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 광주(光州) 희양현(晞陽縣)
2 고(故) 백계산(白鷄山)
3 옥룡사(玉龍寺)
4 동진대사(洞眞大師) 보운탑비문(寶雲塔碑文)과 아울러 서문.
통직랑(通直郞)
5 정위(正衛) 한림학사(翰林學士) 사단금어대(賜丹金魚袋) 신(臣) 김정언(金廷彦)
6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제자(門弟子) 사문(沙門) 신(臣) 석현가(釋玄可)
7는 교지에 의하여 글씨를 쓰다.
공손히 생각해 보건대 법신(法身)은 동(動)과 적(寂)인 양면이 있고, 도체(道體)란 희(希)하고 이(夷)
8하여 중생세계 중에 성인(聖人)을 보는 마음을 달아 놓고, 사바세계에 인(仁)을 구하는 생각을 걸어 놓았다. 대웅(大雄)
9께서는 서축(西竺)에 태어나셨고, 그 진법(眞法)은 동방으로 전래하였다. 이로부터 강회승(康僧會)는 오(吳)나라에서 전법하고
10, 마등대사(摩騰大師)는 한(漢)나라로 와서
11 부처님
12의 밀인(密印)을 가지고 선백(禪伯)의 깊은 종지(宗旨)를 연창하였다. 드디어 불법을 배우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선(禪)을 익히게 하여 세속을 구제하였으니, 보월(寶月)이 능가산 위에 떠오름에
13 조용히 금인(金人)
14을 생각하게 하였다. 현주(玄珠)를 적수(赤水) 중에 찾았음은
15 오로지 망상(罔象)
16에 의거하는 것과 같았으니, 이는 묵묵함을 말미암은 것이고, 다만 심중에만 있을 뿐이다. 목경(目鏡)을 찾으려고 서쪽으로 유학하여
17 중묘(衆妙)를 터득하였고, 심주(心珠)를 갈고 닦아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18 뭇 중생을 교화하였으니, 석문(釋門)
19은 풍구(風丘)
20에 높이 열렸고, 현도(玄道)
21는 진역(震域)
22에 크게 중흥하였다. 불(佛)이란 깨달았다는 뜻으로, 그를 스승 삼아 수행(修行)하는 것이니 대사(大師)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법휘는 경보(慶甫)요, 자(字)는 광종(光宗)이며, 속성은 김씨로서 구림(鳩林)
23 출신이다. 아버지는 익량(益良)이니 관위는 알찬(閼粲)
24이었다. 오산(鰲山)
25이 내린 악령(岳靈)을 받아 광화(光華)
26의 여경(餘慶)을 육성하였고, 계림에서 탄생하여 혁엽(奕葉)
27으로 더욱 아름다움을 드날렸다.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니 품행은 풀잎에 나부끼는 맑은 바람과 같이 우아하고
28, 마음은 꽃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과 같이 투명하였다.
29 궁중에서는 왕의 수라상에 대한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30 궁 안에서 왕비를 도와 내화(內和)를 도모하였으며
31, 이로부터 가문이 크게 창성하였다.
32 함통(咸通) 9년
33 상월(相月)
34 재생명(哉生明)
35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흰 쥐가 푸른 유리구슬 1개를 물고 와서 사람의 말을 하되 “이 물건은 희대의 진기한 보물이니, 바로 현문(玄門)의 상보(上寶)이다. 가슴에 품고 호념(護念)하면 반드시 빛나는 광명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임신하였는데 항상 마음을 맑게 하여 재계하다가 음력 4월 20일에 탄생하였다.
집안에는 한치의 땅도 없었으나
36 초년(髫年)
37에 이르러서부터 가산이 일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전생에 이미 법아(法牙)를 닦았고
38, 승과(勝果)를 역수(逆修)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아이들과 노는 가운데 있으나, 오히려 동년(童年)의 위에 있었다. 나이 유학(幼學)의 시절이 되어서는 책을 메고 학당에 들어가려는 마음이 있었으며
39, 덕은 노성(老成)한 사람보다 귀하였다. 이미 불교에 출가 수도하려는 뜻을 품고는 이친(二親)에 고하되 “세상의 진노(塵勞)를 여의고 출세간(出世間)인 불지(佛地)에 오르는 인연을 닦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비록 혜가(慧柯)
40의 재질(才質)은 부족하나, 오직 불법의 동량이 되기를 기약하는 마음은 굳게 다짐하였다”라고 여쭈었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말없이 탄식하고 “기인(己仁)
41을 이루고 물지(物智)
42를 이룩하여 이미 내외(內外)의 도(道)에 합하였다”면서 “네가 출가하려는 뜻은 좋으나, 너와 헤어짐은 슬프고 또 슬픈 일이라”하자, 대사가 “뜻은 부모의 곁에 있으나, 마음의 약속은 부처님 앞에 있습니다”라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의 원하는 바를 하늘도 따라 주는 것이거늘 내 어찌 아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로서 거역할 수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울면서 허락하였다.
