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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사자산(師子山) 흥▨▨▨(興▨▨▨) 교시(敎諡) 징효대사(澄曉大師) 보인지탑비명(寶印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조청대부(朝請大夫)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언휘(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교지에 의하여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살펴 보건대 진종(眞宗)은 본시 적적하건만 억지로 교(敎)의 문을 설립하였고, … 전심(傳心)의 취지를 제창하였으니, 그 추요는 심오한 뜻[玄機]
3이어야 알 수 있는 그윽한 경지[玄境]
4인 것이며, 그 종지(宗旨)는 부처의 말과 마음이므로 이름과 말로써 그 시종(始終)을 엿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고 듣는 것으로도 법도를 알 수 없다. 여기에 때를 타고 원력(願力)으로 출세한 신인(神人)이 있으니, 그는 언진(言津)
5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홀로 걸어가 바로 성해(性海)로 돌아갔으니 마침내 뜻의 길을 따라 외로이 선산(禪山)에 들어갔다. 반드시 이단(異端)을 천착하고 그 사견(邪見)을 믿어서 … 마음이 마치 원숭이처럼 날뛰어 항상 삼독의 숲을
6 요란하게 하다가 홀연히 좋은 인연을 만나 선유(善誘)임을 알았다. 이와 같이 미혹한 중생(衆生)을 인도하는 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그가 곧 징효대사(澄曉大師)이시다. 대사의 휘(諱)는 절중(折中)이요, 자(字)는 … 속성은 … 휴암(鵂嵒)
7 사람이다. 그의 선조가 모성(牟城)에서 벼슬살이하다가 드디어 군족(郡族)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동(先憧)
8이니, 기예는 궁술과 기마에 뛰어났으며
9 명성은 화이(華夷)에 떨쳤다.
10 효자(孝慈)는 역사책[史官]에 실렸고, 공적은 왕부(王府)
11에 간직되어 군성(郡城)
12의 귀감이며 마을[閭里]의 동량이었다. 어머니는 백씨(白氏)로 선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천녀(天女)가 나타나 이르되 “아미(阿㜷)
13께서는 반드시 지혜 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 하면서 아름다운 보배 구슬을 전해 받고는 대사(大師)를 임신하였다. 그 후 보력(寶曆) 2년(헌덕왕 18, 826) 4월 7일에 탄생하니, 날 때부터 성스러운 자태를 지녔고,
14 일찍부터 아이들과 같이 장난하지 아니하였다. 일곱 살 때 걸식(乞食)하는 선승을 보고 흠모하여 출가(出家)할 것을 결심한 다음, 드디어 양친(兩親)을 하직하였다. 외롭게 오관선사(五冠山寺)
15에 가서 진전법사(珍傳法師)를 배알하니 법사가 이마를 만져 주는 순간 문득 식심(息心)의 뜻에 계합하여 곧 절[慈室]에 있게 되었다. 머리를 깎고
16 … 모두들 말하기를 “후대(後代)의 도안[漆道人]이 여기에 다시 나타났다”면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구의사미(救蟻沙彌)
17와 더불어 어찌 같은 자리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열다섯 살 때에 곧바로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화엄경[雜華]을 배워 방광(方廣)의 진전(眞銓)을 찾았으며, 십현(十玄)
18의 묘의를 연구하였다. 의학(義學)하는 사문들이
19 비로소 그 말을 듣고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마치 공융(孔融)이 응문(膺門)에 나아가서
20 마침내 망년(忘年)의 벗을 삼은 것과 같았으며,
21 … 지켜 죽음을 같이하는 교우(交友)가 되었다.
22 열아홉 살 때 백성군(白城郡)
23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고자 하였을 때, 대사(大師)가 계(戒)를 받으려고 계단에서 수계의식을 행하려 상단(上壇)
24하는 날, 갑자기 자색 기운이 단중(壇中)에서 솟아올랐다. 이를 본 어떤 노(老)스님이 대중들에게 말하되, “이 사미(沙彌)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하루아침[一朝一夕]에 닦은 공이 아니니, 이러한 증험을 보인 것은 마땅히 이미 계율[戒珠]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는 반드시 후대(後代)의 미혹한 중생을 제도할 큰 재목(材木)이므로 수계하기 전 먼저 이러한 상서를 나타낸 것이다”라 하였다. 돌이켜 태몽(胎夢)을 생각하니 참으로 합부(合符)하였다. 이로부터 정성스럽게 계율[浮囊]을 지키며 멀리 절경(絶境)
25을 찾아다니다가 풍악산
26 장담사(長潭寺)
27에서 도윤화상이 오랫동안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선비(禪扉)
28로 찾아가서 오체투지하고 예배를 드렸다. 화상이 이르되 “영산에서 서로 이별한 후 몇 생(生)이나 되었는가.
