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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淸道 雲門寺 圓鷹國師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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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 운문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선사 원응국사 학일(圓應國師 學一, 1052~1144)의 비이다.
윤언이(尹彦頤)가 짓고 탄연(坦然)으로 추정되는 왕사 단속사 주지가 써서 1149년(의종 3) 이후에 세웠다. 현재 비는 귀부와 비신은 현존하나 상부는 망실되었다. 둘레로 당초문을 장식한 비신은 중간이 절단되어 철골 구조물로 틀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절단된 부분을 제외한 부분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글자가 선명하다.
비문은 원응국사가 태어나 선문에 출가하여 경율론 삼장에 통달하고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하자 선종 승려들이 10중 6, 7이 옮겨갔으나 국사만은 생명을 바쳐 선종을 수호하였고 숙종 왕자인 징엄이 병이 나자 반야를 염송하여 낫게 하였으며 인종이 왕사로 책봉하고 운문사에 주석하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음기에는 비직원(批職員) 24명, 법리주지(法理住持) 57명, 법리명공(法理名公) 29명, 가계(加階) 29명, 가계명공(加階名公) 50명, 참학(參學) 40명을 차례로 승계에 따라 열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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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원응국사비명(圓應國師碑銘)
고려국(高麗國) 운문사(雲門寺) 원응국사비(圓應國師之碑)
은청(銀靑) 광록대부(光錄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호부상서(戶部尙書) 판형부사(判刑部事)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윤언이(尹彦頤)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다.
일찍이 듣건대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모든 부처께서 비장(秘藏)하여 아끼는 바이다. 시방허공(十方虛空)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그리고 유색(有色)과 무색(無色) 등 이 모두가 여래장중(如來藏中)의 묘명(妙明)한 존재이므로, 여래(如來)의 삼신(三身)2이 여기에서 나타나며, 보살(菩薩)의 만행(萬行)도 또한 이로부터 성취(成就)된다. 그러므로 …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오직 현람(玄覽)을 씻어버리고, 공空과 유有에 떨어지지 아니한 몸은 마치 고목(槁木)의 가지와 같으며, 또 한 마음은 불이 꺼진 싸늘한 재와 같은 것으로써 족히 해(解)를 삼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세상의 우매한 자가 바야흐로 또한 마치 불이 사방 (四方)으로 나아가서 닥치는 대로 연접(連接)하여 소식(燒食)하는 것과 같이 모든 망상(妄想)으로써 자심(自心)의 체(體)를 삼아 종신(終身)토록 얽매여 망연(茫然)한 상태로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므로 일단영성(一段靈性)3이 캄캄한 유암(幽暗)으로 변하게 되어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하고 돌아 올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미혹(迷惑)함이 아니겠는가?
여래께서 그러한 중생(衆生)을 불쌍히 여기시어 49년 동안 삼승(三乘) 12분교(十二分敎)를 설법(說法)하여 근기의 이둔(利鈍)을 따라 중생을 인도하셨다. 그러나 이른바 정법안장은 본래 말이 없는 경지이지만, 부처께서 일생(一生)의 교화(敎化)가 장차 끝나려 하므로, 시간과 공간인 천하(天下)와 후세(後世)에 널리 전(傳)해지지 못할까 염려(念慮)하였다. 그리하여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금색(金色) 바라(波羅)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으나, 오직 마하가섭존자(摩訶迦葉尊者)만이 묵연(黙然)히 파안미소(破顔微笑)함으로써 정법안장을 전해 받고, 그로부터 조조(祖祖)가 상전(相傳)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 서건(西乾) 28조(祖) 중 제27조인 반 야다라(般若多羅)에 이르렀고, 이어 달마대사가 이어받아, 동토선종(東土禪宗)의 제5조인 홍인대사(弘忍大師)에까지 이르러서는 더욱 여러 파(派)로 분리(分離)되어 북방(北方)의 신수(神秀)와 남방(南方)의 혜능(慧能)으로 돈점(頓漸)이 갈라졌다.
그러나 신수(神秀)의 계파(係派)는 후세(後世)에 단절되었고, 혜능문파(慧能門派)는 그 지파(支派)가 침연(浸衍)하고 호호(浩浩)하여 마치 백천(百川)의 중류(衆流)와 같았다. 자세히 그 사자상승(師資相承)을 거슬러 올라가면 요약컨대 불타(佛陀)의 정종(正宗) 하나 뿐인 것이다. 해동(海東)의 부도씨(浮圖氏)가 그 가풍(家風)을 듣고 기꺼이 발심(發心)한 자가 무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모든 의문(疑問)이 마치 얼음처럼 녹고, 매듭이 풀린 듯 하여 지견(知見)이 고명(高明)하니, 그 지(知)는 무지(無知)에서 나왔고, 견(見)은 무견(無見)에서 발현(發現)하여 조사(祖師)의 심인(心印)에 계합(契合)한 분이 있었으니, 우리는 바로 원응국사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국사의 속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학일(學一)이며, 자(字)는 봉거(逢渠)이니, 서원(西原) 보안(保安)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응첨(應瞻)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도 이씨(李氏)로, 어느 날 밤 용(龍)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 임신하였다. 만삭(滿朔)이 되어 출생하였는데 향기가 실중(室中)에 가득하여 오랫동안 흩어지지 아니하였다. 국사는 젖먹이 때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 젖을 먹지 아니하였고, 나이 겨우 8살 때 이미 오신채와 고기[葷血]를 먹지 않았다. 11살에 진장선사(眞藏禪師)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13살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향수사(香水寺)의 혜함(惠含)선사를 찾아가 친견(親見)하였다. 혜함선사가 어느 날 국사에게 거양(擧揚)하되, 어떤 승려가 장경혜릉(長慶慧稜)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학인(學人)이 출신할 길이옵니까” 장경(長慶)선사가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출신할 길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국사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나서 … 계속 정진(精進)하여 선지(禪旨)를 통달하였다. 또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하지 못한 것이 없으며, 더욱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博通)하여 반야 삼매를 얻었다. 그로부터는 인간(人間)의 질병에 대하여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일체(一切)를 구제하되, 진찰만 하면 효험이 있었다. 종도(宗徒)들이 국사의 도덕을 추앙(推仰)하되, 마치 태산(泰山)처럼 앙모(仰慕)하며, 또한 중성(衆星)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을 향하는 것과 같았다.
우리 선왕(宣王) 2년, 송(宋)의 신종(神宗) 원풍(元豊) 7년(1084) 갑자(甲子)에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승과고시(僧科考試)에 우 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 대각국사가 입송유학(入宋遊學)하여 화엄종지(華嚴宗旨)와 겸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수학하고 철종(哲宗)의 원우(元祐) 원년(선종 3, 1086) 병인년에 귀국하여 천태지자(天台智者)를 존숭하여 별도로 천태종(天台宗)을 창립하였다. 이 때 총림납자(藂林衲子) 가운데 천태종으로 경속(傾屬)한 자가 10 중에 6·7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본 국사께서는 조도(祖道)4가 조락(凋落)하여짐을 슬퍼하며, 개연(介然)한 결심으로 쓸쓸히 홀로 서서 위법망구(爲法亡軀)의 정신으로 생명을 바쳐 호종(護宗)하였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勸諭)하였으나, 끝내 그의 명(命)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이에 … 산 횡봉사(橫峯寺)로 은둔하여 그곳을 열반지처(涅槃之處)로 삼으려고 하였다. 왕제(王弟)인 부여공(扶餘公)은 선지(禪旨)에 조예가 깊었는데, 스님과 더불어 평소 서로 친한 사이였다. 예의(禮儀)를 극진히 하여 궁내(宮內)로 초빙하였으므로 국사께서는 경사(京師)로 나아갔다.
