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옥룡사 통진대사 보운탑비(光陽 玉龍寺 洞眞大師 寶雲塔碑)
- 시대
- 고려
- 연대
- 958년(광종 9)
- 유형
- 비문
- 크기
- 높이 197.0cm, 너비 106.1cm, 글자크기 1.8cm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김정언(金廷彦) / 계묵(繼默) / 현가(玄可)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옥룡사 터에 있던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통진대사 경보[洞眞大師 慶甫, 869(경문왕 9)~947(정종 2)]의 비. 비는 파손되어 전하지 않고 비편의 일부가 절터 부근에서 출토되어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비문 전면의 탁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승려 현가(玄可)가 해서로 쓴 것을 계묵(繼黙)이 새겼다. 비문의 구성은 54행에 1행 72자이다. 비문 내용은 통진대사가 태어나 수학하고 도선(道詵)의 제자가 되었다가 무염과 범일을 예방하고 당에 가서 소산광인(疎山匡仁)에게서 조동종을 전수받고 강서노선(江西老善)의 심인도 받아 귀국한 후 견휜의 귀의를 받고 옥룡사에 주석하다 후백제가 패망한 후 왕건의 초청으로 개경에 가서 귀의를 받다 광종대에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판독문/해석문
| 판독문 | 허흥식 |
光陽玉龍寺洞眞大師寶雲塔碑」
高麗國光州晞陽縣故白鷄山玉龍寺 制諡洞眞大師寶雲之塔幷序」
通直郎正衛翰林學士賜丹金魚袋臣金廷彦奉 制撰 門弟子沙」
門臣釋玄可奉 制書」
恭惟法身動寂道體希夷塵區懸見聖之心沙界掛求仁之念 大雄西降眞法東傳於是僧會遊吳摩騰赴漢佩梵仙之密印演禪伯之秘宗遂使學 佛化人習禪濟俗盖亦」
生寶月於楞伽之上杳想 金人得玄珠於赤水之中高憑罔象爰囙默默只在心心懸目鏡以西遊苞含衆妙瑩心珠而東返攝化群生釋門高闢於風丘玄道聿興於震域佛者覺也」
師而行之 大師其人矣法諱慶甫字光宗俗姓金氏鳩林人也父益良位閼粲鰲峀降靈毓光華之餘慶鷄林誕粹騰弃葉之彌芳母朴氏行葉風淸心花露裛中饋無非於壺政內和」
自是於家肥於咸通九年相月哉生明夜夢白鼠啣靑琉璃珠一顆而來遂人語曰此物是希代之奇珎迺玄門之上寶懷須護念出必輝光因有娠處心齋戒 如來出世之月二十日」
誕生大師誕彌月以無芋果髫秊而有慶則是法芽尙早勝果逆脩雖居兒戱之中猶在童年之上年登幼學纔傾鼓篋之心德貴老成旣有緇門之志迺告二親曰願得離塵之請覬脩登」
地之因雖乏慧柯惟期法棟父母潛然歎曰成已仁也成物智也合內外之道也汝棲禪而美則美矣我割愛而悲莫悲兮大師志在其親心期卽 佛父母迺曰人所欲者天且從之」
豈昧愛子之因猶有嚴君之拒遂泣而䚷直往夫仁山寺落采因栖學藪未樂禪山迅足空留它心尙住魂交之夕 金僊摩頂提耳迺授之方袍曰汝其衣之所以衛身而行乎且此地」
非心學者栖遲之所亟去之不亦冝乎大師卽以形開因而警戒以爲道之將行時不可失昧爽坐以待旦挈山裝鳥逝乃詣白鷄山謁道乘和尙請爲弟子脩菩薩道入如來家覩奧之眼」
曾開知幾之心旣悟以爲非智無以護其法非戒無以防其違年十有八禀具於月遊山華嚴寺忍草抽芽浮囊濟浪益驗戒香之馥孔彰心石之堅坐雨方終出雲還似復徃白鷄山辭大」
師師因謂曰汝其志不可奪勢不可遏汝以吾爲東家丘末如之何遂笑而聽去自尒遊有泛覽學無常師歷謁聖住無染大師崛山梵日大師譚柄纔揮玄機了見念言于以採玉于以探」
珠道遠乎哉行之則是遂於景福元年壬子春出山翽翽並海飄飄爰傾入漢之心乃告凌波之客許之萬載忻以同行已過秦橋旋臻漢地雲心訪道浪跡尋師乃詣撫州疎山謁匡仁和」
尙仁若曰格汝鯨海龍子耶大師玄言遂颺秘說爰諮許以昇堂因以入室方資目擊旣得心傳仁公大喜因謂曰其有東流之說西學之求者則可與言道者鮮矣東人可目語者惟子誰」
今執手傳燈因心授印汝其盤桃山側撝佛日以再中蒸棗海隅導禪河而更廣必矣自是僧之眞者必詣境之絶者必搜去謁江西老善和尙和尙乃欲聽其言觀其行因謂曰白雲鏆斷」
行人路答曰自有靑霄路白雲那得留和尙以大師捷對不羈颺言無礙乃送之曰利有攸徃時然後行大師以鵬必變於南溟鶴
|
|
| 해석문 | 이지관 |
고려국(高麗國) 광주(光州) 희양현(晞陽縣)2 고(故) 백계산(白鷄山)3 옥룡사(玉龍寺)4 동진대사(洞眞大師) 보운탑비문(寶雲塔碑文)과 아울러 서문.
통직랑(通直郞)5 정위(正衛) 한림학사(翰林學士) 사단금어대(賜丹金魚袋) 신(臣) 김정언(金廷彦)6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제자(門弟子) 사문(沙門) 신(臣) 석현가(釋玄可)7는 교지에 의하여 글씨를 쓰다.
공손히 생각해 보건대 법신(法身)은 동(動)과 적(寂)인 양면이 있고, 도체(道體)란 희(希)하고 이(夷)8하여 중생세계 중에 성인(聖人)을 보는 마음을 달아 놓고, 사바세계에 인(仁)을 구하는 생각을 걸어 놓았다. 대웅(大雄)9께서는 서축(西竺)에 태어나셨고, 그 진법(眞法)은 동방으로 전래하였다. 이로부터 강회승(康僧會)는 오(吳)나라에서 전법하고10, 마등대사(摩騰大師)는 한(漢)나라로 와서11 부처님12의 밀인(密印)을 가지고 선백(禪伯)의 깊은 종지(宗旨)를 연창하였다. 드디어 불법을 배우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선(禪)을 익히게 하여 세속을 구제하였으니, 보월(寶月)이 능가산 위에 떠오름에13 조용히 금인(金人)14을 생각하게 하였다. 현주(玄珠)를 적수(赤水) 중에 찾았음은15 오로지 망상(罔象)16에 의거하는 것과 같았으니, 이는 묵묵함을 말미암은 것이고, 다만 심중에만 있을 뿐이다. 목경(目鏡)을 찾으려고 서쪽으로 유학하여17 중묘(衆妙)를 터득하였고, 심주(心珠)를 갈고 닦아 본국으로 돌아와서는18 뭇 중생을 교화하였으니, 석문(釋門)19은 풍구(風丘)20에 높이 열렸고, 현도(玄道)21는 진역(震域)22에 크게 중흥하였다. 불(佛)이란 깨달았다는 뜻으로, 그를 스승 삼아 수행(修行)하는 것이니 대사(大師)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법휘는 경보(慶甫)요, 자(字)는 광종(光宗)이며, 속성은 김씨로서 구림(鳩林)23 출신이다. 아버지는 익량(益良)이니 관위는 알찬(閼粲)24이었다. 오산(鰲山)25이 내린 악령(岳靈)을 받아 광화(光華)26의 여경(餘慶)을 육성하였고, 계림에서 탄생하여 혁엽(奕葉)27으로 더욱 아름다움을 드날렸다.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니 품행은 풀잎에 나부끼는 맑은 바람과 같이 우아하고28, 마음은 꽃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과 같이 투명하였다.29 궁중에서는 왕의 수라상에 대한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30 궁 안에서 왕비를 도와 내화(內和)를 도모하였으며31, 이로부터 가문이 크게 창성하였다.32 함통(咸通) 9년33 상월(相月)34 재생명(哉生明)35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흰 쥐가 푸른 유리구슬 1개를 물고 와서 사람의 말을 하되 “이 물건은 희대의 진기한 보물이니, 바로 현문(玄門)의 상보(上寶)이다. 가슴에 품고 호념(護念)하면 반드시 빛나는 광명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임신하였는데 항상 마음을 맑게 하여 재계하다가 음력 4월 20일에 탄생하였다.