29 우연히 서로 만남이 어찌 이다지도 늦었는가”하였다.
30 대사는 이미 입실을 허락받았고 스님의 자풍(慈風)에 깊은 감명을 느꼈으므로, 나의 원에 적합하다면서 화상(和尙)을 사사하였다. 화상은 지난 날 중국(中國)에 가서 먼저 남전화상(南泉和尙)
31을 친견하고 법을 이어 받았으니, 남전(南泉)은 강서도일(江西道一)을 계승하였고,
32 강서(江西)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을 승사하였으므로
33 남악(南岳)은 곧 조계혜능(曹溪慧能)의 몽자(冡子)이니,
34 그 고매(高邁)함을 가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사(大師)는 도윤을 모시면서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의 법을 이어받게 되었다.
35 이 때 “내 어찌 진단(震旦)에 유학하는 것을 늦추리요”하고는 그 후 곧바로 도담(道譚)선사에게 나아가 … 자인(慈忍)선사를
36 함께 친견하고 예배를 드리니,
37 처음 뵙는 것 같지 않고 구면과 같음을 느꼈다.
도담선사가 말하되 “늦어서야 상봉(相逢)하였으니 그동안 얼마나 되었는가”하거늘, 이에 대사(大師)가 앞에 놓여 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병이 곧 병이 아닐 때는 어떠합니까”
38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이름이
39 무엇인가”
40 대사(大師)가 또 답하되 “절중(折中)입니다”하였다. 선사(禪師)가 이르되 “절중(折中)이 아닐 때에는 누구인가” 대답하되 “절중(折中)이 아닌 때는 이와 같이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이름 밑에 허사(虛事)가 없으니, 이제 절중(折中)은 어찌할 수 없구나! 내가 많은 사람을 상대하였지만, 그대와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하였다. 그러므로 16년 동안 선방에서
41 진리를 깊이 탐구하여 드디어 망언(亡言)의 경지를 밟았으며, 마침내 득의(得意)의 마당으로 돌아갔으니, 참으로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
42 붉은 빛을 꼭두서니에서 뽑아냈지만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집 밖을 나가지 아니하고도 천하(天下)를 두루 아는 자를 대사(大師)에게서 볼 수 있었다. 바다에 들어가서 구슬을 찾고, 산에 올라가 옥(玉)을 캐는데 있어 어찌 정(定)해 놓은 스승이 있으리요. 이에 다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행장을 짊어지고 행각하면서 선지식을 친견하였다.
중화(中和) 2년(헌강왕 8, 882)에 전 국통
43인 대법사(大法師) 국공(威公)이 대사(大師)가 머물 곳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44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과 같았다. 생각 끝에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곡산사(谷山寺)
45에 주지(住持)하도록 하였으니, 애써 주선해준 단성(丹誠)에 못 이겨 잠깐 주석하였지만
46 경연(京輦)
47과 가까운 것이 마음에 맞지 아니하였다. 이때 사자산(師子山)에 석운대선사(釋雲大禪師)가 있었는데, 징효대사(澄曉大師)의 덕은 화이(華夷)를 덮었는데도 정해진 거처(居處)가 없음을 알고 신족(神足)
48을 보내어 간절한 성의를 표하여 말하되, “노승(老僧)이 있는 이 곳은 작은 그릇이 있을 곳이 아니니, 대사(大師)가 여기에 주석한다면 가장 적합할 듯합니다. 만약 스님이 아니면 누가 이 도량(道場)을 감당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속히 왕림(枉臨)하여 송문(松門)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청을 받은 대사(大師)는 그 성의를 거역할 수 없어 곧 선중(禪衆)을 데리고 그 곳에 주석하였다. 이 절의 경치는 천봉만학이 마치 병풍처럼 열려 있고, 층암 절벽의 절경이어서 참으로 해동(海東)의 가경(佳境)이며, 또한 천하(天下)의 복전(福田)이라 할 수 있었다. 대사(大師)가 여기에서 도착한 날로부터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아침에는 셋, 저녁에는 넷으로
49 끊임없이 모여들어, 마치 비처럼 모이고 바람과 같이 달려와서 도리(桃李)처럼 말없이도 모여들고 벼와 삼처럼 줄을 썼다.