우리 숙왕(肅王) 4년이며, 송의 소성(紹聖) 5년(1098) 무인년에 대각국사가 홍원사(弘圓寺)에 원각경 법회(法會)를 개설하고 국사를 부강(副講)으로 모셨으나, 스님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선(禪)과 강(講)이 교람(交濫)하는 일은 감당할 수 없다” 면서 다만 법석(法席)에 참석하여 청강할 뿐 이었다. 숙종의 왕자(王子)인 징엄(澄儼)이 있었으니, 이른바 지금의 원명국사(圓明國師)인데, 그가 9살 때 어느 날 갑자기 폭사(暴死)하여 몸에 체온이 모두 끊어져 싸늘한 시체처럼 되었다. 원각회(圓覺會)에 모였던 모든 대중이 창황(愴惶)하고 전도(顚倒)하여 구명(救命)할 방법을 몰랐다. 마침내 대각국사가 원응국사에게 구제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국사께서 비밀리 대반야(大般若)를 염송(念誦)하였더니, 조금 후에 왕자(王子)가 소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각국사께서 특히 경중(敬重)하는 마음이 더 해졌다. 숙종 임금이 국사의 법력(法力)을 자세히 듣고 법주사(法住寺)로 이주(移住)하도록 주선하였다.
그 후 우리 예종[睿王] 원년(元年)이며 송의 숭녕(崇寧) 4년(1105)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첨가(添加)하고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으며 몇 달도 되지 않아, 다시 귀산사(龜山寺)로 이주하였다. 송의 도군(道君) 대관(大觀) 2년(예종 3, 1108) 무자년에 이르러 선사(禪師)의 법계를 첨가하였고, 정화(政和) 3년(예종 8, 1113) 계사년부터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으며, 4년(예종 9, 1114) 갑오년에는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진가(進加)하였고, 7년(예종 12, 1117) 정유년에는 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으며, 선화(宣和) 4년(예종 17, 1122) 임인년에 예종(睿宗) 임금께서 병환으로 인하여 국사를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왕사(王師)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스님께서는 굳게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시중(侍中) 김인존(金仁存) 등이 국사께 이르기를 “임금께서 국사를 신하(臣下)로 여기지 않고 정중한 예의로 국사를 섬긴지 이미 오래이온데, 국사께서 왕의 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함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간 고(諫告)하므로, 국사는 부득이 왕명(王命)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종께서 왕사로 모시는 배례(拜禮)를 올렸으나, 미처 왕사책봉(王師冊封)의 의전은 행하지 못하고 왕이 등하(登遐)하였다.
4월 … 인종[仁王]이 즉위(卽位)하여 선왕(先王)의 뜻을 추술(追述)하여 7월 7일 중사(中使)를 보내 편지로써 뜻을 전달하고, 7월 8일에도 똑같이 하였으나, 스님은 장계(狀啓)를 갖추어 사양(辭讓)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도 물러서지 않고 재삼(再三) 사신을 보내 마침내 허락을 받아 12일에 이르러 예의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16일에는 인종이 명경전(明慶殿)에 행행(幸行)하여 제자(弟子)의 예를 펴고, 백관(百官)들은 함께 축하의 예배를 올렸다. 5년 계묘년의 봄부터 여름에 날이 크게 가물어 … 국사에게 기우(祈雨)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께서 옥촉정(玉燭亭)에서 대선사인 득선(得善) 등과 더불어 선지(禪旨)를 거양(擧揚)하였더니, 다음 날 큰 비가 내려 전야(田野)를 축축이 적시어 완전히 해갈(解渴)하였으므로, 그 후부터는 수(水)·한(旱) 등 재변(災變)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면 효응(效應)이 없을 때가 없었다.
또 그 해에 승과고시(僧科考試)의 선석(選席)5에 증명법사[主盟]가 되었는데, 당시 학자들이 ‘이종자기(二種自己)’에 대하여 극렬(極熱)하게 토론하였다. 이를 본 국사가 이르기를 “자기(自己)란 본시 하나뿐이거늘 어찌 둘이 있겠는가! 앞으로는 이러한 논리는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면서 맹렬히 비판하였다. … 이 말을 들은 학인(學人)들은 오랫동안 이에 대해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 그 후 혜홍(惠洪)의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이 전래(傳來)함에 이르러 고사삼실(古師三失)을 비판함에 있어 자기(自己)를 이종(二種)으로 분류(分類)함을 일실(一失)로 지적한 것을 보고서야, 학자(學者)들이 모두 의심을 끊었다.
대금(大金) 천회(天會) 4년(인종 4, 1126) 병오년에 연로(年老)를 핑계하여 운문사(雲門寺)로 퇴거(退去)할 것을 빌었으나, 인종은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는 경사(京師)와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국사를 경암사 주지를 겸하도록 하여 스스로 왕래하기에 편하도록 주선하였다. 6년에 … 경암으로 돌아가서 차자(箚子)6를 갖추어 다시 귀사(歸寺)를 청걸(請乞)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굳었으므로 인종은 친서를 보내 만류하여 이르기를, “짐(朕)이 자주 내변(內變)을 만나거나 혹은 충예(冲倪)가 상차(喪差)하였을 때마다 국사의 도력(道力)에 힘입어 안녕(安寧)을 얻었는데, 지금 과인(寡人)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시니, 장차 누구를 의지하오리까”라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임금님의 만류하는 뜻이 간절하므로 참아 홀연히 떠날 수 없사옵니다만, 산승(山僧)이 세간(世間)을 탐연(貪戀)하여 늙었으면서도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 7년 을유(乙酉) 9월 19일 마침내 왕사(王師)의 직인과 아울러 상계장(上啓狀)을 봉(封)하여 왕조(王朝)에 반납하고, 몰래 경암사를 출발하여 광주(廣州)에 이르렀을 때, 인종이 소식을 듣고 내신(內臣)인 유필(庾弼)을 보내어 왕의 간곡한 정성을 담은 친서를 전달하였다.
또 좌우가령(左右街令)에게 명하여 국사께서 지나가는 주(州)와 군(郡)에 지시하여 혜소국사(慧照國師)께서 하산(下山)할 때의 예에 준하여 영송(迎送)토록 하고, 다시 왕사의 직인을 돌려보냈다. 10월 19일 운문사로 들어가니 … 중국 보리달마의 현신이라 찬탄하며, 사방(四方)의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국사께서는 그 도제(徒弟)들을 훈도하여 각각 자기(自己)를 밝히게 하는 것으로 급무(急務)를 삼아 겸추(鉗鎚)로 단련(鍛鍊)하였으니, 가히 묘법(妙法)을 밀전(密傳)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국사는 조사선(祖師禪)을 참구하는 선열(禪悅) 외에도 힘껏 보시(布施)를 행하여 일체(一切)물질에 있어서는 조금도 인색함이 없었으니, 국사의 자비는 천성(天性)에 깊이 뿌리박힌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국사께서 비록 만리(萬里)의 밖에 있으나, 임금께서 항상 공경하는 마음이 한결 같았다. … 특히 자주 위로와 문안을 더하였으며, 겸하여 다향(茶香)과 약제와 기타 도용(道用)에 필요한 물건을 보내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그 융숭한 대우는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운문사 산문(山門)의 융성함이 근고이래(近古已來)로 이 같은 적이 없었다.