43 대사는 곧바로 부인산사(夫仁山寺)
44로 가서 삭발하고
45, 경전을 배우는 강원으로 들어가 교리를 배웠다.
46 선산(禪山)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빠른 걸음으로 행각(行脚)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밤 꿈에
47 금선(金仙)
48께서 이마를 만지며 귀를 잡고 방포(方袍)를 주면서 “너는 이 가사를 입어야 하니 그 까닭인 즉 앞으로 이를 몸에 두르고 수행(修行)하되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곳은 심학자(心學者)
49의 참선하는 곳이 아니다. 곧바로 떠나가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하거늘 대사는 잠을 깬 다음, 깊이 생각하되 “이는 앞으로 내가 수도의 길을 떠날 조짐으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때를 기다리겠는가
50”하고, 입산하는 행장을 꾸려 마치 새처럼 집을 나와 백계산(白鷄山)으로 나아가 도승화상(道乘和尙)
51을 배알하고 간청하되 제자가 되어 보살도를 닦아 여래의 집에 들어가서 오묘한 진리를 보는 지혜의 눈
52과 모든 사물(事物)의 근원을 아는 마음을 열도록 지도를 간청했다.
53 이미 깨달은 것은 지혜(智慧)가 아니며, 그 불법(佛法)을 옹호할 수도 없으니, 오직 계율(戒律)이 아니면 비위(非違)를 막을 수 없다하여 열 여덟살 때,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
54에서 구족계를 받고는 인초(忍草)에서 싹이 돋고
55, 또한 부낭(浮囊)
56을 굳게 지니 듯하여 계향(戒香)의 향기로움을 더욱 퍼지게 하였고, 마음을 돌과 같이 견고히 하였다.
그 후 여러 해 동안의 좌우(坐雨)
57인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다가
58 다시 본사인 백계산(白鷄山)으로 가서 도승(道乘)스님을 뵙고 하직 인사를 드렸더니, 도승대사가 이르되 “너의 뜻을 꺾을 수 없으며, 또한 자네의 굳은 의지를 막을 수가 없구나! 너는 나를 동가(東家)의 구(丘)
59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에게는 그러한 지도 능력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다”하고
60웃으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의 길을 떠나기를 허락하였다.
61 그로부터 제방(諸方)으로 행각하되 배움에 있어 일정한 상사(常師)를 두지 아니하고, 성주사의 무염대사(無染大師)
62, 굴산사의 범일대사(梵日大師)
63 등을 차례로 친견하여 법문을 듣고 현기(玄機)를 깨닫고 생각하기를 ‘옥을 캐고 구슬을 탐색하듯 도(道)가 어찌 먼 곳에 있겠는가. 행하면 바로 그 곳에 있다’고 하였다. 드디어 경복(景福) 원년(元年)
64 임자년 봄에 훨훨 산을 나와
65 바람처럼 바다를 건너
66 중국으로 유학할 마음을 굳혔다.
67 마침내 선장(船長)에게 간청하여 편승(便乘)을 허락받아 기꺼이 동행하게 되었다.
68 주교(奏橋)
69를 지나 한(漢)나라에 이르렀다. 운수(雲水)의 마음으로 도를 묻고 여기 저기 선지식을 찾았다. 무주(撫州)
70의 소산(踈山)
71으로 가서 광인화상(匡仁和尙)
72을 친견하였다. 광인화상이 말하되
73 “너는 큰 바다
74의 용이 되고자 하는가”
75 화상(和尙)이 현언(玄言)을 드날리면서 비설(秘說)을 묻고는 곧 승당(昇堂)하게 하여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바야흐로 목격도존(目擊道存)의 심인(心印)을 깨달아 이심전심의 정법안장을 전해 받았다.
