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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묘갈(退溪 李滉 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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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慶尙北道 安東市 陶山面 土溪里)에 있는 퇴계이황묘전비(退溪李滉墓前碑)이다. 1577년(선조 10)에 세워진 이 비는 받침돌 위에 몸돌을 얹고 좌우대칭의 구름무늬를 넣은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비문은 이황 자신이 지은 명(銘)과 기대승(奇大升)이 나중에 지은 후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씨는 금보(琴輔)가 쓴 것으로, 원문은 이황의 문집인 『퇴계집(退溪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황(1501~1570)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형조좌랑(刑曹佐郞) 등을 역임하다가, 1543년(중종 38) 이후로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되어도 나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며, 1560년(명종 15)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조선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사후에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이 건립되어 배향되었다. 묘비의 앞면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관직명이 아닌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 生而大癡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했으며 / 中何嗜學
말년에는 어찌 벼슬에 올랐던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 學求猶邈
관작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 爵辭愈嬰
세상에 진출하면 실패가 많았고 / 進行之跲
물러나 은둔하면 올발랐네 / 退藏之貞
국가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慙國恩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라 / 亶畏聖言
산은 높이 솟아 있고 / 有山嶷嶷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 有水源源
선비의 옷을 입고 한가로이 지내니 / 婆娑初服
뭇 비방에서 벗어났네 / 脫略衆訕
내 그리워하는 분 저 멀리 있어 볼 수 없으니 / 我懷伊阻
나의 패옥 누가 구경해 주리 / 我佩誰玩
내 고인을 생각하니 / 我思故人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 實獲我心
어찌 후세 사람들이 / 寧知來世
지금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랴 / 不獲今兮
근심스러운 가운데에 낙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가운데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을 구하리 / 復何求兮
융경(隆慶) 4년(1570, 선조3) 봄에 퇴계 선생은 나이가 70세였는데, 재차 전문(箋文)을 올려서 치사(致仕)할 것을 청했으나 상(上)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가을에 또다시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신축일에 선생께서 별세하시어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은 크게 애도하시며 영의정을 추증하고 장례는 의정(議政)의 예를 쓰도록 명하였다. 멀고 가까운 지방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슬퍼하고 애석해하며 서로 곡하고 조문하였다. 다음 해 3월 임오일에 집 동쪽의 건지산(搴芝山)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황(滉)이며, 자는 경호(景浩)이다. 일찍이 퇴계(退溪)에 집터를 정하여 살고 인하여 스스로 호로 삼았으며, 뒤에 도산(陶山)에다가 서당을 짓고 또 도수(陶叟)라고도 불렀다. 그 선대는 진보현(眞寶縣) 사람이었다. 6대조 석(碩)은 고을의 아전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아드님인 자수(子修)는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안동(安東) 주촌(周村)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고조의 휘는 운후(云侯)인데 벼슬이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며, 고조비는 숙인(淑人) 권씨(權氏)이다. 증조의 휘는 정(禎)인데 벼슬이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비는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이다. 조(祖)의 휘는 계양(繼陽)인데 성균 진사(成均晉士)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이분이 예안(禮安)으로 이거하여 온계리(溫溪里)에 거주하였다. 조비는 정부인 김씨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식(埴)인데 성균 진사로 여러 번 추증을 받아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선비(先妣)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와 춘천 박씨(春川朴氏)로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출생하신 지 한 돌이 못 되어 부친을 여의고, 어려서는 숙부인 송재공(松齋公)에게 수학하였다. 이미 장성해서는 학문에 힘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더 스스로 각고하였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에 진사가 되고, 갑오년(15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가 박사(博士)로 옮겼으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정유년(1537)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그 후 삼년상을 마치고는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홍문관부교리 겸 세자시강원문학(弘文館副校理兼世子侍講院文學),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지냈으며, 다시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옮기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성균관사예 겸 시강원필선(成均館司藝兼侍講院弼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과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는데, 성균관 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휴가를 얻어 성묘하였다.
다음 해인 갑진년(1544) 봄에는 홍문관 교리로 소환되어 좌필선(左弼善)에 임명되고,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으로 천직되었다가 병으로 면직되었으며, 사옹원 정(司饔院正)이 되었다가 전한에 다시 임명되었다. 이때 간신 이기(李芑)가 삭탈관직하도록 계청(啓請)하였다가 얼마 후 이기가 또다시 삭탈관직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다.