황통(皇統) 2년(인종 20, 1142) 임술년 2월 8일 산불이 크게 일어났는데, 대중을 총동원하여 진화작업에 나섰으나 불길을 잡지 못하였다. 국사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산을 향하여 축원(祝願)하였더니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을 끄게 되었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4년 갑자년 10월 21일에 병이 들어 국사께서 친히 진맥하고 시의(侍醫)에게 이르기를, “삼부(三部)의 맥(脈)이 끊어졌으니, 화기(化期)가 다가왔다” 고 했다. 의사도 역시 그렇다고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께 서는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가부좌(跏趺坐)로 단정히 앉아 향을 사루고 축원한 후 제자(弟子)들에게 훈교(訓敎)하되, “너희 들은 도력(道力)을 기르는데 전력할 것이고 명리(名利)를 탐구(貪求)하지 말라” 하시고, … “진성(眞性)은 본래 원명(圓明)하여 확연(廓然)히 시방(十方)에 두루하며, 시방(十方)이 혼일(渾一)한 동체(同體)이고, 출몰(出沒)이 본시 동광(同光)이라” 는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고, 거의 입적하려하였다. 이때 문인(門人)들이 서로 말하기를 “오늘은 중일(重日)이므로, 세속(世俗)에서는 크게 꺼리는 날이니, 만약 오늘 입적하시면 어찌하나” 하고 중론(衆論)이 분분하였다. 국사께서 선적(禪寂) 중에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하니, 문인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국사께서 이르되 “산문(山門)에서 수도하는 분상(分上)에는 세(歲)도 없고 일(日)도 없거늘, … 어찌 기일(忌日)이 따로 있겠는가? 오늘이 만약 기일(忌日)이라면 내가 『섬자경』 중에 설(說)한 일체묘보살(一切妙菩薩)의 본생담(本生談)에 의하여 연명(延命)을 제석천왕(帝釋天王)에게 청하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섬자경(睒子經)』의 미륵상품(彌勒相品)을 염송(念誦)하다가 수각(數刻)이 지난 후 문인에 이르기를 “내가 미륵품(彌勒品)을 염송(念誦)하되, 한 글자도 착오(錯誤)함이 없으니, 드디어 맥박과 호흡(呼吸)이 평정(平正)하여 오늘 죽지 아니하고, 가히 너희들의 청(請)에 부합토록 하리라” 하고, 식사하는 것이나 기거(起居)함이 평일(平日)과 같았다. 11월 15일에 다시 병세를 보여 사세장(辭世章)과 왕에게 올리는 유언장(遺言狀)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측은(惻隱)하였다.
그 후 12월 9일 밤 오경(五更)에 삭발 목욕하고 법복(法服)을 갈아입은 다음, “오음운일편(五陰雲一片) 산멸진무여(散滅盡無餘) 유유고균월(唯有孤輪月) 청광일대허(淸光溢大虛)” 라는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고, 가부좌(跏趺坐)로 차수(叉手)하고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으니 문인이 꿇어 앉아 모시고 있다가, 포시(哺時)7에 이르러 흔들어 보니 이미 천화(遷化)하였다. 그러나 지체(肢體)가 생시(生時)와 같으며, 얼굴빛은 백옥(白玉)과 같았다. … 인근 주군(州郡)으로부터 참관하러 오는 사람이 마치 담장과 같이 둘러 싸였다. 오호라! 국사의 생사관(生死觀)은 고호(賈胡)들과 같으며, 또한 전리(傳吏)가 머물고자 하면 머물고, 떠나려 하면 곧 떠나는 것과 같아서 종용(從容)하고 자재(自在)함이 이와 같으니, 비록 방온거사(龐蘊居士)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문인들이 유언장(遺言狀)과 국사의 직인인 인보(印寶) 및 천화사장(遷化事狀)을 가지고 역마(驛馬)를 타고 임금께 주달(奏達)하였다. 임금께서 부고를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며 경탄(敬歎)하시고, 3일간 조회를 파하고 내신(內臣)인 김경원(金景元)과 일관(日官)인 … 을 보내어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토록 하였다.
다음해 1월 24일 사신을 보내 예(禮)를 갖추어 국사(國師)로 책봉 하는 한편 시호를 원응이라 추증하였다. 또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27일 그 문도들이 좌신(坐身)을 들것으로 매고, 청도군 지곡사(池谷寺)의 동쪽 산기슭에서 사유(闍維)하고, 30일 유골을 수습하니 머리에는 중골(重骨)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전삭(栓索)과 구련(勾連)으로 되어 오색(五色)이 선명(鮮明)하였다. 2월 … 자인현(慈仁縣) 판악산(板岳山) 남쪽으로 … 천신(遷神)하였다. 최초 입멸(入滅)로부터 사유에 이르기 까지 47일 동안 앉은 상태로 조금도 기울지 아니하였으며, 오물(汚物)의 누설(漏洩)도 없었다. 열세(閱世)는 93세요, 좌하(坐夏)는 82세였다. 문인들이 국사의 행적(行跡)을 기록하여 비(碑)를 세우고자 하는 일을 임금에게 주청(奏請)하였다. 그리하여 인왕(仁王)께서 신(臣) 언이(彦頤)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으나, 신은 도(道)를 섭(涉)함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허락을 얻지 못하여 행적(行跡)의 대략(大略)에 의거하여 분향하고 계수(稽首)한 다음, 억지로 서술(序述)하고 송구(頌句)로 명(銘)을 짓는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전해 받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은
확연(廓然)하고 적요(寂寥)하여 변제(邊際)가 없다.
두두물물(頭頭物物) 상섭(相攝)하고 상입(相入)하니
전후제(前後際)를 초월하여 선후(先後)가 없네.
이와 같은 격외조령(格外祖令) 파비(巴鼻)가 없어
말로써나 문자로써 다룰 수 없다.
삼삼조사(三三祖師) 밀부(密付)하여 전해오면서
한 사람이 한 사람에 전승(傳承)하였다.
계계승승(繼繼承承) 이은 법통(法統) 접근(接近)을 못해
달마대사(達磨大師) 숭산(崇山)에서 9년을 면벽(面壁)하고
설중(雪中)에서 신(信)을 보여 득법(得法)하였고
법을 이은 혜가대사(慧可大師) 한 팔 뿐일세.
전법제자(傳法弟子) 선택함은 난중난(難中難)이니
불심등(佛心燈)을 전해줌이 이와 같도다.
행자(行者)일 때 법을 받은 노행자(盧行者)에서
오종가풍(五宗家風) 그 분파(分派)는 백천(百川)과 같네.
위산대원(潙山大圓) 원상(圓相) 그린 그 가풍(家風)이여!
방원장단(方圓長短) 그 모양은 최초구(最初句)이고
임제대사(臨濟大師) 제창(提唱)하신 일구법중(一句法中)에
삼현(三玄) 삼구(三句) 그 종풍(宗風)은 일즉삼(一卽三)일세.
동산양개(洞山良价) 오위편정(五位偏正) 천양(闡揚)했으니
정중편(正中偏)과 편중정(偏中正)은 군신합(君臣合)이요.
운문문언(雲門文偃) 주장(柱杖)으로 거양(擧揚)했으며
신통묘용(神通妙用) 자재하게 현전(現前)하도다.
법안문익(法眼文益) 4기(機)로써 제접(提接)했으니
3계중(三界中)에 어디서나 동일하도다.
