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전공비(金時敏 戰功碑)
- 시대
- 조선
- 연대
- 1619년(광해군 11)
- 유형
- 비
- 재질
- 돌
- 크기
- 전체높이 277.0cm, 비신높이 201.6cm, 너비 99.0cm, 두께 17.9cm,
-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499-1 진주성내
- 출토지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499-1 진주성내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각자/서자
- 성여신(成汝信) / 미상 / 한몽인(韓夢寅)
- 지정사항
- 시도유형문화유산
- 연구정보
개관
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3대첩(三大捷)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것으로, 현재 진주성내(晋州城內)에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김시민(金時敏, 1554∼1592)은 조선(朝鮮) 중기의 무신으로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시하였으며,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地)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되었다.그 해 9월에는 진해(鎭海)로 출정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다하라(平小太)를 사로잡는 등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그 해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약 2만명은 대나무 사다리 수 천개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여 왔는데,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 휘하의 병사는 3,800명에 불과하였으나, 부녀자와 노약자까지 총동원하여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10월 10일에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는데, 김시민장군은 전투 후 순찰하다가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얼마 후에 몰하였다.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의정·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추증(追贈)되었다. 괴산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 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판독문/해석문
| 판독문 | 이우태 | ||
| 해석문 | 이우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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