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남 이성산성 (河南 二聖山城)
- 인천 계양산성(仁川 桂陽山城)
- 태안 앞바다 (泰安海底)
- 부여 쌍북리유적 (扶餘 雙北里遺蹟)
- 부여 관북리유적 (扶餘 官北里遺蹟)
- 부여 궁남지 (扶餘 宮南池)
- 부여 능산리사지 (扶餘 陵山里寺址)
- 익산 미륵사지 (益山 彌勒寺址)
- 나주 복암리 (羅州 伏岩里)
- 신안 앞바다 (新安海底)
- 금산 백령산성 (錦山 栢嶺山城)
- 경주 안압지(慶州 雁鴨池)
- 경주 황남동 376번지 유적 (慶州 皇南洞 376番地 遺蹟)
-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부지 및 연결통로부지내 유적 (國立慶州博物館 美術館敷地 및 連結通路敷地內 遺蹟)
- 경주 월성해자 (慶州 月城垓子)
- 경주 인용사지(慶州 仁容寺地)
- 창녕 화왕산성 (昌寧 火旺山城)
- 김해 봉황동 (金海 鳳凰洞)
- 함안 성산산성 (咸安 城山山城)
하남 이성산성 (河南 二聖山城)
이성산성(二聖山城)은 경기도 하남시(河南市) 춘궁동(春宮洞)의 이성산(二聖山, 209.8m)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포곡식 석축산성(包谷式 石築山城)이며, 삼국시대에는 한강유역 점유를 위한 교두보로서 그 지리적 가치가 중요시되어 왔다. 한편 이성산성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입각한 연구에서 이 일대를 백제(百濟)의 한성시대 도읍지(漢城時代 都邑地),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 또는 온조왕(溫祚王)의 고성(古城),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천도했던 한산(漢山) 등으로 비정하여 왔으나. 그 정확한 성격은 1986년부터 근래까지 진행되고 있는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이성산성의 평면형태는 부정형(不定形)을 이루며, 둘레 1,925m, 내부면적 약 47,200평으로,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축성(築城)된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이성산성의 역사적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이는 묵서목간(墨書木簡)이 A지구의 1, 2차 저수지와 C지구 저수지에서 각각 출토되었다.
지형이 낮은 산성 내 남쪽 계곡을 막고 설치한 A지구의 저수지(貯水池)는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차 저수지는 산성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규모는 54×30m이고 평면형태는 타원형(橢圓形)을 이루고 있다. 제3차 발굴에서는 1차 저수지의 제14층에서 ‘무진(戊辰)’銘 간지(干支)가 기록된 목간이 출토되었다.
2차 저수지는 1차 저수지가 자연 매립된 이후 상부에 조성한 저수지로, 장방형의 평면형태를 이루는 호안석축(護岸石築)을 갖추고 있다. 2차 저수지에서도 목간이 출토되었으나 판독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저수지가 조성된 시기는 1차가 6세기 중엽, 2차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C지구의 저수지는 산성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서로 긴 장방형(長方形)의 호안석축을 갖추고 있다. C지구 저수지에 대한 전면조사가 이루어진 제8차 발굴에서는 ‘욕살(褥薩)’이라는 고구려(高句麗) 관직명(官職名)이 기록된 목간과 고구려 자(尺)가 출토되었다. 이때 조사된 7개의 층위 가운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 등 신라(新羅)와 통일신라(統一新羅)의 유물만 나오는 반면에, 고구려 목간 및 자가 출토된 제5층에서는 고구려계(高句麗系) 유물이 소량의 백제계(百濟系)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제8차 발굴에서 출토된 5~6세기경의 유물과 ‘욕살(褥薩)’이 기록된 ‘신묘(辛卯)’銘 목간, 그리고 고구려 자(尺)는 제3차 발굴에서 출토된 고구려 성주(城主)를 뜻하는 ‘도사(道使)’가 기록된 목간과 함께, 당시 이성산성이 고구려의 수중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볼 수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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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계양산성(仁川 桂陽山城)
계양은 인천광역시의 북단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으로는 김포시가, 남으로는 부평구가 자리잡고 있다. 계양산은 정상이 395m로 인천을 대표하는 진산(鎭山)이다. 북으로는 백석산과 천등산으로 이어지고 남으로는 소래산으로 이어진다. 계양산은 서남으로 길고 비스듬하게 철마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멀리 서해안을 바라보며 북으로는 길게 김포평야와 한강을 끼고 있다.
