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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구묘표(金鎭龜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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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김진구(金鎭龜, 1651~1704)는 본관이 광산(光山)이고 자는 수보(守甫), 호는 만구와(晩求窩), 시호는 경헌(景獻)으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아들이고, 숙종(肅宗)의 원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이다. 배위(配位) 정경부인 한산이씨(貞敬夫人韓山李氏)는 지평(持平) 이광직(李光稷)의 딸이다. 김진구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 교리(校理), 좌승지(左承旨), 수원부윤(水原府尹),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689년(숙종 15)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에 의해 탄핵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西人) 정권이 들어서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기용되고 1702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1705년(숙종 31)에 건립된 이 비는 군포시 대야미동(軍浦市 大夜味洞)에 있는데 비좌원수(碑座圓首)의 형태를 띠었으며, 대석(臺石)에는 문양이 없다. 비의 상태는 양호하며, 동생 김진규(金鎭圭)가 짓고, 아들 김춘택(金春澤)이 썼다. 비문에는 김진구가 관직에 있을 때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산이씨와 합장하였는데, 묘소에는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혼유석(魂遊石), 족석(足石), 계체석(階砌石), 문인석(文人石)과 1934년에 건립한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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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우리 김씨(金氏)들의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벼슬길에 오르고 물러 나옴이 세도(世道:세상인심)와 방운(邦運:국운)에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황강공(黃岡公:金繼輝)으로부터 5대가 되었으니, 이제 큰 형님 일생의 시말에서 더욱 잘 알 수 있다.
옛적 목릉(穆陵:선조)의 때에 조정의 이론이 갈라지기 시작하였고 황강공(黃岡公)은 의로운 사람들의 우두머리로서 간사한 아첨꾼들로부터 가장 심하게 분노를 샀다. 문원공(文元公:김장생)이 우리 동방 도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혼탁한 세상의 곤궁함에 처해 있다가 인조께서 역사를 바꾸신 처음(인조반정)에 부르심을 받아 크게 유학을 밝혔다. 참판공(參判公:김반)은 김문정공(金文正公)의 큰 절의를 미루어 밝혀서 도의가 전도된 세상에 주(周)나라를 존중하는 의리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생원공(金益兼)은 황조(皇朝:명나라)를 위해 순절하여 한 몸으로 300년의 윤리강상을 수립하였다.
돌아가신 아버님(金萬基)께서는 효종과 현종을 섬겨 잘못을 보충하고 바로잡으며 선양하는 큰 공로가 있었으며, 또 인경왕후(仁敬王后)를 탄생시켜 왕의 심복이 되었다. 경신년(숙종 6, 1680년)에 남(柟) · 견(堅)이 반란을 일으키자 충성을 다해 하늘(왕실)을 도와 토벌하였으니 공로는 왕실에 있지만 사림도 또한 이 때문에 피비린내를 면할 수 있었다. 대대로 쌓은 덕이 이와 같고, 형님은 젊어서부터 이미 국가가 위급할 때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좌하셨고 역적을 토벌하던 해에 과거에 뽑혀 조정에 서게 되었다.
언관이었을 적에 박태상(朴泰尙)이 왕의 질문을 받고도 김문곡(金文谷:金壽恒)이 무죄임을 밝히지 않은 것을 탄핵하였다. 김문곡(金文谷)은 윤휴(尹鑴)가 중전를 규제하려 한 것을 배척하여 큰 윤리를 밝히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참소당한 적이 있다. 또한 윤지완(尹趾完)이 오시수(吳始壽)를 구제해 주려는 것을 탄핵하여 시수(始壽)는 사형을 면할 수 없음을 극력 주장하였으니 일찌기 거짓으로 오랑캐의 말이라 사칭하여 선왕을 무고하고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또 홍우원(洪宇遠)의 가인괘(家人卦:周易 家人卦 彖辭)에 대한 해석은 윤휴(尹鑴)와 서로 표리가 되니 가벼운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론을 올렸다. 그가 경연에서 임금님을 모시고 있었을 때 박성의(朴性義) 등이 이이(李珥)과 성혼(成渾) 두 현신을 무고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것을 막으려하는 것을 변론하여 배척하였다. 간성(諫省:사간원)의 장관이었을 때에는 정재숭(鄭載嵩) 등이 오랑캐에 사신을 갔을 때 임금을 욕되게 한 것을 변론하지 않았다 하여 죄를 줄 것을 청하였다.
