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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원융국사비명(諡圓融國師碑銘)(篆題)
▨▨대부(▨▨大夫)
2 상서(尙書)
3 예부(禮部)
4 시랑(侍郞)
5 지제고(知制誥)
6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
7를 하사받은 신(臣) 고청(高聽)
8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유림랑(儒林郞)
9 상서(尙書) 도관낭중(都官郞中)
10이고 비금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임호(林顥)
11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태세(太歲)가 갑오(甲午)에 있는 해
12, 선병(璿柄)
13이 묘(卯)를 가리키는 달
14에
15, 신(臣)이 송막(松漠)
16에 사신으로 갔다가 廻
17(결락)國, 자수(紫水)로 서(書)
18하여 가로되, 고 원융국사(故圓融國師)는 세계의 진량(津梁)
19이며 인천(人天)의 안목(眼目)
20이셨는데 지금 서거(逝去)하였다. 무봉탑(無縫塔)
21에 뚜껑을 얹고
22, 황견유부(黃絹幼婦)
23인 명문(名文)을 지어 완염(琬琰)
24에 새기고자 하였다. 사(寫) (결락) 그 방유(芳蕤)
25한 비문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신(臣)이 구슬로 엮은 발
26 앞에
27 나아가 석엽(石葉)
28 로하(爐下)
29에서 절하고 사양하여 고하기를, “성조(聖朝)
30께서는 문장이 비단결 같고 동원하는 문사(文詞)도 풍부하여 마치 윤금(潤金)과 같이 절묘한 문장력(文章力)을 따를 사람이 없사오니
31, 바라옵건대 폐하(陛下)께서 친(親)
32히 절묘호사(絶妙好辭)
33인 뛰어난 비문(碑文)을 지으시고, 신(臣)에게 내리신 명(命)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34.
임금께서 임호(林顥)가 주청(奏請)한 표문(表文) 말미(末尾)에 비서(批書)하고 칙명(勅命)
35하기를,“경(卿)에게 부탁한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36. 이고(李翶)
37가 약산(藥山)
38에게 도(道)를 묻고 약산 스님을 학형(鶴形)과 같다고 칭송하였고, 손작(孫綽)
39은 지둔(支遁)
40 스님을 친견하고 그의 응실(鷹室)
41에 흠복(欽伏)하였으니, 스님의 사람됨을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
42.”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신(臣)이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43, 문인(門人)들이 제공(提供)한 행적(行跡)의 실록을 살펴보니
44 국사께서 이 세상에 응화(應化)한 특수한 행적이 매우 자세히 적혀 있었다. 신(臣)은 다만 그 중에서 중요한 부분 대략(大略)만 따서 기록했을 뿐이다.
대저 모군(毛群)의 무리들 중에는
45 반드시 기린이 서수(瑞獸)
46이고, 많은 우족(羽族)들에는 봉새가 성조(聖鳥)이다
47. 만약 기린이 나타나면 두 개의 뿔을 가진 짐승들은
48 야수(野藪)에로 모이고, 봉황이 내려오면 여러 개의 날개를 가진 새들은
49 원오(園梧)
50에 가득하니, 이는 곧 소·말·산까치·종달새 등이다
51. 만약 기린과 봉새가 없으면 어찌 그들을 서수(瑞獸)와 성조(聖鳥)라 할 수 있겠는가
52? 그 까닭인 즉 보통의 모우(毛羽)와 다른 것은 인(仁)에 응(應)하고 덕(德)을 보이니, 오랜만에 한번씩 나타나기 때문이다
53. 국사의 출세시기(出世時期)는 나계(螺髻)의 자비가 은몰(隱沒)하고
54 이소(犛蘇)의 가르침
55이 해이해진 말세(末世)
56에 해당하는 지라, 국사와 같은 인물(人物)은 백년이나 천년이 지난 후라야 한번씩 드물게 출생(出生)하여 불법(佛法)을 호지(護持)하며 시든 각화(覺花)를 다시 무성하게 하고