집안에는 한치의 땅도 없었으나36 초년(髫年)37에 이르러서부터 가산이 일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전생에 이미 법아(法牙)를 닦았고38, 승과(勝果)를 역수(逆修)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아이들과 노는 가운데 있으나, 오히려 동년(童年)의 위에 있었다. 나이 유학(幼學)의 시절이 되어서는 책을 메고 학당에 들어가려는 마음이 있었으며39, 덕은 노성(老成)한 사람보다 귀하였다. 이미 불교에 출가 수도하려는 뜻을 품고는 이친(二親)에 고하되 “세상의 진노(塵勞)를 여의고 출세간(出世間)인 불지(佛地)에 오르는 인연을 닦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비록 혜가(慧柯)40의 재질(才質)은 부족하나, 오직 불법의 동량이 되기를 기약하는 마음은 굳게 다짐하였다”라고 여쭈었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말없이 탄식하고 “기인(己仁)41을 이루고 물지(物智)42를 이룩하여 이미 내외(內外)의 도(道)에 합하였다”면서 “네가 출가하려는 뜻은 좋으나, 너와 헤어짐은 슬프고 또 슬픈 일이라”하자, 대사가 “뜻은 부모의 곁에 있으나, 마음의 약속은 부처님 앞에 있습니다”라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의 원하는 바를 하늘도 따라 주는 것이거늘 내 어찌 아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로서 거역할 수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울면서 허락하였다.43 대사는 곧바로 부인산사(夫仁山寺)44로 가서 삭발하고45, 경전을 배우는 강원으로 들어가 교리를 배웠다.46 선산(禪山)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빠른 걸음으로 행각(行脚)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밤 꿈에47 금선(金仙)48께서 이마를 만지며 귀를 잡고 방포(方袍)를 주면서 “너는 이 가사를 입어야 하니 그 까닭인 즉 앞으로 이를 몸에 두르고 수행(修行)하되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곳은 심학자(心學者)49의 참선하는 곳이 아니다. 곧바로 떠나가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하거늘 대사는 잠을 깬 다음, 깊이 생각하되 “이는 앞으로 내가 수도의 길을 떠날 조짐으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때를 기다리겠는가50”하고, 입산하는 행장을 꾸려 마치 새처럼 집을 나와 백계산(白鷄山)으로 나아가 도승화상(道乘和尙)51을 배알하고 간청하되 제자가 되어 보살도를 닦아 여래의 집에 들어가서 오묘한 진리를 보는 지혜의 눈52과 모든 사물(事物)의 근원을 아는 마음을 열도록 지도를 간청했다.53 이미 깨달은 것은 지혜(智慧)가 아니며, 그 불법(佛法)을 옹호할 수도 없으니, 오직 계율(戒律)이 아니면 비위(非違)를 막을 수 없다하여 열 여덟살 때,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54에서 구족계를 받고는 인초(忍草)에서 싹이 돋고55, 또한 부낭(浮囊)56을 굳게 지니 듯하여 계향(戒香)의 향기로움을 더욱 퍼지게 하였고, 마음을 돌과 같이 견고히 하였다.
그 후 여러 해 동안의 좌우(坐雨)57인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다가58 다시 본사인 백계산(白鷄山)으로 가서 도승(道乘)스님을 뵙고 하직 인사를 드렸더니, 도승대사가 이르되 “너의 뜻을 꺾을 수 없으며, 또한 자네의 굳은 의지를 막을 수가 없구나! 너는 나를 동가(東家)의 구(丘)59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에게는 그러한 지도 능력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다”하고60웃으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의 길을 떠나기를 허락하였다.61 그로부터 제방(諸方)으로 행각하되 배움에 있어 일정한 상사(常師)를 두지 아니하고, 성주사의 무염대사(無染大師)62, 굴산사의 범일대사(梵日大師)63 등을 차례로 친견하여 법문을 듣고 현기(玄機)를 깨닫고 생각하기를 ‘옥을 캐고 구슬을 탐색하듯 도(道)가 어찌 먼 곳에 있겠는가. 행하면 바로 그 곳에 있다’고 하였다. 드디어 경복(景福) 원년(元年)64 임자년 봄에 훨훨 산을 나와65 바람처럼 바다를 건너66 중국으로 유학할 마음을 굳혔다.67 마침내 선장(船長)에게 간청하여 편승(便乘)을 허락받아 기꺼이 동행하게 되었다.68 주교(奏橋)69를 지나 한(漢)나라에 이르렀다. 운수(雲水)의 마음으로 도를 묻고 여기 저기 선지식을 찾았다. 무주(撫州)70의 소산(踈山)71으로 가서 광인화상(匡仁和尙)72을 친견하였다. 광인화상이 말하되73 “너는 큰 바다74의 용이 되고자 하는가”75 화상(和尙)이 현언(玄言)을 드날리면서 비설(秘說)을 묻고는 곧 승당(昇堂)하게 하여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바야흐로 목격도존(目擊道存)의 심인(心印)을 깨달아 이심전심의 정법안장을 전해 받았다.76 광인화상(匡仁和尙)은 크게 기꺼워하면서 “중국 법통이 해동으로 흘러간다는 설과 서학(西學)을 위하여 중국에 와서 유학하는 구도자 중에 가히 더불어 도(道)를 논할 만한 자는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동인(東人) 중에 목어(目語)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자네를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77 하였다. 손을 잡아 법등(法燈)을 전하고 마음을 통하여 심인(心印)을 전해 준 다음, “그대는 반조산(盤桃山)78 곁에서 불일(佛日)을 도와 다시 중흥하고, 해우(海隅)79의 국민을 잘 순화시키는 한편80 선법(禪法)으로 인도하여 다시 넓힐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훌륭한 큰스님은 반드시 찾아가서 친견하고81, 환경이 절묘한 성지(聖地)는 남김없이 참배하였다.82 강서(江西)로 가서 노선화상(老善和尙)을 배알하고83 그의 법문을 들으며, 그의 수행담을 듣고자 하였다. 화상(和尙)이 묻되 “백운(白雲)이 행인(行人)의 길을 봉쇄하며 차단하였구나”84 대답하되 “스스로 청소(靑霄)인 공중 길이 있거늘, 백운(白雲)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화상은 대사의 변재가 민첩하여 조금도 걸림이 없이 자재하게 답함을 보고85, 곧 인가하여 법을 전해주고는86 “남을 이롭게 할 자신이 생긴 연후에 떠나도록 하라”고 말씀하였다.87 대사는 대붕새는 반드시 남명(南溟)에서 변하고, 학은 모름지기 동해(東海)88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화이(華夏)에서의 구법을 마치고 상진(桑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본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만나 천우(天祐) 18년89 여름 전주 임피군(臨陂郡)90에 도착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못할 정도의 위험한 시기였다.91 그 당시 주존(州尊)92인 도통 태부견훤(太傅甄萱)93은 군대를 통솔하여 만민이 보호하는 방벽의 언성(堰城)이었다.94 태부는 본시 선행을 쌓아 장군의 집안에 태어났으니 바야흐로 웅대한 뜻을 펴기 시작하였다. 비록 일단은 대사를 체포하였다가 석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95 스님의 자안(慈顔)으로 접근하였으나, 존경하는 마음만 더욱 돈독해졌다.96 그리하여 찬탄하되 “우리 스님을 만나기는 비록 늦었지만 제자가 됨을 어찌 늦추겠는가”하면서 모시는 태도가 정성스러우며, 존경하는 마음 또한 돈독하여97 전주의 남쪽98 남복선원(南福禪院)99에 주석하도록 초청하였다. 대사가 말하되 “새들도 장차 쉬고자하면 나무를 선택함이거늘, 난들 어찌 포과(匏瓜)100처럼 매달려서만 있으리요”라 했다. 그리고 백계산(白鷄山) 옥룡사로 갔다. 과연 그 곳은 편안히 수도할 수 있는 청재(淸齋)이며, 또한 조용히 참선하기에 알맞는 성지였다.101 구름은 계상(溪上)에 덮여 있고102, 돌을 베고 누워 흐르는 시냇물을 양치질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103 그러나 드디어 태부(太傅)의 초청을 받아 들여 그 곳으로 이주하기로 하였으니 실로 뗏목은 이미 귀당(歸塘)에 버렸고104, 구슬은 다시 구포(舊浦)로 되돌아 왔다고105 하겠다.
