해제
<안향 초상>은 고려시대의 유학자 안향(安珦, 1243~1306)을 그린 초상화이다. 안향은 주희(朱熹, 1130~1200)가 주창한 성리학을 최초로 고려에 소개하고 전파했으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조선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평가된다. 초명은 유(裕)이며,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본관은 순흥(順興),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이 초상화의 상단에는 안향의 아들 안우기(安于器, 1265~1329)가 1318년 9월에 작성한 제발과 찬문(贊文)이 적혀 있다. 이 제발문에 따르면 1318년에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이 안향의 공을 치하하며 그의 초상화를 그려 문묘(文廟)에 보관하고 그의 고향에서 제사를 치를 것을 지시했으며, 이때 흥주(興州)의 수령 최림(崔琳, 14세기 전반 활동) 또한 안향의 초상화를 제작해 경상도의 흥주향교(興州鄕校)에 봉안했다고 한다. 1318년은 안향이 이미 졸한 시점이므로 이때 충숙왕과 최림의 주도로 그려진 안향의 초상화는 추사(追寫: 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려 그린 것)한 것이거나, 아니면 안향 생전에 제작된 초상화를 이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안영호(安永鎬, 1854~1896)는 「죽옥(竹屋: 안우기) 선조가 문성공 초상화에 쓴 찬문을 엎드려 차운해 짓다. 나란히 작은 기록도 쓰다(伏次竹屋先祖贊文成公眞像韻[幷小識]」란 글에서 안향의 초상화에 대해 “원나라 사람이 그린 구화(舊畵)를 세 차례 옮겨 그려 여러 본이 되었다”고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가 어떤 기록을 토대로 이와 같이 기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문묘에 봉안되었던 안향 초상화에 대한 후대의 기록은 없는 반면에 흥주향교에 봉안되었던 안향 초상화의 전래 내역은 상세히 전한다. 1457년에 일어난 지역 내 변란(變亂)으로 순흥부(順興府)가 폐지될 때 안향의 적장손(嫡長孫)인 안지귀(安知歸, 15세기 활동)는 흥주향교에 있던 안향의 초상화를 자신의 집으로 옮긴 뒤 보관하였다. 이후 1543년에 안지귀의 증손 안정(安珽, 1494~1548)은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설립한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 초상화를 기증하였다. 1559년에 풍기군수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은 화면에 결실이 많고 채색이 희미한 점 등을 이유로 도화서 화원 이불해(李不害, 1529~?)를 초청해 이 초상화의 이모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그는 2점의 이모본을 완성하였다. 소수박물관 소장 <안향 초상>이 언제 제작된 그림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이 초상화가 조선 중기에 이불해 혹은 무명의 작가가 이모한 본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이 시기에 소수서원에서 이루어졌던 여러 이모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초상화가 고려시대에 제작된 원본 그림이란 주장이다. 이는 소수서원에서 17~19세기에 작성한 서원 운영 관련 각종 기록물 및 이 시기에 소수서원을 방문한 문인들이 남긴 기록에 최림의 주도로 그려진 안향의 초상화가 소수서원에 보관되어 있었음이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다. 대표적인 기록으로 1691년에 소수서원을 방문해 이 초상화를 본 이세구(李世龜, 1646~1700)가 작성한 「사군을 유람하고 쓴 글(遊四郡錄)」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안우기가 쓴 이 찬문 글씨가 절묘하다고 평가했다. <안향 초상>에서 안향은 홍포(紅袍)를 입고 검은색의 두건(頭巾)을 쓴 채 자신의 좌측을 바라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화면 곳곳에 비단이 결실된 부분이 매우 많이 확인된다. 이 그림의 화가는 부드럽고 얇은 필선으로 이목구비를 묘사하고 좀 더 탄력이 있는 필선을 가지런히 구사해 머리카락과 수염을 묘사하였다. 이보다 훨씬 굵고 검은 색의 필선으로 옷 주름을 그렸다. 이처럼 그는 정교한 필선의 구사와 채색으로 안향을 매우 온후하면서도 생기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이 초상화에서 안향의 얼굴은 다소 보랏빛을 띠는데, 이는 후대에 가채를 한 탓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세구는 이 초상화를 상세히 살핀 뒤 안향의 얼굴색이 자줏빛[자(紫)]을 띤 것이 안응창(安應昌, 1603~1680)이란 인물이 1659년에 안향의 초상화에 색을 추가로 칠하고 다시 장황한 탓 때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이 초상화가 고려시대에 제작된 그림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 초상화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특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글: 이성훈
제발문
선수고려국(宣授高麗國) 유학제거(儒學提擧)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증시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진영
宣授高麗國儒學提擧 都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贈諡文成公安珦眞
지난 연우(延祐) 5년(1318, 충숙왕5) 2월에 유지(宥旨)가 내려졌다. 그 조목에는 “도첨의 중찬(都僉議中贊)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 안향(安珦)은 학교를 숭상하여 설치한 공이 있으니, 공자 사당에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고향에서 제사를 올리라.”라고 되어 있었다. 흥주수(興州守) 산랑(散郎) 최림(崔琳)이 임금의 유지에 따라 영정 1본을 그려 향교에 봉안하려 하였는데, 당시 사자(嗣子)인 우기(于器)가 마침 조정의 명으로 변방에 나가 있었기에 최림이 영정을 보내 보여주었다. 이에 향을 피우고 절한 뒤에 찬을 지었다.
越延祐五年二月, 降宥旨. 其目云, 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安珦, 有崇設學校之功, 亦於夫子廟庭圖形, 致祭桑鄕. 興州守散郞崔琳, 依其目摹寫一軀, 將安之于鄕校, 時嗣子于器適承乏鎭邊, 崔君送以示之. 於是, 焚香拜手, 乃爲之贊曰, 先君當日振儒風, 上命圖形文廟中. 一幅丹靑炤桑梓, 四時籩豆答膚功.
先君當日振儒風 선친께서 당시에 유학의 기풍을 진작하시니
上命圖形文廟中 영정을 그려 문묘에 봉안하라 임금이 명하였네
一幅丹靑炤桑梓 한 폭의 초상화가 고향에서 빛나니
四時籩豆答膚功 사계절 제사 올려 큰 공에 보답하네
이해 가을 9월 모일에 찬문을 짓는다.
경상전라주도순무진변사(慶尙全羅州道巡撫鎭邊使)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평리 겸 판전의시사(檢校評理兼判典儀寺事) 상호군(上護軍) 안우기(安于器)가 절하고 쓰다.
是年秋九月日贊, 慶尙全羅州道巡撫鎭邊使匡靖大夫檢校評理兼判典儀寺事上護軍安于器拜題.
국역: 김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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