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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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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는 1735년(영조 11)에 축성된 영남감영 석성의 건립경위 등을 밝히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대구에는 원래 토성만 있었는데 그나마 임진왜란으로 무너져 견지(遣址)만 남은 것을 1735년(영조 11) 3월에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부임)던 민응수(閔應洙가 나라에 건의하여 이듬해 정월 8월에 돌을 다듬기 시작하여 8월 12일에 성터를 닦고 영남감영의 석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해 4월 25일에 체성이 완성되고, 6월 5일에 여첩이 완성되었는데 사정문은 쌍홍문에 건축하였고, 손방(東南問)과 건방(西北問)에 암간(暗間), 야간통행문(夜間通行門)을 두었다. 또 수성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당시 건립경위와 수성에 참여한 인원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
대구부(大丘府)는 실로 한 지방의 중앙을 차지하는 곳으로 달성부(達城府)가 폐지된 뒤로 감영을 옮겨 영남의 대도시가 되었음에도 아직 방어 부분은 부족하였다. 감영 북쪽에 옛 토성 터가 있는데, 어느 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훼손되어 거의 다 없어진 상태였다. 내(민응수(閔應洙))가 을묘년(영조 11, 1735년)에 이곳의 관찰사로 와서 그것을 개탄하다가 즉시 방비할 뜻을 강구하니 대부분 돌이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이윽고 이해 겨울에 돌이 있는 곳을 둘러보고는 곧장 의논을 정해 조정에 보고하여 이듬해 1월 8일 계묘일에 처음으로 돌을 채취하기 시작해 4일 뒤인 정미일에 마침내 터를 닦았다. 4월 25일에는 체성(體城)을 만들고 6월 6일 여첩(女堞)을 완공했다. 4개의 정문(正門)은 쌍무지개 모양으로 문루가 있었고, 2개의 암문(暗門)을 동남쪽과 서북쪽에 설치했으며, 둘레는 옛터에서 조금 넓혀서 총 2120보이고 여장(女墻)은 819보이다. 성첩(堞城)의 높이는 서남쪽이 18척 동북쪽이 17척이고, 뒤의 축대는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級)이다. 사역에 들어간 사람과 비용을 대략 계산해보면 다음과 같다. 도청(都廳) 둘을 두어 주관하게 하고, 각 도청 밑에 부감(副監)하나를 두었다. 체성(體城)을 100패(牌)로 나누고 패마다 각각 장수가 있었으며, 길이와 수공(授功 : 사시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고려하여 4면을 4곳으로 구분하였으며, 4문 역시 각기 도청(都廳)을 두고 부감(副監)이 사역을 감독하게 했다. 돌을 캐는 일과 기와를 굽는 일은 모두 별도로 담당자를 정해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나 역시 매일 그들의 공(功)을 순시하여 상벌을 주니 더욱 열심히 하여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완공을 빨리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부근 고을의 대오에 들어있는 군졸을 장계로 청하여 조련과 역을 정지하게 하였는데, 농사철이 되면 모두 돌려보내고 승려들로 뒤를 잇게 했다가 나중에는 군영의 관속과 도내 기술공, 각 광산의 군졸을 모집하여 모든 장교와 이속, 하인 등에게 품삯을 후하게 주어 부렸다. 철탄과 석탄, 재목과 기구에 필요한 물품은 모두 후하게 지급하여 곧바로 사들이게 하고 심부름 값을 주어 운반하니 지불한 비용은 매우 많았으나 군영에 필요한 각종 물품이 모두 완비되고 판식(販殖)의 이익이 줄어들었다. 대비해둔 나머지를 헐값으로 팔아 성을 지킬 기구를 만들고 수성창(修城倉)을 건립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군향을 저축하고 돈과 베를 쌓아두었다. 공사가 끝나자 모든 장졸들과 함께 구정(龜亭)에서 활쏘기를 하고 남문에서 크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등수에 따라 시상하였다. 또 가을 순행으로 여러 고을의 뛰어난 군교들을 모았는데 활쏘기 시험과 시상을 구정(龜亭) 때와 똑같이 하였다. 10월에 상을 청하는 계본이 비로소 인준을 받아 내려왔다. 위로는 도청(都廳)부터 아래로는 이속과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품계를 올려주거나 쌀을 하사하거나 베를 주거나 하여 은전(恩典)은 두텁고 상품은 무성하였다. 11월 신축일에 선화당(宣化堂)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낙성식에 모인 사람이 모두 3백여 명이 되었다. 군인, 승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춤을 추며 낙성을 축하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번에 성을 쌓은 공역은 매우 큰일이라 수고도 역시 대단했으니 역을 담당한 여러 장교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으므로 비를 세워 기록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마침내 그 전말을 대략 서술하고 각 사람의 성명을 그 아래 새겼다
숭정기원후 두 번째 정사년(영조 13, 1737년) 2월 상순 세움.