자비로 집을 삼아 중생을 교화하던 옛 스님들의 자취를 밟았으며106, 지혜(智慧)의 횃불을 높이 들어 육도(六途)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을 구제하던 고승(高僧)들의 여휘(餘揮)를 계승하였다.107 이 때 절학자(絶學者)108들이 서로 경축하면서 말하되 “비록 년전에는 태산이 무너진 탄식이 있었고109, 오늘에는 대중들이 앙모할 대상이 없다는 슬픔이 없음을 기뻐하도다”라 하였다. 이제 존경하며110 따르는111 문도(門徒)가 번창하고 법문을 들으려고 찾아오는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112 대사는 24년 동안113 운수생활(雲水生活)을 하면서 후생(後生)을 지도하였으니, 마치 거울이 물상(物象)을 비추되 전혀 피로함이 없으며, 범종(梵鍾)이 언제나 치기만 하면 울리는 것과 같이 수문수답(隨問隨答)114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조리 있고 정연하게 부상(扶桑)115의 백성을 교화하였다. 청태(淸泰) 3년116 가을에 이르러 우리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께서117 몸에 갑옷을 입고118 손에는 한검(漢劍)을 잡아119 공손히120 천벌(天罰)121을 행하되 해우(海隅)를 괴롭히는 자는 모두 소탕하고122 삼한(三韓)을 협화(協和)하였으므로123 이에 사군(四郡)이 다시 태평한124 군자국125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 또한 깊이 신봉하였다. 대사께서 서토(西土)에 가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남산(南山)126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환구(寰區)127를 복되게 하였다. 이 때 태조께서 청풍(淸風)을 바라보고 백월(白月)을 첨앙하듯 숭앙(崇仰)해 마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급히 지검(芝檢)128을 보내 옥경(玉京)129으로 초빙하였다. 눈으로는 대사가 개경으로 왕림함을 보았고 귀로는 용이 변화130함을 들었다. 비록 승가(僧伽)에 귀의하는 의례(儀禮)이나 마치 부처님을 받드는 의전(儀典)과 같이 하였다. 대사는 달이 하늘을 지나가고 구름이 푸른 산 바위틈으로 돌아가듯 조금도 걸림이 없고 적적(寂寂)하게 보광(葆光)131을 세상 밖으로 비추었고, 현현(玄玄)하게 역중(域中)132에서 교화를 행하였다. 이른바 엄숙하게 위엄을 보이지 않으나 함이 없어도 스스로 다스려져133 선도(善道)로 나아가고, 함께 복문(福門)134으로 출입하도록 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태조 임금이 승하하였다.135 마치 고기가 수조하(水藻下)에 편안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136 나라에는 하늘이 무너진 듯 탄식하였고137, 함지(咸池)138에는 일잠(日蘸)의 빛도 없는 듯하다.139 의공대왕140이 즉위하여 부왕(父王)의 유풍을 받들고141 선지(先志)를 계승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을 미미(亹亹)142하며 법력을 빌어 자자(孜孜)143하다가 문득 세상을 버리고 이미 천상(天上)으로 돌아가셨다. 이어 문명대왕144이 왕위145에 올라146 중광(重光)으로 꽃을 엮어147 천축의 교풍(敎風)인 불교를 널리 퍼뜨리고, 거울을 잡아서는 해방(海邦)의 풍속을 비추어 순화시켰다.148 왕은 봉필(鳳筆)149을 보내 스님을 왕궁으로 초빙하였고 중헌(衆軒)으로 내려와 친견하였다.150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용집(龍集)151 협흡(協洽)152 4월 28일에 대사께서 열반에 들고자하여 목욕한 다음, 대중을 방 앞에 모아놓고 유훈하되 “나는 이제 떠나려하니 대중들은 잘 지내도록 하라. 진속(塵俗)에는 귀천이 있으나 공문(空門)153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법이니, 수월(水月)처럼 마음을 맑게 하고154 연하(煙霞)와 같이 고상하게 살도록 하라.155
옷은 계절에 맞추어 갈아입지 말며, 음식은 두 가지 이상 하지 말며, 마땅히 고사리 등 풀뿌리를 캐어 식량을 삼고156 선열(禪悅)로써 포식을 삼을 것이니157, 이렇게 하여야 나의 제자이며 또한 나의 원에 적합할 것이요. 그 밖에 나의 도(道)에 무슨 별다른 관행(觀行)이 따로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한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으니, 너희들은 내가 죽거든 탑으로써 나의 유체(遺體)를 간직하거나, 비를 세워 행적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나의 현복(玄福)을 짓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58 이 말이 끝나자마자 방(房)에 들어가 승상에 기대어 가부좌를 맺고 앉아 엄연(儼然)하게 옥룡사상원(玉龍寺上院)에서 입적하였다.
슬프도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나이는159 80세요, 보살계를 받은 지는160 62하(夏)였다. 이날 아침 현무산(玄武山) 산정161에 4~5명의 젖먹이 어린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162 들렸다. 태양은 향정(香庭)에 처참하게 비추고 바람은 보찰(寶刹)을 슬프게 하며, 송백나무 또한 슬픈 빛을 띠었고, 인령(人靈)은 떨면서 두려워하는 소리를 내었다.163 다음 날 영구를 백계산으로 옮겨 모시고 돌로 감실(龕室)164을 만들어 시신을 그 안에 모셔 봉폐(封閇)165하였다. 문명대왕(文明大王)166이 부음을 듣고 슬픔을 금치 못하여 미리 살피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弔書)를 보냈다. “고옥룡선화상(故玉龍禪和尙)은 조각달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고고하고, 고운(孤雲)이 한가롭게 날아가는 것과도 같이 조용하셨다.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보배로운 불교를 배우고167 동국(東國)으로 돌아와 그 법을 전파하니168 자비스러운 바람은 만리의 변방까지 불었고, 선정(禪定)의 밝은 달은 구천(九天)의 밖에까지 비추었다. 이와 같은 분은 오직 우리 통진대사 뿐이시다” 그러므로 시호를 동진대사(洞眞大師), 탑호는 보운(寶雲)이라 추증하고, 국공(國工)을 시켜 돌을 다듬어 탑을169 세우도록 하였다. 시공한 지 2년 후170 문도들이 감실을 열고 신구(神軀)를 보니 얼굴이 생전과 같아서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울면서 색신(色身)을 옮겨 백계산 동쪽 구름 덮인 바위 위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왕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171 주위의 환경은 노을이 덮인 뫼가 병풍처럼 청룡과 백호로 둘러 있고, 구름이 자욱이 덮인 시냇물은 마치 거울과 같이 맑다. 진실로 위인을 길러내는 신구(神區)172이며, 진리를 세계로 돌아가는 비택(秘宅)이 될 만하였다. 대사는 계족산173에 들어가 멸진정에 입정(入定)하여 자씨(慈氏)인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림과 같으니 스님의 추모사업을 내가 하지 않으면 다시 누가 하겠는가”라 하였다.174 대사의 신기한 자태는 선천적으로 자연스러웠다.175 인행(仁行)은 스스로 실천하고, 덕행(德行)은 남에게 나누어주었다. 문하에 선객(禪客)은 신신(莘莘)176하고 법손(法孫)은 제제(濟濟)하였다. 심등(心燈)은 계속 타올라 꺼지지 아니하였고, 행동은 아름다움을 전하였다. 전법제자인 큰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천통선사(泉通禪師) 등이다. 그들은 아픈 마음을 쥐어 잡고177, 열반 직전에 보았던 스님의 얼굴을 추모하면서 서로 의논하되178, 우리가 선사(先師)의 유언만을 고수하고179 그를 지키기 위해 만약 비석을 세워 훈적(勳跡)을 새겨 두지 않으면180 선사(先師)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여겨 비를 세우기로 하고, “존조(尊祖)하는 일로써 대사의 행장을 모아 왕에게 표장(表狀)을 올려 유부(幼婦)의 문장(文章)181을 지을 수 있는 자에게 명하여 선사(先師)의 업적을 기록하는 비문을 짓도록 청하였으니182 어찌 호곡하면서 슬퍼만 하랴”183 하고, 급히 비석을 세우는데 온 힘을 다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스님을 추억하니 문인(門人)들은 스님께서 백계산 기슭에 자취를 감추어184 다시 친견할 수 없음을 슬퍼하며 땅을 치며 애통해 하다가185, 다시 혜원법사가 여산 동림사에 있는 호계(虎溪)에 자취를 감추었던 일을 기억하였다.186 이러한 소문이 낱낱이 임금에까지 들렸다. 곧 우리 상(上)이신 정종임금께서는187 경악(瓊蕚)188을 이어 받았을 뿐 아니라, 경사스럽게 요도(瑤圖)189를 승습하여 조업(祖業)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선조(先祖)의 가풍을 빛나게 하고 항상 백행(百行)190의 근본인 효도의 정성을 다하는 한편,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 더욱 돈독히 하신 분이었다.191
드디어 한림학사인 신(臣) 김정언(金廷彦) 저에게 명령하시되 “고옥룡대사(故玉龍大師)는 몸을 가짐에 있어서는 강한 절제력이 있었고192, 심학(心學)193의 도(道)는 그 끝이 없었다. 중국에 가서는 가섭(迦葉)의 현종(玄宗)인 선법을 전해 왔고194, 청구(靑丘)인 본국에 돌아와서는 퇴폐한 풍속을 순화하였으니, 능히 정리(靜利)195로써 인세(人世)를 이익하게 하였으므로 국민들에게 끼친 그 공적은 막대하여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196 이와 같은 대사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모름지기 외손제구(外孫虀臼)의 비문을 지어197 그 위업이 무궁토록 전하려 하니 자네는 마땅히 훌륭한 문장으로198 대사의 공훈을 적어 비석에 새겨서199 현종(玄蹤)을 세세(世世)에 전해 보이며, 빛나는 행적200을 생생(生生)에 드러내도록 하라”하시었다. 신(臣)이 폐하의 명을 들으니 땀이 흐르고 뼈에 사무쳤다.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한 다음, “신(臣)은 붓을 잡을201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202 절묘(絶妙)한 문장으로 비문을 짓는 일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203 마치 공중에 드리워 진실을 분간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오니204, 청컨대 하명(下命)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였다.205 상(上)이 이르되 “대저 사람은 의(義)를 의지하여 행할 것이며, 인(仁)을 당하여는 사양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였다. 신(臣)은 하는 수 없이 왕의 명을 받아들였으나,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끼쳐 줄 만한 여력이 없다.206 후일 이 비문207을 보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빈축이나, 비방함을 초래할 것이208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마치 서투른 목수(木手)가 손을 다칠까 두려워하는 것과 같았다.209 그러나 주상의 강하신 명령이 몸을 베어 내는 것과 같았기에210 드디어 떨리고 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211, 억지로 붓을 잡게 되었다.212 이상 비문의 뜻을 거듭 선양하려고 게송으로 읊는다.
불타(佛陀)의 교리는 심오하고도 미묘하며
달마의 선지(禪旨)는 공(空)하지 않음이 없네!
도(道)가 어찌 우리들의 마음밖에 있으랴!
부처란 본시 중생의 심중에 있다네.
지혜의 햇빛은 모든 중생 비춰주고213
진리의 강한 바람 무명(無明)을 흩어준다.
일찍이 내가 부처임을 깨달은 이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 우리 스님뿐이라네! (其一::TEXT)
높고 넓은 스님의 덕은 풀잎과 같고214
마치 우담발화의 꽃봉오리와 같아215
깊고도 아름다운 스님의 지혜광명216
글로나 말로선217 표현할 길이 전혀 없다.
무주(撫州)의 소산(疏山)218에서 광인(匡仁)의 법219 이어받고
정법안장(正法眼藏) 소중히 해동으로 전해 와서
그 덕망 앙모하여 사방(四方)에서 모여들어220
문 앞에는 삼대처럼 긴 열이 섰도다.221 (其二)
스님의 도덕을 말로는 설(說)할 수 없어
현묘(玄妙)하고 또 현묘하여 비할 데 없다.