76 광인화상(匡仁和尙)은 크게 기꺼워하면서 “중국 법통이 해동으로 흘러간다는 설과 서학(西學)을 위하여 중국에 와서 유학하는 구도자 중에 가히 더불어 도(道)를 논할 만한 자는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동인(東人) 중에 목어(目語)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자네를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
77 하였다. 손을 잡아 법등(法燈)을 전하고 마음을 통하여 심인(心印)을 전해 준 다음, “그대는 반조산(盤桃山)
78 곁에서 불일(佛日)을 도와 다시 중흥하고, 해우(海隅)
79의 국민을 잘 순화시키는 한편
80 선법(禪法)으로 인도하여 다시 넓힐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훌륭한 큰스님은 반드시 찾아가서 친견하고
81, 환경이 절묘한 성지(聖地)는 남김없이 참배하였다.
82 강서(江西)로 가서 노선화상(老善和尙)을 배알하고
83 그의 법문을 들으며, 그의 수행담을 듣고자 하였다. 화상(和尙)이 묻되 “백운(白雲)이 행인(行人)의 길을 봉쇄하며 차단하였구나”
84 대답하되 “스스로 청소(靑霄)인 공중 길이 있거늘, 백운(白雲)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화상은 대사의 변재가 민첩하여 조금도 걸림이 없이 자재하게 답함을 보고
85, 곧 인가하여 법을 전해주고는
86 “남을 이롭게 할 자신이 생긴 연후에 떠나도록 하라”고 말씀하였다.
87 대사는 대붕새는 반드시 남명(南溟)에서 변하고, 학은 모름지기 동해(東海)
88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화이(華夏)에서의 구법을 마치고 상진(桑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본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만나 천우(天祐) 18년
89 여름 전주 임피군(臨陂郡)
90에 도착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못할 정도의 위험한 시기였다.
91 그 당시 주존(州尊)
92인 도통 태부견훤(太傅甄萱)
93은 군대를 통솔하여 만민이 보호하는 방벽의 언성(堰城)이었다.
94 태부는 본시 선행을 쌓아 장군의 집안에 태어났으니 바야흐로 웅대한 뜻을 펴기 시작하였다. 비록 일단은 대사를 체포하였다가 석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95 스님의 자안(慈顔)으로 접근하였으나, 존경하는 마음만 더욱 돈독해졌다.
96 그리하여 찬탄하되 “우리 스님을 만나기는 비록 늦었지만 제자가 됨을 어찌 늦추겠는가”하면서 모시는 태도가 정성스러우며, 존경하는 마음 또한 돈독하여
97 전주의 남쪽
98 남복선원(南福禪院)
99에 주석하도록 초청하였다. 대사가 말하되 “새들도 장차 쉬고자하면 나무를 선택함이거늘, 난들 어찌 포과(匏瓜)
100처럼 매달려서만 있으리요”라 했다. 그리고 백계산(白鷄山) 옥룡사로 갔다. 과연 그 곳은 편안히 수도할 수 있는 청재(淸齋)이며, 또한 조용히 참선하기에 알맞는 성지였다.
101 구름은 계상(溪上)에 덮여 있고
102, 돌을 베고 누워 흐르는 시냇물을 양치질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103 그러나 드디어 태부(太傅)의 초청을 받아 들여 그 곳으로 이주하기로 하였으니 실로 뗏목은 이미 귀당(歸塘)에 버렸고
104, 구슬은 다시 구포(舊浦)로 되돌아 왔다고
105 하겠다.
자비로 집을 삼아 중생을 교화하던 옛 스님들의 자취를 밟았으며
106, 지혜(智慧)의 횃불을 높이 들어 육도(六途)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을 구제하던 고승(高僧)들의 여휘(餘揮)를 계승하였다.