계양산성은 계양산 주봉의 동쪽으로 뻗어 내린 표고 202m지점 봉우리에 있다. 삼국시대에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 1,184m이며 서문과 동문이 있다. 동벽 부근에 물을 저장하는 우물[集水井] 세 개를 확인하였는데 그 중 동벽에 바로 붙어있는 우물[이른바 ‘제 1집수정’]에서 목간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우물 상부에서 약 3m가량 아래부분에서 출토되었는데, 5각형의 막대형으로 논어 공야장 전반부의 일부가 쓰여있다.
이 곳은 삼국시대 삼한시대 소국이 있었던 곳으로 475년 이전은 백제에 속하였으며 551년 무렵까지는 고구려의 땅이었다. 551년에서 553년에 잠시 백제에 속하였다가 553년 이후는 완전히 신라의 땅이 되었다. 고구려 이래 통일신라시대 경덕왕이 이름을 고치는 757년까지 주부토(主夫吐)라 불리었다. 한편 계양산성에서는 “主夫…”를 새긴 7세기 대 기와도 출토되었다. (『나무속 암호 목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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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앞바다 (泰安海底)
태안은 충남 서쪽 끝 반도로 북쪽은 내륙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서, 남, 동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해안선의 길이가 530.8km나 되며 12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그 중 서북쪽에 대섬 앞바다에서 고려 목간이 발견되었다. 2007년 5월 주꾸미를 잡기 위해 설치한 통발에 고려청자가 붙어나와 이를 계기로 국립해양유산연구소(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청자운반선을 조사하게 되었다. 여기서 선박자체는 물론, 2만 3천여점의 고려청자와 함께, 운항에 종사한 뱃사람들이 사용한 솥, 그릇, 물동이, 밧줄 등이 발견되었다.
목간은 십수점 발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공표된 것은 15점이다. 대체로 “탐진에서 누구에게 자기 몇 개를 보낸다”고 기록한 꼬리표 목간으로 도자기에 달렸던 것이다. 서울 개경으로 보내는 도자기 꾸러미에 달린 꼬리표는 배에 실린 물건이 누구에게 배달되어야하는 물건인가가 적혀 있다. 한 곳에서 여러 곳으로 보낼 때 붙인 꼬리표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 “얼마만큼을”이 중요했다. 도자기 꾸러미에 함께 끈으로 묶기 위해 목간 일부분을 “<”나 “><”로 판 것이 대부분이다.
내용에 따라 도자기들이 탐진(耽津) 즉 강진에서 제작되어 배로 개경(開京)으로 향하던 중에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좌초하여 가라앉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두의 모습과 함께, 청자 산업과 유통, 뱃사람들의 생활을 알려준다.
(『나무속 암호 목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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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쌍북리유적 (扶餘 雙北里遺蹟)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유적(雙北里遺蹟)은 사비도성(泗批都城) 내에 있는 금성산(錦城山)의 북동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사비시대에 도성의 중심지역과 지금의 공주(公州), 논산(論山)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交通路)로 알려져 있다.
쌍북리의 서북쪽에는 부소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금성산이 있다. 부소산성 기슭에서 동남쪽으로 완만하게 내려와 평지를 이루다가 다시 남쪽으로 금성산 자락과 이어진다. 이곳 현내들, 280-5번지(신성전기 창고)와 102번지(쌍북 주공 아파트)에서 각각 백제 목간이 출토되었다. 쌍북리유적은 1998년 쌍북리 102번지 일대의 택지조성과 관련하여 충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조사결과 사비시대의 생활유적(生活遺蹟)과 더불어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담장 및 다수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목간이 출토된 조사지역의 A지점에는 시기를 달리하는 두 개의 저습지 개흙층이 확인되었고, 그 중 표토하 3m 내외에 형성된 선대 개흙층에서는 백제시대의 수로(水路), 우물, 건물의 기단(基壇)으로 추정되는 석렬유구(石列遺構) 등이 노출되었다.
수로의 내부 및 주변에서는 목간(木簡), 칠기(漆器)를 비롯한 다양한 목제품(木製品)과「월입(月卄) · 사(舍) · 대(大)」가 새겨진 백제시대 명문토기편, 인장문이 찍힌 기와편, 마노석제 장신구 등이 각종 씨앗류 및 동물뼈와 함께 출토되었다.
특히 수로 주변의 유기물 퇴적층에서는 완형의 목간 1점과 약간 파손된 목간 1점, 눈금 간격이 약 1.5cm 정도되는 목제 자[尺]가 수습되었다.
