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등묘비(鄭希登墓碑)
- 시대
- 조선
- 연대
- 1746년(영조 22)
- 유형
- 비
- 재질
- 돌
- 크기
- 높이 146.0 너비 57.0 두께 23.0
-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두문동
- 출토지
-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각자/서자
- 송인명(宋寅明) / 미상 / 이광사(李匡師)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이 비는 1746년(영조 22) 경기도 포천에 건립된 정희등묘비(鄭希登墓碑)로 외6대손인 송인명(宋寅明)이 비문을 지었고, 외7대손인 이광사(李匡師)가 글씨를 썼다. 정희등(鄭希登 : 1506∼1545)의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원룡(元龍)이다. 1528년(중종 23) 진사가 되고, 1534년(중종 2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보직되었다. 이어 정언의 벼슬에 있을 때 부인이 먼저 죽었는데, 김안로(金安老)가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안로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도사·광흥창수(廣興倉守)·사복시첨정 등의 한직으로 전전하다가,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제거된 뒤 수찬·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에 중용되었다.1541년(중종 36) 지평으로서 그해의 흉황(凶荒)과 수령의 폐해를 조사하기 위하여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1544년(중종 39) 세자시강원우필선·장령을 지냈다. 이듬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권세를 잡게 된 소윤의 윤원형(尹元衡)··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제거하려 하였을 때 극력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용천(龍川)으로 유배가던 도중에 죽었다. 1568년(선조 1) 신원되어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1786년(정조 10)에 의민(毅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판독문/해석문
| 해석문 | 한민섭 | ||
| 판독문 | 최진욱 |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문의 : 042-860-91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