57, 고갈된 법해(法海)로 하여금
58 거듭 폭원(幅員)의 광막(曠邈)에 채웠으니
59, 원수방족(圓首方足)
60들의 모임이 상서롭고 또한 성스러우니 그를 사람 중의 인봉(麟鳳)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스님의 휘는 결응(決凝)이요, 자는 혜일(慧日)이며 속성은 김씨(金氏)니, 그의 선조(先祖)는 명주(溟州)
61 사람이다. 대왕부(大王父)
62의 휘는 영길(英吉)이니 선행을 닦은 과보(果報)로 얻은 바이며, 화려한 호족(豪族)이요, 대대(代代)로 의관(衣冠)을 정제(正制)한 양반이었다
63. 금벽(金壁)
64을 주조하여 사방으로 튼튼히 둘렀으므로
65 당시 사람들이 금공(金公)이라 불렀으니 마치 한(漢)나라 때 석분(石奮) 만석군(萬石君)
66과 같았다. 왕부(王父)의 휘는 선희(善熙)이니, 관직(官職)은 장보(章保)
67와 기연(器璉)
68·굉홍(宏洪)
69 등을 역임하여 그 명성이 사방(四方)에 떨쳤다. 아버지
70의 휘는 광률(光律)이니 금곡경(金穀卿)
71을 역임하였다. 충직하여 항상 직간(直諫)을 올려
72 임금으로 하여금 더욱 선정(善政)을 베풀도록 최선을 다하였으며
73, 새로운 일을 일으켜 공을 세워서
74 당세(當世)에 큰 혜택을 끼쳤으며
75, 송(宋)나라에 새해 인사로 보내는 세사(歲使)를 인솔하고 갔다가
76 안성(安城)
77에 상주(常住)하고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그곳이 곧 명주(溟州)
78 부해방(負海邦)
79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감잉(感孕)
80하되 그 빙도반목(氷桃磻木)
81과 곡용부래(曲龍浮萊)
82로 정수(精粹)
83의 꽃이며 영령(英靈)의 기백이라 하겠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느 시대에 괴위(瑰偉)
84하고 걸절(傑絶)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방씨(房氏)
85이니,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이며, 내의령(內議令)
86인 강명(康明)
87의 딸로써
88 시집가기 전에 친정에서 베짜는 법, 예의범절 등 가정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89. 고가(考家)
90에 있을 때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항상 남방 환희세상(歡喜世界)의 교주(敎主)이신 보승여래불상(寶勝如來佛像)
91을 봉안하고 손에는 주단(炷檀)
92 향로를 들었으니 마음은 상쾌하기가 마치 감제(甘薺)와 같았다
93. 스님을 분만할 때가 거의 다가와서 사택(私宅)에 도량(道場)을 개설하고
94 스님들을 청하여 경을 강하도록 하였다. 마침 한(漢)나라로부터 고려에 와서 건봉사(乾聖寺)
95에 우거(寓居)하고 있던 스님
96도 강석(講席)에 참석하여 청법하다가 잠깐 조는 동안 비몽사몽간에
97 누더기를 입고 육환장을 짚은 스님
98이 나타나서, “이 집에 장차 산기가 임박하였는데
99 어찌 대문을 열어놓지 않았는가.”하므로, 스님이 깜짝 놀라 꿈을 깨어 절에 돌아가 보니
100, 이날 인시 초(寅時 初)
101에 국사께서 탄생하였으니 대송(大宋) 건덕(乾德) 2년 갑자(甲子)
102 7월 20일 갑오(甲午)였다. 12살 때 용흥사(龍興寺)
103에 나아가 천지화상(天只和尙)의 사제 악수좌(萼首座)
104인 광굉(廣宏)을 은사로 하여 불전(佛殿) 앞에서 무명초(無名草)인 머리를 깎고, 논둑에서 농사일을 할 때 입었던 속복(俗服)을 먹물로 염색한 승복(僧服)으로 갈아입고 스님이 되었다. 어느날 수좌(首座)가 혼허(魂栩)
105 중 꿈에 법라(法螺)를 불고 바라를 치면서
106 설라국사(𦵮羅國師)
107인 결언(決言)
108을 맞이하여 예배하고 난 후 자세히 보니 바로 우리 원융국사(圓融國師)였다. 드디어 국사를 상징하여 이름을 지었다.