사람을 교화(敎化)함은 태양처럼 혁혁하고,
불도(佛道)를 홍포(弘布)함은 허공같이 끝이 없네.
때때로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만나서
지극한 마음으로 설법을 경청하였네!
더 높은 그 명성을 견줄 사람 전혀 없고
위대하신 그 업적 앞에서 비추고 있네! (其三)
자비와 위력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드넓은 이 세상에 이타행(利他行) 쉬지 않았네!
열반에 드시니 달은 선정(禪庭)에 떨어졌고,
치솟은 산봉오리 성지(聖地)를 무너뜨렸네!
화려한 문장(文章)으로 비문을 지었으니222
개성(芥城)223 이 끝나더라도 이 비는 남아 있어,
비록 내가 지은 비문 부끄럽긴 하지만
그러나 오로지 사실만 직필(直筆)하였을 뿐. (其四)
현덕(顯德) 5년224 세차(歲次) 돈양(敦䍧)225 8월 15일 세우고,
문생(門生) 석계묵(釋繼黙)은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전남(全南) 광양(光陽)의 옛 이름. 백제 때에는 마로현(馬老縣), 신라 때에 이르러 희양현(晞陽縣)으로 개칭하고 승평군(昇平郡)에 예속시켰다. ↩ 전남(全南) 광양(光陽)에 위치. ↩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양군(光陽郡) 옥룡면(玉龍面) 백계산(白鷄山)에 있었던 절. 1150년에 세운 도선국사비(道詵國師碑)도 있다. ↩ 고려 때 문관(文官)인 관계(官階). 문종 때 정한 문산계(文散階)에는 6품(品)의 하(下)로 규정하였으나, 1308년에 5품으로 개정하고, 1310년에는 정5품으로 하였다가, 1356년에 폐지하였다. ↩ 문신. 한림학사내봉령참지정사감수국사(翰林學士內奉令參知政事監修國史)를 지냈고, 경기도(京畿道) 여주군(驪州郡) 북내면(北內面) 상교리(上橋里)에 있는 보물 제6호인 「高達寺 元宗大師 慧眞塔碑文」과 「覺淵寺 通一大師塔碑文」, 「普願寺 法印國師碑文」 등도 지었다. ↩ 당시 뛰어난 명필. 동진대사(洞眞大師)의 문인(門人). ↩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碑文」 註10 希夷條. ↩ 부처님을 지칭함. ↩ 강거국(康居國)의 회승대사(僧會大師)가 불교 전파를 위해 오(吳)나라에 와서 손권(孫權)을 감화(感化)시키므로써 오(吳)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聞慶 鳳巖寺 智證國師碑文」 註40 康會南行條:『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新羅篇과 「海州 廣照寺 眞澈大師碑文」 註117 康居僧會始昇吳主之車條, 大正藏 卷50, p.325 上段 참조). ↩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67)에 서역(西域)의 마등(摩騰)과 축법란(竺法蘭) 스님 등이 처음으로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였다는 말(「聞慶 鳳巖寺 智證國使碑文」 註21 漢徵佩日條와 註38 攝謄東入條:『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新羅篇, 「海州 廣照寺 眞澈大師碑文」 註116 摩騰先陟漢王之殿條 등 참조). ↩ 불타(佛陀)를 가리킴. ↩ 보월(寶月)이 능가산정(楞伽山頂)에 떠 오른다는 말. 능가(楞伽)란 능가산(楞伽山)의 준말. 초기선종(初期禪宗)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능가경(楞伽經)』이었으므로 능가(楞伽)는 능가종(楞伽宗)이니, 능가종(楞伽宗)은 선종(禪宗)의 대명사임. ↩ 금인(金人)은 자마금신(紫磨金身)을 가진 불타(佛陀)를 지칭함. ↩ 「谷城 大安寺 寂忍禪師碑文」 註43 得赤水所遺條:『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新羅篇 참조. ↩ 황제(皇帝)가 적수(赤水)에게 잃어버린 현주(玄珠)를 찾아낸 소경(盲) 망상(象罔)과 같은 말. ↩ 목경(目鏡)을 끼고 서방[西方(唐)]으로 유학하였다는 말. ↩ 심주(心珠)를 비추다. 즉 심인(心印)을 얻어 견성(見性)하고 동국(東國)인 신라로 돌아왔다는 말. ↩ 불교를 가리킴. ↩ 인풍(仁風)이 가득한 언덕. 즉 군자(君子)의 덕풍(德風)이 항상 부는 나라이니 석가(釋迦)가 탄생한 인도(印度)를 가리킴이나, 여기서는 해동(海東)을 뜻함. ↩ 선종을 지칭함. ↩ 진단(震旦) 또는 진나(震那), 지나(支那)라고도 하니, 인도(印度)에서는 고대 중국(Chinistan)을 지칭함이나, 여기서는 진방(震方)인 동국, 즉 우리나라를 가리킴. ↩ 계림(鷄林)과 같은 말(「奉化 太子寺 朗空大師碑文」 註140 鳩林條 참조). ↩ 고려 태조 때 신라의 관제(官制)를 따라 베푼 관등(官等)의 제6관계인 아찬(阿飡)의 이칭(異稱). ↩ 오산(鰲山)이니 경상북도(慶尙北道) 청도(淸道)의 옛 이름. ↩ 곱고 아름다운 빛. 광채(光彩), 광휘(光輝)와 같은 뜻이니, 번영한 국조(國朝)의 영광(榮光). ↩ 『金石全文』에는 奕字가 弃로 되었는데, 이는 奕의 오자임. 혁엽(奕葉)이란 혁엽누세(奕葉累世)의 준말로서, 奕은 代의 바뀔 역字. 대대(代代) 또는 누세(累世)와 같은 뜻이니 신라의 역대조정(歷代朝廷)이라는 말. 潘岳의 「楊仲武詩」, “伊子之先 奕葉熙隆”. ↩ 품행(品行)은 풀잎사귀에 나부끼는 맑은 바람과 같다는 뜻. ↩ 읍로(裛露)라고도 하니, 마음은 꽃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과 같다는 말. 陶潛 「雜詩」, “秋菊有佳色 裛露掇其英”. ↩ 궁중에서 왕에게 올리는 진지의 뒷바라지를 정성껏 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 ↩ 궁중의 정치. 남편이 궁중에서 복무하는 알찬(閼粲)이므로 그의 부인은 마땅히 궁중의 안살림을 돌보게 되기 때문임. 顔延之의 「宋文皇帝元皇后哀策文」, “壺政穆宣 房樂韶理” 그 註에 “壺政은 謂宮中之政明也”라 하다. ↩ ①주부가 안살림을 잘 살아서 그 가문을 창성하게 하였다는 말이니, 『禮』 禮運, “父子篤 兄弟睦 夫婦和 家之肥也” ②가정 내의 선정(善政). ↩ 당(唐)의 선종연호(宣宗年號).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8년(868). ↩ 음력 7월의 다른 이름. 『爾雅』 釋天에 “七月爲相 八月爲壯”이라 하였다. 『漢書』 律曆志에 “陰一月은 陬, 二月은 如, 三月은 病, 四月은 余, 五月은 皐, 六月은 且, 七月은 相, 八月은 壯, 九月은 玄, 十月을 陽, 十一月은 辜, 十二月은 涂”. ↩ 哉는 始의 뜻으로 비로소 광명을 생(生)한다는 뜻이니, 초생달이 보이기 시작할 때, 곧 음력 초3일. 『書』 武成, “厥四月哉生明” 傳에 “其四月 哉 始也 始生明 月三日 與死魄互言 前月大則 初二日 明始生 前小則 三日明始生 謂之哉生明 哉 始也”. ↩ 薔字가 『金石全文』에는 芋이니, 이는 의 오자임. 1년전(年田)이며 불경전(不耕田)이라는 말인데, 1년식 경작하는 화전(火田)도 아니고 다만 국유(國有)인 자연녹지(自然綠地)에 그냥 감자나 옥수수 등을 심어서 연명한다는 뜻으로 1평의 땅도 소유함이 없는 매우 가난하였다는 말. ↩ 髫는 다박머리 초字이니, 상투를 틀기 전 두발로 댕기를 땋아 아래로 드리우는 년령, 곧 동년(童年)을 가리킴. 秊은 年의 本字인데, 『金石苑』과 『金石全文』에는 秊으로 되었으나 『金石總覽』에는 年으로 되었으니 相通함. 李端의 「岳州逢司空曙詩」, “共有髫年故 相逢萬里餘”. ↩ ①역(逆)으로 명복(冥福)을 닦는 것.②노자(老子)가 먼저 죽은 소자(少者)의 명복을 비는 것. ③생전에 미리 사후의 일을 설영(設營)하기 위해 불사(佛事)를 행하여 명복을 비는 것. 『灌頂隨往生十力淨土經』, “四輩男女 能鮮法戒 知身如幻 精勤修習 行菩提道 未終之時 逆修三七 燃燈續明 懸繒幡蓋 請召衆僧 轉誦尊經 修諸福業 得福多不 佛言普廣 其福無量 不可度量 隨審所願獲其果實”. ↩ ①북을 쳐서 학생을 경고(警告)하여 책 상자를 열고 서적을 꺼내는 것. ②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 ③취학함을 가리킴. 『禮』 學記, “入學鼓篋 孫其業也”라 하고, 그 註에 “鼓篋 擊鼓警衆 乃發筐出所治經業也”라 하다. ↩ 지혜의 가지. 즉 재질(才質)이란 뜻. ↩ 자기에 따른 인행(仁行)이니, 유교(儒敎)의 덕목인 인의(仁義)의 인(仁)을 지칭함. ↩ 物은 중생(衆生)을 가리킴. 