이 때 헌강대왕
50이 봉필(鳳筆)
51을 보내 궁궐로 초빙하고는 사자산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
52에 예속시켜 대사(大師)를 그 곳에 있게 하고는 나라의 중흥(中興)을 기꺼워하였으나, 갑자기 헌강대왕이 승하하여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
53이 즉위하여 선교를 존숭함이 전조(前朝)보다 못하지 아니하였다. 왕이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멀리서 찬양하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뜻 밖에 정강왕(定康王)도 즉위 2년 만에 승하하여
54 때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고, 국조(國祚)는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연진(煙塵)
55이 일고, 갑자기 요기(妖氣)가 가득하여 산중 절[蓮扉]에까지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웠다. 대순(大順) 2년
56에 상주의 남쪽으로 피난 가서 잠시 조령(鳥嶺)에서 서지(栖遲)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본산(本山)인 사자산이 병화(兵火)를 만나 귀한 사찰[寶坊]이 모두 소실되었으니, 대사(大師)는 혜안으로 미리 길흉(吉凶)을 점쳐 건물과 함께 타 죽을 액난을 면하였다. 진성대왕이 어우(御宇)한지 2년 만
57에 특별히 명주의 삼석(三釋)과 포도(浦道) 두 승려와 동궁내양(東宮內養)
58 안처현(安處玄) 등을 보내어 륜언(綸言)을 전달하여 국태민안을 위해 법력(法力)을 빌고 나아가 음죽현(陰竹縣)
59의 원향사(元香寺)를 선나별관(禪那別觀)으로 영속시켰다. 이 날 대사(大師)는 북지(北地)를 떠나 점차 남행(南行)하다가 공주(公州)를 향해 지하(城下)를 지나가는데, 장사(長史)인 김공휴(金公休)가 군리(郡吏)인 송암(宋嵒) 등과 함께 멀리서 듣고 자(慈) … 에 이르러 군성(郡城)으로 영입하고 겸하여 … 대사가 머무르기를 요청하였다. 대사(大師)가 장사(長史)에게 이르되 “빈도(貧道)는 늙어 죽음이 임박하였으므로 쌍봉사에 가서 동학(同學)들을 만나보고 선사(先師)의 탑에 참배하려 하니 만류하지 말아 달라”하시고, 드디어 몇 사람의 대중을 거느리고 떠나 진례군계(進禮郡界)
60에 들어서자마자 적도(賊徒)들이 길을 차단함을 당하여 대중들이 길을 잃게 되었다. 이 때 홀연히 운무가 몰려와 어두워지며 캄캄해지더니
61 공중(空中)에서 병마(兵馬)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도적의 우두머리 등 모두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뒤로 물러서면서
62 뿔뿔이 흩어졌고, 대사(大師)와 대중은 재앙을 면하였으니, 이는 관세음보살님이 자비로 가호해 주신 덕택이라 하겠다.
63 한탄스러운 바는 전국 방방곡곡에 초적(草賊)
64이 출몰하여 조용한 곳이 없었다. 이러한 위험한 때에 밤을 새워가며
65 길을 재촉하여
66 무부(武府)
67에 도달하였으니, 병사들도 공경히 받들었고, 일군(一郡)은 편안하게 되었다. 진성왕은 대사가 남방(南方)으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68 서경(西境)을 보호하였으며 군흉(群凶)들이 예배하고 대대(大憝)가 귀의하였다. 임금은 대사가 길이 국가를 복되게 하며 겸하여 어머니[北堂]를 위해서 무량사(無量寺)와 영신사(靈神寺)
69 두 절을 헌납하여 주석(住錫)하도록 하였다. 당주(當州)
70의 군사(郡吏) 김사윤(金思尹) 등이 찾아와서 선지(禪旨)를 듣고 법문(法門)에 깊이 감명을 받아 분령(芬嶺)
71에 계시도록 청하고, 군(郡)의 동림(桐林)을 선거(禪居)에 길이 예속시켜 열반(涅槃)할 종신처로 삼게 하였다. 혜원법사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때 진(晋)나라 안제(安帝)가 숭앙하고,
72 승조(僧稠)가 효룡산(孝龍山)에 있을 때에 제(齊)나라 문선제(文宣帝)가 귀의하였으며,
73 허순(許詢)
74이 지둔(支遁)을 스승으로 모셨고,
75 주서(朱序)
76가 도안(道安)
77대사를 존숭한 것 등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진량(津梁)
78이 되며, 시대의 약석(藥石)
79이라고 할 만하였다. 군신이 의뢰하며 사서(士庶)들이 귀의하였다. 어느 날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되 “이곳은 반드시 재해(災害)가 일어나 구융(寇戎)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있을 터이니, 미리 대처하여 재난이 다가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하고 홀연히 북산을 향해 떠났다. 서해(西海)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80 갑자기 풍랑을 만나 배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였다. 대사(大師)가 뱃사공[海師]에게 “주야 육시(六時)로 천리(千里)쯤 온 듯하니 여기가 어디며, 어디를 향해 가느냐”고 물었다.