개보(開寶)
109 8년 흥복사(興福寺)
110 관단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국사께서는 기년(綺年)
111의 나이에 세속을 떠나 스님이 되어 결고(經誥)
112를 연마하여 정통하므로써 유오하고 미묘
113한 뜻을 감옹력(鑒翁力)
114하게 해석하며, 까다롭고 난삽(難澁)한 반결(盤結)
115을 회유
116하였다. 한 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알아서 푸른 지혜가 마치 두터운 얼음처럼 투철하였다
117. 영원(靈源)인 본심(本心)자리는 담적하여 일체 반연의 조짐이 끊어지고서야
118 바야흐로 나에게로 흘러오면
119 곧 옥과 같이 맑은 작용을 암기(暗記)하며, 본각(本覺)의 그 자리는 멀고 고요하여 길이 여러 갈래로 나의 앞에 나타났으나 나는 그 양(羊)이 달아난 길을 잃지 아니하였다
120. 28세 때 승과(僧科)를 보는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선발되었는데, 대덕(大德)을 거쳐
121 대사(大師)의 법계를 내린 분은 목종(穆宗) 임금이시고
122 수좌(首座)를 가증(加贈)
123한 이는 성고(聖考)
124이며 승통(僧統)으로 추대한 이는 정종(靖宗) 임금이시니, 열성조(列聖朝)의 여러 임금께서 지극한 신심(信心)으로 존경하였으므로 융숭한 대우(待遇)를 받았다
125. 성고(聖考)인 덕종(德宗)께서 궁궐 동쪽에 있는 묘지사(妙智寺)를 국사에게 헌납하였다
126. 이 절은 시끄러운 세속(世俗)과는 멀지 아니하나
127 속진(俗塵)이 날아오지 않는 곳이며, 푸른 산 봉우리
128는 비단과 같은 고운 구름
129으로 덮혀 있다. 사방을 바라보면 마치 오랜 장마가 개인 것과 같이 맑고 깨끗하여 아름다운 새모양 등 괴이(恠異)한 그림을 펼쳐놓은 듯하였다
130 산과 계곡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
131는 마치 고요한 밤에 튕기는
132 현악(絃樂)과 같으니
133, 실로 헌황씨(軒皇氏)가 광성자(廣成子)에게 도(道)를 물었던
134 공동산(崆峒山)과 같은 승경(勝景)이었다
135. 그러므로 왕은 특별히 청하여 스님을 이 절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중희(重熙)
136 십재(十載)에 정종(靖宗) 임금이 왕사(王師)로 책봉하고자 중추지주사(中樞知奏事)
137 병부시랑(兵部侍郞)인 왕총지(王寵之)
138를 중사(中使)의 자격으로 임금이 재가한 고(誥)를 가지고 세 번이나 갔으나
139, 국사께서는 겸산(兼山)처럼 굳은 의지로 거듭 사양하였는데
140, 왕의 청이 더욱 확고하였으므로
141 부득이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42 6월에 개성(開城) 남쪽
143에 행차(幸次)하여 현종(顯宗)의 아버지인 안종(安宗)
144의 영정을 대정사(大精舍)에 봉안하였으니
145, 그 절이 바로 봉은사(奉恩寺)
146이다. 구의(摳衣)
147의 예를 행하였는데, 이 날 가랑비
148가 계속 내려 옷을 적셨다
149. 우중(雨中)에 오는 국사를 근심하여 성상과 몇 조소(皁素)
150 등이 멀리까지 나가서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151 (결락) 상당(象堂)
152으로 맞이하고 작미로(鵲尾爐)
153를 들고 기도하면서 발원하되, 저의 제자들이 앞으로 미륵부처님의 용화회상(龍華會上)
154을 만나 마치 약왕보살이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 앞에서 소신연비(燒身燃臂)하고 마정수기(摩頂授記)
155를 받음과 같이 되기를 빌었다. 오늘 청정한 대중
156을 보니 향기로운 연기는 멀리 퍼지고, 여러 날 짐승과 수중(水中)의 어족(魚族)들까지도 마치 잠을 자듯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였다
157.
