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태조어진
해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재위 1392~1398)의 초상화이다. 태조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여러 곳에 어진이 봉안되었다. 왕의 초상화를 모신 곳을 진전(眞殿)이라 하는데, 조선 초기 태조의 진전은 서울의 문소전(文昭殿)을 비롯하여 옛 왕조의 도읍지였던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그리고 본관인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태조의 고향인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등 여섯 곳이었다. 태조의 진전은 제도의 변화나 전쟁의 참화 등을 이유로 축소되어 조선 후기에는 경기전과 준원전만 남게 되었다. 태조 어진은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여러 번 모사되었는데, 왕들의 초상화를 보관한 선원전(璿源殿)에는 한 때 26축에 달하는 태조 어진이 있었다고 전한다. 태조 어진은 현재 유일하게 한 점이 온전한 상태로 전한다. 이 초상화 외에도 1900년에 조중묵(趙重默), 채용신(蔡龍臣, 1850~1941) 등이 이모한 붉은 색 곤룡포를 입은 태조 어진이 남아있으나 얼굴을 포함하여 절반 이상이 소실된 상태다. <조선 태조 어진>은 1410년 경기전에 봉안된 어진을 1872년(고종9)에 모사한 것이다. 당시 모사 과정을 기록한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따르면 어진을 그린 화사는 조중묵, 박기준(朴基駿), 백은배(白殷培, 1820~?), 유숙(劉淑. 1827~1873), 이창옥(李昌鈺), 박용기(朴鏞夔, 1873~?), 박용훈(朴鏞薰. 1841~?), 안건영(安健榮, 1841~1876), 조재흥(趙在興), 서두표(徐斗杓) 등 10인이었다. 화면 우측 상단에 “태조대왕어용(太祖大王御容) 소자사복지구년임신(小子嗣服之九年壬申) 이모(移摹)”. “태조고황제어진(太祖高皇帝御眞)”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앞쪽의 표제는 1872년 제작 당시에 붙인 것이고, 뒤쪽의 붉은 비단에 적힌 표제는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태조를 황제로 추존한 뒤 1900년에 새로 써서 붙인 것이다. <조선 태조 어진>에서 태조는 평상시의 집무복인 익선관(翼善冠)과 청색 곤룡포(袞龍袍) 차림이다. 숙종실록의 기사를 보면 태조 어진의 복색이 청색인 것을 고려의 유습으로 해석하였다. 1444년(세종 26)에 대홍색 곤룡포(大紅色 衮龍袍)를 명에서 사여 받은 이후 조선의 왕은 붉은색 곤룡포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는데, 이 복식은 그 이전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 밖에 좁은 소매, 간편한 신발의 복식 역시 조선 전기의 왕실 복식을 반영한다. 어진 속 태조는 정면을 향하고 두 손을 소매 안에서 맞잡은 공수자세를 취하고 용상에 앉아 있다. 어깨와 하체가 실제보다 과장되게 크게 그려져 전체적으로 삼각구도를 이루었다. 이처럼 좌우대칭의 정면상, 안정된 삼각구도는 초상화에 절대자의 권위를 부여하는데 효과적이다. 현존하는 어진 중에는 태조 어진을 제외하고 정면상을 취한 경우가 드물어 조선 초기의 구도로 추측된다. <조선 태조 어진>의 얼굴 묘사에서도 조선 초기의 양식을 상당 부분 반영한다. 조선 후기에는 초상화에 음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초상화는 음영 대신 선묘를 위주로 하였다는 점에서 원본의 양식을 되도록 반영하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곳곳에 음영이 부드럽게 가미된 것은 1872년 다시 모사할 당시의 관습이라고 추측된다.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 어진으로 국보에 지정되어 있다. 모사할 당시의 의궤와 함께 전하고 있어 어진화사의 화풍과 제작 과정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원본 도상과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조선 말기에 어진을 모사한 제도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글: 유재빈
제발문
태조대왕(太祖大王) 어용
太祖大王御容
-소자가 왕위를 계승한 9년째 임신년(1872, 고종9)에 이모하였다-
-小子嗣服之九年壬申移摸-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어진
太祖高皇帝御眞
국역: 김채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