이 목간(木簡)에 쓰인 글자는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목간이 주로 관청(官廳)이나 도성내 주요시설에서 출토된 점을 감안해 볼 때, 7세기 중반을 중심연대로 하는 쌍북리유적에서 확인된 건물지 및 관련시설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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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관북리유적(扶餘 官北里遺蹟)
부여 관북리유적(扶餘 官北里遺蹟, 사적)은 백제 사비시대(泗批時代)의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유적으로서, 1982년부터 1992년까지 7차에 걸쳐 충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2001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연차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사결과, 백제시대의 연못, 도로(道路), 하수도(下水道), 축대(築臺), 건물지(建物址)를 비롯하여, 대규모 공방(工房) 관련 시설, 수혈유구(竪穴遺構), 곡물이나 과일 등을 저장했던 창고시설(倉庫施設)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근래에 조사된 공방, 창고, 수혈주거지 등은 조사지역이 백제시대 왕궁이나 관청(官廳)의 부속시설이 위치했던 지역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정교한 호안석축(護岸石築)을 갖춘 연지(蓮池)의 전체 규모는 동서 10m, 남북 6.2m, 깊이 0.75~1.15m이며, 내부의 퇴적층은 크게 하부의 황갈색토층과 흑회색점질토층, 그리고 상부의 흑갈색토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백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목간은 연지 내부에 퇴적된 세 토층 모두에서 확인되었으며, 특히 상부의 두 층에서는 목간 뿐만 아니라 다량의 백제토기와 기와편 외 목제인형 다리, 바구니 등 유기유물(有機遺物)들도 상당량 수습되었다.
연지의 폐기시점을 알 수 있는 단서로는 상층의 흑갈색토층에서 수습된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7세기 전반~중반의 어느 시점에 연지가 폐기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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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궁남지 (扶餘 宮南池)
부여 궁남지(扶餘 宮南池, 사적)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일대에 위치한 백제 사비시대(泗批時代)의 궁원지(宮苑池)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본기(百濟本紀) 무왕(武王) 35년(634)에 궁(宮)의 남쪽에 연못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주변에 위치한 화지산(花枝山)의 별궁지(別宮址),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와 관련하여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또『삼국사기』의 동일기사에 “궁남(宮南)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이고,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궁남지는 신선이 사는 방장선산을 모방하여 만든 섬이 있어서 신선정원(神仙庭園)이라고도 했다.
한편 사비시대의 이궁지(離宮址)로 전해오는 연못의 동쪽 일대에는 대리석을 팔각형(八角形)으로 짜 올린 어정(御井)이라 불리는 유구와 함께 백제 기와편, 초석(礎石) 등이 남아 있어, 궁남지는 이궁[離宮, 別宮]의 궁원지로 꾸며졌음을 알 수 있다.
궁남지에 대한 조사는 1990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모두 9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조사(’90년)에서는 궁남지 서편과 군수리사지 사이에서 백제시대에 조성된 연못의 서쪽 호안(護岸) 일부가 확인되었고,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한 2 · 3차 조사(’91~’93년)에서는 북동쪽과 남동쪽의 호안 일부와 수전지(水田址) 일부가 확인되었다. 이후 전면적인 발굴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6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사비시대(泗批時代)에 조성된 인공수로(人工水路), 목조저수조(木造貯水槽), 우물지와 도로유구(道路遺構), 수전(水田) 경작지, 토기가마터, 굴립주건물지(堀立柱建物址) 등 다양한 유구들이 확인되었고, 여기에서 6~7세기대의 유물과 함께 3~4세기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간(木簡)은 주로 6세기 무렵에 조성하여 사용된 인공수로와 목조저수조의 내부에 퇴적된 개흙층에서 출토되었는데, 목간에는 백제시대의 행정구역명(行政區域名), 인명(人名), 지명(地名)에 관한 정보 및 수전을 개간했던 사실이 적혀 있어 당시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수로와 저수조에서는 목간 뿐만 아니라 짚신, 칠기(漆器), 농구(農具), 공구(工具), 목부재(木部材), 생활용구(生活用具)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들이 수습되어 사비시대의 생활문화 연구에 있어 중요한 학술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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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사지 (扶餘 陵山里寺址)
부여 능산리사지(扶餘 陵山里寺址, 사적)는 백제(百濟) 사비시대(泗批時代)의 사찰유적으로, 부여 나성(羅城)과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 사이에 있는 능뫼골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백제문화권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해 1992년부터 2002년까지 8차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중문(中門), 목탑(木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일직선상(南北一直線上)에 놓이고 주위에 회랑(回廊)이 배치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임이 밝혀졌다.
