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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긍묘갈(李勉兢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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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1824년(순조 24) 강원도 철원에 건립된 이면긍묘갈(李勉兢墓碣)로 족제(族弟)인 이면백(李勉伯)이 비문을 지었고, 사제(舍弟)인 이면승(李勉昇)이 글씨를 썼다.
이면긍(李勉兢 : 1753~1812년)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대림(大臨)이다. 1783년(정조 7)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홍문관에 들어가 응교,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정조 11)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후 이조참의, 영천군수,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가. 일처리 소홀로 인해 파직되었다. 후에 복직하여 승지, 이조참판, 형조참판,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812년에는 의정부우참찬, 도감제조의 벼슬을 하다가 병으로 생을 마쳤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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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광동
이면긍묘갈
유명조선국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 겸 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이공 묘갈명병서
영조 계미년(영조 39, 1763년)에 동몽들에게 소학을 강론하게 하고 음식을 하사하였는데 여러 아동들이 다투어 음식을 움켜잡다가 국을 쏟아서 요를 더럽혔다. 임금께서 짐짓 꾸중하여 깨끗이 닦게 하시고서 그들이 하는 바를 시험하려 하셨다. 모두 두려워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당당하게 나와서 아뢰는 자가 있었으니, “조심하지 않은 잘못은 진실로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등이 비록 어리나 곧 강에 응한 선비인데, 전하께서 어찌 마땅히 청소의 일을 시키십니까?”하였다. 임금께서 크게 기특하게 여기셨으니, 그때 나이가 겨우 11세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일을 할 것이나 다만 나는 늙어서 미처 보지 못할 것이다.”하셨다. 인하여 세손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가 너의 임금이니, 잘 모시라”라고 하셨다.
아이는 후에 과연 정조의 지우를 받아 명성이 있었으니, 이분이 나의 족형으로 근래에 돌아가신 이조판서 이공이다. 휘는 면긍이고 자는 대임이다. 선계는 국성에서 나왔으니, 정종대왕의 별자이신 덕천군 후생이 그의 선조가 된다. 6대를 전하여 휘 경직으로 호는 석문이고 시호는 효민이며, 벼슬이 호조판서인 분이 계셨다. 효민이 상주목사를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된 휘 장영을 낳았다. 상주목사의 셋째 아들은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휘 구성이고, 넷째 아들은 제천현감을 지내고 사복시정에 추증된 휘 관성이다. 감찰이 호군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휘 문정을 낳았다. 호군이 봉화현감을 지낸 휘 광직을 낳았는데, 제천현감의 아들인 이조참판에 추증된 휘 진우의 아들로 도승지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휘 광보가 아들이 없어서 봉화현감의 둘째 아들인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휘 영순으로 양자를 삼았다. 공은 바로 동지공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온양정씨로 주서로 추증된 광익의 따님이다.
공은 1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세에 장원급제하였으나, 규정을 어겨서 6년 뒤에 발탁되었다. 계묘년(정조 7, 1783년)에 또 다시 장원급제하여 의례에 따라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문신초계에 들어가서 자주 강제에서 높은 등급을 받아서 매우 많은 상을 받았다. 공은 천성이 준엄하고 곧아서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또한 재주 있다는 평판이 일찍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에 시기하는 자들이 분연히 비방함이 많았다. 그러므로 아홉 달 동안 관리의 등용에 선발되지 못하였으나, 이윽고 임금께서 그 도와주는 이가 적으며 능히 떳떳한 도리를 지키고 묵묵히 훌륭한 일을 수행 할 수 있는 바탕이 있음을 깨달았다. 갑진년(정조 8, 1784년)에 수찬 · 교리 · 이조좌랑 · 정랑에 임명되었다. 정석에서 판당과 함께 처음으로 벼슬에 임명될 후보자들 올리는 일을 처리하였는데, 아침부터 한 낮까지 시간이 걸리자 임금께서 공이 그 직무를 태만히 한다고 진노하였다. 병오년(정조 10, 1786년)에 전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직동권관에 특보되었다. 얼마 안되어 부름을 받고 응교에 임명되어 서장관으로서 연경에 갔다. 행차가 출발하고 나서 특명으로 승지 · 대사성 · 이조참의 · 아전 등에 임명 되었다.
