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조선 후기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 1629~1714)의 전신초상이다. 윤증의 초상화는 전신상 3점과 소상 2점, 그리고 초상화 제작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영당기적(影堂紀蹟)』이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전신상 3점은 1744년에 장경주(張敬周, 1710~?)가 그린 1점과 1788년에 이명기(李命基, 1756~1813 이전)가 그린 2점으로, 세 점 모두 복식이나 취세(取勢)는 동일한 측면좌상이다. 사방관을 쓰고 하얀 도포를 입은 전신 초상으로, 양손을 소매 밖에 꺼내어 맞잡고 있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흰 도포와 검은색 띠, 검은 사방관은 흑백대비를 이루면서 긴장감을 느끼게 하며,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노론과 소론간 당쟁이 치열하던 때 소론을 이끌었던 노학자의 권위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또한 상투관이 훤히 비쳐 보이도록 미세한 먹선을 그어 표현한 사방관 표현은 조선 시대 초상화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첫 번째 장경주가 그린 윤증의 초상은 화면 왼쪽에 쓰여 있는 화기(畵記)와 『영당기적』의 내용을 통해 1711년에 변량(卞良, 생몰년 미상)이 그렸던 윤증의 초상화를 본 떠 그린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장경주는 정면상 1점과 측면상 3점 등 총 4점을 이모(移模)하였으나, 3점은 손상되어 세초(洗草)하여 묻었고 현재는 측면상 1점만이 전하고 있다. 또 다른 두 점은 1788년에 이명기가 모사한 것이다. 한 점은 장경주가 그린 것을 보고 그대로 본 뜬 구법본이고, 또 다른 한 점은 전통적인 표현기법 대신 입체감을 강조한 새로운 화법, 즉 신법을 적용하여 표현한 것이다. 구법본은 이모본의 특성에 따라 자신의 화풍은 최대한 배제한 채 장경주가 그린 초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소매 밖으로 가지런히 모은 양손과 안면부에서는 약간의 음영을 가미하여 장경주의 작품보다 입체감이 살짝 두드러진다. 한편, 신법을 사용해 제작한 윤증 초상은 취세와 외형은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선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면 표현에 중점을 두는 등 서양화법의 적용이 확연히 눈에 띈다. 안면부와 의습의 윤곽을 색의 중첩을 통한 음영 차이로 굴곡을 나타냈으며, 손의 표현 역시 구법으로 제작한 초상에 비해 사실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의복은 노랗게 염색된 비단바탕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바탕비단의 색보다 조금 짙은 선으로 의습선의 윤곽을 설정하고, 엷게 갠 호분을 넓게 칠해 도포의 면을 표현하였다. 호분을 중첩하여 두껍게 칠해 표현한 도포는 지나치게 볼륨감을 강조한 음영표현으로 인해 의습선이 호분 밑에 파묻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처럼 신법의 윤증 초상은 지나치게 입체감을 강조하는 바람에 주인공이 화면에서 가벼이 떠 있는 듯이 보여 오히려 그 완성도가 떨어진다. 『영당기적』에도 비판적인 평이 남겨져 있는 것처럼 노학자의 고매한 품격과 전신을 담아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1711년에 변량이 제작한 최초의 윤증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지만, 1744년에 장경주가 모사한 초상화와 1788년에 이명기가 모사한 구법과 신법 초상화, 그리고 초상화 제작과 이모과정 전반을 기록한『영당기적』을 남기고 있어 조선 시대 초상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글: 장인석
제발문
명재선생(明齋先生) 유상
明齋先生遺像
숭정(崇禎) 기원후 세 번째 무신년(1788, 정조12) 2월에 모사하다.
崇禎紀元後三戊申二月摹.
국역: 김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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