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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서묘표(申承緖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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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614년(광해군 6)에 세워진 신승서(申承緖)의 묘표이다. 찬자는 신승서의 아들인 신흠(申欽)이다. 신흠은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로 한문4대가의 한 사람이며,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서자는 신승서의 손자이자, 신흠의 아들인 신익성(申翊聖)이다. 신익성은 병자호란 때의 척화5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으로 선조의 부마이고, 문장·시·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신승서(1531~1572)는 자는 중술(仲述)이고, 1558년(명종 13)에 생원에 급제하고 음직에 보임되어 귀후서 별제, 의금부 도사, 상의원ㆍ도화서 별제, 사도시 직장, 장악원 주부, 장례원 사평을 지냈다. 1566년(명종 21)에 지방으로 나아가 구례현감이 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사헌부감찰에 제수되고 1572년(선조 5)에 호조좌랑, 예빈시판관, 개성부도사를 지냈으며, 그해 8월 재직 중에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표는 평산(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 뒤를 이어 조상 중에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분들을 나열하고 신승서의 세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중반부에서는 신승서의 관직생활과 혼인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으며, 그의 자식들과 손자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후반부에서는 신흠이 글을 짓게 된 경위, 신승서의 치적(治積) 및 성품에 대한 서술이 있고, 신흠과 신감(申鑑)의 관직과 신흠이 부모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담은 정을 서술하면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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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자
개성도사(開城都事) 신공(申公) 승서(承緖) 표(表)
선부군(先府君) 묘표
옛날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때 육신[六臣 : 신숭겸(申崇謙)ㆍ배현경(裴玄慶)ㆍ홍유(洪儒)ㆍ복지겸(卜智謙)ㆍ유검필(庾黔弼)ㆍ최응(崔凝)]이라 불리는 이들이 실로 그 대사를 주도하여 모두 왕명으로 태사(太師)를 삼았다. 그중의 한 분이 신공 숭겸인데 공로가 가장 컸으며 마침내 순절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장절(壯節)이란 시호를 내리고 춘천(春川)에 예장하게 했으며 본관을 평산(平山)으로 하사하였는가 하면, 묘정(廟庭)에 향사하고 고려의 사직이 무너진 뒤에도 숭의전[崇義殿 : 마전(麻田)에 있는 고려 태조를 모신 사당]에 배향되었으니, 이분이 곧 우리의 시조이다.
그리하여 신씨는 마침내 해동의 큰 문벌이 되었는데, 사가(史家)의 기록들에 나타나 계보를 댈 수 있는 것을 따져 보면 원윤(元尹) 보장(甫莊), 개국성제자(開國聖帝子) 홍상(弘尙), 적경실부사(積慶室副使) 경(勁), 근시(近侍) 유비(愈毗), 동정(同正) 명부(命夫), 전서(典書) 응시(應時), 도관(都官) 영재(令材), 병부낭중(兵部郞中) 적(䙗), 조봉랑(朝奉郞) 연(衍), 도관(都官) 중명(仲明), 전리판서(典理判書) 즙(諿)이 곧 세계(世系)이다.
도관공(都官公)의 배필은 낙랑김씨(樂浪金氏)이고 판서공의 배필은 무송유씨(茂松庾氏)이다. 판서공이 안(晏)을 낳았는데 종부령(宗簿令)을 지냈고 고려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으며 배필은 장흥임씨(長興任氏)이다. 묘소는 평산(平山) 진불산(眞佛山) 서쪽 광정리(廣庭里)에 있다. 이분이 효(曉)를 낳았는데 우리 태종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우정언에 제배되어 국사를 말하다가 뜻이 맞지 않자 물러나 행주(幸州)에 살면서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며 향년 81세로 세상을 마치고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배필은 남양(南陽) 홍씨(南陽洪氏)로 전서(典書) 희충(希忠)의 따님이다. 이분이 자계(自繼)를 낳았는데, 전생서주부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배필은 평강채씨(平康蔡氏)로 학생 소(沼)의 따님이다. 이분이 세경(世卿)을 낳았는데, 사직서영(社稷署令)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배필은 고령박씨(高靈朴氏)로 전적(典籍) 사란(思孄)의 따님이다. 정언공으로부터 공까지는 묘소가 고양(高陽) 행주에 있다. 이분이 영(瑛)을 낳았는데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니 대대로 음덕을 쌓아오다가 공에게 이르러 발휘되어 조금 명성을 떨쳤다. 일찍이 묘당에 올라 삼조(三朝)를 섬겼고 삼대를 추은하였다. 배필은 단양우씨(丹陽禹氏)로 학생 석규(錫圭)의 따님이다. 4남을 두었는데 그 둘째 분이 곧 나의 선부군이다.
선부군의 이름은 승서(承緖), 자는 중술(仲述)인데,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 26)에 태어났다. 무오년(1558, 명종 13)에 생원에 급제하고 음직에 보임되어 귀후서 별제, 의금부 도사, 상의원ㆍ도화서별제, 사도시직장, 장악원주부, 장례원사평을 지냈으니 이것이 벼슬살이 이력이다. 병인년(1566, 명종 21)에 지방으로 나가 구례현감이 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사헌부감찰에 제수되고 임신년(1572, 선조 5)에 호조좌랑, 예빈시판관, 개성부도사를 지냈으며 그해 8월 재직중에 세상을 떠나니 춘추는 겨우 41세였다.