기사년(1689년)에 남(柟) · 견(堅)의 잔당들이 권력을 탈취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비시키고 많은 충신과 현신을 죽였으며 형님을 제주도로 귀향 보냈다. 또 반역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공훈을 삭제하고, 또 장차 없는 죄를 교묘히 꾸며 큰 옥사를 일으켜 형님을 해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남(柟) · 견(堅)의 복수를 하고자 한 것이다. 오래지 않아 임금께서 크게 깨우쳐서 간신배들을 물리치고 억울함을 풀어 주셨다. 이 때 첫 번째로 형님을 다시 기용하여 유배상태에서 참판에 임명하시고 이전의 공로와 봉호를 회복시켰다. 중전의 자리도 다시 바르게 되고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모함도 또한 벗겨졌다. 왕이 비록 고쳐서 새롭게 하였지만, 저 의리를 버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뒷날에 공에게 화를 입힐 계획을 세웠고 또 대부분 박태상朴泰尙()과 윤지완(尹趾完)에게 붙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기필코 형님에게 환심을 사서 스스로 그들 간신의 무리에 합류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참소하였으나 임금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형님을 임용하였다. 형님은 비록 여러 사람의 참소에 곤경을 당했으나 자기의 소신을 굽힌 적이 없었다.
송정명(宋正明)이 윤증(尹拯)을 변호하고 송문정공(宋文正公:송시열)을 비방하면서 사관의 선출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형님은 사관의 선배로서 그를 떨어뜨렸다. 윤세현(尹世顯) 등이 문정공(文正公:송시열)을 위해 그에 대한 비판이 근거 없는 무고임을 변론하다가 성균관 유생 중 윤증(尹拯)을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벌을 받게 되었다. 형님은 당시 성균관 일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에 대해 이와 관련된 성균관의 유생을 내쫓고 그의 벌을 풀어 주었다.
신사년(숙종 27, 1701년)에 중전에게 변고가 있자 임금님께서 후궁 장씨(張氏: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에 이익수(李益壽)가 ‘세자가 몸소 그 상례(喪禮)의 장소에 참여하던지 혹은 세자궁의 관료를 파견할 것’을 주청하였다. 상례의 기일이 다가오자 이진수(李震壽) 등이 또 세자가 망곡할 것을 주청하였다. 형님께서는 당시 예조판서를 하고 있었는데, 사리를 분별하고 경전을 인용하며 위의 주장 모두를 논박하고 실행하지 않을 것을 아뢰었다. 박세당(朴世堂)이 주자(朱子)의 사서주(四書註)를 고치고 또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비(三田渡碑)가 오랑캐에게 아첨한 것을 비호하고, 송문정공(宋文正公:송시열)이 이경석(李景奭)을 비판한 것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성균관 학생들이 이에 대해 상서를 올리고 이 일이 예조로 내려오자, 형님은 주자(朱子)의 주석은 이전 현인들의 주장에 대한 집대성이고, 송문정공(宋文正公)이 이경석(李景奭)을 비판한 것은 춘추(春秋)로부터 남겨져 내려오는 의리에 따른 것이란 점을 자세히 밝히고 박세당(朴世堂)의 글을 물이나 불에 던질 것을 주청하였다.
위에 서술한 것은 형님이 조정에서 행하신 일의 전말이고 행적의 대략이다. 형님께서 사악함과 올바름에 대한 변멸에 엄격하신 것은 황강공(黃岡公)께서 사문(斯文:유학, 여기서는 주자학)을 지키고 경전을 존중하며 경전과 예법을 삼가 지킴에 근본한 것이니 문원공(文元)이 남기신 가르침을 실추시키지 않았다.