81 뱃사공이 대답하되 “전도(前途)를 암산하니 아마 서국(西國)
82일 듯하다”고 하였다. 뱃사공의 말을 들은 대사(大師)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전에 진(秦)으로 유학하려던 때는 기상이 컸는데
노승(老僧)이 이제야 유학승이 되었구나.
옛날 유학하려던
83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니
때가 너무 늦은 것을 다시 느끼네!
황홀하고 침음(沉吟)하면서 근심에 잠겼다. 그날 밤 꿈에 해신(海神)이 나타나 이르되 “대사(大師)께서는 입당구법(入唐求法)을 포기하고 본사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니, 부지런히 정진하고 상심(傷心)하지 말라”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순풍을 만나 동쪽으로 반일(半日) 쯤 가다가 당성군(唐城郡)
84의 서계(西界)인 평진(平津)
85에 도달하였다. 곧바로 수진(守珍)으로 가서 임시로 머물고자 하여 드디어 은강선원(銀江禪院)에 이르니, 매우 훌륭한 도량이었다. 그 곳에서 십여 일 동안 임시로 주석하고 있었다.
대왕(大王)
86이 황양현(荒壤縣)
87 부수(副守)인 장연설(張連說) 편으로 명다(茗茶)와 명향(名香)을 담은 양함(琅函)을 보내면서 “항상 스님을 왕좌(王佐)의 재목(材木)으로 흠모하였으므로, 이제 국사(國師)의 예를 표합니다”고 전하였다. 대사(大師)는 전쟁[煙塵]의 핍박으로 세상이 혼란하다 하여 설린(薛藺)의 요청을 거절하고,
88 주풍(周豊)의 간청도 사양하면서
89 이르기를 “세상은 모두 혼탁하고 시대는 오랫동안 혼미하므로 반딧불로는 능히 한밤의 어둠을 제거(除去)할 수 없고, 아교로써 능히 황하(黃河)의 탁류를 막을 수 없다”고 하며, 항상 어두운 현실을 보니 실로 삶의 길이 싫어졌다. 건녕(乾寧) 7년(효공왕 4, 900) 3월 9일 새벽[詰旦]에 이르러 홀연히 문인(門人)들에게 이르되, “삼계(三界)는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고, 만연(萬緣)은 모두 적적한 것이다. 나는 이제 떠나려하니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여 선문(禪門)을 수호하고,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곧 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니라”하였다.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입멸(入滅)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75세요, 법랍은 56년이었다.
이때 하늘빛은 창망하였고, 햇빛은 참담하였으며, 인간은 모두 눈을 잃은 듯 하였고, 세상은 함께 상심에 잠겼으니, 하물며 문하(門下)의 제자들이야 오죽 하였겠는가. 모두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며, 제자들은 함께 슬픈 표정으로 천축(天竺) 구시라(拘尸羅)의 법
90을 본받아 석실(石室)의 서쪽에서 다비(茶毗)
91하고, 사리 천과(千粿)를 습득하였다. 그 날 밤 황양현 제치사(制置使)인 김견환(金堅奐)이 말하되, “석단(石壇) 위에서 자색 기운이 하늘로 뻗치더니 천중(天衆)이 날아와서 사리를 주워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면서, 원중(院中)에 가서 자세하게 그 특수한 상서를 이야기하였다. 대중들이 전해 듣고 깜짝 놀라 쌍림(雙林)
92으로 가 보았더니, 과연 일백여 과의 사리를 습득하게 되었다. 천인(天人)들이 공경하였고, 스님과 신도들이 애통해 마지아니하였다. … 이는 강안(江岸) … 현읍(縣邑) 사람들이 원망스러운 것은 산사(山寺)와의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바다의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스님들만이 살고 있으므로, 마치 절벽에 매달린 제비집과 같았다.