107 이 때 절학자(絶學者)
108들이 서로 경축하면서 말하되 “비록 년전에는 태산이 무너진 탄식이 있었고
109, 오늘에는 대중들이 앙모할 대상이 없다는 슬픔이 없음을 기뻐하도다”라 하였다. 이제 존경하며
110 따르는
111 문도(門徒)가 번창하고 법문을 들으려고 찾아오는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112 대사는 24년 동안
113 운수생활(雲水生活)을 하면서 후생(後生)을 지도하였으니, 마치 거울이 물상(物象)을 비추되 전혀 피로함이 없으며, 범종(梵鍾)이 언제나 치기만 하면 울리는 것과 같이 수문수답(隨問隨答)
114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조리 있고 정연하게 부상(扶桑)
115의 백성을 교화하였다. 청태(淸泰) 3년
116 가을에 이르러 우리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께서
117 몸에 갑옷을 입고
118 손에는 한검(漢劍)을 잡아
119 공손히
120 천벌(天罰)
121을 행하되 해우(海隅)를 괴롭히는 자는 모두 소탕하고
122 삼한(三韓)을 협화(協和)하였으므로
123 이에 사군(四郡)이 다시 태평한
124 군자국
125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 또한 깊이 신봉하였다. 대사께서 서토(西土)에 가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남산(南山)
126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환구(寰區)
127를 복되게 하였다. 이 때 태조께서 청풍(淸風)을 바라보고 백월(白月)을 첨앙하듯 숭앙(崇仰)해 마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급히 지검(芝檢)
128을 보내 옥경(玉京)
129으로 초빙하였다. 눈으로는 대사가 개경으로 왕림함을 보았고 귀로는 용이 변화
130함을 들었다. 비록 승가(僧伽)에 귀의하는 의례(儀禮)이나 마치 부처님을 받드는 의전(儀典)과 같이 하였다. 대사는 달이 하늘을 지나가고 구름이 푸른 산 바위틈으로 돌아가듯 조금도 걸림이 없고 적적(寂寂)하게 보광(葆光)
131을 세상 밖으로 비추었고, 현현(玄玄)하게 역중(域中)
132에서 교화를 행하였다. 이른바 엄숙하게 위엄을 보이지 않으나 함이 없어도 스스로 다스려져
133 선도(善道)로 나아가고, 함께 복문(福門)
134으로 출입하도록 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태조 임금이 승하하였다.
135 마치 고기가 수조하(水藻下)에 편안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136 나라에는 하늘이 무너진 듯 탄식하였고
137, 함지(咸池)
138에는 일잠(日蘸)의 빛도 없는 듯하다.
139 의공대왕
140이 즉위하여 부왕(父王)의 유풍을 받들고
141 선지(先志)를 계승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을 미미(亹亹)
142하며 법력을 빌어 자자(孜孜)
143하다가 문득 세상을 버리고 이미 천상(天上)으로 돌아가셨다. 이어 문명대왕
144이 왕위
145에 올라
146 중광(重光)으로 꽃을 엮어
147 천축의 교풍(敎風)인 불교를 널리 퍼뜨리고, 거울을 잡아서는 해방(海邦)의 풍속을 비추어 순화시켰다.
148 왕은 봉필(鳳筆)
149을 보내 스님을 왕궁으로 초빙하였고 중헌(衆軒)으로 내려와 친견하였다.
150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용집(龍集)
151 협흡(協洽)
152 4월 28일에 대사께서 열반에 들고자하여 목욕한 다음, 대중을 방 앞에 모아놓고 유훈하되 “나는 이제 떠나려하니 대중들은 잘 지내도록 하라. 진속(塵俗)에는 귀천이 있으나 공문(空門)
153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법이니, 수월(水月)처럼 마음을 맑게 하고
154 연하(煙霞)와 같이 고상하게 살도록 하라.
155
옷은 계절에 맞추어 갈아입지 말며, 음식은 두 가지 이상 하지 말며, 마땅히 고사리 등 풀뿌리를 캐어 식량을 삼고
156 선열(禪悅)로써 포식을 삼을 것이니
157, 이렇게 하여야 나의 제자이며 또한 나의 원에 적합할 것이요. 그 밖에 나의 도(道)에 무슨 별다른 관행(觀行)이 따로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한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으니, 너희들은 내가 죽거든 탑으로써 나의 유체(遺體)를 간직하거나, 비를 세워 행적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나의 현복(玄福)을 짓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58 이 말이 끝나자마자 방(房)에 들어가 승상에 기대어 가부좌를 맺고 앉아 엄연(儼然)하게 옥룡사상원(玉龍寺上院)에서 입적하였다.
