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선생대마도반구일기(勉菴先生對馬島返柩日記)
개요
곽한소(郭漢紹)가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대마도에서 순국하던 11월 17일부터 유해가 조선으로 돌아온 12월 13일까지 16일간의 노정을 기록한 책이다. 내용은 충남 청양군 정산 최익현 본댁에서 출발하여 부산항까지 영구(靈柩)를 맞이하러 가서 다시 정산으로 영구를 모시고 오는 왕복여정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으며, 영구가 일본에서 돌아오게 되는 과정에서 당시 조선쪽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밖에『면암선생대마도반
곽한소(郭漢紹)가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대마도에서 순국하던 11월 17일부터 유해가 조선으로 돌아온 12월 13일까지 16일간의 노정을 기록한 책이다. 내용은 충남 청양군 정산 최익현 본댁에서 출발하여 부산항까지 영구(靈柩)를 맞이하러 가서 다시 정산으로 영구를 모시고 오는 왕복여정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으며, 영구가 일본에서 돌아오게 되는 과정에서 당시 조선쪽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밖에『면암선생대마도반구일기』에는 최익현의「유소(遺疏)」와 영구를 본댁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곽한소의『면암선생양례일기(勉菴先生襄禮日記)』도 수록되어 있다.
해제
| 표제 및 권수제 | 표제: 勉庵先生對馬島返柩日記, 권수제: 없음 |
|---|---|
| 저자 | 곽한소(郭漢紹, 1869~1936) |
| 판종 | 필사본 |
| 작성연대/간행시기 | 1906년 |
| 형태사항 | 1책 / 가철 / 사주무변, 무계, 무어미, 주쌍행(註雙行) / 10행 자수부정 / 23.0 x 20.0cm |
| 소장처 | 모덕사 |
개요
이 책은 곽한소(郭漢紹)가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대마도에서 순국하던 11월 17일부터 유해가 조선으로 돌아온 12월 13일까지 16일간의 노정을 기록한 책이다.『면암선생대마도반구일기(勉菴先生對馬島返柩日記)』와『대마도반구일기(對馬島返柩日記)』로 표제가 다른 두 본이 있으나, 편의상『반구일기』로 지칭한다. 이 일기는 충남 청양군 정산 최익현 본댁에서 출발하여 부산항까지 영구(靈柩)를 맞이하러 가서 다시 정산으로 영구를 모시고 오는 왕복여정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으며, 영구가 일본에서 돌아오게 되는 과정에서 당시 조선쪽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밖에『면암선생대마도반구일기』에는 최익현의「유소(遺疏)」와 영구를 본댁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곽한소의『면암선생양례일기(勉菴先生襄禮日記)』도 수록되어 있다.
"곽한소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윤도(允道), 호는 경암(敬菴), 경직재(敬直齋)이다. 조부는 곽치영(郭致英)으로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다가 승진되어 용양위부호군을 지냈다. 1882년 경기도 지평의 북면 진대곡(眞垈谷)에서 부 곽정현(郭定鉉)과 모 전의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우는 한종(漢宗)과 한기(漢綺)이다. 그의 집안은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충청도 공주로 이사한 뒤에 연기에 정착하였는데, 그는 연기의 태천으로 이거한 뒤 16세 때 부안임씨와 혼인하였다. 그는 부친의 서당에서 월헌(月軒) 이연덕(李淵悳)에게 공부하였으며 20세에 최익현의 문하에 들어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승을 따라 항일운동에 동참하면서『문변록(聞變錄)』에 투쟁의 상황을 기록하였으며, 최익현의 사후에는 스승의 문집 발간을 위하여 1907년부터 정산에 머물면서 3년간 완간될 때까지 간역(刊役)에 힘썼다. 이후 그는 연기에 은둔하며 유생으로서 독서와 문장, 후진양성으로 일생을 보냈고, 특히 선조의 유문(遺文)을 정리하거나 족보발간 등 문중사업에 전심하였다.
곽한소의 유고(遺稿)는 외아들 곽해근(郭海根)을 거쳐, 현재 곽노권(郭魯權)이 소장하고 있는데, 영인 간행된 전 10책의 『경암전집(敬菴全集)』과 그중에서 시서와 일기류를 선별하여 국역한 5책의『국역 경암전집國譯 敬菴全集』이 있다. "
"『면암선생대마도반구일기』와『대마도반구일기』는 내용이 동일하고, 모두‘병오년 11월 17일 인시 고복(皐復)’이라고 표지에 간지가 명시되어 있고, 본문 첫 장에 각각‘문인서원곽한소근록’·‘문인곽한소근록’이라고 저자가 명시되어있으며,『양례일기』역시‘문인서원곽한소근록’이라고 따로 명시되어 있다. 합본된 최익현의「유소」는 병오 7월 11일의 기록과 함께 정미 3월 초 7일에 입철(入徹)하였다고 세자(細字)로 적혀 있으며,『양례일기』는 3월 21일부터 4월 8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책들은 모두 해서로 쓰였으며 날짜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노정에 날짜마다 간지와 날씨가 기록되어 있다.『면암선생대마도반구일기』는 중간에 필체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나 고쳐 쓴 곳은 많지 않고,『대마도반구일기』는 필체가 한결같고 고쳐 쓴 흔적이 많으며,『양례일기』는 더 정갈하게 쓰인 편이다.
