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릉
- 왕릉명
- 건릉
- 능주명
- 제22대 정조·효의선황후
- 왕릉위치
-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 조성연대
- 1800년 왕릉, 1821년 천릉, 1821년 왕후릉
- 왕릉형태
- 합장릉
능의 조성
건릉은 정조와 왕비 효의왕후의 합장릉으로 봉분이 1기인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화산 아래 위치한 건릉은 정조의 부모가 잠들어 있는 융릉과 왼쪽으로 자좌향으로 위치해 있다. 건릉은 1800년 처음 조성 당시에는 융릉의 오른편 자리인 택개현 인근 재화 자리 부근에 조성되었으나 1821년 김조순의 주장으로 지금의 융릉 왼편 자리로 천릉하였다. 1821년 정조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건릉에 합장하기로 하였는데 당시에는 택지가 불길하다고 하여 지금의 위치로 천릉을 하면서 효의왕후릉을 함께 조성하였다. 천릉할 곳이 구 능지와 가까웠기 때문에 구릉의 석물을 옮겨서 새로운 능에 배치하도록 하였는데 장명등을 비롯해 문무석인과 석수 등 석물은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혼유석은 하나만 설치하게 하였다. 1800년 조성된 건릉에서는 다양한 명기류를 비롯하여 편경, 편종 등 악기도 발굴되었다.
능주 소개
정조(正祖, 1752~1800)는 조선 제22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다.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는 청원부원군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이다. 1759년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뒤에 진종이 됨)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즉위하자 곧 규장각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문형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인재를 모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임진자·정유자 등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 후기 사회에 맞추어 재정리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續五禮儀)』·『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국조보감(國朝寶鑑)』·『대전통편(大典通編)』·『문원보불(文苑黼黻)』·『동문휘고(同文彙考)』·『규장전운(奎章全韻)』·『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이 그 결과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임이 당쟁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이라는 문풍이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정조는 이와 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 있게 장려해 문운을 진작시켜 나갔다.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 확산을 꾀해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도 적극 지원하였다. 정조대의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에 입각한 조선중화의식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의 대의명분 아래 조선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해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고유문화현상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문화의 제반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간행하였고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정조의 업적은 이밖에도 『일성록(日省錄)』의 편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의 설치, 형정의 개혁, 궁차징세법의 폐지, 『자휼전칙(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의 폐지, 천세력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였던 서학에 대해 정학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재위기간 동안 추진했던 많은 정책은 실현을 보지 못했다.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훙서하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1821년 비 효의왕후가 승하하면서 융릉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健陵)’이 되었다. 시호는 ‘문성 무열 성인 장효 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다. 효의왕후(孝懿王后, 1754~1821)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원비이다. 본관은 청풍으로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증찬성 홍상언(洪商彦)의 딸이다 한성부 가회방 사제에서 출생하였다. 1762년 세손빈으로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고,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시니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애가 극진하여 화완옹주가 자신을 괴롭혔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하며, 청연(淸衍)·청선(淸璿) 두 군주와는 더욱 우애가 돈독하였다. 청선군주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비통해하였고, 그 자녀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성품이 깨끗하고 절개가 굳어 개인적인 사욕에 흐르지 않았기에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경계하여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궐의 재물은 공물이라 하여 사사로이 사가에 물화를 내린 적이 없었다.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시호는 ‘예경 자수 효의 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이고,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안녕리에 있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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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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