智는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동체(同體)임을 관찰하는 지혜. ↩ 울면서 출가할 것을 허락하였다는 말. 䚷는 허락할 혜字임. ↩ 부인사(夫仁寺)이니, 대구(大邱) 신무리(新武里) 팔공산(八公山) 내에 있는 절. ↩ 삭발(削髮) 또는 낙발(落髮)과 같은 뜻이니, 落은 머리카락을 깎아 떨어뜨린다는 말.「寧越 興寧寺 澄曉大師碑文」 註17 落采條 참조).. ↩ 학인(學人)들이 경전을 배우는 절이란 말이니, 강원(講院)을 지칭함. 藪란 옛날 사원을 일컫는 뜻이니, 예컨대 발연수(鉢淵藪), 동화수(桐華藪), 가야갑수(迦倻岬藪) 등이다. ↩ 잠을 잔다는 뜻. 『莊子』 齊物論, “잠을 잘 때에는 魂이 交合하고, 깨었을 적에는 五官이 열린다고 하였다 其寐也魂交 其覺也形開” (「藍浦 聖住寺 無染和尙碑文」 註124 魂交條:『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新羅篇 참조). ↩ 대각금선(大覺金仙)의 준말이니 부처님을 지칭함. ↩ 참선하는 사람. ↩ 밤이 밝아오는 상태. 아직 새벽 먼동이 트기 이전. 昧는 어둡다는 뜻. 爽은 밝다는 말. 즉 밤의 어둠과 아침의 밝음이 아직 분명치 아니한 이른 새벽. 여기서는 저녁부터 그냥 그대로 가만히 앉아 날이 밝아지기를 기다린다는 뜻. ↩ 광양(光陽) 옥룡사(玉龍寺)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의 은사(恩師)스님. 도선(道詵)으로 추정됨(金映遂, 「曹溪禪宗に就いて」, 『震檀學報』89, 1938:崔柄憲, 「道詵의 生涯와 風水地理說」, 『韓國史硏究』11, 1975 영암군편 『先覺國師 道詵의 新硏究』, 1987:金杜珍, 「羅末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그 思想」, 『東方學志』57, 1988 등 참조). ↩ 오묘한 진리를 보는 눈. 곧 혜안(慧眼). ↩ 미리 사변(事變)의 기미(幾微)를 아는 것. “謂預知事之幾微也” 『易』 繫辭下, “子曰 知 幾其神乎 幾者 動之微吉之先見者也”. ↩ 지리산(智異山) 화엄사(華嚴寺)이니, 절 앞에 큰 계천이 있는데, 계곡 동쪽에는 일류봉(日留峰)이 있고 서쪽에는 월류봉(月留峰)이 있으므로 월류산(月留山)이라고도 함.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의 남산(南山) 제일봉(第一峰)도 월류봉(月留峰)이라 하는데 최치원이 지은 이름이다. ↩ 산중 토굴에서 수도하다가 도적의 피습으로 풀포기에 묶임을 당한 스님이 벗어나려고 잡아당기면 풀포기가 뽑힐까 두려워하여 그냥 참고 묶여 있었다는 말. 곧 계률을 굳게 지킨다는 뜻이니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은 말(「海州 廣照寺 眞澈大師碑文」 註60 草繫懸心條와 「江陵 地藏禪院 朗圓大師碑文」 註68 草繫條 등 참조). ↩ 계율을 지키려는 의지가 굳어야 한다는 교훈이니, 옛날 가죽 주머니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중간에 나찰귀(羅刹鬼)가 나타나 부낭(浮囊)을 자기에게 달라고 유혹함을 굳게 물리치듯 오욕(五欲)의 유혹을 그와 같이 매섭게 물리치라는 교훈에서 온 말(「豐基 毗庵 眞空大師碑文」 註61 浮海之囊條와 「寧越 興寧寺 澄曉大師碑文」 註31 浮囊條, 大正藏 卷12, p.432 中段 등 참조).. ↩ 동안은 금족(禁足)하고 좌선안거(坐禪安居)한다는 말. 우안거(雨安居) 또는 하안거(夏安居)라고도 함. 이 하안거(夏安居)에는 전중후(前中後)의 3기가 있는데, 율제(律制)에 따르면 음력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전안거(前安居), 4월 17일부터 5월 15일까지를 중안거(中安居), 5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를 전안거(前安居)라 하였다. 중국총림(中國叢林)에서는 동안거제(冬安居制)를 증설(增設)하였으니 음력 10월 16일부터 익년(翌年) 1월 15일까지임. 좌우방종(坐雨方終)이란 우기좌선(雨期坐禪). 즉 하안거(夏安居)를 해제(解制)하였다는 말(「聞慶 鳳巖寺 靜眞大師碑文」 註63 坐雨條 참조). ↩ 산정(山頂)에 덮여 있던 구름이 들판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산정(山頂)으로 돌아가듯 다시 본사인 백계산(白鷄山)으로 돌아왔다는 말. ↩ 丘는 공자(孔子)의 이름. 공자(孔子)의 서쪽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거리가 멀어서 공자가 성인(聖人)인 줄 모르고, 동가(東家)의 丘라고 일컬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데서 온 말. 『孔子家語』, “孔子西家有愚夫 不能識孔子 是聖人 及曰 彼東家丘 吾知之矣”. ↩ 어찌할 수 없다는 말. ↩ 널리 참관(參觀)하는 것. 행각(行脚)하면서 승지(勝地)를 참배하는 것. 梁昭明太子 「文選序」, “歷觀文囿 泛覽辭林”. ↩ 충남 보령군(保寧郡) 성주사(聖住寺) 무염국사(無染國師). ↩ 강원도(江原道) 명주군(溟州郡) 구정면(邱井面) 계산리(鷄山里) 도굴산(闍崛山) 굴산사(崛山寺) 범일국사(梵日國師). 그의 조부 구원(逑元)은 명주도독(溟州都督)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문씨(文氏)로 명주 일대의 호족가문 출신이었다. 스님의 제자로 낭원개청(朗圓開淸)과 낭공행적(朗空行寂) 등이 있다. ↩ 당(唐)의 소종연호(昭宗年號). 신라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892). ↩ 翽는 새가 훨훨 날을 홰字. ①중다한 모양. ②새가 날개를 치는 소리. 『時』 大雅 卷下, “鳳凰于飛 翽翽其羽” 傳에 “翽翽 衆多貌” 箋에 “翽翽 羽聲也”. ↩ 飄는 회오리바람 표字. 표요(飄曜)와 같은 뜻이니 동요하여 정주(定住)하지 아니한 모양. 또는 바람처럼 바다를 건넌다는 말. 班彪 「北往賦」, “風猋發以飄飄兮 谷水漼以揚波” 그 註에 “良曰 飄飄 風馳”. ↩ 유학을 위해 중국에 들어가려는 마음. ↩ 능파(凌波)는 능파(陵波)와 같은 뜻. 선장을 지칭함. 배를 타고 파도를 넘어 외국으로 간다는 말. 또는 파도를 가볍게 건너간다는 뜻. 『神仙傳』, “乘雲步虛 越海凌波 出入無間 呼吸千里”. ↩ 『金石苑』과 『金石全文』에는 秦橋로 되었는데, 『金石總覽』의 奏는 秦의 오자임. 진교(秦橋)란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교명(橋名)임. 「谷城 大安寺 寂忍禪師碑文」, “千尋水桑 秦橋迢遞而燮換炎凉”. ↩ 중국 강서성(江西省)의 무주부(撫州府). ↩ 중국 강서성(江西省) 무주부(撫州府) 금계현(金谿縣) 서북 5리 지점에 위치. 이 산중에 광인(匡仁)이 개창한 소산사(疎山寺)가 있다. ↩ 생몰연대는 미상. 당말(唐末) 5대 조동종(曹洞宗) 스님. 광인(光仁)이라고도 함.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의 제자. 출가하여 향엄지한[香嚴智閑(?~898)] 등에게 수학(修學)하다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법을 이어 받고, 무주(撫州) 임천(臨川)의 소산(疎山)에 주석(住錫)하면서 동산(洞山)의 종풍(宗風)을 거양(擧揚)하였다(『宋高僧傳』 卷13, 『祖堂集』 卷8, 『景德傳燈錄』 卷17 참조). ↩ 광인화상(匡仁和尙)이 이에(若:이에 약) 가로되. ↩ 『金石苑』과 『金石全文』에는 鯨海로 되었고, 『金石總覽』에는 접해(鰈海)이다. 접해(鰈海)란 접역(鰈域)과 같은 말로써 동해(東海)에 가자미가 많이 잡히므로 한국근해(韓國近海)를 가리킴이니, 동역(東域) 즉 우리나라를 뜻함. 그리고 경해(鯨海)란 대해(大海)를 지칭하는 것. ↩ 자네는 경해[鯨海(鰈海)]의 용자(龍子)가 되고자 하는가. ↩ 이심전심의 준말. 즉 정법안장(正法眼藏)인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전해 받았다는 말. ↩ 唯字가 『金石總覽』과 『金石苑』에는 唯로 되었고, 『金石全文』에는 惟字로 되었으나, 이는 상통하는 字이므로 무방함. “오직 자네를 제쳐놓고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 번도(蹯桃), 벽도(碧桃), 또는 백도(白桃), 천도(天桃) 등이라고도 하니, 신선이 먹고 산다는 복숭아로써 신선이 사는 곳을 지칭함. 