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金石文)은 말 그대로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비석처럼 석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금석문에 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보낸 칠지도(七支刀)는 철검인데 그 놈체의 양면에 글자를 새기고 금(金)을 상감하여 이 칼을 보낸 사연을 기록한 것,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의례용기 바닥에 ‘호우(壺)’라는 명칭을 도드라지게 주조한 것, 불상 광배(光背)에 그것을 조성한 이유를 새겨 넣은 것 등은 고대 금문의 대표적인 예이다. 석문의 예는 무수히 많다. 현재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자리잡고 있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로부터 시작해서, 죽은 이의 신원과 행적을 기록한 고려의 각종 묘지(墓誌), 조선 지방관들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 같은 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금석문이라 하면, 위와 같은 금문, 석문뿐 아니라 토기에 기록한 토기 명문(銘文), 잘 다듬은 나무 조각에 쓴목간(木簡)의 기록, 직물에 쓴 포기(布記), 고분의 벽에 붓글 씨로기록한 묵서명(墨書銘), 칠기(漆器)에 기록한 묵서,기와나 전돌의명문(銘文) 등을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는 넓은 의미의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역사학의 기본 자료는 종이로 만든 서책(書冊)에 기록한문헌 자료이다. 넓은 의미의 금석문은 이러한 문헌자료, 그리고 문자 기록이 없는 고고학 발굴 자료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문자 기록을 의미한다.
따라서 금석문의 대상 범위가 너무 넓어져 그 의미가 모호해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를 고려해서 서책 이외의 물건에 기록한 것을 명사(銘辭)라 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분야를 명사학(銘辭學), 명문학(銘文學)이라 정의하기도 하지만 역시 문제가 있다.
명(銘)은 원래 비석이나 금속에 새기거나 두드러지게 양각(陽刻)한 글 혹은 비문(碑文)가운데 운문(韻文) 을 가리키므로, 먹물을 이용해서 쓴 묵서(墨書)는 명사(銘辭)로 보기 어렵고, 이것도 명사의 일종이라고 하면 역시 금석문의 정의처럼 그 외연(外延)이 지나치게 확장되는 폐단을 피할 수 없게 된다.돌, 기물(器物) 등 기록이 베풀어진 대상물의 성격을 주목한 견해도 있다. 문헌기록이 이루어진 서책이나 종이 문서가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다른 기능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기록만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데 비해, 금석문의 기록 대상물은 기록의 매체라는 것 외에 별도의 용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토기 명문이나 각종 조상명(造像銘)을 생각하면 일면 타당하지만, 비석이나 목간의 경우는 다른 용도가 아닌 기록의 대상물로서 이용된 것이므로 적용될 수 없다. 금석문을 특정 장소에 고정된 기록물로 이해하는 견해도 석탑 명문, 청주시 용두동의 철당간 명문처럼 대형 구조물에 기록된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만, 소형 불상이나 동경(銅鏡) 같은 소형 유물의 명문은 포괄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이처럼 금석문을 대체할 만한 용어가 마땅치 않다. 또 워낙 오랜 동안 사용해와서 익숙해진 용어이기 때문에 이를 바꾸는 것이 능사도 아닌 듯 하다. 일단은 종이로 만든 문서나 서책이 아닌 물건, 즉 돌, 금속, 나무, 직물, 토기ㆍ기와 같은 소성품 등에 기입한 전통시대의 문자나 기호, 그림을 금석문이라 부르고자 한다. 단 고대 중국에서 거북의 등 껍질과 짐승 뼈에 기록한 갑골문(甲骨文)은 이를 다루는 별도의 분과 학문이 존재하고, 금속 화폐에 주조한 명문은 동일 화폐는 공통된 내용과 형식을 갖고 있으므로 금석문에서 제외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장의 인문(印文)은 금석문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금석문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 그 정의나 내포의 범위도 보다 정교하게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어려운 실정이므로, 차선책이긴 하지만 그 하부 유형을 보다 세부적으로,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사용한다면 오해의 여지는 줄일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