지금의 임금님께서는 그 신분(身分)이 가치(珂齒)
158로써 벽정(璧庭)
159으로 말미암아 왕위에 올랐으니 거북의 수명과 같이 성수만세(聖壽萬歲)하기를 빌었으며
160, 태평태자(泰平天子)가 문석(文石)
161의 상서로움에 응합(應合)되어 국운이 번창하고 편안함을 이룩하였다
162. 더욱이 임금께서 불교의 무상심심(無上甚深)한 묘법(妙法)을 깊이 숭상하였으니
163, 이것이 어찌 구세보살(救世普薩)과 당래(當來)에 해탈하실 미륵부처님
164과 만나는 때가 아니겠는가
165. 그러므로 직군(稷君)
166에 명하여 법도(法度)를 강설케 함으로써
167 덕을 베풀었으며, 또한 왕이 겸허한 자세로
168 목민(牧民)하였다
169. 임금께서 앙궁(鴦宮)
170에 행행(行幸)하여 절을 올리고 국사(國師)로 모셨으니
171, 마치 지적(知積)
172이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
173를 받들고 약왕보살
174이 뇌음정각(雷音正覺)
175을 친견한 것과 같았다. 누조(累朝)
176에 걸쳐 여러 임금이 국사를 우대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국사께서 어려서 아직 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겨우 형언(形言)하는 2, 3살 때
177, 성선(聖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178 외조부(外祖父)의 집으로 가자고
179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180. 어머니가 하는 수 없이 아이의 뜻을 따라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181 그 가택(家宅)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全燒)되고 말았다
182. 이를 본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호(加護)라고 하였으니
183,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장자(長者)가 양록(羊鹿)인 권거(權車)로써 유혹하여 화염에 싸인 자녀(子女)들을
184 화택(火宅)
185으로부터 구출한 것과 같은 예라고 하겠다
186.
또 동츤(童齓)
187의 어린 나이 어느 날 밤 꿈에 귀산사(龜山寺)
188로 가는 중로(中路)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의 품속에 두개의 거울
189이 있는데 하나는 해이고 다른 하나는 달이다.”라고 했다. 국사가 이 말을 듣고 가슴을 헤치니 이상한 광명(光明)이 홀연히 흘러나와서 주변 산야(山野)를 비추었다. 국사의 자(字)가 혜일(慧日)인 것은 대개 그 상서(祥瑞)를 기록한 것이다
190. 어느 날 숭복사(崇善寺)
191로부터 궁중에서 경을 강설하기 위해 내정(內庭)으로 가다가
192 부아산(負兒山)
193 서쪽에 있는 덕찰원(德刹院)
194에 들렀더니 그곳의 어떤 스님이 국사에게 고하기를, “어제 밤 꿈에 자씨불(慈氏佛)
195이 이르시기를, ‘내일 나의 벗이 이곳을 지나갈 터이니, 너는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봉대(奉待)하라’고 하였는데, 오늘 여기에 투숙하는 이가 오직 스님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스님은 필연코 미륵 삼실(三悉)의 경지와 같은 셈이다
196. 경연(京輦)
197에 이르러 일친(昵親)
198인 동관(冬官)
199 시랑(侍郞)과 강언제(姜彦第)
200 시랑(侍郞)은 한밤중에
201 서서 국사의 독경하는 소리가 유양(瀏喨)
202하여 매우 우아함을 들었다. 시랑(侍郞)이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곧 스님이 코를 고는 소리였다
203. 다시 전에 듣던 곳으로 돌아가 들었으나 역시 독경하는 소리와
204 같았다. 이에 미루어 본다면 국사는 자나 깨나 항상 화엄삼매(華嚴三昧)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미세(癸未歲)
205에 정종(靖宗) 임금께서 국사를 문덕전(文德殿)으로 영접하여 단비가 내리도록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서
206 잡화경(雜花經)
207을 강설하였는데, 경(經)을 설하려고 책을 펴자마자
208 오색구름이 허공을 덮었고 기문(綺紋)
209이 하늘로 뻗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하였다
210. 이상의 몇 가지는 대충 열거한 것이고
211, 이와 같은 일이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212. 국사의 눈동자는 마치 용의 검푸른 눈동자와 같았고, 눈의 정기(精氣)는 번개불과 같이 빛났으며
213, 걸음은 상섭(象步)와 같이 안상(安詳)하였다. 거룩하고 괴수(壞秀)
214한 모습은 마치 연꽃이 푸른 산을
215 맑게 갠 들판을 진압하는 것과 같았고
216, 온후하고 청화(淸和)한 음성
217은 마치 선우(仙竽)
218가 고요히 천풍(天風)
219을 두들기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였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하나도 환포(幻泡)와 같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국사께서는 이러한 환포(幻泡) 중에서 진여(眞如)의 경지
220를 터득하였다. 따라서 일체의 유상(有想)도 모두가 전도(顚倒)이다. 그렇지만 국사는 이 전도된 중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성(涅槃城)
221에 도달해 있었다.