뒷면
축성 원역(員役) : 도차원(都差員)을 중간에 없애고 두 도청(都廳)은 나중에 추가로 두었다.
도차사원(都差使員) 전 수사 이수신(李守身), 일도청(一都廳) 전 부사 김후(金垕), 이도청(二都廳) 절충(折衝) 조극량(趙克亮), 책응도청(策應都廳) 전 첨사(僉使) 권순성(權順性), 동소도청(東所都廳) 가선(嘉善) 신지(申智), 서소도청(西所都廳) 전 첨사 이청(李淸), 남소도청(南所都廳) 가선(嘉善) 이진명(李彦命), 북소도청(北所都廳) 절충 백상휘(白尙輝), 동문도청(東門都廳) 절충 민흥조(閔興肇), 서문도청(西門都廳) 절충 이유천(李惟天), 남문도청(南門都廳) 절충 정리(鄭理), 북문도청(北門都廳) 절충 이광신(李光新), 도청감동(都廳監蕫) 가선 이무실(李茂實), 책응감동(策應監蕫) 절충 허익(許榏), 동소감동(東所監蕫) 한량 장만유(張萬維), 서소감동(西所監蕫) 절충 김극협(金克協), 남소감동(南所監蕫) 가선 문재징(文在徵), 북소감동(北所監蕫) 한량 하도문(河道文), 동문감동(東門監蕫) 사과(司果) 서언성(徐彦成), 서문감동(西門監蕫) 한량 이백령(李百齡), 남문감동(南門監蕫) 가선 홍치운(洪致雲), 북문감동(北門監蕫) 절충 윤형로(尹衡老), 번와감관(燔瓦監官) 동지(同知) 홍우정(洪禹鼎). 각소패장(各所牌將) 동(東) 서필제(徐必悌), 박치항(朴致恒), 배성빈(裴聖彬), 정연걸(鄭後杰), 정도흥(丁道興), 최경륜(崔擎崙), 백후검(白厚儉), 김기필(金基必), 윤만주(尹萬柱), 갈세무(葛世茂), 서희세(徐熈世), 문성찬(文聖賛), 변익한(卞益漢), 송이문(宋以文), 김여오(金汝五), 명희건(命希建), 최맹세(崔孟世), 장봉원(張鳳元), 김재형(金載亨), 전득주(田得疇), 허징(許澄), 허심(許鐔), 홍만원(洪萬源), 정필용(鄭必龍), 차명재(車命載). 서(西) 이태신(李泰新), 윤성대(尹聖大), 오신삼(吳信三), 전하성(田夏成), 배우장(裴遇章), 하천징(河天澄), 김여웅(金汝雄), 김운서(金雲瑞), 허집(許鏶), 송귀갑(宋龜甲), 백문채(白文采), 정웅조(鄭雄朝), 조지벽(趙持璧), 이태명(李泰命), 이상엽(李相燁), 문덕창(文德昌), 나진익(羅進益), 서규징(徐奎徵), 김응태(金應泰), 백봉로(白鳳老), 최명태(崔命泰), 백몽룡(白夢龍), 정웅도(鄭雄道), 송석태(宋碩泰), 배재망(裵再望). 남(南) 서신채(徐信彩), 하상해(夏尙海), 이정식(李廷植), 정운화(鄭震華) 조삼덕(趙三德), 허숙(許橚), 신필화(辛必和), 정인건(鄭仁建), 공인제(孔仁齊), 석태륜(石泰崙), 최석붕(崔碩鹏), 정안세(鄭安世), 문재형(文在衡), 문방언(文邦彦), 김명기(金命基), 최동급(崔東岌), 송도흥(宋道興), 정도명(丁道明), 백원채(白元采), 백봉채(白鳳采), 김경두(金慶斗), 전택기(田宅基), 이국량(李國樑), 서사적(徐師積), 최경태(崔慶泰). 