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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소개

불국사다보탑

연혁
지정별 국보 제 20호
연혁 景德王 10년(751) 창건
수리지적
  • 1925년 해체보수
  • 1970~73년 표면세척 및 손실부 보강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은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 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현황

불국사(佛國寺) 대웅전(大雄殿) 앞에 서쪽 석가탑(釋迦塔)과 대조를 이루어 동쪽에 자리한 탑으로, 감은사(感恩寺) 다음가는 전형적인 쌍탑가람(雙塔伽藍)의 배치를 보여준다. 기단부는 4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는데, 보계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돌기둥이 남아 있다. 그 위는 네 모서리와 중앙에 4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치고 있다.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서리에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軀)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4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돌기둥을 돌려 팔각연화석(八角蓮華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蓮華石) 위에는 8개의 기둥머리 모양의 받침이 있어 8각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8각의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의 구조는 완전히 의표(意表)에서 벗어난 참신한 착상으로 이루어져서 전무후무한 걸작을 남겼고, 조법(彫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건축을 보는 듯 우려하며, 복잡한 아래위의 가교(架橋)가 중심에 통일되어 한 점의 문란함도 없다.

이 탑을 다보탑(多寶塔)이라고 하는 것은,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나란히 앉아 석가의 설법을 증명하는 상으로 해석되는데, 동양의 불교국가에서 석조(石造)로서는 가장 뛰어나고 오랜 작품이다.

이 탑은 서쪽의 삼층석탑(三層石塔)과 함께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25년에 수리를 한 바 있다.

자료 : 문화재청

불국사 삼층석탑

연혁
지정별 국보 제 21호
연혁 景德王 10년(751) 창건
수리지적
  • 1966년 1층탑신이상 해체보수
  • 1970~73년 표면세척 및 손실부재 부분보충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10년(774) 12월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한 후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 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상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현황

불국사(佛國寺) 대웅전(大雄殿)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각부의 비례가 아름다운 우수작의 하나이다.

기단부는 몇 장의 돌로 결구(結構)되었고, 아래위 면석(面石)은 탱주(탱柱) 둘을 세워 3구(區)로 구분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고, 옥신(屋身)에는 우주(隅柱)가 표현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은 층마다 5단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특히 탑 주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화(蓮華)가 조각된 8개의 둥근 돌을 돌리고, 이들 연화석(蓮華石) 사이에 긴 돌을 끼워 경계를 삼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이다.

정역(淨域)을 나타내기 위한 시설이라고도 해석되며, 한편으로 연화대(蓮華臺) 위에 8보살(菩薩)을 안치하여 공양하는 의태(意態)를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탑은 일명 석가탑(釋迦塔)이라고 하는데, 동쪽의 다보탑(多寶塔)에 대한 호칭으로, ‘법화경(法華經)'에 보이는 석가여래(釋迦如來) 상주설법(常住說法)의 상(相) 곧 다보여래(多寶如來)와 나란히 앉기 이전의 상(相)으로 해석된다.

동서 두 탑의 대조가 묘할 뿐 아니라 조형(造形)이 소박 장중하여, 신라(新羅) 석탑 중에서 하나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며, 이 탑의 건립연대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정된다.

자료 : 문화재청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연혁
지정별 국보 제 112호
연혁 신문왕 2년(682) 창건
수리지적 1996년 전면 해체보수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이며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현황

화강암의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方形) 중층(重層)의 이 탑은 동서 양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를 보인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각각 12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상층기단은 면석을 12매로, 갑석은 8매로 구성하였다. 탱주(撑柱)는 하층기단에 3주(柱), 상층기단에 2주를 세웠다.

초층옥신(初層屋身)은 각 우주(隅柱)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은 각면이 한 돌, 3층은 전체가 한돌로 되었다. 옥개석은 받침돌로 별석(別石)으로 각층 4매씩의 돌로 되었다. 그리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마다 5단의 층급(層級)으로 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양탑 모두 노반(露盤)과 높이 3.3m의 철제 찰주(擦柱)가 남아 있다.

목조가구(木造架構)를 모방한 형적(形蹟)을 보이며 옥개석 받침을 층단식(層段式)으로 한 수법은 전탑의 전단계 모습을 추정케 한다. 기단을 이중으로 하는 형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이와 같은 양식은 이후로 한국 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자료 : 문화재청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연혁
지정별 국보 제 112호
연혁 신문왕 2년(682) 창건
수리지적 1996년 전면 해체보수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보물 제366-1호)와 청동제사각감(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현황

화강암의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方形) 중층(重層)의 이 탑은 동서 양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를 보인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각각 12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상층기단은 면석을 12매로, 갑석은 8매로 구성하였다. 탱주(撑柱)는 하층기단에 3주(柱), 상층기단에 2주를 세웠다.

초층옥신(初層屋身)은 각 우주(隅柱)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은 각면이 한 돌, 3층은 전체가 한돌로 되었다. 옥개석은 받침돌로 별석(別石)으로 각층 4매씩의 돌로 되었다. 그리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마다 5단의 층급(層級)으로 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양탑 모두 노반(露盤)과 높이 3.3m의 철제 찰주(擦柱)가 남아 있다.

목조가구(木造架構)를 모방한 형적(形蹟)을 보이며 옥개석 받침을 층단식(層段式)으로 한 수법은 전탑의 전단계 모습을 추정케 한다. 기단을 이중으로 하는 형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이와 같은 양식은 이후로 한국 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탑의 전체높이는 13.4m이다.

자료 : 문화재청
  • 정보제공부서 : 건축문화재연구실
  • 담당자 : 김현용
  • 문의 : 063-836-7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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