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 시대
- 고구려
- 연대
- 5세기 경
- 유형
- 묘지
- 재질
- 돌
- 크기
- 미상
- 소재지
-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 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하해방촌(下解放村 : 구 下羊魚頭) 모두루묘
- 출토지
-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 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하해방촌(下解放村 : 구 下羊魚頭) 모두루묘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각자/서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모두루의 무덤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하해방촌(下解放村 : 구 下羊魚頭)에 있다. 무덤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돌방흙무덤[석실봉토분]이며, 앞방과 널방을 가진 구조이다. 묵서[먹으로 쓴 글]는 널방으로 통하는 앞방의 정면 상단에 두루마기처럼 기다랗게 펼쳐져 쓰여 있다. 글자의 수는 800여 자에 달하며, 이 가운데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겨우 300 여자에 불과하다. 무덤의 주인공에 대하여 종래에 염모(冉牟)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으나 최근에 모두루(牟頭婁)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묘지문의 전반부는 모두루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었고, 후반부는 모두루의 행적을 기술한 내용이다. 묘지문에 따르면, 모두루의 조상은 추모성왕[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에 도움을 주었으며, 그의 할아버지 염모(冉牟)는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반란을 평정한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두루는 광개토왕대에 북부여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활약하였으며, 장수왕대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루묘지에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기술되어 있어 건국신화의 변천 양상을 살필 때 매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왕 앞에서 신하가 스스로 노객(奴客)이라고 부른 사실, 『삼국사기』 등에 보이지 않는 염모(冉牟)와 모두루의 행적 등은 5세기 고구려사 연구의 핵심 사료로 이해되고 있다.
판독문/해석문
| 해석문 | 노태돈 | ||
| 판독문 | 최남선 | ||
| 판독문 | 田中俊明 | ||
| 판독문 | 武田幸男 | ||
| 판독문 | 노태돈 | ||
| 판독문 | 허흥식 | ||
| 판독문 | 池內宏 |
참고문헌
| 단행본 | 2004 |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
| 단행본 | 2002 |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 |
| 논문 | 1997 | 「從冉牟墓誌和好太王碑看高句麗書法」『高句麗歷史與文化硏究』 |
| 단행본 | 1995 | 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Ⅰ, 國史編纂委員會 |
| 논문 | 1995 | 松原孝俊, 1995, 「牟頭婁墓誌の神話學的硏究」『佐伯有淸先生古稀記念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
| 논문 | 1995 | 趙東元, 1995, 「高句麗 金石文의 所在와 硏究現況」『阜村申延澈敎授 停年退任紀念 史學論叢』, 일월서각 |
| 단행본 | 1992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
| 논문 | 1992 | 金昌鎬, 1992, 「高句麗 金石文의 人名表記」『先史와 古代』3 |
| 단행본 | 1990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조선유적유물도감』4, (고구려편2), 외국문물종합출판사 |
| 논문 | 1988 | 盧泰敦, 1988, 「5세기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人의 天下觀」『韓國史論』19, 서울대 국사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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