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듣건대 용이 하늘 거리에서
2 뛰놀 때는 반드시 풍운(風雲)의 힘에 도움을 받고 성인이 운(運)을 받을 때도 장수의 공을 기다린다 하였으니, 방숙(方叔)과 소호(邵虎)
3는 ▨주(▨周)에서 ▨▨하고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
4은 강한 한(漢)나라에서 부절(符節)을 빨리 전했다. 그 능히 (이들을) 계승하여 읊조릴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유장군(劉將軍)인 듯하다.
군(君)의 이름은 인원(仁願)이고 자(字)는 사원(士元)이며 조음(雕陰) 대빈(大斌) 사람이다. ▨토(▨土) 개가(開家)하여(집안을 열어) ▨▨가 동국(東國)에 깃발을 세우게 하고, 모토(茅土)를 분봉(分封)하여
5, 넘겨줌으로써 왕손(王孫)이 북강(北疆)에서 정절(旌節)을 가지게 하였다.
6 삼초(三楚)
7 그 관리들을
8가 장하게 여기고 육군(六郡)
9이 그 관직
10을 칭송하니, 갈라져 나간 가지와 퍼진 잎사귀(갈라져 나온 자손・종족)를 대략 말할 수 있다.
조(高祖) ▨▨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영동장군(寧東將軍) 서주대중정(徐州大中正) 팽성목공(彭城穆公)이다. 위(魏)나라 왕실이 기강이 없어져 이주(爾朱)
11가 전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동경(東京 : 洛陽)이 망하여 없어지고 ▨▨서쪽으로 옮긴 때를 당해 천자의 수레를 받들어 모시고 관내(關內)
12로 옮겨 살았다. 얼마 있다가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 지절(持節) 도독(都督) 하북제군사(河北諸軍事) 수주자사(綬州刺史)를 제수받고 관직으로 말미암아 식읍(食邑)을 받고 대대로 거기에서 살아 ▨고▨▨지(▨鼓▨▨之)하여 ▨북주지망(▨北州之望)했다.
증조(曾祖) 평(平)은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 삭방군수(朔方郡守) 수주자사(綬州刺史)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로서 봉작을 이어받아 팽성군개국공(彭城郡開國公)이 되었다.
조(祖) 의조(懿周)는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의동삼사(儀同三司) 수(隨 : 隋나라의)사지절(使持節) 수주제군사(綬州諸軍事) 수주총관(綬州摠管) ▨주자사(▨州刺史) ▨▨군개국공(▨▨郡開國公)이다.
부(父) 대구(大俱)는 황조(皇朝 : 唐나라)의 사지절(使持節) 동・수이주총관(同・綬二州摠管) 24주제군사(州諸軍事) 수주자사(綬州刺史)였는데 얼마 있다가 도독(都督)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승・하이주도행군총관(勝・夏二州道行軍摠管)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 상주국(上柱國)으로 관직이 바뀌고 따로 팽성군개국공(彭城郡開國公)으로 봉해졌다. 모두 계수나무 향기와 난꽃 향내가 있었고 쇠처럼 곧고 옥처럼 윤이 났으며 명성이 커다란 나무보다 높고 명예가 사림(詞林)
13에 꽉 차니 인품이 높은 벌열
14을 여기에서 보겠도다.
군(君)은 하기(河基)
15에서 도량을 품부받고, 악독(嶽瀆)
16 믿음직스럽고 효성과 공경이 나날이 진보했다. 운명이 창성한 때에 짝하고, 좋은 때를 만나고 좋은 임금을 만났으며 몸을 삼가고 이치에 환하여 운을 열어서 넓고 너른 하늘을(천하를) 밝게 다스렸다.
17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는 성스럽고 영묘하시며,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셔서
18 육합(六合)
19을 병탄하고 팔황(八荒)
20을 석권하여 널리 여러 재주있는 사람을 찾아서 대보(大寶)를 편하게 하였으며, 뛰어난 사람은 특별히 뛰어나게 하고 어두운 사람・밝은 사람은 반드시 도달하게 하셨다.