93 그리하여 사리를 모시고 동림(桐林)으로 돌아가서 천우(天祐) 3년(효공왕 10, 906)에 높이 석탑을 세우고 그 금골(金骨)
94을 안치하였다. 대사(大師)는 영악(靈岳)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선천적으로 지혜로웠고, 선의 종지(宗旨)를 깨달아 무생(無生)의 언덕에 올랐으며, … 가는 곳마다 선(禪)의 종지만을 물었고, 거주(居住)하는 장소마다 현리(玄理)를 참구하였으니, 진승(眞乘)이 바로 이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대중은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모인 사람은 바다와 같았으며, 학인(學人)을 지도하되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스님은 중생을 위해 현생(現生)하였으며 곳을 따라 교화하여 일정한 장소가 없었으니,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선관(禪關)을 크게 열고 대교(大敎)를 천양하여 말세(末世)에 있어 마군을 소탕하고, 삼조(三朝)
95에 걸쳐 왕도(王道)를 부호(扶護)하여 풍거(風竅)
96와 같이 숙연한 위엄을 떨쳤으며, 항상 … 우로(雨露)가 만물을 생성케 하는 것과 같이 덕을 베풀어서 중생의 마음 밭에 뿌렸고, 심지어는 깊은 진리를 가르치고 도타운 뜻을 일러 주었다. 이와 같은 위업이 혹은 학도(學徒)들의 입으로 전파되기도 하고, 혹은 승사(僧史)에 실려 있기도 하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는 여종(如宗)·홍가(弘可)·신정(神靖)·지공(智空) 등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를 모두가 석성(石城)
97이 무너질까 염려하며, 함께 사리를 모신 높은 언덕이 능곡(陵谷)으로 변할까 걱정한 나머지 임금님께 표상(表狀)을 올려서
98 비석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주청하였다. 효공대왕
99은 일찍부터 대사의 빛나는 도풍(道風)을 앙모하여 항상 불교를 존숭한 까닭에 시호를 징효대사(澄曉大師)라 하고, 탑명을 보인지탑(寶印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이어 한림학사이며 전(前) 예부시랑(禮部侍郞)인 박인범(朴仁範)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인범이 왕명(王命)을 받고 비문을 짓기 전에 와병으로 죽었으니,
100 장학(藏壑)
101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리하여 이 일은 문인(門人)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었다. 방진(芳塵)
102은 점차 사라지고 아직 정석(貞石)
103을 새기지 못하게 되자 문인들의 뜻을 모아 행장(行狀)을 초안해서 내운(乃雲) … 학려(鶴唳)
104와 같은 애절한 진정(陳情)이 하늘에까지 들렸던 것이다.
경명왕은 신기(神器)로 아름다움을 전하고 보도(寶圖)로 천명(天命)을 이어 선왕의 뜻을 계승하며, 이를 뒷사람들에게 널리 보여 주고자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높은 공적을 찬양하라 하시지만, 인연(仁渷)은 재주가 토봉(吐鳳)
105이 못될 뿐만 아니라 학문도 망양(亡羊)
106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계과(桂科)에는 비록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나, 제구(虀臼)
107에 대해서는 상수(傷手)
108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라는 바는 억지로 붓을 잡아
109 비문을 지었으니, 이로써 국왕의 은혜를 갚고 아울러 문인(門人)들의 뜻을 위로함이니, 앞의 뜻을 거듭 밝히고자 이에 명(銘)을 짓는다.
대각의 대승법이여! 묘도(妙道)를 열어주고,능인(能仁)의 비밀법(秘密法)이여! 중생을 인도하네.
진위(眞僞)를 분간함이여! 시대(時代)를 깨우쳤고
범부(凡夫)가 곧 성인(聖人)이여! 모두가 부처로다.
110
오산(鼇山)
111에 빼어남이여! 기골(奇骨)을 받아 낳고,
학수(鶴樹)서 열반함이여! 보신(報身)을 화장했네.
비로소 그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언제나 빛난 그 이름! 날마다 새롭도다.
