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묘
- 왕릉명
- 연산군묘
- 능주명
- 제10대 연산군·거창군부인 신씨
- 왕릉위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로17길 46
- 조성연대
- 1506년 연산군묘 조성, 1513년 이장, 1537년 거창군부인묘 조성
- 왕릉형태
- 쌍분
능의 조성
연산군묘는 연산군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강화도 교동에서 1506년 11월 6일에 사망하자, 연산군을 왕자군의 예로 장사지냈다. 장사한 지 6년이 지난 1512년에 연산군 부인 신씨가 연산군의 묘를 자신의 외조부 임영대군의 땅이 있는 양주 해촌으로 이장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1513년 2월 20일 연산군의 무덤을 왕자군의 예로 개장(改葬)하였다. 거창군부인 신씨는 24년 후에 연산군 옆에 부장되었는데, 1537년 4월 8일 신씨가 사망하자 1537년 6월 26일 왕자군 부인의 예보다 높은 왕후 고비(考?)의 예로 장사지냈다. 이후 연산군묘는 지속적으로 관리되었는데, 1653년(효종 4)과 1792(정조 16)년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냈고, 1904년(고종 41)에는 무너진 곳을 개수하였다.
능주 소개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조선 제10대 왕이자 조선 최초의 폐군이다. 연산군의 아버지는 조선 제9대 왕 성종이며,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폐비윤씨(廢妃尹氏)이다. 연산군은 7세에 서연(書筵)을 통해 세자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1년 후 생모인 윤씨가 사망하게 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방치된 윤씨 능묘 천장(遷葬)두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대립하였다. 재위 4년인 1498년 7월 많은 신진 사류(士類)와 삼사에 속한 대간들을 죽인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어났다. 이후 국왕(연산군)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심인 사냥과 사치를 즐겼고 국고의 사정은 나빠졌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 윤씨 복위와 관련하여 과거 그 죽음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죽인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있었다. 국왕의 악행과 실정이 극에 달하자 1506(중종 1) 훈구파를 중심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자 중종반정을 일으켰으며 연산군은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났다. 실록에는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폐위 된지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거창군부인 신씨(1472~1536)는 연산군(燕山君)의 부인으로 영의정(領義政)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1488년(성종 19) 왕세자였던 연산군과 가례를 올렸다. 5남 1녀를 낳았는데, 이 중 폐세자 이황, 창녕 대군(昌寧大君) 이성(李誠), 휘순 공주(徽順公主)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봉해졌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산군이 폐위당하고 강화도 교동현으로 옮겨지자 따라가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9월 26일에는 두 아들이 함께 사사되었다. 11월 8일 연산군이 역질로 사망하자 강화도 교동에 장사지냈는데, 1512년(중종 7) 왕에게 양주 해촌(海村)으로 이장(移葬)하기를 청하였으며, 중종은 이를 허락하고 왕자의 예로 정중히 개장하도록 하였다. 1537년(중종 32) 신씨가 사망하자 중종은 연향(宴享)을 미루고 왕후(王后)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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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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