병오년(1546, 명종1) 봄에는 휴가를 받아 외구(外舅)를 장례하고 병으로 체직되었다. 다음 해인 정미년(1547) 가을에는 응교로 임명되고 부름을 받았으나 서울에 도착한 다음 병으로 면직되었다. 무신년(1548) 1월에는 외직으로 나가 단양 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가 풍기(豐基)를 맡았다. 기유년(1549) 겨울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갔다가 탄핵을 받아 두 품계를 박탈당하였다.
임자년(1552) 여름에는 교리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아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부응교로 옮겨졌다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되었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고, 형조 참의와 병조 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면직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을묘년(1555) 봄에 휴가로 있던 중 해직되자 배를 세내어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고 연달아 부르는 명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무오년(1558) 가을에는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청하고 부르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도성에 들어가 사은하니 대사성에 임명되고, 얼마 후에는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해 봄에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을축년(1565) 여름에는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기거하였다. 겨울에 상이 특지를 내려 부르고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병인년(1566) 1월에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글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했는데, 서울에 올라오는 도중 공조 판서에 임명되고 또 대제학에 겸직되었다. 선생은 마침내 새로 내린 벼슬을 극력 사양하고 집에 돌아와 죄를 받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벼슬이 체직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정묘년(1567, 명종22) 봄에는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되었으므로 부르는 명이 있었다. 선생은 6월 도성에 들어갔는데, 이때 마침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선조 )이 뒤를 이었다. 금상이 선생을 예조 판서로 임명하자, 선생은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고 즉시 동쪽으로 돌아왔다. 10월에 부르는 명을 받고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곧바로 상이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상소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 1월에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자, 선생은 다시 상소하여 받기 어려운 의리를 극구 말하였다. 또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니 체차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7월에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사양하고 글을 올려 6개 조항을 아뢰었으며 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그 후 대제학과 이조 판서,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극력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기사년(1569) 3월에는 차자(箚子)를 올려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는데, 차자를 네 번이나 올리면서 그치지 않았다. 상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아시고는 인견(引見)하여 타이르시고 역졸로 하여금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이달에 선생은 집에 도착한 다음 글을 올려 사은하고 인하여 치사할 것을 청하였다.
처음에 선생은 병환이 위중해지자 아들인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에서는 반드시 준례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도록 청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유명(遺命)이라 칭하고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며, 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빗돌에다가 전면(前面)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세계(世系)와 행실을 뒤에다 간략히 서술하여 《가례(家禮)》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기를 “이 일을 만일 남에게 부탁하여 할 경우 아는 사람 중에 기고봉(奇高峯) 같은 이는 반드시 실상이 없는 일을 장황히 늘어놓아 세상에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기술해서 미리 명문을 짓고자 하였으나 미뤄 오다가 끝내지 못하고 난고(亂稿) 가운데 보관되어 있으니 찾아서 써야 한다.” 하였다. 준은 이 경계를 받고 선생이 별세하자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묘도(墓道)의 표(表)는 유계(遺戒)에 따라 그 명문을 그대로 썼다.
아, 슬프다.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우리 동방에 으뜸임은 당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후세의 학자들도 선생이 말씀하고 저술한 것을 관찰한다면, 장차 반드시 감발(感發)되고 묵계(默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 중에 서술하신 것은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활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는 선생의 장려를 받아 성취되었으니 부모와 천지의 은혜보다도 더한데 선생이 별세하니, 태산이 무너진 듯 대들보가 꺾인 듯하여 의귀(依歸)할 곳이 없다.
남기신 경계 말씀을 엎드려 생각하니 감히 어길 수가 없으나, 묘도에 게시하여 후세에 알리는 것을 또한 안 할 수 없으므로 그 대략을 기록하고 이에 대한 말을 붙인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질서가 있었으며, 장성하여서는 더욱 함양하고 결점을 고쳐 나갔다. 중년 이후로는 부귀공명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 탐구에 힘써서 미묘한 진리를 환히 꿰뚫어 충적(充積)하고 발양하여 사람들이 측량할 수가 없었는데, 선생은 겸허하고 공손하시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하였다. 날마다 공부를 새롭게 하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여 그치지 않았다.