가가(家家)마다 가풍(家風)으론 비록 다르나
귀결(歸結)하는 구경지(究竟地)는 묘원(妙圓)한 것을
위대하신 운문사의 원응국사여!
동국(東國)에서 출생하여 선법(禪法)을 중흥(中興)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총림(叢林)을 찾아
용맹정진 참구(參究)하여 본색(本色)을 보다.
혜능(慧能) 이후(以後) 오가(五家) 칠종(七宗) 모든 종지(宗旨)를
원응국사 흉중(胸中)에는 총지(總持)했도다.
기민(機敏)한 활구중(活句中)에 기어(奇語)가 있어
전(箭)과 봉(鋒)이 상적(相敵)하는 살활일(殺活釰)이여!
원응국사 출생하기 5천년 전에
달마대사(達磨大師) 그 법등(法燈)이 꺼지려 할 때
꺼진 등불 다시 밝혀 중흥(中興)한 것은
전적(全的)으로 원응국사 공덕이라네!
…
죽을 듯이 배고파도 절식(節食)하였고
궤범(軌範)으로 수행(修行)하여 고결(高潔)하시였네.
자나 깨나 중생 위해 모범(模範)이 되고
일절재물(一切財物) 보시하여 도와주셨네.
무소유(無所有)를 가풍(家風)으로 무애(無礙)하시며
실상반야(實相般若) 그 속에서 삼매(三昩)를 얻다.
인간질병 차별 없이 구제하시고
찾아오는 중생에게 법열(法悅)을 주다.
예종왕(睿宗王)과 인종조(仁宗朝)인 양대(兩代)에 걸쳐
왕사되신 높은 덕(德)은 비길 데 없네.
가물 때나 장마 질 때 기도하시면
비 내리고 장마 그침 원(願)대로 되며
산중(山中)에서 마치려고 윤허(允許)를 빌어
남에 있는 운문사로 가고자 했다.
사대색신(四大色身) 포류(蒲柳)처럼 노쇠했지만
정신(精神)만은 총명하여 변하지 않다.
부유(浮游)같은 인간생명 유한(有限)이어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서로서로 흩어지도다.
선정인(禪定印)에 단좌(端坐)하여 입적(入寂)하시니
얼굴빛이 백옥(白玉)같아 평소(平素)와 같네!
문인들이 천화사(遷化事)로 상주(上奏)하여
임금께서 부음(訃音)듣고 상비(傷悲)하시다.
원응이란 시호로써 추증하시고
애절(哀切)하신 조사(弔辭)로써 정을 펴시다.
영원토록 그 위업(偉業)을 전(傳)하려 하사
미신(微臣)에게 명하시어 찬명(撰銘)케 하다.
고매하고 탁월하신 유업방촉(遺業芳躅)은
천만세(千萬歲)가 흘러가도 변치 않으리!
왕사(王師)인 단속사(斷俗寺) 주지(住持) … 받들어 쓰다.
불신(佛身)을 성질상으로 셋으로 나눈 것으로, ①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 ②자성신(自性身)·수용신(受用身)·변화신(變化身) ③법신(法身)·응신(應身)·화신(化身) 등이다. ↩
우리들의 오염되지 아니한 심성(心性)을 지칭한 것으로, ①유일진심(唯一眞心) ②진여불성(眞如佛性) ③일착자(一着子) ④일진법계(一眞法界) 등의 뜻이다. ↩
고려국(高麗國) 운문사(雲門寺) 원응국사(圓應國師)의 비(碑) [제액(題額)]
은청(銀靑) 광록대부(光錄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호부(戶部) 상서(尙書) 판형부사(判刑部事)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윤언이(尹彦頤)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다[비문(碑文)을 쓴 이는『海東金石苑』에는 ‘왕사(王師) 단속사(斷俗寺) 주지(住持) ▨▨▨▨▨▨▨가 봉선서(奉宣書)’라 하였고,『海東金石苑』劉承幹의 고증(考證)에는 ‘석(釋)▨▨ 서(書)’라 하였으며, 갈성말치(葛城末治)의『朝鮮金石攷』에는 ‘왕사(王師) 석(釋)▨▨’를 석탄연(釋坦然 : 1070~1159)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찍이 듣건대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모든 부처님께서 비장(秘藏)하여 아끼는 바이다. 시방허공(十方虛空)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그리고 유색(有色)과 무색(無色) 등 이 모두가 여래장중(如來藏中)의 묘명(妙明)한 존재이므로, 여래(如來)의 삼신(三身)이 여기에서 나타나며, 보살(菩薩)의 만행(萬行)도 또한 이로부터 성취(成就)된다. 그러므로 (결락) 로서는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오직 현람(玄覽)을 씻어버리고, 공(空)과 유(有)에 떨어지지 아니한 몸은 마치 고목(槁木)의 가지와 같으며, 또한 마음은 불이 꺼진 싸늘한 재와 같은 것으로써 족히 해(解)를 삼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세상의 우매한 자가 바야흐로 또한 마치 불이 사방(四方)으로 나아가서 닥치는 대로 연접(連接)하여 소식(燒食)하는 것과 같이 모든 망상(妄想)으로써 자심(自心)의 체(體)를 삼아 종신(終身)토록 얽매여 망연(茫然)한 상태로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므로 일단영성(一段靈性)이 캄캄한 유암(幽暗)으로 변하게 되어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하고 돌아올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미혹(迷惑)함이 아니겠는가?
여래(如來)께서 그러한 중생(衆生)을 불쌍히 여기시어 49년 동안 삼승(三乘) 12분교(十二分敎)를 설법(說法)하여 근기의 이둔(利鈍)을 따라 중생을 인도하셨다. 그러나 이른바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본래 말이 없는 경지이지만, 부처님께서 일생(一生)의 교화(敎化)가 장차 끝나려 하므로, 시간과 공간인 천하(天下)와 후세(後世)에 널리 전(傳)해지지 못할까 염려(念慮)하였다. 그리하여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금색(金色) 바라(波羅)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으나, 오직 마가가섭존자(摩訶迦葉尊者)만이 묵연(黙然)히 파안미소(破顔微笑)함으로써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해받고, 그로부터 조조(祖祖)가 상전(相傳)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결락) 서건(西乾) 28조(祖) 중 제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에 이르렀고, 이어 달마대사가 이어받아, 동토선종(東土禪宗)의 제5조(祖)인 홍인대사(弘忍大師)에까지 이르러서는 더욱 여러 파(派)로 분리(分離)되어 북방(北方)의 신수(神秀)와 남방(南方)의 혜능(慧能)으로 돈점(頓漸)이 갈라졌다. 그러나 신수(神秀)의 계파(係派)는 후세(後世)에 단절되었고, 혜능문파(慧能門派)는 그 지파(支派)가 침연(浸衍)하고 호호(浩浩)하여 마치 백천(百川)의 중류(衆流)와 같았다. 자세히 그 사자상승(師資相承)을 거슬러 올라가면 요약컨대 불타(佛陀)의 정종(正宗) 하나 뿐인 것이다. 해동(海東)의 부도씨(浮圖氏)가 그 가풍(家風)을 듣고 기꺼이 발심(發心)한 자가 무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결락) 모든 의문(疑問)이 마치 얼음처럼 녹고, 매듭이 풀린 듯하여 지견(知見)이 고명(高明)하니, 그 지(知)는 무지(無知)에서 나왔고, 견(見)은 무견(無見)에서 발현(發現)하여 조사(祖師)의 심인(心印)에 계합(契合)한 분이 있었으니, 우리는 바로 원응국사(圓應國師)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국사의 속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학일(學一)이며, 자(字)는 봉거(逢渠)이니, 서원(西原) 보안(保安)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응첨(應瞻)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도 이씨(李氏)니 어느날 밤 용(龍)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 임신하였다. 만삭(滿朔)이 되어 출생하였는데 향기가 실중(室中)에 가득하여 오랫동안 흩어지지 아니하였다. 국사는 젖먹이 때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 젖을 먹지 아니하였고, 나이 겨우 8살 때 이미 훈혈(葷血)을 먹지 않았다. 11살적에 진장(眞藏)스님을 은사로 삭발하여 스님이 되었고, 13살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향수사(香水寺)의 혜함(惠含)스님을 찾아가 친견(親見)하였다. 혜함스님이 어느날 스님에게 거양(擧揚)하되, 어떤 스님이 장경혜릉(長慶慧稜)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학인(學人)이 출신(出身)할 길이옵니까.” 장경(長慶)이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출신(出身)할 길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나서 (결락) 계속 정진(精進)하여 선지(禪旨)를 통달하였다. 또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하지 못한 것이 없으며, 더욱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博通)하여 반야삼매를 얻었다. 그로부터는 인간(人間)의 질병에 대하여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일체(一切)를 구제하되, 진찰만 하면 문득 효험이 있었다. 종도(宗徒)들이 스님의 도덕을 추앙(推仰)하되, 마치 태산(泰山)처럼 앙모(仰慕)하며, 또한 중성(衆星)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을 향하는 것과 같았다.
