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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세건신도비(南世健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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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576년에 건립된 남세건(南世健)의 신도비(神道碑)이다. 이 비는 비좌개석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맞배지붕이다. 대석에는 복련이 있으며, 성모재(誠慕齋) 아래 비각 안에 있다. 비는 마멸이 진행되고 있으나 판독이 가능하다. 남세건의 묘는 정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와의 합장묘이다. 상석·향로석·혼유석·계체석·장명등·문인석·망주석과 조선 중기에 건립한 비좌원수의 묘표가 있다.
남세건(1484~152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자는 백순(伯順)이고 증병조참판 변(忭)의 아들이다. 1524년(중종 19) 참봉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1536년 병조참판에 이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호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고 1541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인종이 즉위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호조참판이 되고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 겸 주문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1546년 형조참판에 이어 이듬해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1548년(명종 3) 경기도 관찰사로 나가 흉년으로 인해 궁핍해진 민생을 돕고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또한 충효한 사람 및 절개를 지킨 부녀자들을 포상할 것을 왕에게 상소하였다. 1549년 공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대사성·호조참판이 되었다.
예조참판(禮曹參判) 남공(南公)의 묘비(墓碑)
유명조선국 가선대부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남공묘비명 : 서문을 아울러 쓰다.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은 글을 짓고,
남(男) 가선대부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응운(應雲)은 전액을 쓰고,
전연사제검어모장군 이집(李磼)이 글씨를 쓰다.
공의 이름은 세건(世健)이며, 자는 백순(伯順), 성은 남씨(南氏),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7대조는 을번(乙蕃)으로 고려 때에 시중(侍中)을 지냈고, 시호는 경렬(敬烈)이다. 그의 아들은 재(在)이며, 호는 구정(龜亭)으로 우리 태조(太祖)의 개국을 도와 일등공신권(一等功臣券)을 하사받고, 좌의정(左議政)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그의 아들은 경문(景文)으로 병조의랑(兵曹議郞)을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고조가 된다. 그의 아들은 지(智)이니, 관직은 충경공과 같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그의 아들은 칭(偁)이니, 내섬시부정(內贍寺副正)을 역임하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은 변(忭)이니, 삭령군수(朔寧郡守)를 역임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좌참찬(左參贊) 한성군 이훈(李塤)의 여식을 맞아 성화(成化) 갑진년(1484, 성종 15) 4월 기묘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경술(經術)에 정통하여 여러 무리들이 매우 존경하였다. 정묘년(1507, 중종 2)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여러 번 추천을 받았으나 등용되지 않다. 그러다가 임오년(1522, 중종 17)에 경능참봉에 음직(蔭職)으로 보임되었다. 다시 학문에 더욱 힘써 갑신년(1524, 중종 19)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고, 정자(正字), 저작랑(著作郞)으로 승진하였다. 병술년(1526, 중종 21)에 시강원(侍講院) 설서(設書)로 옮긴 뒤 사서(司書)로 승진하고, 정해년(1527, 중종 22)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전직하였다. 무자년(1528, 중종 23)에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승진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弘文館)의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를 역임하고, 경인년(1530, 중종 25)에 장령(掌令)으로 승진한 뒤 부응교(副應敎)로 옮기고, 신묘년(1531, 중종 26)에 응교(應敎) 겸 필선(弼善)이 된 뒤 곧바로 전한(典翰)에 승진하였다. 계사년(1533, 중종 28)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가 가을에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니, 관직에 오른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시의(時議)는 매우 합당하다고 평하였다. 그해 겨울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다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관직이 바뀌었는데, 10여 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송사(訟事)를 명료하게 해결하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예조참의로 옮기고, 이어서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을미년(1535, 중종 30)에 좌부승지로 체직되었다가 겨울에 다시 우승지가 된 뒤 여러 차례 도승지에 올랐다. 병신년(1536, 중종 31)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특별히 가자(加資)되어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병조로 옮기고, 다시 얼마 되지 않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정유년(1537, 중종 31)에 모친의 병으로 공조참판(工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관직이 바뀌었다가 가을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부친의 상을 당하자 극진한 예로 상례를 치렀고, 상을 마치자 외직인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 고을을 잘 다스렸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여러 차례 전직을 거쳐 중추부동지(中樞府同知)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을 지냈는데, 언제나 총관직(摠管職)을 맡았다.
정미년(1547, 명종 2)에 형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명종(明宗)께서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와 나라의 치도(治道)를 강론하고 연구하였는데, 공이 정성을 다하여 인도하는 공로가 매우 컸다. 무신년(1548, 명종 3)에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나가고, 경술년(1550, 명종 5)에 다시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고, 이어서 호조참판으로 옮겼다. 임자년(1552, 명종 7) 6월 2일 병으로 자택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 69세였다. 부고를 아뢰자 왕이 매우 놀라고 슬퍼하여 관리를 보내 조문하였다. 그해 9월에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선산(先山)인 광주 음촌리에 장사지냈다.