오랑캐와 예의지국이라는 큰 원칙을 가슴에 새기고 사신 것은 사실상 참판공과 생원공 두 공의 사적을 따른 것이며, 왕실을 돕고 사림을 돕는 모든 일은 가정교육에서 얻은 것이 특히 많다.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주상의 호위병을 이끌고 위난을 진압한 적이 있었는데, 형님께서 아버지를 이어 위망이 있었다. 왕께서 이 때문에 연이어 어영(御營)과 수어(守禦)와 병조를 맡겨 주고 의지하며 국가의 중임이라 생각했는데, 비방하는 사람들은 임금의 외척임을 구실삼아 반대하였다. 이것은 또한 윤휴(尹鑴) 등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님을 훼방하던 무리들이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닦은 덕행이 이미 전대(前代:여기서는 漢을 지칭)의 저 허사(許史:한나라 선제의 장인인 허백(許伯)과 외가인 사고(史高))와 다르고, 또 형님이 스스로 세운 공로가 있었으므로 왕께서 끊임없이 임용하시는 이유인데도 사람들은 이점(외척이란 점)을 구실로 삼으니, 이것은 아마도 세태를 반영한 것일 것이다. 이분의 됨됨이는 윤리강상이 있으니 이전에 황후께서 비록 바르게 되었지만 8년 동안 군신과 모자의 윤리가 여러 차례 의리를 버리고 이익을 탐하는 자들에 의해 더렵혀졌고, 끝내 또 상례(喪禮)에 대한 의론이 있었는데도 형님의 상소문 중에 “비록 낳고 길러주신 은혜가 있지만 또한 백어(伯魚:공자의 아들.공자와 이혼한 생모를 위해 지나치게 곡을 한 것을 가리킴)의 어머니와는 다르다.”라고 한 것은 하늘의 정한 예법을 얻은 것만이 아니다. 그러니 저들이 비록 끊임없이 비방을 하지만 형님에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 여기에서 형님이 군자임을 알 수 있다.
형님은 태어나 30세가 되어 벼슬을 하기 시작했고 54세에 별세하였다. 그 중간에 위태로움과 욕됨이 여러 차례 있었으니, “지위에 편안하였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능히 하시는 일마다 스스로 그 조정에 충성을 다하였고 집안의 명성을 떨치게 하셨다.
사람은 그 처지에 따라 세상의 공정하고 편파됨과 나라의 다스려짐과 혼란함을 판단한다. 전(典:‘서전’을 지칭)에 말하기를 “네 조상이 했던 충성스럽고 근면한 행실을 계승하여 너의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또 “군자가 없다면 나라라 할 수 있을까?”라고 했는데, 형님은 사실상 이와 유사하다. 형님은 부모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다른 사람과 사귐에 관대하고, 평상시에는 공손하고 신중하였지만 큰일에 닥쳐서는 꺾을 수 없는 강한 절개가 있었다. 평소 권한 있는 요직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무거운 임무를 맡으면 지략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큰 군사 요새를 통치하기도 하고 두 번이나 호조판서를 지내 대부분 돈과 곡식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으나, 지위가 한 등급 올라갈 적마다 그 집의 마구간이나 창고는 더욱 비어있고 옷은 남루하기가 가난한 선비같아서 비록 형님을 싫어하는 사람조차도 청렴검소하다고 평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형님의 행실과 치적, 공로와 경력 중에 기록하여 후세에 알릴만한 것이 많지만 가장 관계가 큰 것만을 묘도(묘의 앞) 위에 기록해 두고 그 나머지는 생략한다.
우리 김씨(金)는 광산(光山)의 이름있는 집안이다. 형님의 휘는 진구(鎭龜)이고 자(字)는 수보(守甫)이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묘소자리 근처에 장사를 지냈고, 황강공(黃岡公) 이하의 관직과 휘(諱)는 모두 돌아가신 아버님(金萬基)의 비문에 적혀있다. 형님은 아들 여덟을 두었으니, 아들은 춘택(春澤) 보택(普澤) 운택(雲澤) 민택(民澤) 조택(祖澤) 복택(福澤) 정택(廷澤) 연택(延澤)이다. 부모의 유업을 이어나갈 사람은 많으나 여기에서 다시 강조하여 분발하게 한다.
숭정(崇禎) 갑신후(甲申後) 62년(1705년) 7월 일에
아우 진규(鎭圭)가 글을 짓고
아들 춘택(春澤)이 글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