우리 선왕(宣王) 2년 송(宋)의 신종(神宗) 원풍(元豊) 7년 갑자(甲子)에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승과고시(僧科考試)에 우수한 성적으로 (결락) 합격하였다. 대각국사가 입송유학(入宋遊學)하여 화엄종지(華嚴宗旨)와 겸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수학하고 철종(哲宗)의 원우(元祐)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귀국하여 천태지자(天台智者)를 존숭하여 별도로 천태종(天台宗)을 창립하였다. 이 때 총림납자(藂林衲子)가운데 천태종으로 경속(傾屬)한 자가 10 중에 6·7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본 스님께서는 조도(祖道)가 조락(凋落)하여짐을 슬퍼하며, 개연(介然)한 결심으로 쓸쓸히 홀로 서서 위법망구(爲法亡軀)의 정신으로 생명을 바쳐 호종(護宗)하였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勸諭)하였으나, 끝내 그의 명(命)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이에 (결락) 산(山) 횡봉사(橫峯寺)로 은둔하여 그곳을 열반지처(涅槃之處)로 삼으려고 하였다. 왕제(王弟)인 부여공(扶餘公)은 선지(禪旨)에 조예가 깊었는데, 스님과 더불어 평소(平素) 서로 친한 사이였다. 예의(禮儀)를 극진히 하여 궁내(宮內)로 초빙하였으므로 스님께서는 경사(京師)로 나아갔었다.
우리 숙왕(肅王) 4년이며, 송(宋)의 소성(紹聖) 5년 무인(戊寅)에 대각국사가 홍원사(弘圓寺)에 원각경 법회(法會)를 개설하고 스님을 부강(副講)으로 모셨으나, 스님이 사양하기를 “선(禪)과 강(講)이 교람(交濫)하는 일은 감당할 수 없다” 면서 다만 법석(法席)에 참석하여 청강할 뿐이었다. 숙종의 왕자(王子)인 징엄(澄儼)이 있었으니, 이른바 지금의 원명국사(圓明國師)인데, 그가 9살 때 어느날 갑자기 폭사(暴死)하여 몸에 체온이 모두 끊어져 싸늘한 시체처럼 되었다. 원각회(圓覺會)에 모였던 모든 대중이 창황(愴惶)하고 전도(顚倒)하여 구명(救命)할 방법을 몰랐다. 마침내 대각국사가 스님에게 구제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스님께서 비밀리 대반야(大般若)를 염송(念誦)하였더니, 조금 후에 왕자(王子)가 소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각국사께서 특히 경중(敬重)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숙종 임금이 스님의 법력(法力)을 자세히 듣고 법주사(法住寺)로 이주(移住)하도록 주선하였다.
그 후 우리 예왕(睿王) 원년(元年)이며 송(宋)의 숭녕(崇寧) 4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첨가(添加)하고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으며 몇 달도 되지 않아, 다시 귀산사(龜山寺)로 이주하였다. 송(宋)의 도군(道君) 대관(大觀) 2년 무자(戊子)에 이르러 선사(禪師)의 법계를 첨가하였고, 정화(政和) 3년 계사(癸巳)부터는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으며, 4년 갑오(甲午)에는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진가(進加)하였고, 7년 정유(丁酉)에는 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으며, 선화(宣和) 4년 임인(壬寅)에 예종(睿宗) 임금께서 병환으로 인하여 스님을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왕사(王師)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스님께서는 굳게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시중(侍中)인 김인존(金仁存)등이 스님께 이르기를 “임금께서 스님을 신하(臣下)로 여기지 않고자 정중한 예의(禮儀)로 스님을 섬긴지 이미 오래이온데, 스님께서 왕의 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함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간고(諫告)하므로, 스님은 부득이 왕명(王命)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종(睿宗)께서 왕사(王師)로 모시는 배례(拜禮)는 올렸으나, 미처 왕사책봉(王師冊封)의 의전은 행하지 못하고 왕이 등하(登遐)하였다.
4월 (결락)에 인왕(仁王)이 즉위(卽位)하여 선왕(先王)의 뜻을 추술(追述)하여 7월 7일 중사(中使)를 보내 편지로써 뜻을 전달하고, 7월 8일에도 같이 하였으나, 스님은 장계(狀啓)를 갖추어 사양(辭讓)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도 물러서지 않고 재삼(再三) 사신을 보내 마침내 허락을 받아 12일에 이르러 예의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16일에는 인종(仁宗)이 명경전(明慶殿)에 행행(幸行)하여 제자(弟子)의 예를 펴고, 백관(百官)들은 함께 축하의 예배를 올렸다. 5년 계묘(癸卯)의 봄부터 여름에 날이 크게 가물어 (결락) 스님에게 기우(祈雨)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스님께서 옥촉정(玉燭亭)에서 대선사(大禪師)인 득선(得善)등과 더불어 선지(禪旨)를 거양(擧揚)하였더니, 다음 날 큰 비가 내려 전야(田野)를 축축히 적시어 완전히 해갈(解渴)하였으므로, 그 후부터는 수(水)·한(旱) 등 재변(災變)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면 효응(效應)이 없을 때가 없었다. 또 그 해에 승과고시(僧科考試)의 선석(選席)에 주맹(主盟)이 되었는데, 당시 학자들이 ‘이종자기(二種自己)’에 대하여 극렬(極熱)하게 토론하였다. 이를 본 스님이 이르기를 “자기(自己)란 본시 하나 뿐이어늘 어찌 둘이 있겠는가! 앞으로는 이러한 논리는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 면서 맹렬히 비판하였다. (결락) 이 말을 들은 학인(學人)들은 오랫동안 이에 대해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 그 후 혜홍(惠洪)의『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이 전래(傳來)함에 이르러 고사삼실(古師三失)을 비판함에 있어 자기(自己)를 이종(二種)으로 분류(分類)함을 일실(一失)로 지적한 것을 보고서야, 학자(學者)들이 모두 의심을 끊었다.
