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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장군이치대첩비(權慄奬軍梨峙大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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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권율(權慄, 1537~1599)의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니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이고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광주목사가 되었고 남원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정예부대를 맞아 동복현감 황진(黃進) 등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황진이 총을 맞아 아군의 사기가 떨어지자 장군이 직접 군사를 독려하여 대승을 거두니 호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 공로로 전라감사가 되고 독성전투에 이어 다음해에 행주의 대첩을 거두었다.
행주에는 비석이 있으나 이치에 표식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후손 창섭(昌燮)이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에게 글을 청하여 1886년(고종 23)에 글을 짓고 1902년(광무 6)에 금산 이치에 비석을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 때 일본에 의해 폭파되고 그 파편만 면사무소에 보관하다가 1964년에 다시 글씨를 새겨 세웠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권율이치대첩비
도원수권공이치대첩비(都元帥權公梨峙大捷碑)
아아! 역대로 지나간 옛날을 보니 문무(文武)의 재주를 지니고 중흥의 대업을 능히 도와 빛나게 만방(萬邦)의 모범이 된 사람은 예컨대 주(周)나라의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당나라의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 선조대왕 때의 경우 도원수 충장공(忠莊公) 권공이 거의 그러한 사람에 가까우니 크고 높은 공렬이 사람들의 눈과 귀에 환하게 드러나 비록 하인이나 부녀자, 어린아이일지라도 지금까지 칭송이 끝이 없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공은 먼저 이치(梨峙)의 승리를 거두고 뒤에 행주(幸州)의 공적을 이루었는데 행주에는 비석을 새겨 고적을 칭송하고 있지만 유독 이치에는 갖춰지지 못하였다. 공의 후손 창섭(昌燮)이 분연히 탄식하며 장차 비석세우기를 계획하고 그 조카 재기(在箕)를 보내 나에게 기록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삼가 살피니 공의 이름은 율(慄), 자(字)는 언신(彦愼)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영의정 철(轍)의 아들이다. 공은 키가 헌칠하여 팔 척이고 용모가 장대하였다. 대대로 독실하게 충성스럽고 어질었으며 유학을 숭상하여 늦게 조정의 관직에 올랐으나 사람들이 모두 큰 계책을 보좌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만력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섬나라 오랑캐가 기승을 부려 우리가 경계하지 않은 것을 틈타 승승장구하며 들어오니 온 나라가 급하게 허둥대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권율의 재주를 시험해 볼만하다.”라고 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영남과 호남을 사지(死地)로 보았는데 공은 유독 강개하여 명을 받자 단기(單騎)로 내려갔다. 겨우 광주에 이르렀는데 서울은 이미 지킬 수가 없어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니 공은 통곡하며 “신하된 자가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날을 기다릴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병사 1,500명을 얻고 나아가 전주(全州)에 이르렀다. 이때 적병은 험준한 고개를 넘어 전주와 호남을 노리고 있었다. 중봉선생(重峰先生 : 조헌(趙憲))은 공과 함께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공은 병사가 훈련이 잘 되지 않았으므로 기일을 바꾸자고 편지를 보냈지만 조선생은 이미 금산에 도착하여 적에게 패배하고 의롭게 전사하였다.
공은 이 소식을 듣고 조카인 경승(慶升)에게 이르기를 “적들은 반드시 승세를 타고 이치(梨峙)를 경유하여 호남을 침범할 것이니 너는 부대 하나를 이끌고 웅치(熊峙)를 넘어 영정곡(永貞谷)에 매복하였다가 그들이 돌아가는 길을 끊도록 하라.” 말하고 또 동복(同福)현감 황진(黃進)을 선봉으로 삼고 “이치는 바로 적과 우리가 반드시 전투할 장소이니 만일 먼저 점거하지 못한다면 일을 도모하기 어렵다.”라 말하며 달려 나가게 하고는 공도 또한 참모, 여러 공들과 함께 뒤따랐다.