내용이 중복되는 것으로 최익현의 제자 최제학(崔濟學)이 쓴 『반구일기(返柩日記)』도 있는데, 최익현의 병세가 악화된 1906년 10월 19일부터 1906년 12월 22일까지 18일간의 사정이 기록된 필사본으로 임병찬의 손자가 소장하고 있다. 이 책이 합본되어 있는 임병찬(林炳瓚)의『대마도일기』역시 최익현의 대마도에서의 생활상 및 순국전후의 상황을 기록한 책으로, 필사본 1책이며 부산의 상무사(商務社) 김영규(金永圭)의 애도문이 부록되어 있다."
"1) 반구의 경위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체결에 참여한 자들의 처단을 주장하였으며, 이듬해 2월 호남으로 내려가 임병찬과 태인에서 거병했지만 6월에 체포되어 최익현, 임병찬, 고석진(高石鎭), 최제학 등 13인의 의사들은 일본군사령부에 구금되었다. 7월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다시 일본의 쓰시마(對馬島)의 이즈하라(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 최익현은 일본의 회유와 협박을 물리치고 단식으로 저항하였고 1907년 10월 19일 병환이 시작하니, 임병찬이 간호하다가 다급히 서울로 전보를 쳤다. 이때에 최제학과 고석진이 사령부에서 풀려나 있었으므로 노병희(魯炳憙)와 최익현의 큰아들 최영조(崔永祚)와 함께 수의를 준비해서 대마도에 들어갔으며, 최익현은 죽음에 임박하여 임병찬에게 「유소」를 구술하고 순국하였다. 영구는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내기 위해 11월 21일 배편으로 동래부 초량(草梁)에 돌아오게 되고, 저자는 부산으로 달려가 정산의 본가로 영구를 운구하는 과정에 전력을 다하였다.
2) 반구여정 및 주요 사건
저자는 17, 18, 19일까지는 최익현의 순국에 대한 대마도 쪽의 전후사정을 적었고, 20일에 정산에서 급히 출발하는 것으로 노정을 시작하였다. 저자는 이때에 정산에서 최익현의 막내아들 영복(永福)과 출발하여 공주를 거쳐 대전에 이르러 기차에 올라 옥천, 영동, 황간, 금산, 대구, 청도, 밀양을 지나 저녁에 동래 초량의 상무사(商務社)에 도착하였다. 21일에 영구를 맞이하여 통곡하고 육지로 내렸으며, 최영설(崔永卨)이 집례, 최만식(崔萬植)이 사화, 노병희가 호상, 저자와 최제학이 사서를 담당하고, 고수남(高秀南)이 명정을 썼다. 22일에 성복(成服)하고, 23일에‘춘추대의일월고충(春秋大義日月高忠)’을 써서 매달고 발인하였다. 24일에 어제는 귀포 고창사(古倉舍)에서 묵었고, 이 날은 김시환(金始煥)이 주선하여 접대하였다. 25일에 양산 출두리를 지나고 낙동강 하류를 건너 김해 선암 활천을 지났다. 26일에 거인리 관창터와 벽송정(碧松亭)을 지나 노치를 넘어 창원 자여역점(自如驛店)에서 묵었다. 27일에 신풍현, 행화정(杏花亭)을 거쳐 칠원 군수가 영구를 맞이하여 작청(作廳)에 모셨다. 28일에 영산 상포진을 건너 창녕읍 작청에 묵었다. 29일에 현풍 송예를 거쳐 읍내에 이르러 군수가 접대하였고 삼가, 단성, 의령의 사우 팔십여 명이 와서 치전하였다. 12월 1일에 성주 안원을 지나 읍내에 도착하니 송규락(宋奎洛)이 와서 접대하였다. 2일에 부상점(扶桑店)을 거쳐 금천시점(金泉市店)에서 묵었다. 3일에 봉계, 황간 시목골, 추풍역을 지나 읍내에 도착하니 군수와 대구 유생들이 와서 전제를 지냈다. 4일에 영동 미륵당(彌勒堂)을 지나 옥천 진평점(榛坪店)에서 묵었다. 5일은 바로 선생의 생신날이라 더욱 통곡하였으며, 송치, 삼기리, 증약역, 양길치, 회덕을 지나니 송석구(宋錫九) 일행과 진잠·회덕 유생이 와서 조곡하였고 공주 유성시장에서 묵었다. 6일에 사치를 넘어 공암을 지나니 저자의 부친이 달려와 조문하였다. 마치를 넘어 금강 창벽의 위험한 길을 안전하게 지나서 안도하였다. 7일 저녁에 정산 장귀동 본가에 도착하여 중화당(中和堂)에 봉안하였다. 8일에 저자는 목공의 관 제작을 감독하고 조객들을 접대하였으며, 조객(弔客)록, 부의(賻儀)록, 치전(致奠)록, 가마(加麻)록, 전부(傳訃)록, 제문(祭文)록, 만사(挽詞)록을 기재하였다. 9일에 저자는 관의 내부 도색과 입관제구 제작과 최질을 마련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10일에 미시(未時)에 관을 열어보니 시신이 생시 같았으며 새로 대렴하였다. 11일에 저자는 관의 외부 도색을 감독하였으며, 미석(渼石)이 명정을‘면암최선생지구(勉菴崔先生之柩)’라고 고쳐 썼다. 12일에 관위의 명정을 최재창(崔載昌)이 썼고, 저자는 그와 부고를 만들어 원근 각지로 보냈다. 13일에 오시(午時)에 성빈(成殯)하였다.