또한 동 · 서회랑의 바깥쪽에는 각각 남북방향의 배수로(排水路)가 설치되어 있는데, 서회랑 외곽의 배수로에는 목교(木橋) 및 석교(石橋)가, 동회랑 외곽의 배수로에는 석교(石橋)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중문지 남쪽에서는 동서 · 남북방향의 도로유구(道路遺構)와 배수시설이 확인되었다.
한편 1993년에는 공방(工房)으로 추정되는 건물지(建物址)에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었다. 또한 목탑지의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출토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국보 제288호)에는 창왕[威德王] 13년(567년)에 공주(公主)가 사리를 공양(供養)했다는 명문기록이 확인됨에 따라 이 절이 백제왕실의 기원사찰(祈願寺刹)임이 밝혀졌다.
목간은 서배수로(西排水路) 남단의 목교 주변에서 확인된 능산리사지 조성 이전의 선대 배수로에서 빗, 젓가락, 그릇 등의 목제품(木製品)과 건축부재(建築部材)와 함께 출토되었다.
24점의 목간 가운데는 대덕(對德), 나솔(奈率) 등의 백제의 관직명(官職名)과 보희사(寶憙寺), 자기사(子基寺) 등의 사찰명(寺刹名)이 적혀 있어 백제사(百濟史) 연구에 있어 귀중한 학술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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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
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 사적)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현 彌勒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백제시대(百濟時代) 최대 규모의 사찰로, 백제 무왕(武王) 2년(601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미륵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무왕조(武王條)에 보이는 창건기록설화(創建緣起說話)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조선불교 총서(朝鮮佛敎 叢書)』에 실린 고려(高麗) 초 승려 혜거국사비문(惠居國師碑文)에 의하면 후백제(後百濟) 시기(922년)에 미륵사 개탑(改塔) 기사가 실려 있다.
한편 조선시대(朝鮮時代)의『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미륵사 석탑이 동방에서 가장 큰 석탑이라고 기술되어 있고, 영조(英祖) 때 강후진(康候晉)이 편찬한『와유록(臥遊錄)』에는 폐허가 된 후의 미륵사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미륵사는 백제 무왕대에 창건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중기인 17세기 전후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는 1970년대 원광대학교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후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80년부터 1994년까지 15년간에 걸쳐 국립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실시되었다.
미륵사의 가람은 중원(中院)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을 둔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의 구조로서, 각 원에는 중문(中門), 탑(塔), 금당(金堂)을 남북으로 배치하고 중원 북쪽에는 대규모 강당(講堂)을 설치하였다. 또한 중원에 목탑(木塔)을, 동 · 서원에는 각각 석탑(石塔)을 둔 삼금당 삼탑식(三金堂 三塔式)의 가람배치는 창건연기(創建緣起)의 ‘…당(堂), 탑(塔), 낭무(廊廡), 삼소창지(三所創之)…’란 기록과 일치하고 있는 부분이다.
미륵사지에서는 주류를 이루는 토기, 기와류와 함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미륵사(彌勒寺), 금마저관(金馬渚官), 묘봉원(妙奉院), 연우사년(延祐四年),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등의 명문기와는 미륵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조선시대에 폐사되기까지 지속적으로 번와(燔瓦)를 통해 개보수(改補修)된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목간(木簡) 2점은 사역(寺域) 남측에 대규모로 조성된 동 · 서 연못 가운데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에 조성된 서쪽 연못 내부의 개흙층에서 수습되었다.
그 중 네 면에 묵서(墨書)가 남아 있는 목간은 연못의 남동모서리 부근의 지표하 260cm에서 통일신라시대 인골(人骨) 2구와 함께 출토되었고, 양면에 묵흔이 있는 목간은 네 면 목간이 수습된 곳에서 북쪽으로 25m 떨어진 지점(지표하 230cm)에서 출토되었다.