대금(大金)의 천회(天會) 4년 병오(丙午)에 이르러 연로(年老)를 핑계하여 운문사(雲門寺)로 퇴거(退去)할 것을 빌었으나, 인종(仁宗)은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는 경사(京師)와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스님을 경암사 주지를 겸하도록 하여 스스로 왕래하기에 편하도록 주선하였다. 6년에 (결락) 경암(瓊嵒)으로 돌아가서 차자(箚子)를 갖추어 다시 귀사(歸寺)를 청걸(請乞)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굳었으므로 인종(仁宗)은 친서를 보내 만류하여 이르기를, “짐(朕)이 자주 내변(內變)을 만났으며 혹은 충예(冲倪)가 상차(喪差)하였을 때마다 국사의 도력(道力)에 힘입어 안녕(安寧)을 얻었는데, 지금 과인(寡人)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시니, 장차 누구를 의지하오리까” 라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임금님의 만류하는 뜻이 간절하므로 참아 홀연히 떠날 수 없사옵니다만, 그러나 산승(山僧)이 세간(世間)을 탐연(貪戀)하여 늙었으면서도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라 하였다. (결락) 천회(天會) 7년 을유(乙酉) 9월 19일 마침내 왕사(王師)의 직인과 아울러 상계장(上啓狀)을 봉(封)하여 왕조(王朝)에 반납하고, 몰래 경암사(瓊嵒寺)를 출발하여 광주(廣州)에 이르렀을 때, 인종(仁宗)이 소식을 듣고 내신(內臣)인 유필(庾弼)을 보내어 왕의 간곡한 정성을 담은 친서를 전달하였다. 또 좌우가(左右街)의 승록(僧錄)에 명하여 국사께서 지나가는 주(州)와 군(郡)에 지시하여 혜소국사(慧照國師) 께서 하산(下山)할 때의 예(例)에 준하여 영송(迎送)토록 하고, 다시 왕사(王師)의 직인을 돌려 보냈다. 10월 19일 운문사(雲門寺)로 들어갔다. (결락) 한보리(漢菩提). 몸을 다투어 찬탄하며, 사방(四方)의 학자들이 마치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국사께서는 그 도제(徒弟)들을 훈도하여 각각 자기(自己)를 밝히게 하는 것으로 급무(急務)를 삼아 겸추(鉗鎚)로 단련(鍛鍊)하였으니, 가히 묘법(妙法)을 밀전(密傳)하였다고 이를 만 하였다.
조사선(祖師禪)을 참구하는 선열(禪悅) 외에도 힘껏 포시(布施)를 행하여 일체(一切) 물질(物質)에 있어서는 조금도 인색함이 없었으니, 스님의 자비는 천성(天性)에 깊이 뿌리박힌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스님께서 비록 만리(萬里)의 밖에 있으나, 임금께서 항상 공경하는 마음이 한결 같았다. (결락) 특히 자주 위로와 문안을 더하였으며, 겸하여 다향(茶香)과 약제와 기타 도용(道用)에 필요한 물건을 보내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그 융숭한 대우는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운문사 산문(山門)의 융성함이 근고이래(近古已來)로 이 같은 적이 없었다. 황통(皇統) 2년 임술(壬戌) 2월 8일 산불이 크게 일어났는데, 대중이 총동원하여 진화작업(鎭火作業)에 나섰으나 불길을 잡지 못하였다. 스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산을 향하여 축원(祝願)하였더니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을 끄게 되었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결락)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4년 갑자(甲子) 10월 21일에 발병(發病)하여 스님께서 친히 진맥하고 시의(侍醫)에게 이르기를, “삼부(三部)의 맥(脈)이 끊어졌으니, 화기(化期)가 다가왔다” 고 했다. 의사도 역시 그렇다고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께서는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가부좌(跏趺坐)로 단정히 앉아 향을 사루고 축원한 후 제자(弟子)들에게 훈교(訓敎)하되, “너희들은 도력(道力)을 기르는데 전력할 것이고 명리(名利)를 탐구(貪求)하지 말라” 하시고, (결락) “진성(眞性)은 본래 원명(圓明)하여 확연(廓然)히 시방(十方)에 두루하며, 시방(十方)이 혼일(渾一)한 동체(同體)이고, 출몰(出沒)이 본시 동광(同光)이라” 는 임종게(臨終偈)를 설하자마자, 거의 입적상태(入寂狀態)에 있었다. 이때 문인(門人)들이 서로 말하기를 “오늘은 중일(重日)이므로, 세속(世俗)에서는 크게 꺼리는 날이니, 만약 오늘 입적(入寂)하시면 어찌하나” 하고 중론(衆論)이 분분하였다. 국사께서 선적중(禪寂中)에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하니, 문인(門人)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국사께서 이르되 “산문(山門)에서 수도하는 분상(分上)에는 세(歲)도 없고 일(日)도 없거늘, (결락) 어찌 기일(忌日)이 따로 있겠는가? 오늘이 만약 기일(忌日)이라면 내가『섬자경(睒子經)』 중에 설(說)한 일체묘보살(一切妙菩薩)의 본생담(本生談)에 의하여 연명(延命)을 제석천왕(帝釋天王)에게 청하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섬자경(睒子經)』의 미륵상품(彌勒相品)을 염송(念誦)하다가 수각(數刻) 동안을 지난 후 문인(門人)에 이르기를 “내가 미륵품(彌勒品)을 염송(念誦)하되, 한 글자도 착오(錯誤)함이 없으니, 드디어 맥박과 호흡(呼吸)이 평정(平正)하여 오늘 죽지 아니하고, 가히 너희들의 청(請)에 부합토록 하리라” 하고, 식사하는 것이나 기거(起居)함이 평일(平日)과 같았다. 11월 15일에 다시 병세를 보여 사세장(辭世章)과 왕에게 올리는 유언장(遺言狀)을 지었는데, 그 내용(內容)이 측은(惻隱)하였다.