곧 동해(東海)의 섬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산. 전하여 해동(海東)인 신라를 가리킴. ↩ 동해(東海)의 한쪽. 즉 해동(海東)인 동국(東國)을 지칭함. ↩ 쪄서 익힌 대추.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이니 불교로써 국민을 교화한다는 뜻. 『晏子』 不合經者, “景子對曰 昔者奏繆公 乘龍而理天下 以黃布裹烝棗” 반도산측과 대구이므로 증조해우도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 같음. ↩ 진실한 고승(高僧)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문법(問法)하라는 말. ↩ 절경(絶境)인 불교 승지(勝地)는 모두 참배하라는 뜻. ↩ 강서노선화상[江西老善和尙(860~930)]:임제종승(臨濟宗僧). 하북(河北) 출신. 흥화존장(興化存獎)의 제자. 휘(諱)는 혜옹(慧顒). 자세한 전기는 미상. ↩ 봉쇄차단(封鎻遮斷)의 준말. ↩ 민첩하게 척척 대답하고 조금도 더듬거리지 않는다는 말. ↩ 소리를 높여서 하는 말. 자신 있고 정정당당하게 하는 말. 공언(公言) 또는 양언(揚言)과 같은 말. 『書』 益稷, “皐陶拜手稽首 颺言曰 念哉” 傳에 “大言而疾曰颺”이라 하고, 그 疏에 “皐陶拜手稽首 颺聲大言”이라 하다. ↩ ①남을 이롭게 할 수 있는 힘을 얻은 바가 있는 연후에 떠나라는 당부. ②상해(上海)에서 담보대부(擔保貸付), 정기대부(定期貸付) 등에 관한 사항(事項)을 기재한 장부. 利有攸往簿. 利有攸往이란 대부(貸付)에 의해 이익을 얻는다는 뜻. ↩ 상졸지향(桑椊之鄕)과 같은 말이니, 여러 대(代)의 조상(祖上)의 무덤이 있는 고향이란 뜻으로 모국(母國)인 신라를 지칭함. ↩ 당(唐)의 애제연호(哀帝年號).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 5년(921). ↩ 옛날 전북(全北) 전주(全州)의 속현(屬縣). 백제 때는 시산군(屎山郡) 또는 피산(陂山), 취성흔문(鷲城忻文), 소도(所島), 실조출(失鳥出) 등으로 칭하다가 신라 때는 임피현(臨陂縣)으로 개칭되었다. ↩ 마침 그 당시는 왕건과 견훤의 대치 상태가 극심하여 길에는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는 말. ↩ 전주지방(全州地方)을 도통(都統)하는 존관(尊官)의 뜻. ↩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신. ↩ 군대를 통솔하여 만민[萬民(국민)]을 보호하는 방벽[防壁(堰)]이 되었다는 뜻. ↩ 비록 일단 스님을 체포하였다가 놓아 주려는 계획을 세우고 곁에 가서 친견하고는 존경하는 마음이 배증(倍增)하였다는 말. ↩ 권권(惓惓)과 같은 뜻이니 정성스러운 모양. ↩ 조조이(慥慥爾)의 준말. 독실(篤實)한 모양. 『中庸章句』 13章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그 註에 “慥慥 篤實貌”. ↩ 전주(全州)의 남쪽 지대. ↩ 전주(全州) 남쪽에 있었던 절 이름. ↩ 표주박이 꼭지에 매달려 있어 가을에 익어서 딸 때까지 그 꼭지를 떠나지 못하고 붙어 있다는 말. 자그마한 고토(故土)에서 크고 넓은 세계로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 『論語』 陽貨, “吾豈匏瓜也哉 焉陵繫而不食”. ↩ 승유(勝遊)와 같은 뜻. 명소(名所)를 답사하면서 유보(遊步)하는 것. 楊烔 「踐官尋 楊隱居詩序」, “極人生之勝 得林野之奇趣”. ↩ 구름에 덮인 시내가 허공에 걸려 있는 듯하다는 말. ↩ 침수(枕漱)는 침석수류(枕石漱流)의 준말이니 돌을 베개로 하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한다는 뜻. 은사(隱士)의 의지(意志)가 고결(高潔)하고 견탁(堅卓)함에 비유하는 말. 『晉書』 孫楚傳, “孫楚 字子荊 才澡卓絶 少時欲隱居 謂王濟曰 當云 欲枕石漱流 誤云 漱石枕流 濟曰 流非可枕 石非可漱 楚曰 所以枕流 欲洗其耳 所以漱石 欲礪其齒”. ↩ 사벌(捨筏)이라는 말이니 筏은 정법(正法)의 비유.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에 도달하면 정법(正法)도 오히려 버려야 한다는 말. 귀당(歸塘)이란 귀허(歸墟)의 뜻과 같음.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 대학(大壑)의 이름. 『顔氏家訓』 歸心, “降河百谷 從何處生 同流到海 何爲不溢 歸塘尾閭 渫何所到”. ↩ 합포주환(合浦珠還)이라고도 하니, 교지(交趾)와 합포(合浦)는 연접해 있는 지명이다. 태수(太守)의 사욕(私慾)으로 말미암아 합포(合浦)의 해중보물(海中寶物)이 모두 교지군(交趾郡)으로 옮겨 갔었는데 다시 후임 군수(郡守)로 청렴한 맹상군(孟嘗君)이 부임함으로부터 옮겨갔던 모든 해중보물(海中寶物)이 다시 합포해중(合浦海中)으로 돌아왔다는 데서 온 말(「忠州 淨土寺 法鏡大師碑文」 註107 交趾珠還條 참조). ↩ 자비의 집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하였던 옛 대덕(大德)스님들의 종적(踪跡)을 밟았다라는 뜻. ↩ 항상 지혜의 횃불을 들어 중생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群生)을 제도하였던 옛 고승(高僧)들의 여휘(餘輝)를 계승하였다. 『보림전(寶林傳)』 10권을 지은 당나라 때 지거(智炬)스님이 있으나, 여기서는 인명(人名)의 뜻이 아님. ↩ 현각(玄覺) 「證道歌」, “絶學無爲閑道人”에서 나온 말이나, 여기서는 선학자(禪學者)를 지칭함. ↩ 비록 근래에 한탄하였다는 뜻. ↩ 옷의 뒷자락을 끌어 올리는 것. 전하여 경례한다는 뜻. ↩ 衤戒字가 『金石苑』과 『金石全文』에는 襶로 되었으니, 『金石總覽』의 衤戒는 襶(패랭이 대字)의 오자임. 예대(曳襶)란 패랭이를 쓴 방문객인 청법자(請法者)를 지칭함. ↩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뜻. ↩ 24년 동안. 1기(紀)가 12년이므로 약 20년을 지칭하는 듯함. ↩ 차서(次序)가 있는 모양. 차례 차례. 『論語』 子罕, “夫子循循然 善誘人”. ↩ 동국(東國)인 신라를 가리킴. 동해(東海) 중에 있는 신목(神木)이니 양수(兩樹)가 동근(同根)인데 처음부터 서로 의지해 있으므로 부(扶)라고 함. 해가 나오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다. 『山海經』 海外東經, “暘谷之上有扶桑 十日所浴 在黑齒北 居水中 有大木 九日居下枝 一日居上枝”. ↩ 후당(後唐)의 폐제연호(廢帝年號). 고려 태조 천수(天授) 19년(936). ↩ 고려 태조의 시호. ↩ 몸소 주의(周衣)를 입다. 주의(周衣)는 두루마기이지만 여기서는 갑옷을 뜻함. 『左傳』, “躬擐甲冑”. ↩ 釰字가 『金石總覽』과 『金石全文』에는 釰로 되었고, 『金石苑』에는 劍으로 되었는데, 이는 劍의 오자임. ↩ 공손하게 행한다는 말. 『魏志』 鍾會傳, “命授六師 龔行天罰”. ↩ 하늘이 내리는 벌. 또는 하늘의 법망(法網). ↩ 해우(海隅)를 괴롭히는 무리를 모두 토벌하였다는 말. 해우(海隅)란 해안(海岸)으로 들어가는 모퉁이, 해추(海陬), 해곡(海曲), 해아(海阿) 등과 같은 뜻. 즉 나라의 구석구석 외진 곳. 『書』 益稷, “帝光天之下 至于海隅蒼生” 隅는 角의 뜻. ↩ 936년에 왕건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인 삼한(三韓)을 통일하였다는 말. ↩ 국가의 안녕을 이룩하였다는 말. 『左氏』 昭七, “鎭撫其社稷 以輯寧爾民”. ↩ 자기의 나라를 미칭(美稱)하는 말. 신라인 동국(東國)을 지칭함. ↩ 전주(全州)의 남쪽 남복선원(南福禪院)을 가리킴. ↩ 봉건시대(封建時代)에 있어 천자(天子)의 직할구역(直轄區域)인데, 전하여 광범한 경계내(境界內) . 또는 천하, 천지(天地)의 뜻. ↩ 왕의 옥쇄를 찍은 교지(敎旨). ↩ 서울 장안(長安), 왕도(王都). ↩ 통진대사의 설법교화를 가리킴. ↩ 영광(榮光)을 갖추는 것. 지혜를 쌓았으나 나타내지 아니하는 것. 『莊子』 齊物論에 “注焉而不滿 酌焉而不竭 而不知其所由來 此之謂葆光”. ↩ 구역의 안. 