두 목간은 모두 단면형태는 사각형이며 상 · 하단이 파손된 상태였다. 네 면에 묵서가 있는 목간편의 경우, 세 면의 묵서방향은 동일하나 나머지 한 면은 반대방향으로 묵서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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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복암리 (羅州 伏岩里)
영산강 중류에 위치한 나주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곳이다. 반남면과 신촌리, 복암리, 영동리에 이 곳 사람들의 무덤이 있다. 청동관모나 신발, 대도 등 출토품을 통해 볼 때 영산강을 기반으로 하는 큰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남부 마한세력의 근거지였던 이곳은 한강이나 금강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세력과는 다른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남부 마한 사회는 남쪽으로 진출해 오는 백제에 의해 5~6세기를 거쳐 완전히 동화되어 갔다. 복암리의 무덤은 백제의 전형적인 돌을 벽돌처럼 쌓아 만든 방 안에 이전부터 마한세력을 상징하는 독항아리로 만든 널이 들어가 있어, 마한문화와 백제문화의 용합과정을 보여준다. 복암리 무덤에서 바로 300m 동편에 제철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경작으로 인해 상당부분 깎여 나갔지만, 철을 만들 때 쓴 화로(爐), 많은 철 찌꺼기, 철 가공품의 부스러기, 금속을 녹이는 데 쓰던 도가니 등이 발견되었다.
한편 이 유적의 지름 5.1m, 깊이 2m 나 되는 커다란 구덩이에서 기와, 흙이나 나무로 만든 그릇, 살구와 밤, 동물뼈 등이 나왔는데, 그와 함께 목간들도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문자가 확인된 3점은 모두 문서이며 제철산업과 관련된 인부들의 관리가 철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공반유물이나 유구는 물론 목간의 내용으로 볼 때 사비시대 특히 7세기 백제의 것이다. 목간과 함께 “관청에서 쓰는 물품(官內用)”이라고 쓴 토기, 글을 쓰는데 필요한 벼루들이 발견되고 있어 이곳에 관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나무속 암호 목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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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앞바다(新安海底)
신안은 한반도 서남쪽에 있는 무안반도 가까이에 있는 다도해로 1004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동으로는 목포시 유달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해남군이 있다. 북으로는 무안과 영광이 있고 남으로는 진도가 있다.
1976년 문화유산관리국 신안해저유물발굴조사단이 1976년 10월에서 1984년 9월까지 10차례에 걸쳐 신안군의 도덕도 앞바다에서 침몰선을 조사하여 모두 22,007점의 유물을 건져올렸다. 이 배는 14세기 전반 중국 원나라의 경원(慶元: 지금의 닝보永寶)에서 일본으로 가던 중에 신안 앞바다에서 좌초하였다. 길이 29.4m, 너비 6.6m의 배는 갑판 아래 7개의 칸막이를 하고 짐을 실었다. 물품은 송, 원시기의 도자기가 많으며, 동남아와의 교역에서 입수한 향신료, 그리고 약재와 저울, 금속제품을 만드는 원료인 주석, 기록용 도구로서 벼루와 먹 등 다양하다.
나무상자나 자루에 붙은 꼬리표 목간 3백여점과 함께 수습되었는데, 모두 짐에 붙었던 꼬리표로 윗부분을 “>< ”로 파거나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었다. 내용은 물건 구입을 주문한 사람이나 기관[貨主]의 이름과 화물을 적었다.
목간의 기록을 통해 1323년 4월 하순에서 6월 초순에 걸쳐 화물을 모았으며, 물건을 주문한 것은 일본 나라의 동복사(東福寺)라는 절 등이었다는 점, 화물 중의 일부는 약재와 동전이었다는 점 등 아주 구체적인 사실을 복원할 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14세기 동아시아 국제교역의 생생한 모습을 되살릴 수 있다.(『나무속 암호 목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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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백령산성(錦山 栢嶺山城)
백령산성은 금산군(錦山郡) 남이면(南二面) 역평리(驛坪里) 와 건천리(乾川里) 사이의 백령(栢嶺 )고개 산 봉우리에 위치한 백제시대 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으로 남문, 북문과 목곽창고, 배수 및 온돌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많은 기와와 토기 조각이 나왔으며, 철제 도끼를 비롯하여 목제 그릇과 함께 목제품에 먹글씨를 쓴 것이 있다. 이 목제품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두 세줄의 기재가 보인다. 백령산성에서는 이외에도 명문기와도 보여서 백제시대 지방 산성에서의 문자사용을 엿볼 수 있다.(『나무속 암호 목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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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안압지(慶州 雁鴨池)
안압지(雁鴨池)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文武王) 14년(674)에 조성된 신라(新羅)의 궁원지(宮苑池)로, 경북 경주시(慶州市) 인왕동(仁旺洞)의 월성(月城)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동경잡기(東京雜記)』등에 있으나,『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월지(月池)’라고 불렸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안압지에 대한 발굴은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전신(前身)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1975년부터 2년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 결과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이룬 호안석축(護岸石築)을 갖춘 대규모 연못과 3개의 인공섬, 입수(入水)와 출수(出水)를 위한 시설물 등이 밝혀졌다. 또한 연못 주변에서는 임해전지(臨海殿址) · 회랑지(回廊址) 등 크고 작은 건물지(建物址) 26개소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궁 안에 못을 파고 주변에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珍奇)한 새와 동물을 길렀으며, 안압지(雁鴨池)의 서쪽에 임해전(臨海殿)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세워 평소에는 왕자(王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사용하였으며,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에는 연회(宴會)를 베풀기도 했다는 역사적 기록과 부합되는 유적이다.