그 후 12월 9일 밤 오경(五更)에 삭발 목욕하고 법복(法服)을 갈아 입은 다음, “오음운일편(五陰雲一片) 산멸진무여(散滅盡無餘) 유유고균월(唯有孤輪月) 청광일대허(淸光溢大虛)” 라는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고, 가부좌(跏趺坐)로 차수(叉手)하고 단정히 앉아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문인(門人)이 굻어앉아 모시고 있다가, 포시(哺時)에 이르러 흔들어 보니 이미 천화(遷化)하였다. 그러나 지체(肢體)가 생시(生時)와 같으며, 얼굴빛은 백옥(白玉)과 같았다. (결락) 인근 주군(州郡)으로부터 참관하러 오는 사람이 마치 담장과 같이 둘러 싸였다. 오호라! 국사의 생사관(生死觀)은 고호(賈胡)들과 같으며, 또한 전리(傳吏)가 머물고자 하면 머물고, 떠나려 하면 곧 떠나는 것과 같아서 종용(從容)하고 자재(自在)함이 이와 같으니, 비록 방온(龐蘊)거사(居士)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문인(門人)이 유언장(遺言狀)과 국사의 직인인 인보(印寶) 및 천화사장(遷化事狀)을 가지고 역마(驛馬)를 타고 임금께 주달(奏達)하였다. 임금께서 부고를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며 경탄(敬歎)하시고, 3일간 조회를 파하고 내신(內臣)인 김경원(金景元)과 일관(日官)인 (결락)을 보내어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토록 하였다. 다음해 1월 24일 사신을 보내 예(禮)를 갖추어 국사(國師)로 책봉하는 한편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또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27일 그 문도들이 좌신(坐身)을 들것으로 매고, 청도군 지곡사(池谷寺)의 동쪽 산기슭에서 도유(闍維)하고, 30일 유골(遺骨)을 수습하니 머리에는 중골(重骨)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전삭(栓索)과 구련(勾連)으로 되어 오색(五色)이 선명(鮮明)하였다. 2월 (결락) 자인현(慈仁縣) 판악산(板岳山)남쪽으로 (결락) 천신(遷神)하였다. 최초 입멸(入滅)로부터 도유(闍維)에 이르기까지 계(計) 47일동안 앉은 상태로 조금도 기울지 아니하였으며, 오물(汚物)의 누설(漏洩)도 없었다. 열세(閱世)는 93이요, 좌하(坐夏)는 82세였다. 문인(門人)이 국사의 행적(行跡)을 기록(記錄)하여 비(碑)를 세우고자 하는 일을 임금에게 주청(奏請)하였다. 그리하여 인왕(仁王)께서 신(臣) 언이(彦頤)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으나, 신(臣)은 도(道)를 섭(涉)함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허락을 얻지 못하여 행적(行跡)의 대략(大略)에 의거하여 분향하고 계수(稽首)한 다음, 억지로 서술(序述)하고 송구(頌句)로 명(銘)하여 이르되,
이심전심(以心傳心) 전해받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은
확연(廓然)하고 적요(寂寥)하여 변제(邊際)가 없다
두두물물(頭頭物物) 상섭(相攝)하고 상입(相入)하니
전후제(前後際)를 초월하여 선후(先後)가 없네. ①
이와 같은 격외조령(格外祖令) 파비(巴鼻)가 없어
말로써나 문자(文字)로써 다룰 수 없다.
삼삼조사(三三祖師) 밀부(密付)하여 전해오면서
한 사람이 한 사람에 전승(傳承)하였다. ②
계계승승(繼繼承承) 이은 법통(法統) 접근(接近)을 못해
달마대사(達磨大師) 숭산(崇山)에서 9년(九年)을 면벽(面壁)
설중(雪中)에서 신(信)을 보여 득법(得法)하였고
법(法)을 이은 혜가대사(慧可大師) 한 팔뿐일세 ③
전법제자(傳法弟子) 선택함은 난중난(難中難)이니
불심등(佛心燈)을 전해줌이 이와 같도다
행자(行者)일 때 법(法)을 받은 노행자(盧行者)에서
오종가풍(五宗家風) 그 분파(分派)는 백천(百川)과 같네 ④
위산대원(潙山大圓) 원상(圓相)그린그 가풍(家風)이여!
방원장단(方圓長短) 그 모양은 최초구(最初句)이고
임제대사(臨濟大師) 제창(提唱)하신 일구법중(一句法中)에
삼현(三玄)삼구(三句) 그 종풍(宗風)은 일즉삼(一卽三)일세. ⑤
동산양개(洞山良价) 오위편정(五位偏正)천양(闡揚)했으니
정중편(正中偏)과 편중정(偏中正)은 군신합(君臣合)이요
운문문언(雲門文偃) 주장(柱杖)으로 거양(擧揚)했으며
신통묘용(神通妙用) 자재하게 현전(現前)하도다. ⑥
법안문익(法眼文益) 4기(四機)로써제접(提接)했으니
3계중(三界中)에 어디서나 동일(同一)하도다.
가가(家家)마다 가풍(家風)으론 비록 다르나
귀결(歸結)하는 구경지(究竟地)는 묘원(妙圓)한 것을 ⑦
위대하신 운문사(雲門寺)의 원응국사(圓應國師)여!
동국(東國)에서 출생하여 선법(禪法)을 중흥(中興)
산(山)을 넘고 물을 건너 총림(叢林)을 찾아
용맹정진 참구(參究)하여 본색(本色)을 보다 ⑧
혜능이후(慧能以後) 5가(五家)칠종(七宗) 모든 종지(宗旨)를
원응국사 흉중(胸中)에는 총지(總持)했도다.
기민(機敏)하온 활구중(活句中)에 기어(奇語)가 있어
전(箭)과 봉(鋒)이 상적(相敵)하는 살활일(殺活釰)이여! ⑨
원응국사 출생하기 5천년 전에
달마대사(達磨大師) 그 법등(法燈)이 꺼지려 할 때
꺼진 등불 다시 밝혀 중흥(中興)한 것은
전적(全的)으로 원응국사(圓應國師) 공덕이라네! ⑩
(결락) (결락) (결락)
죽을 듯이 배고파도 절식(節食)하였다.
궤범(軌範)으로 수행(修行)하여 고결(高潔)하시고
자나깨나 중생(衆生)위해 모범(模範)이 되다.
일절재물(一切財物) 보시하여 도와주시고
무소유(無所有)를 가풍(家風)으로 무애(無礙)하시며
실상반야(實相般若) 그 속에서 삼매(三昩)를 얻다.
인간질병(人間疾病) 차별없이 구제하시고
찾아오는 중생에게 법열(法悅)을 주다.
예종왕(睿宗王)과 인종조(仁宗朝)인 양대(兩代)에 걸쳐
왕사(王師)되신 높은 덕(德)은 비길 데 없네.
가물 때나 장마질 때 기도하시면
비 내리고 장마 그침 원(願)대로 되며
산중(山中)에서 마치려고 윤허(允許)를 빌어
남(南)에 있는 운문사(雲門寺)로 가고자 했다.
4대색신(四大色身) 포류(蒲柳)처럼 노쇠했지만
정신(精神)만은 총명하여 변하지 않다.
부유(浮游)같은 인간생명(人間生命) 유한(有限)이어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서로서로 흩어지도다.
선정인(禪定印)에 단좌(端坐)하여 입적(入寂)하시니
얼굴빛이 백옥(白玉)같아 평소(平素)와 같네!
문인(門人)들이 천화사(遷化事)로 상주(上奏)하온데
임금께서 부음(訃音)듣고 상비(傷悲)하시다.
원응(圓應)이란 시호로써 추증하시고
애절(哀切)하신 조사(弔辭)로써 정(情)을 펴시다.
영원토록 그 위업(偉業)을 전(傳)하려 하사
미신(微臣)에게 명(命)하시어 찬명(撰銘)케 하다.
고매하고 탁월하신 유업방촉(遺業芳躅)은
천만세(千萬歲)가 흘러가도 변치 않으리!
왕사(王師)인 단속사(斷俗寺) 주지(住持) 우가승록(右街僧錄) 석탄연(釋坦然)이 왕명(王命)을
들어 비문을 쓰다.
[음기(陰記)]
운문사(雲門寺) 원응국사(圓應國師) 비음(碑陰)에 문도(門徒)의 성명(姓名)을 갖추어 기록한다.비직(批職)을 받은 스님은 24명이니 아래와 같다.
