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자(撰者)는 최언위(崔彦撝)
2이며, 서자(書者)는 석선경(釋禪扃)
3임.
오룡지사(五龍之寺)
유진(有晋) 고려국(高麗國) 용암산(踊巖山) 오룡사(五龍寺) 고(故)▨▨왕사(王師) 교시법경대사(敎謚法鏡大師) 보조혜광지탑비명(普照慧光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대개 듣건대 영취산에서 종지(宗旨)를 개창하여 무위(無爲)의 교화를 가르쳤고
4,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에 들어
5 미륵 부처님의 출세(出世)를 기다리고 있다.
6 때로는 먼저 미묘(微妙)한 법언(法言)을 설하며, 때로는 처음부터 선행(善行)을 권장하였다. 그러므로 교외(敎外)에 따로 전한 정법안장(正法眼藏)
7으로 깊이 물어 본다면 모두가 해탈(解脫)아닌 것이 없다. (결락) 달마는 혜가대사(慧可大師)가 눈 속에 서서 신표(信表)로 팔을 끊어 바친 신심(信心)을 보고
8 오직 도(道)를 위하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확인하고서야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그로부터 뛰어난 영납(英衲)이 계속 출세(出世)하여 법손(法孫)이 상승(相承)하므로써 그 도(道)가 날로 새로워지고 천하(天下)에 두루 전파되었으니,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대대로 혜명(慧命)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9
대사의 법휘는 경유(慶猷)요, 속성은 장씨(張氏)이다. 그의 선조(先祖)는 남양(南陽)
10의 관족(冠族)이며 대한(大漢)의 종지(宗枝)였는데, 먼 조상이 우연히 경파(鯨波)
11를 건너 토군(兎郡)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 스님의 아버지는 슬기롭고 예악(禮樂)을 좋아하였으며, 공자(孔子)와 노자(老子)의 도를 배우고 따라 지키며 (결락) 공사(公事)를 받들어 죽을 때까지 종사하였다. 어머니는 맹씨(孟氏)니,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홀연히 상서로운 꿈을 꾸고 깨어난 후부터 스스로 임신한 것을 알고는 항상 정념(淨念)을 닦되, 악취가 나는 오신채(五辛菜)
12와 비린내 나는 고기 등을 일체(一切) 먹지 않았다. 함통(咸通) 12년
13 4월 11일에 탄생하였으니, 대사는 날 때부터 법상(法相)을 지녔고, 일찍부터 보리심(菩提心)을 품고 있었다. 之年(결락)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글을 읽음에 있어 다섯 줄씩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는 재주가 있었으며, 자진(子晉)이 신선의 도리를 찾아 떠나려는 나이에
14 극기(克己)하는 자제력이 강하여 삼극(三尅)
15을 성숙하였다. 그 후로 진세(塵世)를 여의고 출가 입산(入山)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여 부모님 앞에
16 꿇어 앉아 허락을 구하였다. 이친(二親)은 마지못하여 눈물을 머금고 허락하면서 “부지런히 수도(修道)하여 초지(初志)를 관철하고 인순도일(因循度日)
17하여 고과(苦果)를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결락) 峯 (결락) 철선사(徹禪師)가 입적하고, 그의 몽자(冡子)인 훈종장노(訓宗長老)
18의 문도들이 송문(松門) 밖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여러 해 동안 정진하고 있었다.
19 그 때 대사(大師)의 나이 겨우 15살이었다. 집을 나와 선경(禪扃)
20으로 찾아가 (결락) 선사를 친견하고 품은 뜻을 아뢰었다. (결락) 드디어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입실(入室)을 허락받았으니, 오히려 문 밖에서 맞아들일 뿐만 아니었다.
21 광계(光啓) 4년
22에 근도사(近度寺) 영종율사(靈宗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계율을 굳게 지켜 계주(戒珠)가 빛나고, 말은 혜실(慧室)
23로 돌아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듣는 재주였으며, 덕(德) 또한 교존(敎尊)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대사(大師)는 이것으로써 도(道)를 깨치려 함은 마치 공곡(空谷)에서 고기를 낚는 것이며 또한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행장(行裝)을 정돈하여 석장(錫杖)을 짚고 산문(山門)을 나와 중국으로 가는 선편(船便)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당(唐)으로 가는 조천사(朝天使)
24의 배에 편승(便乘)하게 되어
25 뜻하는 바 유학(遊學)의 목적을 이야기하였더니
26 (결락) 중국 땅을 딛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여 콧물과 눈물이 함께 흘렀다.