출처와 거취의 문제에 있어서는 때를 보고 의리를 헤아려 자신의 마음에 편안한 바를 추구하고 또한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 논저는 반복하고 무궁하며 광명하고 위대하여 한결같이 순수하게 정도(正道)에서 나왔으니, 저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말씀으로 헤아려 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적다. 선생 역시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아니하고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다고 이를 만하니, 아, 훌륭하다.
선생은 재취하였다. 먼저는 모군(某郡) 허씨(許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는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생산하였으며, 뒤에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봉사 권질(權礩)의 따님이니,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들은 장자 준은 봉화 현감(奉化縣監)이고, 채(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손자는 셋인데, 안도(安道)는 신유년 생원이고, 다음은 순도(純道)와 영도(詠道)이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선비인 박려(朴欐)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로는 적(寂)이 있다.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춘추관사(判中樞府事 兼 知經筵春秋館事)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시 문순공(諡文純公) 휘(諱) 황(滉)
묘갈명(墓碣銘)은 선생이 스스로 지었고 기대승(奇大升)이 그 뒤를 썼다.
타고난 자질이 어리석었고, 장년 되어선 병이 많았다.
중년엔 어찌 그리 학문 좋아하다가, 늙어서는 어찌해 벼슬을 탐하였던가?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져가고, 벼슬은 사양해도 더욱 더해졌네.
나아가는 벼슬길엔 실패가 있고, 물러나 은둔하면에 올바름이 있네.
나라의 은택에 매우 부끄럽고,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초복(初服 : 벼슬하기전에 입던 선비의 옷=벼슬을 그만둠)입고 유유자적하니,
뭇 사람의 나무람도 거리낌없다.
내 마음의 그리움 저쪽에 막혀 있으니, 나의 패옥 누가 보아 주랴.
내가 옛사람 생각해 보니, 실로 나의 마음과 맞는구나.
어찌 알랴, 내세에서 지금의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을 줄.
걱정 속에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걱정이 있다.
수명이 다해 돌아가나니, 다시 무엇 구할 것인가.
융경(隆慶) 4년(선조 3, 1570년) 봄, 퇴계선생께서 연세가 70이었다. 두번이나 전문(箋文 : 길흉의 일이 있을 때 왕에게 아뢰던 4· 6체의 글)을 올려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는데, 그해 12월 신축일 선생께서 별세하셨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크게 슬퍼하시며,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의정(議政)에 대한 예로 장사하도록 명했다. 원근에 부음을 들은 자는 탄식하며 애석하여, 서로 더불어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음해 3월 임오일(21일)집 동쪽 건지산(搴芝山) 남쪽 지맥에 장사하였다.
선생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황(滉)이요 자(字)는 경호(景浩)이다. 일찍이 퇴계(退溪)에 터를 잡아 살았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호로 삼았다. 그후 도산(陶山)에다 서당을 짓고는 또 도수(陶)라고 호(號)하기도 했다.
그의 선대는 진보현(眞寶縣) 사람이었다. 6대조 휘 석(碩)이 고을의 하급관리에서 몸을 일으켜 사마시에 합격했고 밀직사(密直使)로 추증되었다. 아들 자수(子脩)는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였는데 홍건적을 토벌한 공이 있어서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졌고, 안동(安東) 주촌(周村)으로 옮겨와 살았다. 고조부 휘 운후(云侯)는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이었고 사복시정으로 추증되었는데 부인은 숙인(淑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증조부 휘 정(禎)은 선산도호부사였는데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고,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이다. 조부 휘 계양(繼陽)은 성균진사로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예안(禮安) 온계리(溫溪里)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부인은 정부인 김씨이다. 부친 휘 식(埴)은 성균진사로서 여러번 추증되어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이며 부인은 의성 김씨(義城金氏)와 춘천 박씨(春川朴氏)인데 아울러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선생께서 나신 지 돌이 못 되어서 부친을 여의고 소년 적에 숙부 송재공(松齋公)에게 글을 배웠다. 자라나자 뜻을 가다듬어서 글공부에 힘쓰며 더욱 애썼다. 가정(嘉靖) 무자년(중종23, 1528년)진사시에 합격했고, 갑오년(중종 29, 1534년) 문과에 올라,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박사로 전임했다가 성균관 전적 · 호조좌랑으로 옮겼다. 정유년(중종 32, 1537년) 겨울에 모친의 상을 당했으며 상복을 벗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고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 · 형조정랑 · 홍문관 부교리 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 ·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 · 사헌부 장령(掌令) · 성균관 사예(司藝) 겸 시강원 필선(弼善) · 사간원 사간 · 성균관 사성으로 전임한 다음, 휴가를 청해서 선대 묘소에 성묘하였다.
