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건 및 연혁
미륵사는 백제 제 30대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호국사찰이다. 건립당대인 백제시기 기록은 현존하지 않으나, 미륵사 창건설화는 고려 충렬왕대 일연의《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내용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풍부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삼국유사》백제 무왕 조(武王條)에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는 길에 용화산 밑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곳에 법당과 탑 그리고 회랑 등을 세워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삼국사기(三國史記)》, 혜거국사비문(惠居國師碑文) 및 조선시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강후진(康侯晋)의《와유록(臥遊錄)》등의 문헌에서 미륵사와 미륵사탑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문헌의 기록 및 출토유물로 보아 미륵사는 백제 무왕 대에 창건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17세기 이전)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부터 1995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원 주도하에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배치 및 건축유구
미륵사는 사사자(獅子寺)가 있는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좌우능선을 두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조사유구를 통해본 미륵사 원래의 가람은 남북자오선상(南北子午線上)의 서쪽으로 약 23°기운 중앙축선을 기준으로 남쪽에서부터 중문(中門), 탑(목탑), 금당(金堂)을 배열한 중원(中院)과 이를 완전히 둘러싼 회랑(回廊)이 있고, 중원 양옆에 중원의 남북축선과 평행하고 중원의 각 건물과 같은 횡축열선상(橫軸列線上)에 놓인 중문(中門), 탑(석탑), 금당(金堂)을 배치하여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을 대칭으로 놓은 것이다. 또 동·서원(東·西院)의 외곽 회랑터는 중원의 동·서 회랑터에 대응하는 위치에 남북 길이가 전자의 것보다 약간 짧게 북쪽으로 뻗다가 내곽 쪽으로 꺾여 금당터 북쪽에서 폭넓게 북으로 뻗은 동·서 승방터에 연결되고, 이 승방터의 북단에서 가람 중심축에 놓이는 강당터 좌우측과 연결되는 북회랑터와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중원 북회랑터 북쪽에는 중원 남북 중심축선상에 거대한 강당터가 놓이게 된다. 건물의 배치는 거의 평지상에 하였는데 남쪽의 중문과 연결되는 남회랑터 앞과 강당터 북쪽에 동서로 길게 놓인 북승방터 앞에 석축으로 이루어진 축단을 두고 있다. 즉 미륵사의 가람은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의 가람으로 동·서 및 중원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각 원에서는 중문과 탑·금당을 1동씩 두어 소위 일탑식 가람을 동서 축선상에 나란히 배치하고 강당은 중원 북쪽에 하나만 두고 있다. 또 중원에는 목탑을 두고, 동·서원에는 석탑을 두어 3금당(金堂) 3탑식(塔式)을 이룬 것도 창건연기의‘…당(堂), 탑(塔), 랑(廊), 무(무), 삼소창지(三所創之) …’란 기록과 일치하고 우리나라 고대가람으로서는 특이하다. 그리고 이 중심사역 외에 서편에는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건물터가 있고, 북편에는 조선시대 가람터가 확인됨으로써 백제 이후 계속된 미륵사의 모습과 하한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역(寺域) 남측에는 거대한 동·서 연못지가 있고 그 규모와 조성방법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각 원의 금당(金堂)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중원의 금당이 동·서 금당보다 규모면에서 조금 크다. 특히 금당은 바닥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초석 위는 귀틀목을 걸친 흔적이 있어 금당 바닥에 빈 공간을 만들어 바닥마루의 습기(濕氣)에 대비한 것 같다. 또한 사지 전역에 있는 고려·조선시대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溫突施設)이 조사됨으로써 온돌의 발전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지 내에는 이들 건물지와 함께 서쪽 금당지 앞에 국보로 지정된 석탑 1기가 일부 파손된 채 남아 있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탑 중 건립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부터 석탑에 대한 해체 복원 공사가 국립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진행 중에 있다. 통탑은 동원 석탑터 주변에서 출토된 부재로 석탑의 복원안을 연구한 결과 9층임이 밝혀져 1993년 복원되었다.
출토유물
출토된 유물은 기와와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금속, 목재, 석재, 유리 등 다양하다. 기와는 백제 기와로부터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까지 다양하게 출토되었으며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창건시기인 백제의 것이다. 종류는 수막새·암막새·평기와와 서까래 끝에 붙이는 녹유연화문연목와(錄釉蓮花文椽木瓦),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치미(치尾) 등이며 ‘미륵사(彌勒寺)', ‘금마저관(金馬渚官)', ‘묘봉원(妙奉院)’, ‘연우사년(延祐四年)’,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 등의 문자를 새긴 기와도 전시기에 걸쳐 다양하게 수습되었다.
사역에서 출토된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1587)’과 ‘만력십칠년(萬曆十七年)(1589)’ 명 기와를 통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절이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동·서원의 남회랑 앞에는 당간지주가 각 한기씩 있는데 이중 서쪽의 것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들 당간지주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조사 연혁
▶ 1974~1975년 동탑지 발굴
· 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 문화연구소
▶ 1980~1994년 사지 발굴
· 국립문화재연구원에 의해 3차에 걸쳐 사역 전체 발굴
· 중원 및 동서원으로 구성된 삼원병렬식 가람배치 확인
▶ 2000년 미륵사지석탑 주변 발굴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미륵사지석탑 하부 및 주변부 조사
주요 정비
· 1980년 : 미륵사지석탑 보수공사
· 1983~1988년 : 미륵사지 정비공사
· 1990~1992년 : 동탑 복월
· 1991~1994년 : 전시관 건립
· 1995~1998년 : 전시관 주변 및 연지주변 정비
· 1998년 : 미륵사지석탑 정밀안전진단
· 1998년~현재 : 미륵사지석탑보수정비사업
복원 설계
▶ 1989년 미륵사지 주변지역 정비기본구상 및 조성기본계획
· 수행기관 : 대왕건축
▶ 2000년 미륵사 복원 타당성 조사 및 고증자료 확보 학술용역
· 수행기관 : (사)한국건축역사학회
▶ 2007년 미륵사지 유구정밀실측 및 보존관리 방안 학술용역
· 수행기관 :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
미륵사의 발자취
- 담당부서 : 건축문화재연구실
- 담당자 : 박찬민
- 문의 : 042-860-9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