한편 안압지 내부에서는 임해전이 문무왕대에 축조된 사실을 뒷받침하는 조로이년(調露二年, 680)銘 보상화문전(寶相華文塼)을 비롯한 각종 와전류(瓦塼類) 및 건축부재(建築部材)가 출토되었고, 실제 생활에 사용된 다양한 토기류(土器類), 금속유물(金屬遺物), 목제유물(木製遺物) 등 총 3만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안압지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목간(木簡)이 출토된 유적으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목간은 총 51점이 출토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이후 목편(木片)의 정리과정에서 추가로 확인된 수량도 적지 않다. 이들 목간 중 몇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안압지 북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임해전지(臨海殿址)의 통칭 제4건물지에서 제5건물지로 통하는 이중 호안석축 밑 개흙층에서 수습되었다.
목간의 형태에 있어서 대부분은 상단부의 양 측면을 각각 V字 형태로 절단하여 홈을 만들었으며, 일부는 상단부 뿐 아니라 하단부에까지 홈을 만든 것이 있다. 또한 극소수이기는 하나 목간 상단부 중앙에 구멍을 뚫은 것도 확인된다.
한편 목간의 서체(書體)는 주로 예서체(隸書體)이나 간혹 초서체(草書體)도 확인된다. 대체로 목간의 앞뒤 양면(兩面)에 묵서(墨書)가 있으나, 두께가 비교적 넓은 목간의 경우는 세 면 내지는 그 이상의 면에 묵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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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남동 376번지 유적 (慶州 皇南洞 376番地 遺蹟)
경북 경주시 황남동 376번지 유적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이르는 7~9세기대의 생활유적(生活遺蹟)으로서, 1994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수혈유구(竪穴遺構) 4기와 우물 3기를 비롯하여 석곽형유구(石槨形遺構), 목주열(木主列)과 목책유구(木柵遺構), 집석유구(集石遺構) 등의 유구와, 묵서명목간(墨書銘木簡) 2점, 인장(印章), 도가니, 석추(石錘), 토우(土偶)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조사구역내 동편에 위치한 1호 수혈(竪穴)의 동쪽 벽면에 치우쳐 활석제인장과 함께 수습되었으며, 수혈 내부에서는 이외에도 석추, 짚신, 빗[櫛], 골각기(骨角器), 토기편과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1호 수혈은 가장자리에 환목(丸木)들을 설치했을 뿐 별다른 시설물이 확인되지 않은 점과, 방형(方形)의 목제창고(木製倉庫)를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이해되는 “경()”이란 글자가 목간의 묵서내용에 포함되어 있는 점을 통하여 그 성격이 창고 또는 그 부속건물(附屬建物)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3개의 목간편 가운데 한 점은 목간으로의 판단여부가 불명확하다. 반면에 1호 목간과 2호 목간은 출토지(出土地) 뿐만 아니라 서체(書體) 및 수종(樹種)이 동일하며 가공흔적과 규격이 거의 유사하고, 묵서내용에 있어서도 깊은 상관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두 점의 목간편은 동일개체(同一個體)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간의 내용은 앞면에 「5월26일 경의 곡물을…했다. 하경의 곡물은…몇 석, 또 쌀…몇 석 …」, 뒷면에 「중경의 곡물은 23석」의 내용으로 해석되어진다.