공은 심성이 엄중하고 조용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싫어하고 집안 살림은 가난하게 보일만큼 단출하였다. 평소 독서를 좋아하여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아 공무 외에는 바쁜 와중에도 반드시 책을 펴서 앞에 두었다. 시(詩) 또한 청신한 품격을 보였다. 평생을 산업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공무를 받들고 직분을 다 하는 데에만 뜻을 두어 몹시 춥거나 더운 날에도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다. 부인이 “어찌 공무에 대한 노고가 혼자만 이토록 심하십니까”라고 묻자 공은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맡은 일에 태만한 것은 신하가 아니오”라고 하였다. 일찍이 여러 번 좌절을 겪었을 때에 외숙인 의정 이유청(李惟淸)이 위로하며 이르기를 “누이의 일곱 아들 가운데 아무개가 복덕은 비할 데가 없으니, 결국 반드시 명상(名相)이 될 것이요”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과연 사실로 들어나 벼슬이 아경(亞卿)에만 머무르고, 향년이 하수(下壽)에 그쳤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이니, 본관은 성주(星州)로 고려 때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후손이다. 증조는 함녕(咸寧)으로 집현전(集賢殿) 교리였고, 조부는 숙생(叔生)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였다. 부친은 윤식(允湜)이니, 군자감정(軍資監正)이다. 모친은 숙인(淑人) 김씨(金氏)로, 안동부사(安東府使) 거(琚)의 따님이다. 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현명하여 예의범절에 맞게 행동하고 열 살이 안 되어 여공(女工)을 익혀 누구도 따르지 못하였다.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처신함에 있어 효도와 우애를 다하였고, 공에게 출가하여서는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였다. 공의 비첩(婢妾)에 대해서도 정성스럽게 돌봐주어 그 자식들을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대하였으니, 부인의 현명함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몸에는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혹 권하는 자가 있으면 “선비의 집안에서 나고 자라서 검소에 익숙하다. 이를 한 번이라도 몸에 안 걸치면 마음이 금방 불편하게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무당을 믿지 않아 일찍이 귀신을 섬기고 복을 비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나이가 팔십이 넘어서도 더욱 건강하였고, 집안을 다스리는데 조금도 결함이 없었다. 임신년(1572, 선조 5) 3월 17일 87세로 생을 마치니, 5월 경인(庚寅)에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응운(應雲)으로 지금 호조참판이고, 차남은 응룡(應龍)으로 공조참의를 역임했는데, 부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녀는 공주판관(公州判官) 정안(政顔)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이홍진(李弘縉)에게 출가하고, 3녀는 금성현령(錦城縣令) 정순호(鄭純호)에게 출가하였다. 참판 응운은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신세량(申世良)의 여식을 배필로 맞아 5남 1녀를 두었으니, 관(琯)은 청주판관(淸州判官)이고, 호(琥)는 우봉현령(牛峰縣令)이고, 침(琛)은 금천현감(衿川縣監)이고, 위(瑋)가 있고, 근(瑾)은 진사이다. 딸은 사인(舍人) 정연(鄭演)에게 출가하였다. 참의 응룡은 현감 정익수(鄭益壽)의 여식을 배필로 맞아 2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황(璜)으로 사축서(司畜署) 별제(別提)이고, 차남은 유(瑜)이다. 공주판관 정안의 슬하에는 1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억령(億齡)이고, 장녀는 판관 유영(兪泳)에게, 차녀는 진사 신타(申柁)에게, 3녀는 정제(鄭濟)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출가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사옹원 봉사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경성(景星)이고, 차남은 경윤(景潤)으로 개령현감(開寧縣監::TEXT)이고, 3남은 경청(景淸)이다. 딸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금성현령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문기(文起)로 일찍 세상을 떴고, 차남은 문근(文根)으로 진사이며, 장녀는 찰방(察訪) 이제(李磾)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찰방 임건(林楗)에게 출가하고, 3녀는 이명남(李命男)에게 출가하였다. 장손 관(琯)은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이성(以聖), 차남은 이현(以賢)이고, 딸은 어리다.
호(琥)는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이인(以仁), 차남은 이신(以信), 3남은 이공(以恭), 4남은 이경(以敬)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침(琛)은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이충(以忠), 차남은 이효(以孝)이고, 딸은 어리다. 위는 3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이영(以英), 차남은 이준(以俊), 3남은 이웅(以雄)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근(瑾)은 1남을 낳았으니, 이문(以文)이다. 정연은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흥문(興門), 차남은 창문(昌門), 3남은 보문(保門), 4남은 영문(榮門)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황(璜)과 유(瑜)는 각각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공은 또 측실(側室)에서 3남를 낳았으니, 응년(應年)은 관상감정(觀象監正)이고, 자녀가 없으며, 응수(應壽)는 사역원판관이고, 응명(應命)은 전의감정(典醫監正)이니, 각각 아들과 딸을 두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그 외에 내외 후손은 남녀를 합하여 모두 백여 명이다. 공의 장남 참판공 응운이 내게 와서 묘비(墓碑)의 글을 청하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그 세계(世系)를 차례대로 기록하고, 이어서 명(銘)을 쓴다.
선(善)은 사람에게 있고, 그 감응(感應)은 하늘에 달려 있으나
하늘은 반드시 이루기를 기약할 수 없고, 사람은 완전하기 어렵네.
징험(徵驗)이 있고 유감(遺憾)이 없음은 오직 공만이 그러했으니
천수에 이어 복을 누리고, 덕으로서 작위에 올랐네.
또한 그 부인께서도 그 아름다움에 짝할 만 하였으니
노력하고 또 덕을 쌓아 집안에 경사가 찾아왔네.
씨 뿌리고 김매지 않으면, 어찌 수확하랴.
조정의 녹 언제나 끊이지 않아 넉넉하게 끝없이 이어지리라.
만력(萬曆) 4년(1576, 선조 9) 5월 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