스님을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친근감을 느끼며
222,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든 대중이 마치 아름다운 구슬이 즐비하게 늘어서듯
223, 또한 보배 구슬이 주렁주렁 매달린 숲과 같은 진풍경
224이었으니,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모골(毛骨)이 송연할 정도로 엄숙하였다
225. 뿐만 아니라 국사를 친견하는 사람은 누구나 도미(道味)와 취미(趣味)를 느껴서
226 연산(連山)
227한 십익(十翼)
228들이 모두 마음의 티끌을 말끔히 씻었다. 그 중에는 조한(藻翰)
229을 잡으면 하양(河陽)
230의 춘수(春樹)
231와 같은 문장(文章)이 나타나며, 중신(重臣)인 주낭(珠囊)
232들과 겸하여 조말(爪末)의 천진으로 돌아왔다
233. 말년(末年)에 상재(桑梓)나무가 심어져 있는 고향
234에 절을 짓고, 옥돌로 얽은 것과 같은 푸른 삼림(森林)으로 둘러싸인
235 법당(法堂)벽에는 불·보살(佛·菩薩)을 그렸으며
236, 만월(滿月)과 같이 거룩하신 불상이 연꽃으로 조각된 좌대 위에 엄연(儼然)하게 앉아 계셨다
237. 임금께서 절 이름을 화엄안국사(華嚴安國寺)
238 라고 하였다
239.
중희(重熙)
240 10년
241에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절 주변의 천석(泉石)은 가히 혼몽(昏蒙)한 번뇌를 씻을 만하고 칡넝쿨에 얽인 송나(松蘿)는 몸과 세상을 던져 버릴만한 곳이니, 나는 여기에서 시작하고 또한 여기에서 종신(終身)하리라.”하시고, 구산(舊山)인 부석사(浮石寺)로 돌아가게 허락을 빌었다
242. 임금께서 생각하기를, “백운(白雲)을 못으로 고정시키고 노끈으로 얽어매어 한 곳에 머물게 할 수 없거니와
243, 어찌 큰덩어리의 보배 구슬을 황지(隍池)에 방치할 수 있으랴!” 하고
244 스님의 간청을 받아들인 후 홰란(噦鸞)
245 타고
246 멀리까지 나가서 석별의 아쉬움을 참으면서 전송하였다
247. 아울러 함(函)에 가득 채운 진신(珍賮)
248과 융성한 총뢰(寵賂)를 드리고
249, 내사사인(內史舍人)
250 임종일(任從一)
251과 좌가승정(左街僧正) 득생(得生)에게 명하여 호송하여 구산(舊山)까지 무사히 돌아가게 하였다
252. 국사는 왕의 황옥거(黃屋車)
253 뒤에 두고 혁혁(赫赫)히 떠나면서 진룡(眞龍)이 활동하던 것을 모두 그치고
254, 홍진(紅塵)을 나와 창창(蒼蒼)히 늙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255, 마치 일곡(逸鵠)의 쾌거(快擧)
256와 같이 소요자재한 마음으로 부석사
257에 이르렀다. 화엄정토(華嚴淨土)의 사상을 주창하여 본사(本師)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비대(媲對)하였으니
258 영취상(靈鷲山)으로써 칠보정토(七寶淨土)를 삼아 항상 안주(安住)하시는 보신불(報身佛)로 여겼다.
이 절은 의상조사께서 중국인 서화(西華)에 유학하여
259 화엄(華嚴)의 법주(法炷)를 지엄(智儼)으로부터 전해 받고
260 귀국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본당(本堂)인 무량수전(無量壽殿)
261에는 오직 아미타불의 불상만 봉안하고 좌우보처(左右補處)도 없으며 또한 전전(殿前)에 영탑(影塔)
262도 없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義相)스님
263이 대답하기를, “법사(法師)이신 지엄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승(一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열반에 들지 아니하고 시방정토(十方淨土)로써 체(體)를 삼아 생멸상(生滅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이르기를
264,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로부터 관정(灌頂)과 수기(授記)를 받은 이가 법계(法界)에 충만하여 그들이 모두 보처(補處)와 보궐(補闕)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지 않으신 까닭에 궐시(闕時)가 없으므로 좌우 보처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영탑(影塔)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화엄(華嚴) 일승(一乘)의 깊은 종지(宗旨)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엄 스님은 이 화엄 종취(華嚴 宗趣)를 의상에게 전해 주었다. 의상이 전수를 받은 후 원융국사에까지 전승(傳乘)되었다. 그러므로 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절에 주석(住錫)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공(林公)