북(北) 이동환(李東煥), 김최흡(金最潝), 이시빈(李時彬), 이문귀(李文貴), 변시명(卞時明), 김진필(金進弼), 윤익채(尹益彩), 황용징(黃龍澄), 유정로(柳井老), 이득춘(李得春), 배세화(裵世華), 백태주(白泰周), 은시업(殷時業), 조만징(趙萬澄), 황용서(黃龍瑞), 박만적(朴萬廸), 김정태(金鼎泰), 허유석(許有碩), 정세대(鄭世大), 서세태(徐世泰), 김여성(金汝聖), 서익태(徐益泰), 나원갑(羅元甲), 송리태(宋履泰), 조하윤(曹夏胤). 각소부석감관(各所浮石監官) 동(東) 사과(司果) 서신명(徐信明), 서(西) 한량(閑良) 서명찬(徐命賛), 남(南) 절충(折衝) 김중일(金重鎰), 이봉채(李鳳彩), 북(北) 절충 장상익(張相翼). 홍예(虹霓) 동(東) 한량 하중문(河重文), 남(南) 절충 오수적(吳遂績). 매탄감관(埋炭監官) 한량 김익엽(金益燁), 무철감관(貿鐵監官) 절충 박순명(朴順明). 도청영리(都廳營吏) 김필항(金必恒), 김용손(金龍孫), 김하성(金夏成), 색(色) 서취걸(徐就傑), 김이정(金爾鼎). 책응영리(策應營吏) 권운룡(權運龍), 김중린(金重麟), 색(色) 오수겸(吳遂謙). 서사(書寫) 한성익(韓聖益), 서덕후(徐德垕), 대물색(大物色) 정태홍(鄭泰弘). 동소색(東所色) 전유헌(全有獻), 문색(門色) 이세항(李世沆), 부석색(浮石色) 김천균(金千均). 서소색(西所色) 한유신(韓維信), 문색(門色) 서취호(徐就豪), 부석색(浮石色) 강위빈(姜渭滨). 남소색(南所色) 김우평(金遇平), 문색(門色) 채일평(蔡日平), 부석색(浮石色) 정태원(郭奉元), 신언수(申彦樹). 북소색(北所色) 서경봉(徐慶鳳), 문색(門色) 김처후(金處垕), 부석색(浮石色) 강위한(姜渭漢), 번와색(燔瓦色) 김대균(金大均). 홍예(虹霓) 부석색(浮石色) 정창희(鄭昌姬), 정성하(丁聖夏), 매탄색(埋炭色) 김려관(金麗觀). 승군도령승(僧軍都領僧) 해숙(海淑), 동령승(東領僧) 선초(善楚), 서령승(西領僧) 책련(策蓮), 남령승(南領僧) 영훈(永訓), 북령승(北領僧) 재심(載心), 서기승(書記僧) 양민(良敏), 승패승(等牌僧) 이련(爾連),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 초구(楚玖), 도각수승(都刻手僧) 귀윤(歸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