황남동 376번지 유적 조사에서 확인된 수혈유구를 비롯한 제반시설은 7~8세기에 해당되는 신라시대의 관영(官營) 혹은 궁(宮)에서 관리하는 창고의 부속건물로 판단되고 있다. 이외에도 당시의 왕이나 최고지배계층의 능묘(陵墓) 주변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능묘와 관련된 부속유구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목간의 묵서내용을 통해서 관부(官府) 또는 관영수공업장(官營手工業場)이 통일신라시대에는 일정한 창고체계(倉庫體系)를 갖추었으며, 문서와 기록에 입각해서 정기적으로 부속창고의 재고량을 조사하거나 물품을 수납하고, 그 결과를 목간에 날짜별로 기록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나아가 군현제(郡縣制)에 입각한 지방통치체제(地方統治體制)와 중앙의 창부(倉部), 조부(調俯)조직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교통로와 물품의 유통체계 등을 추정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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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부지 및 연결통로부지내 유적 (國立慶州博物館 美術館敷地 및 連結通路敷地內 遺蹟)
국립경주박물관은 전시공간 및 수장고 확충을 목적으로 박물관 동남편 일부 구간을 미술관(당시 사회교육관) 신축부지로 선정하여 1998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도로유구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동서도로(東西道路)와 남북도로(南北道路), 그리고 목간(木簡)과 목제두레박,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가 다수 출토된 석조(石造)우물, 구상유구(溝狀遺構) 등이 조사되었다.
한편 2000년에는 신축된 미술관과 기존 건물간의 냉난방관, 상하수도관을 매설하기 위한 연결통로[共同溝]부지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시대 주거지(住居址)를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도로, 담장, 건물지, 우물 등을 확인하였다. 현재 경주박물관이 위치한 월성(月城) 동남편 일대는 1974년도에 박물관 건물을 신축할 당시 주차장자리에서 반월형(半月形) 연못과 석렬(石列)이, 안압지관의 남쪽 일대에서는 담장유구, 초석, 장대석 등 월성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들이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이번 미술관부지 및 연결통로부지에 대한 조사에서도 ’1974년에 조사된 담장유구의 연결선상에서 담장 일부가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왕경(新羅王京)의 주요시설이 다수 확인되었다. 또한「남궁지인(南宮之印)」銘 수키와,「사(舍)」銘 토기편, 묵서명목간(墨書銘木簡) 등의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이 일대가 궁궐터[宮闕址]에 속했을 뿐 아니라 사서에 기록된 동궁(東宮), 북궁(北宮)과 같은 성격의 남궁(南宮)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목간이 출토된 석조우물은 미술관 신축부지에 대한 발굴이 완료된 이후 터파기공사 과정에서 노출되어 긴급 추가발굴이 이루어졌다. 우물의 상부 4m 가량은 이미 1974년에 박물관 신축공사와 관련한 연못 조성시 결실되었고 깊이 약 3m 정도만이 잔존한 상태였다.
우물 내부에서는 목간 4점을 비롯하여 두레박 7점, 빗 등 목제유물 50여점, 사각편평(四角扁甁)과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 등 토기류 140여점, 기와류 20여점, 금속류 230여점 등 많은 유물들이 다양한 동식물유체와 함께 출토되었다.
목간 4점 가운데 두 점에서 묵서(墨書) 흔적이 육안으로도 확인되나 글자의 대부분이 지워져서 판독(判讀)이 어려운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주(慶州)에서는 월성해자(月城垓字), 안압지(雁鴨池) 등 궁궐터나 황남동 376번지 유적과 같이 관부(官府)에서 관리하는 창고(倉庫)로 추정되는 곳에서 목간이 발견된 사실을 감안하면 그 중요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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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해자 (慶州 月城垓子)
경주는 천년고도 신라의 왕경이 있던 곳이며 월성(月城)은 왕경의 중추인 왕성이다. 동서로 890m, 남북이 260m로 긴 반달모양의 성이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다가 나중에 돌을 섞어 쌓았다. 성의 높이는 10m~18m정도이며 안쪽은 궁궐이요, 궁성으로 활용되었다. 월성은 남산 동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문천이 굽이치는 기슭 바로 북쪽의 반달모습을 이룬 곳에 자리잡고 있다. 월성의 동북쪽에는 바로 안압지가 있고 좀 더 가면 황룡사가 있다. 서북쪽에는 내물왕릉과 계림이 있고 좀 더 멀리 황남동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해자(垓字 · 垓子)란 성에 함부로 접근이나 침입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땅을 파고 물을 끌어들인 웅덩이와 같은 것으로 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물이다. 월성해자는 월성의 동, 북과 서쪽을 휘감고 있는데, 월성 남쪽은 강이 흐르고 있어 따로 해자를 두지 않았다. 성벽 쪽 기반바닥과 그 반대편 돌로 쌓은 부분 사이에 물을 담아 서쪽으로 흘러 내려가게 하였다.