세계 또는 우내(宇內). 『老子』 二十五,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 치긍(治)이란 강제로 하려하지 않으나, 왕성하고 강장(彊壯)함을 이룩한다는 말. ↩ 불문(佛門)을 가리킴. ↩ 타염(墮髯)이란 왕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니, 황제(皇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문득 구렛수염을 떨어뜨린 것에 대한 고사(故事). 전하여 임금의 승하(昇遐)함을 뜻함이니, 즉 황제가 형산(荊山) 밑 호숫가에서 솥을 부어 그 솥이 이루어지자마자 용이 나타나거늘 황제는 군신(群臣), 궁녀(宮女) 등 72인과 함께 그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감을 본 백성들이 용의 수염을 잡았더니, 구렛수염이 뽑히면서 동시에 황제는 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때 백성들이 그 활을 껴안고 통곡하였으므로, 이를 고려 태조가 943년에 승하(昇遐)한 것에 비유함. ↩ 어조(魚藻)에서 온 말이니 어조[魚藻(魚興水藻)]란 고기가 숨어 있는 수조(水藻)를 말함. 즉 고기가 마름 밑에서 편안히 있기 어렵다는 말로써 당시 왕이 죽었을 뿐 아니라 후삼국 통일기반이 잡히지 않아 조야(朝野)가 모두 뒤숭숭하다는 뜻. 『詩』 小雅 魚藻, “魚在在藻 有頒其首”. ↩ 나라 이름. 주(周)의 무왕(武王)이 상(商)을 토멸(討滅)하고 하우(夏禹)의 묘예(苗裔)인 진루공(東樓公)을 토벌(討伐)하여 우왕(禹王)의 제사를 받들던 나라. 옹구(雍丘)에 도읍하였는데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기현(杞縣). ↩ 함당(咸唐) 또는 천지(天池)라고도 하는데, 태양이 목욕한다는 천상(天上)의 못, 『楚辭』 離騷, “飮余馬於咸池兮 總余轡乎扶桑” 『淮南子』 天文訓, “日出暘谷 浴于咸池”(「藍浦 聖住寺 無染和尙碑文」 註8 日蘸咸池時條:『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新羅篇 참조). ↩ 해가 빠질 무렵 홍하(紅霞)처럼 붉게 빛나는 광영(光榮)도 없다는 말. ↩ 고려 제2대 혜종대왕(惠宗大王)의 시호. 명(名)은 무(武), 자(字)는 승건(承乾), 태조의 맏아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 혜종(惠宗)인 의공대왕(義恭大王)이 왕위를 계승하고 태조의 유풍(遺風)을 받들었다는 말. ↩ 부지런히 힘쓰는 모양. 부지런할 미字. ↩ 부지런히 노력하는 모양. 孜는 부지런할 자字. ↩ 고려 제3대 정종대왕(定宗大王)의 시호. 명(名)은 요(堯), 자(字)는 의천(義天), 태조의 둘째 아들. ↩ 척강(陟降)이라고도 함. 오르고 내려온다는 말이니, 일상의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을 말함. ↩ 莅는 다다를 리字(臨), 阼는 東便 섬돌 조字(東階主人按賓處). 곧 천자(天子)가 왕의 위(位)에 오르는 것. 조립(祚立), 천위(踐位), 천극(踐極), 천조(踐祚), 천조(踐阼), 천통(踐統) 등과 같은 뜻. 천조(踐阼)란 천자(天子)가 황위(皇位)에 즉위하는 것이니, 阼는 동쪽의 섬돌. 처음으로 즉위한 천자(天子)가 종묘(宗廟)의 동계(東階)에 올라 제향(祭享)을 주관하므로 임금의 위(位)를 계사(繼嗣)하는 것을 천조(踐阼)라 함. 『禮』 曲禮下, “踐阼臨祭祀”라 하고, 그 「疏」에 “踐은 履也 阼는 主人階也 天子祭祀升阼階 履主階行事 故云踐阼也”라 하다. ↩ 꽃을 엮는 것이니, 곧 자비란 뜻. ↩ 거울을 잡는 것이니, 곧 지혜의 뜻. ↩ 임금의 친서(親書). 즉 교지(敎旨). ↩ 스님을 왕의 처소로 맞이하기를 원하여 스님이 중헌(衆軒)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린다는 말. ↩ 용(龍)은 성명(星名). 집(集)은 세황소집(歲皇所集)이니, 예컨대 용집갑자(龍集甲子)는 세차갑자(歲次甲子)와 같음. ↩ 구갑자(舊甲子)의 미(未)이니, 월3년(越三年)은 947년으로써 947년은 정미(丁未)이다. 구갑자(舊甲子)로는 강위[彊圍(丁)] 협흡[協洽(未)]이어야 하므로 彊圍 2字가 탈락되었음. ↩ 불문(佛門)을 가리킴. ↩ 물에 비친 달처럼 마음을 맑게 한다라는 뜻. ↩ 고상한 생활 태도가 연하(烟霞)와 자신의 자취가 대적(對敵)한다는 뜻. 『緇門警訓』 宋文帝集朝宰論佛敎, “范王 孫綽 張玄”. ↩ 양식을 포장함. 또는 포장된 양식. 『詩』 大雅 公劉, “迺裹餱糧 于橐于囊”. ↩ 포식(匏食)과 같은 뜻. ↩ 현복(玄福)은 명복(冥福)의 뜻이니, 제자들이 자기(自己)의 유언(遺言)대로 행하는 것이 곧 입적(入寂)한 스님의 명복(冥福)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 ↩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란 뜻인데, 여기서는 세수(世壽)라는 뜻. ↩ 법랍(法臘)이라는 뜻. ↩ 백계산(白鷄山)의 북봉(北峯)을 가리킴이니, 동봉(東峰)은 청룡(靑龍), 남봉(南峰)은 주작(朱雀), 서봉(西峰)은 백호(白虎), 북봉(北峰)은 현무(玄武)이기 때문임. ↩ 呱는 젖아이 우는 소리 고字. 곧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 『吳越春秋』 越王無余外傳, “啓生不見父 晝夕呱呱啼泣”이라 하다. ↩ 惴는 두려워할 췌字, 惴惴는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는 소리. ↩ 龕은 사찰탑하(寺刹塔下)의 소실(少室)이니 비석(碑石)을 세우려는 장소의 기반. 즉 기초이고, 權은 권여(權輿)이니 바닥을 뜻함. ↩ 閇는 閉의 속자(俗字). ↩ 문명(文明)은 고려 제3대 정종대왕(定宗大王)의 시호. ↩ 892년에 배를 타고 서학(西學)을 떠났다는 말. ↩ 당(唐)나라에 가서 보배인 불법(佛法)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동국(東國)으로 돌아왔다는 말. 珤字가 『金石全文』에는 瑤로 되었는데, 이는 珤의 오자임. ↩ 층탑(層塔)과 같은 뜻이니, 탑을 가리킴. ↩ 열반에 든 지 2년 후란 말이니 947년임. ↩ 유조(遺詔)와 같은 뜻이니, 천자(天子)가 붕어(崩御)에 이르러 유언(遺言)으로써 후사(後事)를 부탁하는 것. 『書』 顧命序, “成王將崩 命召公 畢公率諸侯相康王 作顧命”이라 하고, 傳에는 “臨終之命曰顧命”이라 하다. ↩ 경사스러움을 길러내는 신구(神區). 곧 명당(明堂)이라는 말. ↩ 계산(鷄山)이라고도 하니 굴굴타파타(屈屈口它播陀(ꇄKukktapada))의 번역. 붇다가야 동쪽에 있는데, 가섭이 열반한 곳. 그 산 모양이 마치 닭의 발처럼 삼봉(三峯)이 솟아 있으므로 계족(鷄足)이라 이름하였다(「丹城 斷俗寺 信行禪師碑文」 註41 鷄足山條:『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新羅篇과 「海州 廣照寺 眞澈大師碑文」 註166 入雞足條 등 참조). ↩ 표가(鑣駕)와 같은 뜻. 鑣란 말재갈 표字로서 왕이 타는 수레와 시신(侍臣)들이 타는 말. 재갈에 난(鸞)의 모양을 새겼으므로 난표(鸞鑣)라고 함. 병월(並軏)이란 여러 대의 수레란 뜻이니, 왕을 수행하는 대신(大臣)들이 타는 수레. ↩ 신기(神奇)한 자태(姿態). 여러 가지로 변하는 용상(容相). 禰衡 「鷃鵡賦」, “惟西域之靈鳥 挺自然之奇姿”. ↩ 많은 모양. 중다모(衆多貌). 宋玉 「高唐賦」, “縱縱莘莘은 衆多之貌”. ↩ 喪字가 『金石苑』에는 (喪), 『金石全文』에서는 器로 되었는데, 喪은 器의 오자임. 심기(心器)란 마음의 그릇이니 심(心)은 만법(萬法)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므로 심기(心器)라고 한다. 南山道宣 「戒疏」 一上, “善識世人心器”. ↩ 눈의 비결(秘訣)이니, 곧 혜안(慧眼) 또는 법안(法眼). ↩ 법통(法統)에 따른 숭배(崇拜). 