이병정이 공과 서로 사이좋게 사귀며 즐겁게 지내고자하여 자주 찾아오기를 성실하고 부지런히 하였으나 공은 그 사람을 비루하게 여겨서 거절하였다. 그러므로 이병정이 공에게 원한을 품고 장령 황장을 시켜서 상소하여 공을 무고하게 하였다. 임금께서 진노하시어 황장을 삭탈관직 시키고, 공을 승지로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께서 황장이 가명으로 상소하였으니, 인의가 못 된다고 하여 공을 외직으로 내보내어 면성첨사를 삼았다가 곧바로 이병정을 울진현감으로 내치고, 공을 이조참의로 불러들였다. 신해년(정조 15, 1791년)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마침 임금께서 대원에서 직분을 더럽히고 요란케 한 것에 대해 진노하여 모두 군으로 내보냈는데 공은 영천으로 나아갔다. 영천은 영남의 고을 중에 가장 폐단이 많았고, 더구나 흉년까지 들어서 민심이 흩어졌었다. 공이 진심을 다하여 편안하게하고,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은 곧바로 상소하여 요청한 뒤에 행하여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힘입고 있다. 계축년(정조 17, 1793년)에 이조참의로 돌아왔다.
공은 품계가 마땅히 올라가야할 자격에 해당하였으나, 임금께서 “공은 고사를 잘 알고 기력이 있으니, 마땅히 정원에 오래있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머뭇거려서 승진하지 못하였다. 공은 부모님이 모두 70여세였는데, 아우인 현재 시랑 면승이 또 다시 과거급제를 하자, 임금께서 칭찬하시기를 “복인이로다. 영천을 매우 잘 다스렸다고 들었으니, 어찌 하늘의 보답이 아니겠는가?”하셨다. 이때 국가에 별 다른 일이 없었고, 혜경궁 홍씨도 장수하고 강령하여 임금께서 팔역에 은혜를 미루어 나이 많은 이들에게 품질을 올려주시고자 하였다. 공에게 그 일을 전임하게 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갑인년(정조 18, 1794년)에 강원감사에 임명되어 동쪽 지방의 숨은 병폐를 조목 별로 갖추어 열거하고, 편리하고 마땅한 것을 상소하여 아뢰어 모두 시행되었다.
을묘년(정조 19, 1795년)에 승정원 안에 적임자가 없어서 특별히 공을 불러서 승지를 삼았다. 공은 비록 임금이 총애하여 돌봐주심이 융숭하고 두터웠으나, 더욱 공경하고 삼가는 예절을 드러내어 임금께서 말씀하신 것은 한번도 집에 돌아가서 전한 적이 없었다. 집안은 담박하여 귀한 신하의 모습이 없었으며, 오래전부터 교유한 궁한 선비들이 헤어진 옷과 관으로 찾아오면 문득 이끌고 들어와 함께 나란히 앉아서 밤새도록 즐겁게 담소하였다. 일찍이 병 때문에 휴가받고 있을적에 임금께서 경연의 자리에서 공의 근황을 물었는데, 모두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아무개가 친구가 없는 것이 곧 이와 같은가”하시고, 곧바로 주서 조석중에게 명하여 글로써 문안하여 전달하게 하였다. 또한 임금께서 늘 공이 가난하여 본양할 수 없는 것을 염려하였다.
무오년(정조 22, 1798년) 봄에 조정에 있으며 경상도관찰사로 추천할 때에 세 번 바꾸어 명하였는데, 맨 먼저 천거된 자도 노모가 있었으므로 주상께서 이윽고 재가하시고는, 여러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아무개가 어찌 조정에 죄를 지어서이겠는가?”하셨다. 7월에 특별히 개성유수에 제수되고, 품계가 가선에 올랐다. 공이 영천을 다스릴 적에 동지공이 가까운 창령에 현령으로 있었는데, 공은 늘 오마로써 집에 달려갔다. 원영과 송부에 있을 때에도 모두 받들고 가서 효양하여 분화함을 성대히 하였으므로 당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12월에 황해도에서 잘못을 답습한 폐단이 있어서 전도신 다섯 사람에게 관동으로 귀양가라는 왕명이 있었고, 공은 금성으로 귀양갔다. 다음해 정월에 소환되어 승지가 되었다. 4월에 정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경신년(정조 24, 1800년) 6월에 정조께서 승하하셨다. 공은 초토에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부르짖어 통곡하는 것이 궐 밖에 그쳐서 이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한스럽게 여겼다. 신유년(순조 1, 1801년)에 거듭 동지공의 상을 당하였다. 복을 마치고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갑자년(순조 4, 1804년) 9월에 호서 지방을 안핵하라는 명을 받들었는데, 돌아오기도 전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을축년(순조 5, 1805년) 정월에 정순왕후가 돌아가셨다. 원릉에 합부하려 할 때에 공이 감독하였는데 정성을 다하고 경비를 알맞게 하여 아껴서 비용은 전례보다 적게 들면서도 일은 더욱 잘 처리하였다. 또한 남은 재물로 본능의 청해가 햇수가 오래되어 파손되고 낡은 것을 보수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우활 하다고하며 이 일은 훗날 지부의 책임이라고 하였다.