3) 「유소」와『면암선생양례일기』
순국 직전에 대마도 배소에서 문인 임병찬에게 구술한 「유소」는 일제의 침략으로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고령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구국의 충정과 굳은 결의를 담았다. 살아 돌아갈 희망은 없지만, 차마 구복(口腹)을 더럽힐 수 없으므로 음식을 물리어 선왕께 바치는 의리를 따르기로 각오하였으며, 역적과 원수를 멸하지 못하고 국권과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나 왜적은 반드시 망할 것인데, 단지 우리가 그들에게 대응의 방법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일 뿐이므로, 폐하께서는 분연히 용기를 내어 뜻을 바로잡고 복수의 뜻을 견고히 하여 기미를 엿보아 일을 추진해야 하며 그 기회는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상소하였다.
면암의 유해가 정산에 도착한 후로는 묘지 선정의 문제가 급한 과제였으므로, 호서 호남 방면에 널리 길지를 구하여 음력 3월 중순경 노성현 북방 월오동 지경의 무동산에 묘지를 정하였다.『양례일기』3월 21일에 산처에서 토지신에게 제를 지냈고, 22일에 양례기일이 촉박하여 심려가 많으며, 23일에 막내상주가 산처에서 돌아오고, 포천상주가 왔다. 24일에 왜추가 양례일자와 노정, 빈객의 숫자를 탐문하였고, 25일에 저자가 홀기와 축문 등을 초(抄)하였고 정산군수에게 부탁했던 제절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26일에 재혈(裁穴)에서 정백운(丁白雲)이 점한 당중평포처(當中平鋪處)로 정하였으며, 27일에 저자의 본댁에서 노복과 나귀를 보내주었으며, 집사망기(執事望記)를 기록하였다. 28일은 발인날로, 유복급가마수상록(有服及加麻隨喪錄)을 기록하였고, 29일에 박씨들이 산역을 금하여 권폄(權窆)으로 허락받고, 4월 삭일에 하관하고 본댁에 도착하여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2일에 유집 간행을 의논하였고, 3일에 재우(再虞)를, 4일에 종우례(終虞禮)를 행하였고, 5일에 저자는 여러 사서들과 만뢰등의 문자를 정서하여 베껴 썼다. 6일에 졸곡(卒哭)을, 7일에 부제(祔祭)를 행하고, 8일 저녁에 돌아와 영연을 모시고 저자는 사부장(謝賻狀)을 썼다."
"저자는 20세에 최익현의 문하에 들어가서 스승을 보필하며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고, 스승의 순국 후에는 반구와 장례, 문집의 편찬까지 도맡아했던 학자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고 저술들의 국역도 다 갖추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이 일기는 저자의 일면을 고찰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익현선생의 항일의거는 대략이나마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항일 운동에 동참한 제자들의 연구는 극히 적은 가운데, 동시대에 같이 활동하던 인물들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는 한말의병연구의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기록에서 미진하거나 빠진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데, 저자의『반구일기』는 당시 대마도 쪽이 아닌, 정산 최익현의 본댁에서 부고를 듣고 부산항에 가서 영구를 맞이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저자는 또 장구동에 머물며 장례 실무에 전념하면서 그 과정을 기록하여 택지(擇地)와 장례절차를 잘 전해주고 있다."
"郭漢紹, 『國譯 敬菴全集』5, 譜文社, 2007.
『勉菴集』 부록 3, 한국고전번역원DB.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1, 1971.
朴敏永, 『나라와 가문을 위한 삶 곽한소』, 역사공간, 2017.
朴敏永,「敬菴 郭漢紹의 생애와 항일투쟁-崔益鉉 擧義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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