27 이때 화정(華亭)
28에 배가 정박하자 선지식이 있는 길을 찾아
29 동림(東林)
30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또한 북저(北渚)
31의 승지(勝地)를 지났다. 당시의 소문에 운거도응화상(雲居道膺和尙)
32의 도덕(道德)이 선종에서 으뜸이며,
33 공덕은 선서(善逝)
34에 못지않을 뿐만 아니라 보수(寶樹)
35에는 왕자(王者)가 되고, 선주(禪株)
36에서는 제1인자(第一人者)였다고 하였다. (결락) 경유(慶猷),
37 형미(逈微),
38 여엄(麗嚴),
39 이엄(利嚴)
40 등은 모두 도응(道膺)으로부터 법(法)을 전해 받고 귀국(歸國)하여 해동에서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라고 일컬어졌다. 운거화상이 대사를 보고 이르되, “말을 들으면 선비임을 알고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이러한 사람은 만리(萬里)가 곧 동풍(同風)이고 천년(千年)에 한 번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네 사람이 항상 그를 흠모하면서 개당(開堂)하여 경·율·론 삼장(三藏)을 가르치기도 하고,
41 또는 선(禪)을 지도하여 목격도존(目擊道存)
42의 이치를 깨닫게 하였다. 이때 운거화상이 자등(慈燈)을 부촉하고, 비밀리 법요(法要)를 전해준 다음 드디어 “나의 도(道)가 동쪽으로 흘러갔으나 경유(慶猷) 한 사람이 능히 나의 마음을 발명(發明)하였다”고 하였다.
43 이른바 불도를 홍포(弘布)함에 있어 어찌 가문(家門)의 귀천(貴賤)을 논할 것이며, 선종(禪宗)을 연창(演暢)함에 어찌 (결락)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빌어 한가로운 마음으로 선문(禪門)을 대할 수 있으랴. 문자(文字)를 떠나 항상 심경(心鏡)을 생각하여 객진(客塵) 번뇌
44를 말끔히 떨어버리고 이치를 얻은 데서 저 편방(偏方)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미매(迷昧)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운거(雲居)의 법인(法印)을 전해 받아 일역(日域)에 중흥(中興)시키려고 다짐하였으니,
45 이는 곧 부처님의 뜻을 따르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라 하겠다.
46 도인(道人)은 망상을 그치고,
47 그 (결락) 번다함을 잊는다. 마치 공자(孔子)가 급한 마음으로 본국인 노(魯)나라로 돌아간 것과 같이,
48 천우(天祐) 5년
49 7월 무주(武州)의 회진(會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군대가 지상에 가득하고 도적은 곳곳에 횡행하며, 삼종(三鍾)이 있는 곳에는
50 사방(四方)에 군벽이 많았다.
51
대사는 암혈(岩穴)에 은둔하여 난리를 피하되 사슴과 더불어 벗을 삼았으며, (결락) 를 만났으나, 대사가 그 산에 머무는 것이 마치 구슬을 품고 있는 물이 더욱 아름다운 것과 같았으며,
52 바다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았다. 옥이 있으면 산이 빛나듯 스님의 명성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선왕(先王)이 북쪽에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남정(南征) 길에 올라 스님이 계신 근처에 이르러 특별히 사신
53을 보내 조서(詔書)를 전달하여 자신이 있는 군벽(軍壁)
54으로 초빙하였다. 대사는 “청하는 조서를 받고 어찌 지체할 수 있겠는가”하고 곧 유영(柳營)
55에 당도하였다.