공은 다 같은 나라의 일인데 진실로 이해를 잘 살펴서 한다면 어찌 지위를 벗어나는 혐의가 있겠는가? 하시고는, 마침내 계청하여 거행하였다. 품계가 정헌에 오르고, 호조판서와 평안감사에 임명되었다. 평양은 거듭 화재를 겪어서 공사가 모두 탕진되고 쇠잔해졌었다. 공이 전임 이서구와 함께 선후로 마음을 다하여 장맛비에 대한 탄탄한 대비를 하고 공도를 관첨하기를 성대히 하여 마침내 예전처럼 회복하였다. 그 외에 선정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관서 지방의 백성들이 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지경연 ·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부호들의 횡포를 금지하고 억제하며 폐지된 법을 수칙하였는데 혹 어떤 사람이 “5일만에 경조로서 풍속을 바꾸고자하여 원망을 받으며 스스로 고생하기를 이렇게 하는가”라고 말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나의 성격이다. 일찍이 선조를 섬겨서 늙어 백발이 되었는데, 어찌 다시 차마 각진 잔을 깨뜨려 둥글게 만들어 신왕을 섬길 수 있겠는가?”하였다. 기사년(순조 9, 1809년)에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남의 말 때문에 면직을 청하였다.
공은 일찍이 원컨대 60세가 되면 곧 벼슬에서 물러나리라 하였었는데, 이때 이미 57세였으므로 남의 정사를 빌려서 한강 가에 물러나와 거처하였다. 비록 임금의 은혜를 받은 것에 감격하여 차마 서둘러 서울을 떠나지는 못했으나, 그 마음은 먼저 이미 산림에 와 있었다. 경오년(순조 10, 1810년)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자 하옥의 명이 내렸다. 공은 강상으로부터 나아가 취리를 받고,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 정무를 시작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 후에 병 · 호판과 대사헌에 임명된 것이 두 번 이었고, 이 · 예 · 형판와 좌참찬에 임명된 것이 한번 이었다. 신미년(순조 11, 1811년)에 임금께서 병환이 있으셨고, 계속하여 관서지방에 도적이 창궐하였다.
공은 본래 병이 있어서 어지럼증이 오래되었는데 주사에 달려가느라 노고와 파리함이 더욱 심하였다. 임신년(순조 12, 1812년)에 달려가느라 노고와 파리함이 더욱 심하였다. 임신년에 품계가 숭정에 오르고, 판의금이 되었다. 이때에는 옥후가 강령을 회복하셨고 왕의 군사가 개선하였으며, 원자를 세자로 책봉함에 공이 도감제조라 되었다. 국가에 큰 경사가 있었으므로 감히 병을 말하지 못하더니, 8월 초 5일에 대사동의 집에서 돌아가셨다. 춘추 60세이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께서 부의와 제문을 내리도록 명하셨다. 10월에 김화 사금학 해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정경부인에 추증된 진주유씨로 정언 칭의 딸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혹되게 가난하였으나 부인의 어짐과 재능에 힘입어서 공이 문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공이 급제하고 몇 달 되지 않아 부인께서 돌아가셨으므로 공은 항상 범문정의 여한이 있었다. 처음에 과천에 장사지냈다가 중간에 양주로 옮기고, 나중에 이곳에 장례지내어 이때에 이르러서 공과 함께 합부하였다. 아들은 호조정랑 종원이고, 딸은 진사 홍진연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의 아들은 □□이고, 딸은 □환민 · 윤휘열 · 윤남규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종원은 아들이 없어서 족인의 아들 상재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았다. 홍진연의 아들은 병선이다.