다음해 갑진년(중종 39, 1544년)봄에 홍문관 교리로 부르는 명을 받고, 서울에 돌아가 좌필선(左弼善)에 임명되었다. 홍문관 응교(應敎)로 전임했고 전한(典翰)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사옹원 정(司饔院 正)이 되었다. 다시 전한에 임명되었는데, 이기(李芑)가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했다가 잠시 후에 기(芑)가 또 삭탈하지 말기를 청해서 사복시 정(司僕寺 正)에 임명되었다.
병오년(명종 1, 1546년) 봄, 휴가를 청해서 외숙부의 장례를 지내고, 병으로 면직되었다. 정미년(명종 2, 1547년) 가을에 응교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서울에 가서는 병으로 사직했다. 무신년(명종 3, 1548년) 정월, 단양군수로 나갔다가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기유년 겨울에 병으로 사직하고 바로 돌아왔다가 탄핵을 받아 두 품계가 삭탈되었다. 임자년(명종 7, 1552년) 여름에 교리로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가서는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고, 다시 부응교로 전보되었다. 품계가 승진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가 형조참의 ·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을묘년(명종 10, 1555년) 봄에 휴가중에 해직된 다음, 배를 세내어서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되어 연달아 부르는 명령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했다. 무오년(명종 13, 1558년) 가을,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부르는 명령도 거두어 주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 :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변)을 내렸다. 도성에 들어가서 은혜에 사례하니 대사성에 임명하였다가 잠시 후에 공조참판으로 임명되어 여러 번 사직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다음해 봄에 휴가를 청해 시골에 돌아왔고,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되기를 청해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었다. 을축년(명종 20, 1565년) 여름에 글을 올려 간곡하게 아뢰어서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거처하였다. 그해 겨울에 특별히 부르시는 명령을 내려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임명하였다. 병인년(명종 21, 1566년) 정월에 병을 참고 길을 떠나, 글을 올려서 사직을 청하였는데 서울로 가는 도중에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또 대제학에 겸직되었다. 마침내 새로 임명한 관직을 힘써 사퇴하고 집에 돌아와서 죄받기를 기다리니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정묘년(명종 22, 1567년) 봄에 중국에서 사신이 온다고 하여 부르시는 명이 있어 6월에 도성에 들어갔는데, 마침 명종이 승하하고 지금 임금(선조)이 뒤를 이었다. 예조판서로 임명되어 사퇴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후에 병으로 면직되어 곧 동쪽으로 돌아왔다. 10월에 부르시는 명이 있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교서를 내려서 올라오기를 재촉하므로, 상소를 올려 힘써 사퇴하였다. 무진년(선조 1, 1568년) 정월,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었는데, 또 상소를 올려 명을 받기 어려운 의리를 지극하게 아뢰었다. 또 교서를 내려서 올라오기를 재촉하므로 상소를 올려서 간곡하게 사퇴했더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7월 대궐에 나아가서 사직하고 상소하여 여섯 조목을 아뢰고, 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쳤다. 그 뒤 대제학 · 이조판서 · 우찬성으로 임명됐으나 모두 힘써 사퇴하여 받지 않았다. 기사년(선조 2, 1569년) 3월에 차자(箚子)를 올려서 돌아가기를 청하여, 네번이나 차자를 올리면서 그만두지 않았다. 임금도 그를 만류할수 없음을 알고 불러서 보시며 위로하는 말씀을 하고, 각 역에 행차를 호송하도록 명했다. 그 달에 선생께서 집에 돌아와, 글을 올려서 은혜에 사례하고 이어서 치사(致仕 : 나이가 연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를 청했다.