1984년 이래 월성과 주변은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매해 발굴되고 있다. 1985년에서 1986년 해자 발굴과정에서 목간과 목간처럼 보이는 것을 합쳐 모두 130점이 나왔다. 이 가운데 먹자국이 확실히 남아 있는 목간은 25점이다. 이들은 대부분 월성의 서북쪽 해자 부근(이른바 “다”지구)에서 출토되었다.
월성해자 목간은 통신문과 같은 것, 세금징수 간이장부, 행정명령 기록, 불교경전 제작, 의약기록과 같은 문서가 두드러진다. 이들 목간은 왕궁인 월성과 월성 북쪽을 둘러싼 주변의 관청에서 사용되었던 기록과 문서로 대체로 6세기에서 7세기의 것이다. 한자를 한글식으로 표기한 이두문도 보여 7세기 왕궁주변의 언어생활도 엿볼 수 있다.
(『나무속 암호 목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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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인용사지(慶州 仁容寺地)
월성의 남쪽에 인접하여 있는 인용사지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세워진 사찰터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은 문헌에 기록한 金仁問(624~694)의 원찰인 仁容寺地로 전해지고 있다. 8세기 중 후반 경의 절터유적과 그 이전의 성격이 다른 여러 건물지군이 변천을 거듭하여 왔던 것으로 파악되어, 이러한 건물에 사용되었던 각종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목간은 우물 내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습되었는데, 토기, 복숭아씨, 완반형 토제품 등 제의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공반되어 출토되었다.
우물 내부 출토유물의 연대 폭을 감안하면, 목간이 우물 내부로 투기된 것은 대략 8세기 초에서 10세기 초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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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화왕산성 (昌寧 火旺山城)
창녕 화왕산성(사적)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해발757m)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화왕산성은 화왕산의 남북 두 봉우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둘레 2.7km, 면적 약 56,000평에 달하는 거대한 산성으로 내부에 9천3지(九泉三池)와 군창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화왕산의 정상부는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내부에 계곡부가 형성되어 서에서 동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계곡 아래부분에 3개의 연지가 있음을 알리고 있다.
연지들은 퇴적이 이루어져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있으며, 창녕군에서 원형의 철책울타리를 돌려 보호하고 있다.
조사는 3개 중 가운데 연지로 일명 용담(용지)라고도 하며, 창녕 조씨의 탄생설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으로 외연의 규모가 동서 34.5m, 남북 31.9m, 호안석축은 1414m, 석축의 높이는 약 2.4m 정도이다. 내부에서 목간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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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金海 鳳凰洞)
김해는 가야의 발상지이며 6세기 전반까지 원조 가야였던 가라(금관국 · 금관가야 · 남가라)가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변진시대 구야국시대부터 이미 바다와 강을 활용한 교역과 물류의 중심지로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국제교통의 중심지였다.
봉황동 유적은 회현리패총과 봉황대유적을 함께 일컫는 이름으로 4세기 이전 생활 및 무덤 유적이다. 동쪽으로는 가까이 수로왕릉이 있으며 멀리 낙동강이 흐른다. 봉황대 구릉 북쪽끝, 주택 신축부지에서 목간이 나왔다. 이곳은 금관국이 멸망한 이후인 6~8세기대의 유적이다. 주거지, 우물, 저습지가 발견되었으며 실생활에 사용된 도질과 연질토기가 보인다. 주거지에는 화덕, 온돌시설과 벽체가 나왔으며, 저습지에서는 나무로 만든 울타리도 있었다.
목간은 사각 막대모양으로 원래 완전한 것이 잘려진 일부인데 네 면에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의 후반부 구절 일부가 쓰였다.
(『나무속 암호 목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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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성산산성 (咸安 城山山城)
함안 성산산성은 경남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의 조남산 정상부를 둘러싼 삼국시대의 테뫼식 석축성이다.
동문과 남문을 갖춘 둘레 약 1,400m의 체성 곳곳에서 외벽 기저부를 보강하는 단면 삼각형의 석축구조물이 확인되었고, 특히 동문지 주변 성내에서는 국내 최다 목간 출토지로 평가되고 있는 대규모 저수지가 중복된 채 확인되었으며, 성내에서 비교적 낮은 동쪽 성벽에 접하여 3m 이상 퇴적된 초기 저수지의 최하위 개흙층(흑갈색 유기질층)에서 제첨축을 비롯하여 많은 목간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목간 중에는 묵서가 뚜렷이 육안으로 관찰되는 것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 목간이 흑화되어 적외선 촬영으로만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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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당부서 :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 문의 : 055-211-9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