슬프도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나이는
159 80세요, 보살계를 받은 지는
160 62하(夏)였다. 이날 아침 현무산(玄武山) 산정
161에 4~5명의 젖먹이 어린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162 들렸다. 태양은 향정(香庭)에 처참하게 비추고 바람은 보찰(寶刹)을 슬프게 하며, 송백나무 또한 슬픈 빛을 띠었고, 인령(人靈)은 떨면서 두려워하는 소리를 내었다.
163 다음 날 영구를 백계산으로 옮겨 모시고 돌로 감실(龕室)
164을 만들어 시신을 그 안에 모셔 봉폐(封閇)
165하였다. 문명대왕(文明大王)
166이 부음을 듣고 슬픔을 금치 못하여 미리 살피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弔書)를 보냈다. “고옥룡선화상(故玉龍禪和尙)은 조각달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고고하고, 고운(孤雲)이 한가롭게 날아가는 것과도 같이 조용하셨다.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보배로운 불교를 배우고
167 동국(東國)으로 돌아와 그 법을 전파하니
168 자비스러운 바람은 만리의 변방까지 불었고, 선정(禪定)의 밝은 달은 구천(九天)의 밖에까지 비추었다. 이와 같은 분은 오직 우리 통진대사 뿐이시다” 그러므로 시호를 동진대사(洞眞大師), 탑호는 보운(寶雲)이라 추증하고, 국공(國工)을 시켜 돌을 다듬어 탑을
169 세우도록 하였다. 시공한 지 2년 후
170 문도들이 감실을 열고 신구(神軀)를 보니 얼굴이 생전과 같아서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울면서 색신(色身)을 옮겨 백계산 동쪽 구름 덮인 바위 위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왕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171 주위의 환경은 노을이 덮인 뫼가 병풍처럼 청룡과 백호로 둘러 있고, 구름이 자욱이 덮인 시냇물은 마치 거울과 같이 맑다. 진실로 위인을 길러내는 신구(神區)
172이며, 진리를 세계로 돌아가는 비택(秘宅)이 될 만하였다. 대사는 계족산
173에 들어가 멸진정에 입정(入定)하여 자씨(慈氏)인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림과 같으니 스님의 추모사업을 내가 하지 않으면 다시 누가 하겠는가”라 하였다.
174 대사의 신기한 자태는 선천적으로 자연스러웠다.
175 인행(仁行)은 스스로 실천하고, 덕행(德行)은 남에게 나누어주었다. 문하에 선객(禪客)은 신신(莘莘)
176하고 법손(法孫)은 제제(濟濟)하였다. 심등(心燈)은 계속 타올라 꺼지지 아니하였고, 행동은 아름다움을 전하였다. 전법제자인 큰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천통선사(泉通禪師) 등이다. 그들은 아픈 마음을 쥐어 잡고
177, 열반 직전에 보았던 스님의 얼굴을 추모하면서 서로 의논하되
178, 우리가 선사(先師)의 유언만을 고수하고
179 그를 지키기 위해 만약 비석을 세워 훈적(勳跡)을 새겨 두지 않으면
180 선사(先師)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여겨 비를 세우기로 하고, “존조(尊祖)하는 일로써 대사의 행장을 모아 왕에게 표장(表狀)을 올려 유부(幼婦)의 문장(文章)
181을 지을 수 있는 자에게 명하여 선사(先師)의 업적을 기록하는 비문을 짓도록 청하였으니
182 어찌 호곡하면서 슬퍼만 하랴”
183 하고, 급히 비석을 세우는데 온 힘을 다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스님을 추억하니 문인(門人)들은 스님께서 백계산 기슭에 자취를 감추어
184 다시 친견할 수 없음을 슬퍼하며 땅을 치며 애통해 하다가
185, 다시 혜원법사가 여산 동림사에 있는 호계(虎溪)에 자취를 감추었던 일을 기억하였다.
186 이러한 소문이 낱낱이 임금에까지 들렸다. 곧 우리 상(上)이신 정종임금께서는
187 경악(瓊蕚)
188을 이어 받았을 뿐 아니라, 경사스럽게 요도(瑤圖)
189를 승습하여 조업(祖業)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선조(先祖)의 가풍을 빛나게 하고 항상 백행(百行)
190의 근본인 효도의 정성을 다하는 한편,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 더욱 돈독히 하신 분이었다.