군(君)은 지위가 풍요로운 데 힘입고 가문이 공적을 이어서, 아름다운 소문의 기림과 뭇사람들의 의견이 합치되는 바였다. 집안을 일으키어 홍문관학생(弘文館學生)이 되었고 (승진하여) 우친위(右親衛)▨▨▨▨▨▨▨▨가 되었다. 완력
21은 ▨건(▨健)하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 일찌기 왕을 수행해서 다른 곳에 가 노닐 때 맨손으로 사나운 짐승을 사로잡으니 태종이 출중함에 깊이 감탄하여
22 특별히 상을 더 내리고 곧 은혜로운 조서를 내려 관내(闕內)에 들어와 내봉공(內供奉)을 맡게 했다.
정관(貞觀) 19년(645) 태종이 친히 육군(六軍)
23을 거느리고서 멀고 험한 곳을 순행하니
24 천승(千乘)
25이 우뢰처럼 격동하고 만기(萬騎)가 구름처럼 모여 ▨▨▨▨▨▨ 다 모였으나 고구려의 역신(逆臣) 개소문(蓋蘇文)만이 홀로 딴 마음을 품고서
26 망명한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간사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 군장을 가두고 병사를 들어 난을 일으켜서는 개미같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감히 왕의 군대에 대항하였다. 황제께서 대단히 성을 내시어 조민벌죄(弔民伐罪)
27를 삼가 행하시니 군대의 날카로운 기세가 이르는 곳마다 마치 ▨▨를 깨뜨리는 것과 같아서 요동(遼東)・개모(蓋牟)・▨▨ 등 10성(城)을 ▨하고 ▨▨・신성(新城)・안지(安地) 등 3성에 주둔하여 그 대장 연수(延壽)・혜진(惠眞)을 사로잡고 그 군사 16만을 포로로 잡았다. 군(君)은 몸소 전장에 참여하여 손수 굴레와 고삐를 받들고, 척후병
28과 후군(後軍)
29이 매번 진을 칠 때마다 먼저 올라 강하고 견고한 성을 꺾고 함락시키기를 썩은 나무를 꺾어 부러뜨리는 것과 같이 쉽게 하여서 싸움에 이기고 공격하여 빼앗은 것이 ▨▨▨▨이었다. (공에 대하여) 내린 물건이 승마(乘馬) 1필(疋)과 ▨▨▨▨▨▨▨궁(弓) 2장(張), 큰 화살 300척(隻)인데 모두 천자를 호위하는
30 호위병
31으로서 특별히 더 포상을 받은 것이다. 요동에서 돌아온 뒤 그간 누차의 전공(戰功)으로 상주국(上柱國)에 특별히 배수되고 따로 여양현개국공(黎陽縣開國公)으로 봉해졌으며 우무위(右武衛) 봉명부(鳳鳴府)의 좌과의도위(左果毅都衛)로 임명되어 북문장상(北門長上)의 기병을 총괄하였다.
21년(647)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임명되어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따라 설연타(薛延陀)
32를 경략하고 아울러 거비(車鼻)
33를 영접하였으며 구성(九姓) 철륵(鐵勒)
34을 안무하였다. 돌아옴에 다시 우무위랑장(右武衛郞將)을 제수받고 예전과 같이 [내]공봉([內]供奉)을 맡았다.
22년(648)에 또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어 요동을 향해 경략하려다가 다른 공적(公的)인 일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해에 다시 우무위(右武衛) 신통부(神通府)의 좌과의도위(左果毅都慰)를 제수받았다. 23년(649)에 태종이 붕어함에
35 종묘 사직은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 없어, 황태자가 거상중(居喪中)에서도
36 병장기를 모아 ▨▨하니, “주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정치는 새롭다
37”고 한 것과 같았다. 군(君)은 천자의 지혜를 입고 재주와 명민함으로 기용이 되어 한 달도 되지 않아 또 현재 임금의 부림을 받았다.
영휘(永徽) 2년(651) 다시 철륵(鐵勒)에 들어가 위무하였는데, 돌아와서는 조칙에 따라서 적의 예봉을 꺾음이 결단성이 있고 굳세며, 강하고 현명함이 통령(統領)을 감당할 만한 자로 간택되어 때에 맞춰 처분되었다.
군(君)은 경략(經略)
38을 임명받고서 자주 요동을 다녀와 5년(654)에 총산도행군대총관(蔥山道行軍大摠管)을 제수받고 노국공(盧國公) 정지절(程知節)을 따라 ▨하로(▨賀魯)를 토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낙양으로 천자의 행차를 좇았다.