265의 이름은 악(嶽)이니, 이미 자하(紫霞)
266를 역임하고, 마음은 주자(朱子)의 사상을 따랐고
267 가난한 초당(草堂)에 살면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 하였다
268. 국사는 명월(明月)이 이미 오백(五白)을 지난 것과 같이
269 이미 연로(年老)하였다. 계사년(癸巳年)
270에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형기(形氣)는 마침내 뱀이 허물을 벗듯
271 변선(變嬗)
272으로 돌아가는 것, 소요향(逍遙鄕)
273인 열반처가 어느 곳에도 없다
274. 나도 반드시 앞으로 더 이상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을 터이니
275, 이미 이전에 인사(印寫)한 대장경 일부(一部)를 정중한 봉안의식을 거쳐 안국사(安國寺)에 진장(鎭藏)토록 하라
276.”하고, 문인 강간(綱幹)
277을 보내어 “화엄법회를 한 번 개설(開設)토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278 그 날 저녁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279, 곧 4월 17일이었다. 이 날 두 마리의 청룡(靑龍)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한 마리는 시포역(柴浦驛)
280에서 다른 한 마리는 부석사 남쪽 계간(溪澗)
281으로부터 올라갔다. 문도들이 비가 오듯 눈물을 흘리면서 구지(釦墀)
282에 부음(訃音)을 전달하였다.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결락) 옥새(玉璽)를 찍은 왕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시호를 원융(圓融)이라 올리고 특이한 물건들을 보내어 부의(賻儀)하고 겸하여 부승록(副僧錄) 혜영(惠英) 등을 보내서 장례를 감호(監護)하도록 하였으니, 5월 4일에 부석사 동쪽 산등에 장사를 지냈다. 국사께서 살아 있을 때는 산림(山林)으로 문을 삼아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하였으나 열반하신 후에는 그 적막함이 마치 대문을 닫은 것과 같았다
283.
오호라! 담복화(薝蔔花)의 향기는 사라지고 온 법계(法界)에 비린내가 진동하며
284 보리수 나무는 부러졌으니 우리들은 앞으로 누구의 음덕(蔭德)을 받을 것인가
285? 스님의 세수는 90세요, 승랍은 78세였다. 문인 중에 수좌(首座)
286위(位)에 있는 스님은 광증(廣證)이요, 삼중대사(三重大師)
287는 구관(口觀)·증해(證海)·수난(秀蘭)·작현(作賢)·원창(元昶) 등이며 대사(大師)
288는 관옥(觀玉)·간성(看成)·해원(海元)·연윤(聯胤) 등 1,438인이니, 그 중에 혹자는 국사의 골수(骨髓)를 얻었고 혹자는 스님의 골(骨)을 이어받아 모두 강학(强學)이며 금언옥조(金言玉調)와 같은 문장(文章)을 토출(吐出)하였다
289. 새가 하늘을 날으나 어찌 그 허공의 끝을 헤아릴 수 있으랴
290! 양쪽 앞발로 땅을 치면서 기어가는 귀부(龜趺)
291와 용(龍)머리모양의 관석(冠石)이 내가 지은 이 비문에 대하여 보잘 것 없는 작품이라고 여길 것이다
292. 삼가 명을 읊어 이르기를,
네발가진 짐승 중엔 일각(一角)이 제일(第一)
293
날아다니는 새들에겐 구포(九包)
294가 으뜸
295 .
일의일발(一衣一鉢) 납자(衲子)들의 모임중에는
296
부석사(浮石寺)의 원융국사(圓融國師) 제일(第一)이시다
297 .
유학하여 깨달은 후 귀국하셔서
298
해동불교(海東佛敎) 굳게 지켜 홍포(弘布)하시니
마군들은 손을 들고 항복하였고
299
우리 스님 인개(忍鎧)로써 천양(闡揚)했도다
300 .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어리석은 중생들을 인도하시니
301
말세중(末世中)에 한 부처님 출세(出世)하셨네
302 .
列 (결락) 牀
양조대(兩朝代)에 주청(奏請)하여 귀사(歸寺)하시다
303 .
몽중(夢中)에서 수기(授記)받아 국사(國師)가 됐고
304
코곤소리 독경처럼 들리었으며
305
말못하는 어린시절 화재를 피해
306
(결락)
(결락)
(결락)
영원토록 썩지않게 돌에 새기다
307 .
▨▨실 수비원(▨▨室 守碑院)
308 에 중대사(重大師)
309 인 홍수(洪首)·현긴(賢緊), 대사(大師)
310 인 대종(代宗).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