정중히 난전(蘭殿)
56으로 맞아 들여 계속 이곳에 머물러 줄 것을 재삼(再三) 부탁하면서, “과인(寡人)이 급히 용패(龍旆)
57를 돌이켜 스님을 모시고자 함이었습니다”
58 하니, 대사(大師)는 수레를 타고 왕과 함께 가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였다. 속기(續起) (결락) 則. 일찍이 장경을 보고 또 고승전을 살펴보니, 송(宋)의 무제(武帝)
59가 적을 평정할 때
60 각현 삼장
61이 부봉(附鳳)하는 정성을 이루었고,
62 수(隋)의 문제(文帝)
63가 성방(省方)
64함에 법찬대사(法瓚大師)
65가 종용(從龍)의 성의를 다하여,
66 일심(一心)으로 법을 소중히 받든 것은 천재(千載)에 똑같은 이치이니, 어찌 신기(神器)만을 기약하리요. 장차 나라의 기강은 기울어지고, 비로소 군신의 의리는 무너지며, 부자(父子)의 (결락) 흉(兇) 도리어 충정(忠貞)의 보좌(補佐)는 사라지고, 국운은 점점 쇠퇴하여 실로 하은(夏殷)
67 때 보다 심하였다. 이러한 때에 국민들은 다 함께 독부(獨夫)
68임을 한탄하며, 그윽이 밝은 임금을 그리워하였건만, 사방(四方)에서 군흉(群兇)이 다투어 일어나서 천하(天下)를 다투고 있었으며, 아직은 진조(秦朝)의 녹사지년(鹿死之年)
69과 같았으나, 대대(大憝)
70한 원흉(元兇)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마치 한실(漢室)이 용흥(龍興)하던 해와 흡사했다.
71 (결락) 지금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궁예(弓裔)를 항복받고 민심을 안정시킨 다음,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하여 왕좌(王座)에 군림하였으니, 성일(聖日)
72을 상진(桑津)
73에 높이 매어 달고, 요망한 분위기
74를 동해(東海)로부터 말끔히 쓸어버렸다.
75 대사께서는 오래도록 혜일(慧日)을 엿보았으며,
76 일찍이 현풍(玄風)을 듣고
77 작은 배를 타고
78 험난한 파도를 헤치면서 중화에 가서 도(道)를 배우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상(上)께서는 곧 수레를 타고 스님을 찾아뵈었으니,
79 앙모하는 마음
80은 바다보다 깊고, 흠승(欽承)하는 생각은 땅보다 넓었다. 왕이 스님을 만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사슬(捨瑟)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항상 몸을 구부려 구의(摳衣)하는 예를 다하였다. 언제나 백성을 다스리는 경훈(警訓)을 물었으며, 귀의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왕사(王師)로 대우하였으니, 이는 군림(君臨)의 길상을 도와달라는 소원 때문이다. (결락) 태제태광(太弟太匡) 왕신편(王信便)에 마납가사(摩衲袈裟)
81 1령(一領)과 유석발우(鍮石鉢盂)
82 1좌(一座)를 선사받았다.
그로부터 임금은 스님을 수시로 찾아뵙고 법문을 들었다. 그러한 즉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과 스님을 존중하는 신심(信心)이 원위(元魏)
83 때 임금이 불교를 신봉
84하는 것과 같았고 왕신(王臣)과 국민 모두가 (결락) 불자(佛子)이었던 것과 같았으니, 불교의 교세가 왕성함이 이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고 할만 하였다. 그러므로 내원(奈菀)에서 정진하며
85 연비(蓮扉)에서 연좌하니,
86 찾아오는 자가 구름과 같고, 모인 대중은 바다와 같이 많아서
87 도량에 도마(稻麻)
88처럼 열을 지었다. 마치 장자(長者)의 공원이나
89 도리성혜(桃李成蹊)와도 같았으며,
90 또한 선인(仙人)이 모인 시장 터와도 같았다. 정명(貞明) 7년
91 3월 23일 자시(子時)에 (결락) 그 날 문밖에서 칼싸움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으니,
92 이것이 바로 스님을 모시러온 사자(使者)의 말발굽 소리였다.