현경(顯慶) 원년(元年 : 656) 좌효위랑장(左驍衛郞將)으로 관직이 바뀌고, 2년(657) 조서에 응하여 문무가 뛰어난 관리
39를 천거하였으며 세 관등을 특진하였다. 후에 철륵(鐵勒)에 가서 이들을 위무하였다. 4년(659)에는 토욕혼(吐谷渾)
40 및 토번(吐藩)
41에 들어가 있는 힘을 다해 다스렸다. 5년(660)에 우이도행군대총관(嵎夷道行軍大摠管)을 제수받고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백제를 완전히 평정하고 그 왕 부여의자(扶餘義慈)와 태자(太子) 융(隆) 및 좌평(佐平)・[달]솔([達]率) 이하 700여 인을 사로잡았으며 이외 수령 고로도▨(古魯都▨), 봉무▨부여생(奉武▨扶餘生), 수연이보라(受延尒普羅) 등은 모두 (당군(唐軍)의 작전에) 참여시켜, (이들이) 공을 세우고 귀순하니 혹은 맞아들여서 대궐
42로 재빨리 오게 하고, 혹은 들어오게 해서 ▨▨▨하니 그 지역 전체의 유민 들이 예전과 같이 편안히 여겼다. 관직을 설치해서 직분을 나누어 각기 맡은 바가 있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군(君)을 도호(都護) 겸 지유진(知留鎭)으로 삼았다.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 또한 막내 아들 김태(金泰)를 보내어 함께 성을 굳게 지키게 하니, 비록 오랑캐와 중국의 다름이 있고 어른과 아이의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나, 군(君)이 마음 편하게 접대해 주는 것이 그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공업(功業)이 능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옛날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평정할 때 상엄(商奄)
43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한나라가 서역을 평정할 때 소륵(䟽勒)
44에서 포위당하였으니, 이는 남아있는 나쁜 풍습이 아직 없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품어온 생각이 좀도둑질되었기 때문이다. 만맥(蠻貊)의 풍속도 동요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키기는 어려운데, 하물며 북방으로 달아난 구적(寇賊)들이야! 원래부터 따르지 않았고, 이미 조과(雕戈)
45를 보았으며 동쪽으로는 금람(錦纜)
46으로 순행하고 서쪽으로는 재앙의 조짐을 띄워 강성해지면
47이내 반역을 도모하니 곧 가짜 승려 도침(道琛), 가짜 한솔(扞率) 귀실복신(鬼室福信)이 그들이다. 민간에서 나와 그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사납고 교활한 사람을 불러모아 임존성(任存城)에 성채를 쌓고 웅거하여
48, 벌떼처럼 모여 있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산곡에 가득차 있다. 남의 이름을 빌리고 지위를 훔쳐 모두 장군(將軍)이라 칭하고서
49 성읍(城邑)을 모두 무너뜨리고 점차 중부(中部)로 들어가 우물을 메우고 나무를 베며, 집들을 무너뜨리고 태워버려서 지나는 곳마다 잔해(殘害)하여 멸망시켜 거의 살아남은 백성이 없었다. 흉악한 위세가 이미 드러나서 사람들이 모두 위협당해 복종하며 성채를 벌여놓고 영을 늘어세워 놓아
50 오래 머물러 있는
51 우리 군대를 공격해서 포위하였다. 운제(雲梯)
52로 굽어보고 지도(地道)
53로 환히 들여다보며, 돌을 치고 화살을 날리는 것이 별처럼 달리고 비처럼 쏟아지며, 밤낮으로 계속해서 싸우고 아침저녁으로 세력을 믿고 침범하면서도 스스로 일컫기를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다고 하며, ▨▨▨▨▨▨ 한다. 무심하게 안심하는 척하여
54 더불어 창검을 가지고 다투지 않고, 병력을 정예하게 하여
55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내어
56 그 나쁜 적들이 힘이 다하고 기운이 쇠해지기를 기다려서, 군(君)이 (이에) 몰래 간첩을 보내서 그 병사들이 게을러진 때를 엿보아 ▨▨▨를 구축하고 틈을 타고 때를 기다려 문을 뚫고 굴을 열어 병사를 풀어서 엄습케 하여 (하략).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