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조선 숙종(肅宗, 재위 1674~1720)대에 소론을 이끌었던 윤증(尹拯, 1629~1714)의 초상화이다. 사방관을 쓰고 하얀 도포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두 점의 흉상 중 한 점은 정면상이고, 다른 한 점은 고개를 살짝 돌린 측면상이다. 이 두 점의 흉상과, 장경주(張敬周, 1710~?)와 이명기(李命基, 1756~1813 이전)가 각각 그린 전신좌상 3점, 그리고 초상화 제작 및 이모과정 전반의 기록을 담은 『영당기적(影堂紀蹟)』이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장황(裝潢) 없이 배접만 되어 있는 상태로 전하고 있는 이 흉상 두 점은 화면에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언제, 누가 그린 것인지 확인이 어렵다. 『영당기적』에도 이 초상들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파악은 어렵지만, 현재 전하고 있는 윤증의 전신상과 비교를 통해 흉상을 그린 화사(畵師)가 누구인지 유추해 볼 수 있다. 흉상의 표현기법을 살펴보면, 안면은 배채를 한 후 앞쪽에서 얼굴의 윤곽을 가는 선으로 규정하였으며, 콧등의 양옆과 양쪽 볼은 조금 짙은 색을 중첩하여 칠해 줌으로써 안면의 굴곡을 묘사하는 등 정식 초상화와 같이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반면 도포는 하얀색 안료를 칠한 후 가는 먹선으로 의습선을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장경주가 1744년에 제작한 전신상과 동일하며 그 크기 또한 비슷하여, 이 두 점의 흉상은 장경주가 전신상과 함께 그린 것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한편, 『영당기적』에는 1711년에 변량(卞良, 생몰년 미상)이 윤증 초상화의 초본을 제작한 내용이 실렸고, 정면 흉상을 포장하였던 종이에는 “처음 그린 초본 같다. 절대 훼손하거나 더럽히지 말라”라는 글이 쓰여 있어, 이 두 점의 흉상이 현존하지 않는 변량이 그린 초본과 가장 유사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두 점의 흉상은 화기를 남기지 않아 언제, 누가 그린 것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점은 아쉽지만, 기록으로만 확인되는 변량이 그린 초상화 원본과 장경주가 제작한 정면상의 모습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윤증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이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대립하였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장경주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예보(禮甫)이다. 인동장씨 화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부 장자욱(張子旭, 1660~?), 부친 장득만(張得萬, 1684~1764)도 화원이었고, 친동생 장사주(張師周, 1707~?) 역시 도화서 화원이었다. 1744년(영조 20) 영조의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하였고, 1748년에는 숙종어진 모사(模寫)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하였다. 사천현감(泗川縣監)을 지냈으며, 1744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등을 그렸다. 글: 장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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