대선사(大禪師)가 2명이니
대선사(大禪師) 익현(翼賢)·대선사(大禪師) 중립(中立)
선사(禪師)가 13명이니
선사(禪師) 정린(正鄰)·선사(禪師) 경웅(景雄)·선사(禪師) 경옥(景玉)·선사(禪師) 각선(覺先)·선사(禪師) 사순(思純)·선사(禪師) 연미(淵微)·선사(禪師) 회묵(懷黙)·선사(禪師) 득숭(得崇)·선사(禪師) 묘혜(妙慧)·선사(禪師) 가관(可觀)·선사(禪師) 계소(戒韶) ·선사(禪師) 각유(覺猶) ·선사(禪師) 연의(淵懿)
삼중대사(三重大師)가 9명이니
삼중대사(三重大師) 덕선(德先) ·삼중대사(三重大師) 양정(良定) ·삼중대사(三重大師) 계징(戒澄) ·삼중대사(三重大師) 각주(覺周) ·삼중대사(三重大師) 경묘(景妙) ·삼중대사(三重大師) 인겸(仁兼) ·삼중대사(三重大師) 진해(眞海) ·삼중대사(三重大師) 석영(碩瑩) ·삼중대사(三重大師) 회원(懷遠)
입내상수좌가도승록(入內上守左街都僧錄) 대사(大師) 혜풍(慧豊)
입내상수우가도승록(入內上守右街都僧錄) 대사(大師) 덕림(德林)
법리주지(法理住持)인 중대사(重大師)가 57명이니
중대사(重大師) 선랑(禪朗)
중대사(重大師) 유조(遺照)
중대사(重大師) 종오(宗悟)
중대사(重大師) 도림(道林)
중대사(重大師) 혜란(慧蘭)
중대사(重大師) 계천(戒遷)
중대사(重大師) 요본(了本)
중대사(重大師) 자초(子超)
중대사(重大師) 이능(理能)
중대사(重大師) 행조(幸照)
중대사(重大師) 관주(冠周)
중대사(重大師) 정본(正本)
중대사(重大師) 담언(曇彦)
중대사(重大師) 인지(仁智)
중대사(重大師) 작련(爵連)
중대사(重大師) 인응(仁應)
중대사(重大師) 기남(寄南)
중대사(重大師) 지성(至誠)
중대사(重大師) 처화(處和)
중대사(重大師) 자순(資順)
중대사(重大師) 적순(迪純)
중대사(重大師) 도안(道安)
중대사(重大師) 지예(之倪)
중대사(重大師) 지선(至禪)
중대사(重大師) 남수(南秀)
중대사(重大師) 종인(宗印)
중대사(重大師) 문원(文遠)
중대사(重大師) 중인(仲仁)
중대사(重大師) 희원(希遠)
중대사(重大師) 조휘(祖煇)
중대사(重大師) 지몽(知夢)
중대사(重大師) 구령(九齡)
중대사(重大師) 정남(挺南)
중대사(重大師) 가원(可元)
중대사(重大師) 영연(靈淵)
중대사(重大師) 각지(覺之)
중대사(重大師) 담유(曇裕)
중대사(重大師) 계주(戒住)
중대사(重大師) 선회(禪懷)
중대사(重大師) 징정(澄靖)
중대사(重大師) 천소(天素)
중대사(重大師) 도정(道精)
중대사(重大師) 품원(品圓)
중대사(重大師) 종습(宗襲)
중대사(重大師) 중순(中淳)
중대사(重大師) 유격(惟格)
중대사(重大師) 도휘(道暉)
중대사(重大師) 도언(道彦)
중대사(重大師) 조윤(祖允)
중대사(重大師) 사성(師誠)
중대사(重大師) 현소(玄素)
중대사(重大師) 혜남(慧南)
중대사(重大師) 이담(理曇)
중대사(重大師) 선밀(禪密)
중대사(重大師) 종이(宗彛)
중대사(重大師) 신초(信初)
중대사(重大師) 자유(子儒)
입내상수 우가 도승록(入內上守 右街 都僧錄) 대사(大師) 영신(英信)
입내상수 좌가 도승록(入內上守 左街 都僧錄) 대사(大師) 웅천(雄闡)
법리명공(法理名公)이 29명이니
관선(冠宣)·관신(觀神)·관석(觀碩)·포이(布夷)·유린(有隣)·현이(玄頤)·선공(善空)·홍청(弘淸)·혜식(慧軾)·자운(子雲)·지웅(智雄)·적령(淑靈)·자회(子懷)·처충(處冲)·회성(懷誠)·혜륜(惠輪)·온소(溫素)·유엄(惟儼)·수견(守竪)·현선(賢善)·경성(景誠)·종영(宗永)·지백(之白)·자연(子淵)·혜유(惠猷)·상추(尙樞)·▨․·진정(眞靖)·정지(正知)
가계(加階)를 첨가(添加)받은 문도(門徒)가 29명이니
선진(善珎)·신명(信明)·적준(迪俊)·여엄(如嚴)·성계(聲溪)·연감(緣鑒)·자남(資南)·선준(禪俊)·선우(禪祐)·▨모(▨慕)·▨▨·․▨·▨․·▨▨·승▨(承▨)·필원(弼源) ·정심(正深) ·현도(賢道) ·혜구(慧球) ·▨원(▨源) ·운효(雲曉) ·안석(安碩) ·지선(至宣) ·사미(思美) ·자선(子禪) ·혜교(慧交) ·계능(戒能) ·이복(利福) ·득총(得聰)
입내상수 좌가도승록(入內上守 左街都僧錄) 대사(大師) 행련(幸連)
묘각사(妙覺寺) 도감(都監) 우가승록 동정(右街僧錄 同正) 혜각(惠覺)
계(加階)한 명공(名公)이 50명이니
경춘(景春) ·성고(性高) ·행경(幸景) ·자존(子存) ·홍준(洪俊) ·영탁(英卓) ·품서(品諝) ·연여(演如) ·탄룡(誕龍) ·석자(釋資) ·연기(硏機) ·묘중(妙中) ·도존(道存) ·회보(懷寶) ·정륜(挺倫) ·준소(俊玿) ·▨운(▨雲)·▨▨·언▨(彦▨)·자휴(子休)·해수(海修)·선원(善元)·연조(緣照)·회실(懷實)·상거(尙渠)·원조(圓照)·묘기(妙機)·상명(尙明)·천원(闡源)·필현(弼賢)·의순(義淳)·지열(智悅)·의총(義聰)·회이(懷已)·각정(覺靖)·준영(俊英)·▨선(․禪)·․▨·교원(皎元)·묘준(妙俊)·종언(宗彦)·각원(覺元)·관혜(觀慧)·관해(觀海)·언구(彦求)·혜상(惠常) 재담(齊淡) 종연(宗淵) 지청(智淸) 담순(曇淳)참학(參學)한 문도(門徒)가 40명이니
존미(存美)·혜심(慧深)·의규(義規)·자순(子純)·제묵(齊黙)·사백(師白)·승호(僧浩)·경엄(敬嚴)·유돈(唯伅)·지휘(智煇)·성순(誠純)·동진(洞眞)·담량(曇亮)·준명(俊明)·정단(正端)·요초(了初)·혁단(赫端)·도연(道緣)·연승(緣勝)·계여(戒如)·지산(智山)·응명(應明)·적청(迪淸)·선행(善行)·법기(法己)·선연(善淵)·선현(善玄)·종신(宗信)·도현(道賢)·용원(用元)·정엄(正嚴)·숙청(淑淸)·정전(定全)·유인(有因)·담윤(曇允)·현정(玄挺)·우린(祐隣)·신원(信元)·정순(挺淳)·유청(儒淸)
승록승사(僧錄僧史) 진경(眞卿)
종순(宗純)이 이 절에 주석(住錫)케 되었으므로 와서 토선(土善)들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