공은 인륜을 좋아하고 재기가 남보다 뛰어났으나, 평생동안 실정을 숨기는 말이나 자랑하고 높은 체하는 안색이 없었다. 그러므로 실제로 행하여 이룬 공효가 비록 여러 사람들의 눈에 드러났으나, 허황된 명성은 그 몸에 미치지 않았다. 걸음가는대로 앞을 향해가서 그림자를 돌아봐도 짝이 없었으나 마음에 옳게 여기지 않는 것은 비록 대관과 귀한 집안으로 기쁨과 노여움으로 사람을 영고하게 할 수 있는 자라도 곧은 말을 샘솟듯이 하여 명일을 위한 계교를 용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발을 옮기는 곳마다 가시밭길 아님이 없었으며 활을 당기며 몰래 엿보는 자들이 서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성주께서 어진 신하라고 자랑하셨고, 이야기 하는 자들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칭하였다. 높고 밝게 잘 마쳐서 몸과 이름이 둘다 영화로웠으니, 어찌 다만 선왕의 밝음만이 홀로 공을 아신 것이겠는가. 공의 단단함이 또한 이룬 것이로다. 공은 신체가 겨우 중인정도 였는데 영채가 찬란하게 빛났으니, 돌아가신지가 이제 10여년인데도 미발과 성모가 아직도 빛나서 사람들의 안중에 있는 듯 하다.
정랑이 일찍이 공의 묘갈명을 면백에게 부탁하였다. 감히 감당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정랑이 이미 죽었고, 정랑의 양자는 어리고 나약하므로 시랑형이 북절을 안찰 할 때에 편지를 보내오기를 “비를 세우는 것이 돌아가신 형님의 뜻은 아니나 입조본말을 내 차마 끝내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 우리 집안은 성대한 문장가의 집안이었으므로 선세의 묘도문 짓는 것을 타인의 손에 맡긴 적이 드물었으니, 지금 우리 집안 사람이 짓는 것이 마땅하다. 나의 형의 명을 엮을 자는 오직 그대뿐이니, 그대는 유념하시라”하였다. 내가 마침내 공의 유사를 찬차하여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하였다.
명시는 다음과 같다.
16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우뚝하게 두각을 나타내고,
두 번이나 장원급제하여 여섯 날개를 드날렸다네.
양조에 좋은 벼슬을 두루 지내며 청소할 때의 약속이 있어
내직으로는 천관을, 외직으로는 방백을 역임하였다네.
승지에 오래 머물며 생각을 다하고
본명과 탁지에서도 공적을 이루었다네.
득실을 궁벽에 맡기고 시종 한결같이 충심을 지켰다네.
그 속마음을 징험하고 겉을 보고자 할진댄
폭염의 천기에도 맑은 바람에 공중의 햇빛이 갠 듯하였다네.
교묘한 말로 유인하는 이들이 속에 독을 감추었으나
모든 근심도 공의 면전에 닿으면 부서졌다네.
별도로 행하는 다리는 어두운 거리를 밟으나
조용히 먼 하늘을 향하여 새벽의 밝은 빛을 보았다네.
완연한 저 곁길은 굽이굽이 뱀이 서려있는 듯 하고
흉중의 빛은 전도되어 멀리 불빛을 쫓도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어짊을 오직 내가 알고 있으니,
세인들이 시기하는 것은 욕될 것이 없도다.
강호에 있어도 궁궐과 막히지 아니하여
한강 북쪽의 모랫길이 성곽과 연하여 있도다.
혹은 헤진 신발로 비틀거리며 가고,
또는 도롱이와 미투리로 돌아다녔다네.
내세에 현거하려던 것은 본래 원했던 것인데 갑자에 돌아가시니,
갑자기 어둡고 아득해졌다네.
빛나는 공렬을 누가 빗돌에 새길 것인가?
소제는 재주가 박하니 짓는 것이 부끄럽도다.
또한 청사에 남아있어 천 억년을 드리우리니
이 묘갈을 그저 드러내어 신역에 세우노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갑신년(순조 24, 1824년) 7월 일에 세우다.
족제 진사 면백이 삼가 글을 짓고,
사제 가선대부 함경도관찰사 겸 순찰사 병마수군절도사 함흥부윤 면승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