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고선사 서당화상탑비(慶州 高仙寺 誓幢和上塔碑)
- 시대
- 통일신라
- 연대
- 800년 ~ 808년(애장왕대)
- 유형
- 비문
- 크기
- 상단부(1) 길이 52.0cm, 폭 45.0cm, 두께 24.0cm / 하단부(2) 길이 90.0cm, 폭 93.0cm, 두께 24.0cm 정도
- 소재지
- 상단부(1) 경상북도 경주시 석장동 707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 하단부(2)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 서체
- 행서(行書)
- 찬자 /각자 /서자
- 미상 / 고금□(高金□)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고선사서당화상비는 통일신라시기에 불교 교리의 발전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승려 원효의 일대기를 적은 비이다.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이 서당(誓幢)이어서 그를 서당화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는 하단부와 상단부가 깨어져서 따로따로 발견되었다. 하단부는 1915년 5월 9일에 조선총독부 참사관실에서 한국금석문의 수집과 정리에 종사하던 일본인에 의하여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군(月城郡) 내동면(內東面) 암곡리(暗谷里) 고선사터에서 3편으로 조각난 채로 발견되었다. 현재 고선사터는 덕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상단부는 1968년 9월 초 경주시의 전(傳) 동천사지(東泉寺址) 근처 석용제(昔庸湜)씨 집에서 발견되었다. 본래 이것은 일제시기에 고물수집에 취미를 갖고 있던 일본인이 자신의 제지공장에 보관하였던 것이었는데, 해방 후 공장을 논으로 변경할 때에 재발견하여 보관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단부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상단부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비는 원효의 손자 설중업(薛仲業)이 779~780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에 원효를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정치적 실권자인 김언승(金彦昇)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 구체적인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애장왕의 재위 기간(800~808)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 비는 원효의 일대기를 정리한 최고의 자료로서 현재 원효 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판독문/해석문
해석문 | 남동신 | ||
판독문 | 황수영 | ||
판독문 | 葛城末治 | ||
판독문 | 朝鮮金石總覽 | ||
판독문 | 허흥식 | ||
판독문 | 김상현 | ||
판독문 | 남동신 | ||
판독문 | 김영태 | ||
판독문 | 齋藤忠 |
참고문헌
단행본 | 2002 |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 |
논문 | 1999 | 南東信, 1999, 「元曉와 芬皇寺 關係의 史的 推移」『芬皇寺의 諸照明』(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第20輯), 慶州 慶州市 新羅文化宣揚會 |
논문 | 1997 | 郭丞勳, 1997, 「新羅 哀莊王代 誓幢和上碑의 建立과 그 意義」『국사관논총』74집, 국사편찬위원회 |
단행본 | 1995 | 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Ⅱ, 國史編纂委員會 |
단행본 | 1992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
논문 | 1992 | 李基東, 1992, 「薛仲業과 淡海三船의 交驩; 統一期 新羅와 日本과의 문화적 교섭의 一斷面」『역사학보』134·135합집 |
논문 | 1988 | 金相鉉, 1988, 「新羅 誓幢和尙碑의 再檢討」『蕉雨黃壽永博士古稀紀念 美術史學論叢』 |
단행본 | 1983 | 齋藤忠, 1983, 『古代朝鮮日本金石文資料集成』, 吉川弘文館 |
단행본 | 1976 | 黃壽永, 1976, 『韓國金石遺文』, 一志社 ; 1994, 復刊 ; 1999, 『金石遺文 黃壽永全集4』, 혜안 |
논문 | 1970 | 黃壽永, 1970, 「新羅誓幢和上碑의 新片-建立年代와 名稱에 대하여-」『考古美術』108, 한국미술사학회 ; 1987, 『元曉硏究論叢』, 한국통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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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 042-860-9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