93 일월사(日月寺)
94 법당에서 입적하시니 세속 나이는 51세요, 승랍은 33이었다. 이 때 하늘은 캄캄하고 땅은 찢어지는 듯 안개 빛은 어두웠고 구름은 수심에 잠겼으며, 산새는 슬피 울고 들짐승은 오열하였다. (결락) 懷. 다음해 1월 19일에 이르러 신좌(神座)를 용암산(踊巖山) 동쪽 봉우리로 옮겼으니, 큰 절과의 거리는 약 300보 쯤 되었다. 오직 대사의 선천적인 자질과 지기(志氣)는 산악(山岳)의 정기를 받은 영령(英靈)이었으며, 중묘(衆妙)하고 깊은 진리를 탐구하니 중묘(衆妙) 회통(會通)하고 (결락) 사마(四魔)를 조복받았다. 정각(正覺)을 훈수하여 진여(眞如)의 세계로부터 응화(應化)한 분이거든, 하물며 일찍이 옥음(玉音)
95을 듣고 금구(金口)
96의 말씀을 전하였으니, 가히 선산(禪山)에 미옥(美玉)을 쌓은 공덕으로 광보(匡輔)의 풍(風)을 도우며, 법왕(法王)의 교화를 도왔다고 할 만하였다. (결락) 삼가 성심(聖心)을 받들어 급인(汲引)
97의 늦음을 이어 받고 스님의 위적을 영원히 유전(流傳)하라는 교지를 받게 되었다. 왕이 단조(丹詔)
98를 보내 문인들을 위로하되, “위대하신 쌍봉(雙峯)스님
99의 법덕(法德)은 한 나라의 자부(慈父)가 되었으나, 이젠 다시 보기 어렵게 되었다. (결락) 스님의 생전에 많은 교훈을 받았으므로, 그 법은(法恩)에 보답하려 하여 명복을 빌고 추모제를 지내는 때를 당하니 마땅히 역명(易名)
100의 의전(儀典)을 거행하리라”하시고, 시호를 법경(法鏡), 탑명은 보조혜광(普照慧光)이라 추증하셨으며,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스님의 홍렬(洪烈)
101을 법답게 천양토록 하라 하시니, 아무리 사양하여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솔이(率爾)
102하게 비문을 지었으나, (결락) 東 (결락) 難 (결락) 와 같이 깊은 지혜를 헤아릴 수 없으며, 형수(荊岫)처럼 높은 덕
103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음에는 부족하지만 이 글을 지으니,
104 비록 포칭(褒稱)할 만한 미덕(美德::TEXT)을 모아
105 직필로 그 전적을 썼으나,
106 아려(雅麗)한 문장이 못됨을 못내 아쉬워하노라.
107
그 덕을 찬사(讚詞)해 가로되,
위대하신 제1조 마하가섭이여!
108
가는 곳마다 당당하고 높았지만
낭중(囊中)에서 영출(穎出)하는 후배가 있어
109
만인(萬人)이 둘러앉은 석상(席上)의 보배였네.
110
탁월하신지라 현교(玄敎)의 주인이여!
좁고도 변방(邊方)인 해동(海東)에 태어나서
조계(曹溪)의 혜능탑을 참배하고서
111
(결락)
日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군왕(君王)이 정중하게 사슬례(사슬례)를 표했고,
재보(宰輔)들도 여러 차례 서신(書紳)하였다.
학도들은 모여서 법요(法要)를 탐구하고
찾아온 불자(佛子)는 모두 양인(良因)을 맺어
연좌(宴坐)하는 그 모습 아름답도다.
112
열반을 슬퍼하여 정신을 잃었고
113
밝고 밝던 보월(寶月)이 법해(法海)에 빠졌네.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천복(天福) 9년
114 용집
115 갑진 5월 임신삭(壬申朔) 29일 무자(戊子)에 세우다
석장(石匠) (결락)
【陰記】
檢校都▨▨事僧:釋定▨
第一座僧:釋獎玄
院 主 僧:釋▨希
典 座 僧:釋神榮
都維那僧:釋繼希
直歲
116僧:釋虛允
專知碑事僧
117: 釋湛洪
專知地理
118事:大德 聦訓
修道使者:佐尹 康守英
廣評省吏 王翼
재학제자(在學弟子)의 관위(官位)와 성명(姓名)은 다음과 같음.
神聖大王
119
康公▨太匡 兼夫人朴氏
黔弼太匡
王▨太匡
劉權說佐丞 兼夫人金氏
王濡
120佐丞
崔彦撝
韓桂逢元甫 兼夫人黔氏
鄭▨元甫
韓憲閏元尹
韓平侍郞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