선비(先妣) 송씨(宋氏)는 선계가 은진(恩津)에서 나왔는데 고의 이름은 기수(麒壽)로 의정부좌참찬이고 비(妣)는 채씨(蔡氏)로 대사헌 침(忱)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임진년(1532, 중종 27)에 선비를 낳아 15세에 선부군에게 시집왔으며 임신년(1572, 선조 5) 4월에 선부군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 춘추 또한 41세였다. 김포(金浦) 참찬공의 묘소 아래 곤좌(坤坐)에다 장사 지냈는데 선부군과 같은 묘역에 봉분은 달리하였다. 아, 애통하다.
2남 2녀를 길러내어 딸은 생원 임경기(任慶基)와 종실 파원도정(坡原都正) 이응복(李應福)에게 시집가고 아들은 흠(欽)과 감(鑑)이다. 임씨는 3녀를 두어 허길(許佶)ㆍ정기(鄭沂)ㆍ김광보(金光輔)에게 시집보내고, 도정도 3녀를 두어 조국철(趙國哲)ㆍ허양(許敭)ㆍ한인철(韓仁哲)에게 시집보냈다. 흠은 병사(兵使) 이제신(李濟臣)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익성(翊聖)과 익전(翊全)이다. 익성은 선조대왕의 셋째 따님인 정숙옹주(貞淑翁主)를 맞아들여 동양위(東陽尉)가 되었다. 딸은 진사 박호(朴濠)와 조계원(趙啓遠)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감은 승지 조인후(趙仁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익량(翊亮)으로 진사이고 다음은 익륭(翊隆)이며 딸은 홍명구(洪命耈)에게 시집가고 그다음은 어리다. 익성은 3남 2녀, 익량은 1남, 박호는 2남 2녀, 조계원과 홍명구는 모두 1남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불초고(不肖孤) 흠(欽)은 선부군께서 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간 해에 태어났는데 일곱 살 때 선부군과 선비가 세상을 떠나 아우 감(鑑)과 함께 외갓집에 가서 자랐으니, 고아가 되어 의탁할 데 없는 가정환경은 구양자[歐陽子 :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부친은 일찍이 잃었으나 모부인은 오히려 세상에 계셨던 경우보다도 못하였다.
선부군의 선행에 대해 대략이나마 들어보지 못하다가 장성한 뒤에 비로소 외왕부(外王父) 및 백부[伯父 : 신홍서(申弘緖)를 말함]와 선부군 당시에 살았던 이들에게 얻어 들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천성이 아름답고 자품이 온후하여 가정에서는 훌륭한 자제요, 관원으로 있을 때는 훌륭한 관리요, 지방 백성을 다스릴 때는 훌륭한 수령이었으며 문장을 잘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하길 원치 않았고 선행을 하되 혹시 명예를 얻을까 부끄러워했다.” 하였다. 불초는 그 말을 삼가 받아 글에 기록하였다.
만력(萬曆) 병신년(1596, 선조 29)에 불초고가 사명을 띠고 구례현을 지나가는데 고을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흠을 만나보았다. 그는 선부군의 치적을 기억하여 말하기를 “청백하면서도 능히 삼가고 성실하면서도 부지런히 하며 송사의 판결을 분명히 하여 사람들이 믿게 하므로 서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하였으며 대로변에 비석을 세워 이제까지 여전히 그 덕을 칭송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부군께서 끼친 사랑이 아직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선비께서는 자질과 식견이 뛰어나고 심덕과 용모가 다 빼어났으며 친가 부모에 순응하고 시부모에 복종하였는가 하면 끼니 수발을 맡아 거르는 때가 없고 살림살이를 알뜰하게 하여 법도가 있었으므로 시숙ㆍ동서간과 일가 친인척에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그 덕을 흠앙하고 그 선에 교화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슬프게도 소자가 복이 없어 하늘이 돌보지 않았으니 아, 애통하다.
불초고 흠(欽)은 선대의 음덕을 입어 학문을 닦고 글공부를 하여 과거에 급제하여서는 대각(臺閣)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8좌(座)의 반열에 오르고 1품의 자급을 지닌데다가 선종조(宣宗朝)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인하여 선부군은 의정부 영의정에, 돌아가신 어머님은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아우 감(鑑)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시강원 벼슬을 역임하고 이제 목사가 되었다.
아, 불초고가 비록 조종을 빛내지는 못했지만 또한 감히 선대의 가르침을 실추하지 않았는데, 계축년(1601, 선조 34) 여름에 선종대왕의 유교(遺敎)로 죄에 걸려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혼자 생각해 보면 입신양명한 것은 모두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끼쳐준 경사로 인한 것이고 재앙을 만난 것은 실로 시운이 불행하였기 때문이다. 오직 행실이 잘못되지 않고 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으로써 부모가 주신 몸을 고스란히 지니고 돌아가는 소지로 삼고 부모의 이름을 드러내는 의의로 삼을 뿐이다. 이제 어느 날 갑자기 죽기 이전에 묘도(墓道)에 그 행적을 드러내어 불초의 끝없는 사모의 정을 부치는 바이다. 지극한 정은 글이 필요 없고 지극한 슬픔은 말이 소용없는 법이나 후세의 자손이 선대의 덕을 살펴보려고 한다면 또한 이를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초고 흠은 피눈물을 흘리며 기록한다.
손자 통헌대부(通憲大夫)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삼가 글씨를 쓰다.
황명 만력 42년(1614, 광해군 6) 9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