적과 고갯마루에서 만나서 몸을 떨쳐 앞으로 나가며 “오늘의 전투는 나아감만 있고 물러남은 없으며 죽음이 있고 사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였다. 격렬한 전투가 얼마 지나자 황공이 총알을 맞아 퇴각을 하니 군대의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공은 칼을 빼고 큰 소리를 외치며 앞장서서 칼날을 무릅쓰니 군사들이 용기를 발휘하여 일당백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는 기세와 물을 쏟아 붓는 형세에 무너지는 것이 마치 비바람 같고 패배하여 도망하는 것은 양이나 돼지떼 같았다. 삼십리의 긴 골짜기를 추격하니 수만의 적들이 거의 다 죽고 적장인 융경(隆景 : 小早川隆景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이 남은 군졸을 모아서 정곡(貞谷)으로 도망했는데 또 다시 복병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공은 전승을 거두고 돌아와서 병졸을 점검하니 죽은 사람이 11명이었다.
시체를 수색하고자 밤에 군문을 나가 찾아서 장차 돌아올 때 제 적의 무리가 갑자기 포위하니 공은 칼을 휘둘러 막는데 총알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검광이 번쩍이니 곧 하나의 큰 불덩어리가 되고 은(銀) 등잔불이 점점 땅을 떠나 공중에서 빙빙 돌아다녔다. 적들은 크게 놀라 “이것은 귀신이다.”라 말하고 각기 도망쳐 버렸다. 공은 제단을 쌓고 전사한 장수와 병졸을 제사지내고는 정충신(鄭忠信)으로 하여금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피난하여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에 승리를 아뢰도록 하였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공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삼고 여러 장수들에게 차등 있게 직책을 내렸다.
얼마 있다가 전라감사로 승진하였고 9월에 근왕병(勤王兵)이 수원의 독성(禿城)에 이르러서 기병(奇兵 : 기습병)을 내어 적의 예봉을 꺾었다. 다음해 이월에 군대를 행주산성으로 옮겨 크게 싸워 승리를 거두니 국가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천자가 듣고 기뻐하며 홍려시(鴻臚寺 : 외국에 대한 사무나 조공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원을 파견하여 선유(宣諭 : 황제의 뜻을 선포하고 효유하는 것)하였고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장병들도 권율의 군대는 다른 군대와 차이가 있어 모두 진정한 장수라고 여겼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도 본국에 자문(諮問)을 보내 별도로 상을 주라고 하며 “권율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의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다.”라고 말하였고 왜(倭)의 우두머리도 또한 그 안부를 물었으니 공의 위명이 중국과 오랑캐를 두렵게 하고 굴복시켰음을 알 수 있다.
선조임금이 장려하신 것도 전후에 지극히 갖추어져 “ 충성과 공로가 크게 드러났고 용맹과 기략은 세상에 뛰어나다.” 라고 말하시기에 이르렀고 또 “경이 아니었다면 국가가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아! 공의 공훈은 비록 온 나라 안의 집이 신주를 모시고 집집마다 축원하더라고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곳 이치(梨峙)는 공의 정독(旌纛 : 깃발)이 임한 곳이고 암아(喑啞 : 호령)가 닿은 곳이니 그 위엄 있는 기운이 마치 가을 서리, 밝은 태양과도 같아 오래 되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인즉 어찌 공이 충성을 바친 땅을 차마 잡초가 우거진 가운데 폐해져서 한낱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이 되게 하겠는가?
산 높고 물 맑은 곳, 큰 비석 이에 우뚝하여 천백세후에도 충성과 의리를 권장하노니 장차 오는 사람들은 읽고서 눈물 흘릴 것이로다.
개국(開國) 4218년(고종 23, 1886년) 병술년
가선대부 대사헌 겸 성균관제주 시강원찬선 경연관 서연관 덕은(德殷) 송병선(宋秉璿)은 글을 짓고,
여산(礪山) 송성용(宋成鏞)은 글씨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