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개관
이 비는 1869년(고종 6) 8월에 경상도관찰사겸대구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영남감영의 성을 수축한 후 수성의 사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공사는 김세호가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 3, 4월경에 착공하여 11월에 준공하였다. 이 비에는 수성에 들어간 자원들의 상세내역과 함께 공사가 끝난 후, 성대한 낙성연도 열고 성의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여 유공자에게 포상하기도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의 위치는 대구남문 밖 영영축성비 바로 곁에 건립되어 있었던 것인데, 1906년(광무 10) 대구군수 박중양(朴重陽)에 의하여 성이 훼철된 후 구 달성군청 (현 대구백화점 옆) 부근에 방치되었다가 1932년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대구 향교 경내로 옮겼고 다시 1980년 영남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수성비(修城碑)
아! 우리 성상께서 빛나게 보위에 임어하시고 대원위합하(大院位閤下)께서 좌우에서 잘 도와 이끄니 이로 말미암아 도는 삼영(三英 : 요·순·우)과 같이 높아졌고 지키는 것은 사방의 오랑캐에 있으니 나라를 강하게 하는 것이 산이나 계곡이 아니고 뭇 백성들의 마음이 성처럼 견고해져서 억만년 태평한 기틀을 크게 안정시키는 것이니 아아! 아름답도다. 이 때에 세호(世鎬)가 외람되게 영남을 안찰하게 되었는데 명을 내리는 날에 말씀하시기를 “임금의 은덕을 베풀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나 변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이나 어찌 관찰사의 책임이 아닌 것이 없겠는가마는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백성들은 병화를 알지 못하고, 군비(軍備)가 소홀하니 이것은 장구한 술책이 아니다. 그대는 이를 힘쓰라."라고 하셨다. 삼가 재배하고 명을 받아 물러나왔다.
감영에 부임한 이래로 아침부터 밤까지 계획하고 기계를 수리하고 별포(別砲)를 설치하여 군대의 위용을 진작시키고 마침내 성을 수리하여 방어를 공고히 하기로 계획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대구는 옛날에는 성이 없었고 단지 토성의 터만 있었는데 과거 영조 병진년(영조 12, 1736년)에 관찰사 민응수(閔應洙)공이 토성의 주변을 따라 돌을 쌓고 문을 세웠었다. 그러나 망루나 포대는 갖춰지지 않았으니 아마도 겨를이 없었던 듯하다. 이제 백여 년을 지나는 사이에 치첩(稚堞 : 성가퀴)은 무너져 훼손되고 망루는 썩어 기울었으니 온 영남중의 웅장한 고을의 체모가 피폐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수리하여 중수하고자 함에 일은 크고 힘은 모자라 능히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였으나, 하늘의 도우심에 사람들이 또한 순종하여 여러 사람들의 기원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재물을 기부하여 보조하고 일꾼을 모집하여 백성들의 힘을 쓰지 않았으니 무릇 칠만전을 써서 8~9개월 만에 공사의 완공을 보고할 수 있었다.
성체(城體)는 더 높게 하였고 돌로 만든 돈대(墩臺 : 위급한 상황에서 신호를 보내는 대)를 새로 쌓고 표루(標樓)를 네 개 세웠으니 남쪽을 선은루(宣恩樓), 동쪽을 정해루(定海樓), 서쪽을 주승루(籌勝樓), 북쪽을 망경루(望京樓)라고 하였다. 여첩(女堞 : 성위에 담을 쌓은 것)은 옛날 것을 평평하게 하여 다시 쌓았고 사이에 포루(砲樓)를 표루(標樓)의 수만큼 설치하여 배로 만들었다. 망루는 혹은 다시 세우고 혹은 수리하여서 여러 누대와 함께 단청을 하였고 석회로 칠한 성가퀴도 그린 듯하여 채색한 누대가 서로 연이었으니 그저 백성들을 흥성하게 하고 나라를 지키는 방도가 된 것만이 아니라, 여기에서 도읍이 풍족하고 번화한 아름다움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일찍이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고 기뻐하니 이것이 어찌 세호(世鎬)가 감히 공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인가? 다만 대원위합하의 신묘하고도 원대한 계책을 삼가 받들어 국가의 유사시의 방비를 한 것이되 그 공사를 감독하여 완성한 것은 실로 여러 보좌하는 장령(將領)들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다. 마침내 크게 잔치를 열어 낙성연을 하였고 조정에 장계로 보고를 올려 공을 논하고 차등 있게 포상하였다. 이어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고 공사의 전말과 감독한 사람의 성명을 그 아래에 쓴다. 예컨대 부실한 부분이 나타나면 잘 수리하여 영원하기를 기대하니 실로 후세의 군자에게 바라는 바이다.
성상(聖上 : 고종) 즉위 7년 경오년(고종 7, 1870년) 11월에 가선대부 관찰사 김세호(金世鎬)는 글을 짓는다.
도감동(都監董) 중군 조성준
서성(西城)감동
책응도청(策應都廳) 전오위장 이회선
동성(東城)감동 전오위장 이운회
북성(北城)감동 전사과 박성연
동성별간역 오위장 서한기, 별간역 색리 정노윤, 간역 색리 윤봉림·손언국
서성별간역 오위장 서규현, 별간역 절충 정지오, 간역 색리 설익수·정택하·서필로
남성(南城)별간역 가산별장 서갑증, 간역 절충 정익승, 색리 정택인·김두갑·서지민
북성간역감관 가선 김정필, 절충 최석봉, 출신 조달운, 색리 김형주·이경룡·김태림
북문간역감관 가의 김기석, 절충 정창은, 색리 정래봉·이효상·최영민
부석소(浮石所 : 돌을 뜨는 곳)감관 사과 이연완, 기관 서필도, 색리 이태룡
벌목소(伐木所 : 나무를 베던 곳)감관 가선 김정한, 사과 이양두, 색리 신석근·양재규
무회소(貿灰所 : 석화를 마련한 곳)감관 절충 이원모, 사과 이기춘
취철소(吹鐵所 : 쇠를 불리는 곳)감관 사과 허석, 절충 한재유, 색리 이주식
야로소(冶爐所 : 철물을 주조하는 곳)감관 절충 김성원, 기관 김남주, 색리 손두오
번와소(燔瓦所 : 기와를 굽는 곳)감관 절충 조장욱, 색리 김갑조
운석(運石)감관 사과 이병하, 사과 노봉윤
비각(碑閣)감동 절충양필관
책응간역 절충 윤봉흡, 절충 허형, 절충 최석로가 글씨를 씀
체성(體城) 신축(新築) 97보, 개축(改築) 180보, 보축(補築) 1,409보
치첩(雉堞) 신축 2,680보
문루공해(門樓公廨) 신건(新建) 72간, 중건(重建) 37간, 중수(重修) 517간
공해(公廨) 여러 곳 수보(修補) 256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