장례의 법요무(法要式)이여! 정성을 다하였고,
법을 계승한 제자는 천명(千名)이 넘네!
달빛이 조문(弔問)함이여! 햇빛은 침침하고,
나원(奈苑)
112에 뿌려줌이여! 그 감로(甘露) 사라졌네.
장로(長老) … 장로 운초(雲超) … 지주인화상(持主人和尙) 장로 형서(夐栖), 장로 예홍(乂洪)이 용덕(龍德) 4년(경명왕 8, 924) 갑신(甲申) 4월 15일에 비문을 완성하였으나, 국가가 다난(多難)하여 24년[二紀]을 지낸 후에야 비로소 사군(四郡)의 연진(煙塵)이 사라지고, 일방(一邦)의 전란이 평정되었다.
천복(天福) 7년(혜종 1, 944) 갑진 6월 17일에 세우고, 최환규(崔奐規)가 글자를 새기다.
【陰記】
삼가 현철(賢哲)과 승속 제자들의 존위(尊位)를 기록하여 다음에 배열(排列)한다.
능선사주(能善寺主)
113
승전사주(乘全寺主)
총월사주(聰月寺主)
최허대덕(崔虛大德)
홍람대덕(弘㑣大德)
114
계정대통(契貞大統)
경보대통(慶甫大統)
115
성언대덕(性言大德)
왕요군(王堯君)
116
왕소군(王昭君)
117
▨▨대왕(▨▨大王)
필영대왕(弼榮大王)
영장정광(英章正匡)
118
왕경대승(王景大承)
119
청단▨주(淸端▨主)
120
김일소판(金鎰蘇判)
121
긍달소판(兢達蘇判)
122
왕규좌승(王規佐承)
123
권▨좌승(權▨佐承)
124
왕순좌승(王詢佐承)
125
성준원보(誠俊元甫)
126
▨▨▨상(▨▨▨相)
김환아찬(金奐阿飡)
김휴장사(金休長史)
127
일휴랑(鎰休郞)
▨순원보(▨順元甫)
희열조(希悅助)
긍열조(兢悅助)
식영한찬(式榮韓飡)
관질한찬(寬質韓飡)
긍일해찬(兢鎰海飡)
현달원보(賢逢元甫)
관헌원보(官憲元甫)
겸상해찬(廉相海飡)
128
윤달원보(允逢元甫)
헌옹원윤(憲邕元尹)
129
사윤일철찬(師尹一哲飡)
간영아간(侃榮阿飡)
장검사상(章劍史上)
필형대감(弼邢大監)
요겸랑(姚謙郞)
최방원윤(崔芳元尹)
기오원윤(奇悟元尹)
기달원윤(奇達元尹)
지연정위(知連正衛)
130
여일정조(與一正朝)
131
평직아간 명주(平直阿干 溟州)
기내 명주(奇柰 溟州)
김예경 명주(金芮卿 溟州)
연세대감 명주(連世大監 溟州)
왕간내 원주(王侃奈 原州)
덕영사간 죽주(德榮沙干 竹州)
132
제종사간 죽주(弟宗沙干 竹州)
송암사상 공주(宋嵒史上 公州)
평직촌주 제주(平直村主 提州)
133
귀평일길간 제주(貴平一吉干 提州)
견필촌주 냉주(堅必村主 冷州)
견화사간 신지현(堅奐沙干 新知縣)
월지산인 신지현(越志山人 新知縣)
애신사간 우곡군(哀信沙干 又谷郡)
능애사간 우곡군(能愛沙干 又谷郡)
세달촌주 내생군(世達村主 奈生郡)
식원댁삼 냉수현(式元大監 冷水縣)
명환촌주 주연현(明奐村主 酒淵縣)
134
강선조 별근현(康宣助 別斤縣)
전립방 소랑(全立房所郞)
길사촌주 단월이(吉舍村主丹越駬)
최산내은(崔山㭆听)당시의 삼강(三綱)과 전명위열(典名位列)
원주(院主):희랑장로(希朗長老)
135
전좌(典座):흔효상좌(昕曉上座)
사(史):도증선사(道澄禪師)
직세(直歲):낭연선사(朗然禪師)
▨검교유나(▨檢校維那):낭선장로(良善長老)
당유나(堂維那):계융상좌(契融上座)
지객(持客):계렴선사(契廉禪師)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