예컨대 달마기(達磨忌), 백장기(百丈忌), 개산역대조기(開山歷代祖忌), 사법사기(嗣法師忌) 등 추모 기념을 말함(『勅修百丈淸規』 卷2, 尊祖章第四:大正藏 卷48, p.1117 下段 참조). ↩ 유래(由來)란 종조(宗祖)로부터 전래되는 법맥(法脈). ↩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膚外孫虀臼(絶妙好辭)]인 8자 중의 일부이니, 제구(虀臼)란 절묘호사(絶妙好辭) 중 사(辭)의 뜻에 속함(「藍浦 聖住寺 無染和尙碑文」 註92 虀臼條와 「慶州 崇福寺碑文」 註269 或觧有八字條:『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新羅篇, 「原州 興法寺 眞空大師碑文」 註111 虀臼條). ↩ 결제(結制) 또는 허락의 뜻. ↩ 어찌 호곡하면서 슬퍼만 하랴. ↩ 백계산(白鷄山)에 입적(入寂)하여 빛을 감추었다는 뜻. 곧 동진대사(洞眞大師)의 입적을 가리킴(本 碑文 註172 鷄足山條 참조). ↩ 슬픔이 깊어 땅바닥을 치면서 가슴을 쥐어뜯는다는 말. ↩ 진(晉)나라 때 혜원법사(慧遠法師)가 호계(虎溪)가 있는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자취를 감추고 승도속(僧道俗) 123명과 함께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가졌다는 말. ↩ 상(上)은 정종(定宗)이니 태조의 둘째 아들. 이름은 소(堯), 자는 의천(義天). ↩ 친왕(親王)이니 친왕이란 왕의 친척. 곧 백숙(伯叔), 형제, 자매, 왕자, 공주 등을 지칭함. 『隋書』 百官志, “皇伯叔昆弟皇子 是爲親王” 蕚은 萼의 俗字임. ↩ 홍도(鴻圖) 또는 비도(丕圖)와 같은 뜻. 선왕(先王)으로부터 전습(傳襲)해 오는 아름다운 왕도(王圖). ↩ 모든 행동, 또는 효행. ↩ 더욱 불법승(佛法僧) 3보(寶)에 귀의하는 뜻을 장려하려 하여란 뜻. ↩ 몸으로 일으킴은 강한 절제가 있었다는 뜻. ↩ 마음으로 배움은 끝이 없다는 말. ↩ 당(唐)나라에 가서는 가섭(迦葉)의 현종(玄宗)인 선법(禪法)을 전래하였다. ↩ 물질적 이익이 아니고, 정신적 이익을 뜻함. ↩ 말이 썩지 아니함을 세운다는 뜻으로 비석을 세운다는 말. ↩ 절묘호사(絶妙好辭)인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 중 외손(外孫)이란 곧 好의 뜻이니, 훌륭한 문장(文章)인 비문을 지어달라는 부탁(本 碑文 註180 幼婦之文辭條 참조). ↩ 그대는 마땅히 홍필(鴻筆). 즉 훌륭한 문장(文章)으로써 대사(大師)의 훈덕(勳德)을 기록하여라는 뜻. ↩ 귀부정민(龜趺貞珉)의 준말. 미석(美石)으로 비신(碑身)을 지칭함이니, 거북 위에 세운 비석을 가리킴. 귀민기사(龜珉紀事)란 비문을 뜻함. ↩ 빛나고 위대한 행적. ↩ ①붓을 잡고 글을 쓰는 것. ②붓을 가지는 것. ③문장을 짓는 일. 재필무능(載筆無能)이란 비문을 지을 능력이 없다는 말. 『唐書』 楮遂良傳, “臣職 載筆”. ↩ 거적을 엮는다는 말이나, 여기서는 비문을 엮는다는 뜻. ↩ 「曹娥碑」에 배각(背刻)한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 중에 황견(黃絹)은 색사(色絲)이니, 곧 絶字의 뜻으로 전하여 절묘한 문장이라는 말. ↩ 허공과 실을 나눈다는 말이니, 극히 하기 어려운 일에 비유한 것. ↩ 청하옵건대 필로(筆路)를 피하도록 허락해 주길 바란다는 말이니, 비문을 지으라는 명령을 거두어 달라는 뜻. ↩ 가용(賈勇)이란 자기 용기의 나머지를 팔 것이 없다는 것. ①용기의 나머지를 팔다. ②자기의 용기를 보여 공을 세우고자 한 것. 『左氏』 成二, “欲勇者 賈余餘勇”이라 하고, 그 註에 “賈 買也 言己勇有餘 欲賣之”라 하다. ↩ 「조아비(曹娥碑)」에 배각(背刻)한 비문찬사(碑文讚詞)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인 8자 중 제구(虀臼)는 신미(辛味)인 식물(食物)을 담는 그릇이니, 곧 辛을 受하는 것. 受辛 2字를 合字하면, 辤字가 되니 辤는 辭와 같음. 전하여 훌륭한 문장이란 말. 사. ↩ 효빈(效矉)이라고도 함. 자신의 추색(醜色)을 돌아보지 않고 강하게 남들이 미색(美色)으로 보아 준다고 착각함을 비유하는 말. 옛 미녀로 알려진 서시(西施)가 간질병(癎疾病)을 일으켜 눈썹을 찡그리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본 마을 추녀(醜女)들이 이것이 미녀의 눈썹으로 알고, 이를 본받아 흉내를 내면서 돌아다녔더니 보는 사람마다 도망쳐 갔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 『莊子』 天運篇, “西施는 病心而矉其里하니 其里之醜人이 見而美之하고 歸赤捧心而矉其里하니 其里之富人이 見之하고 堅閉門而不出하며 貧人은 見之하고 㓞牛妻子而去之走어늘 彼知美矉而不知矉之所以美”. ↩ 자귀를 사용함에 손을 다칠까 근심한다는 말이니, 상전(相傳)하길 집에 건축함에 있어 만약 도대목(都大木)이 없으면 능히 자구를 들지 못하듯, 변변치 못한 자신이 비문을 지으려니 근심이 앞선다는 뜻(「砥平 菩提寺 大鏡大師碑文」 註106 傷手之憂條와 「聞慶 鳳巖寺 智證國師碑文」 註404 每憂傷手條 등:『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新羅篇 참조). ↩ 굳게 사양하였으니, 비문을 지으라고 독촉함을 견디기가 몸을 도려내는 것보다 심하다는 말. ↩ 드디어 비문을 지으라 한 것에 대하여 두렵고 뛰는 마음을 가라 앉혔다는 말. ↩ 토호(兎毫)와 같은 뜻으로 붓의 이명(異名)이니 토끼털로 글씨를 쓰기 때문. 曹植 「樂府」, “墨出靑松煙 筆出狡兎翰”. ↩ 지혜의 햇빛으로써 비추다. ↩ 수성한 잎. 무성한 잎사귀. 부소(扶踈)란 나뭇가지가 쭉쭉 뻗어 있는 모양. ↩ 우담발화[優曇鉢華(ꇄUdumbara)]의 준말. 靈端花라 번역됨. 배뢰(蓓蕾)란 꽃봉오리, 우담발화의 꽃봉오리. 梅堯臣詩에 “高高樹裏鞦韆月 獵獵牆頭蓓蕾風”. ↩ 아름답게 도광(道光)이 있다라는 뜻. ↩ ①말의 문채. ②시문(詩文)의 아름다움. 「詩品」에 “陳思王植其源出于國風 骨氣奇高 詞彩華茂”. ↩ 무주(撫州) 속산(踈山) 광인화상(匡仁和尙)을 지칭함(本 碑文 註71 匡仁和尙條 참조). ↩ 푸른 바다. 곧 창해(滄海)이니 해동(海東)인 신라를 지칭함. 『海內十州記』, “扶桑在東海之東岸 岸直 陸行登岸一萬里 東復有碧海 海廣狹浩汗興東海等 水旣不鹹苦正作碧色 甘香味美”. ↩ 「砥平 菩提寺 大鏡大師碑文」 註43 桃李成蹊條와 「長湍 五龍寺 法鏡大師碑文」 註89 桃李成蹊條 등 참조. ↩ 도마죽위(稻麻竹葦)의 준말이니, 한량없이 많은 수를 나타내는 것(「長湍 五龍寺 法鏡大師碑文」 註87 稻麻條 참조). ↩ 제구(虀臼)는 수신(受辛)이니 受辛을 合字하면 辤가 되니, 辤는 辭와 같은 자로써 문장이란 뜻. ↩ 개자겁(芥子劫)의 성(城)이란 뜻이니, 둘레 40리 되는 성중에 개자(芥子)를 가득 채워 놓고, 장수천인(長壽天人)이 3년 마다 한 알씩 가지고 가서 이 개자(芥子)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를 1겁(一劫)이라 한다. ↩ 후주(後周)의 세종연호(世宗年號). 고려 제4대 광종(光宗) 8년(958). ↩ 䍧은 牂의 오자. 顯德 5년은 958년 戊午年이므로 舊甲子에 戊는 著雍이고, 午는 敦牂이므로 著雍 2字가 탈락되었음. ↩ |
참고문헌
| 논문 | 2003 | 박윤진, 2003, 「高麗初 高僧의 大師 追封」『韓國史學報』14 |
| 단행본 | 1999 | 『黃壽永全集 4(금석유문)』 |
| 단행본 | 1995 | 順天大學校博物館·光陽市, 1995, 『光陽 玉龍寺址 Ⅰ』, 順天大學校博物館 |
| 단행본 | 1994 | 李智冠, 1994,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 伽山文庫 |
| 단행본 | 1992 | 秋萬鎬, 1992, 『羅末麗初禪宗思想史硏究』, 이론과실천사 |
| 단행본 | 1988 | 靈岩郡, 1988, 『先覺國師道詵의 新硏究』, 영암군 |
| 논문 | 1988 | 金杜珍, 1988, 「羅末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그 思想 -風水地理思想에 대한 再檢討」『東方學志』57, 연세대 국학연구원 |
| 단행본 | 1984 | 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
| 단행본 | 1919 | 朝鮮總督府, 1919, 『朝鮮金石總覽』上 |
| 단행본 | 1831 | 劉喜海, 1831, 『海東金石苑』 |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문의 : 042-860-91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