당초 선생께서 병환이 들자, 아들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해당 관청(예조)에서 규례에 따라 예장하기를 청할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유언임을 칭하여 상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여야 한다. 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돌에다가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고 세계(世系 : 집안의 내력)와 행실을 뒷면에 대략 서술해서, 가례(家禮)에 이른 바대로 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셨다. 또 말하기를, “이 일을 만약 남에게 부탁해서 한다면, 서로 아는 사이인 기고봉(奇高峰 : 기대승) 같은 사람은 반드시 실상없는 일을 반드시 장황하게 해서 세상에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항상 내 뜻을 스스로 기술하고자 하여 명문(銘文)을 미리 지었으나, 미루다가 마치지 못했다. 그 명문이 초고 뭉치 속에 섞여 있을 터이니 찾아내어서 그것을 쓰는 것이 옿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준(寯)이 이미 이 경계를 받고 두번이나 글을 올려 예장을 사양했으나 윤허하는 명을 받지 못해서 드디어 감히 다시 사양하지 못했다. 묘도(墓道)의 표(表)에는 남기신 훈계대로 그 명(銘)을 새겼다.
아아,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학업이 우리 동방에 뛰어났음은 당세 사람이 이미 알고 있거니와 후세 학자도 선생께서 의논하고 저술하신 바를 보면 반드시 감동하여 마음이 움직이고 은연 중에 서로 뜻이 통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 안에 서술된 바는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내가 선생의 권장하심을 받아서 성취되었으니 부모와 천지의 은혜보다도 더한데 이제 선생이 돌아가시니 산이 무너진 듯 대들보가 부러진 듯 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 남기신 경계의 말씀을 조용히 생각하니 비록 어기지는 못하지마는 묘소에 비를 세워서 후인에게 알리는 것은 또한 그 행적을 없앨 수 없기에 감히 그 대략을 기록하여 말을 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단정하였고 장성해서는 더욱 함양하여서 중년이후에는 세상의 명예에 뜻이 없었다. 선생은 소년 적부터 타고난 자질이 저절로 덕을 이루었는데, 어찌 반드시 중년 이후부터에야 명예에 뜻이 없었다는 것인가? 그 당시에 제자 중에 불쾌하다는 말이 많이 있어서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으나, 이미 청한 글이어서 부득이 이 글을 쓰고 말았다. 정신을 오로지 해서 학문을 강구하며 미묘한 이치를 환하게 밝혔다. 덕이 가득 쌓이고 밖으로 크게 떨쳐서 사람들이 능히 헤아리지 못하였으나, 또한 겸허하고 공손하여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으니 대개 날마다 새롭게 높은 경지를 깨닫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출처와 거취에 있어서는 그 때를 보고 의리를 헤아려서 마음에 편한 바를 힘껏 추구하였으며 마침내 마음을 굽힌 바는 또한 없었다. 그 논저는 이리저리 되풀이해서 밝고 거룩한 것이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왔으니, 공맹(孔孟) · 정주(程朱)의 언론에 비추어 보아도 합치하지 않는 것이 적을 것이다. 또한 천지에 세워도 어긋나지 아니하고 귀신에게 따져도 의심없다고 이를 수 있으니, 아! 지극하도다.
선생은 재취(再娶)하셨는데 먼저 김해 허씨(金海許氏) 진사 찬(瓚)의 따님을 맞이하여 2남을 낳았고, 후에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봉사 질(礩)의 따님을 맞이하였는데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들 준(寯)은 봉화현감이고 채(寀)는 일찍 죽었다. 손자가 세 사람인데 안도(安道)는 신유년(명종16, 1561년)생원시에 합격했고, 다음 순도(純道)와 영도(詠道)이다. 딸이 둘인데 맏이가 선비 박려(朴欐)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한 아들이 있는데 적(寂)이다.
황명(皇明) 융경(隆慶) 6년 11월 일
후학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 지제교(工曹參議 知製敎)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삼가 기록한다.
만력(萬曆) 5년 정축년 2월 일에 세우다.
성균생원 금보(琴輔)는 삼가 글을 쓴다.
정축년 후의 329년 을사년 10월 일에 고쳐서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