191
드디어 한림학사인 신(臣) 김정언(金廷彦) 저에게 명령하시되 “고옥룡대사(故玉龍大師)는 몸을 가짐에 있어서는 강한 절제력이 있었고
192, 심학(心學)
193의 도(道)는 그 끝이 없었다. 중국에 가서는 가섭(迦葉)의 현종(玄宗)인 선법을 전해 왔고
194, 청구(靑丘)인 본국에 돌아와서는 퇴폐한 풍속을 순화하였으니, 능히 정리(靜利)
195로써 인세(人世)를 이익하게 하였으므로 국민들에게 끼친 그 공적은 막대하여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196 이와 같은 대사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모름지기 외손제구(外孫虀臼)의 비문을 지어
197 그 위업이 무궁토록 전하려 하니 자네는 마땅히 훌륭한 문장으로
198 대사의 공훈을 적어 비석에 새겨서
199 현종(玄蹤)을 세세(世世)에 전해 보이며, 빛나는 행적
200을 생생(生生)에 드러내도록 하라”하시었다. 신(臣)이 폐하의 명을 들으니 땀이 흐르고 뼈에 사무쳤다.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한 다음, “신(臣)은 붓을 잡을
201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202 절묘(絶妙)한 문장으로 비문을 짓는 일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
203 마치 공중에 드리워 진실을 분간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오니
204, 청컨대 하명(下命)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였다.
205 상(上)이 이르되 “대저 사람은 의(義)를 의지하여 행할 것이며, 인(仁)을 당하여는 사양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였다. 신(臣)은 하는 수 없이 왕의 명을 받아들였으나,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끼쳐 줄 만한 여력이 없다.
206 후일 이 비문
207을 보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빈축이나, 비방함을 초래할 것이
208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마치 서투른 목수(木手)가 손을 다칠까 두려워하는 것과 같았다.
209 그러나 주상의 강하신 명령이 몸을 베어 내는 것과 같았기에
210 드디어 떨리고 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211, 억지로 붓을 잡게 되었다.
212 이상 비문의 뜻을 거듭 선양하려고 게송으로 읊는다.
불타(佛陀)의 교리는 심오하고도 미묘하며
달마의 선지(禪旨)는 공(空)하지 않음이 없네!
도(道)가 어찌 우리들의 마음밖에 있으랴!
부처란 본시 중생의 심중에 있다네.
지혜의 햇빛은 모든 중생 비춰주고
213
진리의 강한 바람 무명(無明)을 흩어준다.
일찍이 내가 부처임을 깨달은 이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 우리 스님뿐이라네! (其一::TEXT)
높고 넓은 스님의 덕은 풀잎과 같고
214
마치 우담발화의 꽃봉오리와 같아
215
깊고도 아름다운 스님의 지혜광명
216
글로나 말로선
217 표현할 길이 전혀 없다.
무주(撫州)의 소산(疏山)
218에서 광인(匡仁)의 법
219 이어받고
정법안장(正法眼藏) 소중히 해동으로 전해 와서
그 덕망 앙모하여 사방(四方)에서 모여들어
220
문 앞에는 삼대처럼 긴 열이 섰도다.
221 (其二)
스님의 도덕을 말로는 설(說)할 수 없어
현묘(玄妙)하고 또 현묘하여 비할 데 없다.
사람을 교화(敎化)함은 태양처럼 혁혁하고,
불도(佛道)를 홍포(弘布)함은 허공같이 끝이 없네.
때때로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만나서
지극한 마음으로 설법을 경청하였네!
더 높은 그 명성을 견줄 사람 전혀 없고
위대하신 그 업적 앞에서 비추고 있네! (其三)
자비와 위력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드넓은 이 세상에 이타행(利他行) 쉬지 않았네!
열반에 드시니 달은 선정(禪庭)에 떨어졌고,
치솟은 산봉오리 성지(聖地)를 무너뜨렸네!
화려한 문장(文章)으로 비문을 지었으니
222
개성(芥城)
223 이 끝나더라도 이 비는 남아 있어,
비록 내가 지은 비문 부끄럽긴 하지만
그러나 오로지 사실만 직필(直筆)하였을 뿐. (其四)
현덕(顯德) 5년
224 세차(歲次) 돈양(敦䍧)
225 8월 15일 세우고,
문생(門生) 석계묵(釋繼黙)은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