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개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다. 귀부 및 이수,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신의 높이는 273.0cm, 너비 164.0cm, 두께 23.0cm이다. 탑비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지증대사(智證大師)는 진골출신으로 속성이 김씨이고, 법호는 도헌(道憲)이며, 선종 9산문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창한 사람이다. 824년(헌덕왕 16)에 태어나 9세에 출가하였고, 이후 여러 사찰에서 교화활동을 벌였다. 879년(헌강왕 5) 56세에 대사가 소유하고 있던 전장(田莊) 500결을 사찰에 희사하였고, 이 해에 심충(沈忠)이 희사한 땅에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하고 희양산문을 개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지증대사는 진골출신으로서 신라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경주의 월지궁(月池宮)에 나아가 직접 설법하기도 하였다. 대사는 882년(헌강왕 8) 41세의 나이로 입적하였고, 헌강왕은 885년에 왕명으로 최치원(崔致遠)에게 지증대사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하였고, 탑비는 그 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 비문에서 신라불교사를 크게 3기로 구분하였고, 제3기를 선종의 시대라고 정리하였다. 지증대사는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하여 신라 하대에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 남종선과 구별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 선종사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토지소유관계, 전장(田莊)의 성격 등을 연구할 때에도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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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해석문
해석문 | 남동신 |
대당 신라국 고 희양산 봉암사 교시지증대사의 적조탑비명 및 서
입조하정 겸 연봉황화등사 조청대부 전수병부시랑 충서서원학사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이 교를 받들어 지음.
서(序)에 말한다. 오상(五常)을 다섯 방위로 나눔에 동방(東方)에 짝지어진 것을 ‘인(仁)’이라하고, 삼교(三敎)의 명호(名號)를 세움에 정역(淨域)에 나타난 것을 ‘불(佛)’이라 한다. 인심(仁心)이 곧 부처이니, 부처를 ‘능인(能仁)’이라고 일컫는 것은 당연하다. 해돋는 곳〔욱이(郁夷); 신라〕의 유순한 성품의 물줄기를 인도하여, 석가모니의 자비로운 교해(敎海)에 이르도록 하니, 이는 돌을 물에 던지고 비가 모래를 모으는 것 같이 쉬웠다. 하물며 동방의 제후가 외방(外方)을 다스리는 것으로 우리처럼 위대함이 없으며, 산천이 영수(靈秀)하여 이미 호생(好生)으로 근본을 삼고 호양(互讓)으로 선무(先務)를 삼았음에랴. 화락한 태평의 봄이요, 은은한 상고(上古)의 교화로다. 게다가 성(姓)으로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국왕 같은 분이 삭발하기도 하였으며,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하여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 이는 진실로 하늘이 환하게 서쪽으로 돌아보고, 바다가 이끌어 동방으로 흐르게 한 것이니, 마땅히 군자들이 사는 곳에 부처〔법왕(法王)〕의 도가 나날이 깊어지고 또 깊어질 것이다.
대저 노(魯)나라에서 하늘로부터 별이 떨어진 것을 기록하고, 한(漢)나라에서 금인(金人)의 목덜미에 일륜(日輪)이 채여 있음을 징험함으로부터, 부처의 자취는 모든 시내가 달을 머금은 듯하고, 설법하는 소리는 온갖 퉁소소리가 바람에 우는 것 같아, 혹 아름다운 일의 자 취를 서적〔겸상(縑緗)〕에 모으기도 하고, 혹 빛나는 사실들을 비석〔완염(琬琰)〕에 수놓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낙양을 범람케 하고 진궁(秦宮)에 거울을 걸어놓은 사적이 마치 해와 달〔합벽(合璧)〕을 걸어 놓은 듯하니, 진실로 3척의 혀와 5색의 붓이 아니면, 어찌 그 사이에 문사(文辭)를 얽고 맞추어 후세에 언설을 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한 나라의 경우에 비추어 다른 나라의 사정을 파악하고 한 지방으로부터 다른 지방에 이른 것을 상고하니, 불법(佛法)의 바람이 사막과 험준한 지대를 지나서 오고, 그 물결이 바다의 한 모퉁이〔해동(海東)〕에 비로소 미치었다.
옛날 우리나라가 셋으로 나뉘어 솥발과 같이 서로 대치하였을 때에 백제에 ‘소도(蘇塗)’의 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금인(金人)에게 제사지내는 것과 같았다. 그 뒤 섬서(陝西)의 담시(曇始)가 맥(貊) 땅에 들어온 것은, 섭마등(攝摩騰)이 동(東)으로 후한(後漢)에 들어온 것과 같았으며, 고구려의 아도(阿度)가 우리 신라에 건너온 것은, 강승회(康僧會)가 남으로 오(吳)에 간 것과 같았다.
때는 곧 양나라의 보살제가 동태사에 간지 한해 만이요, 우리 법흥왕께서 율령을 마련하신 지 팔년째였다. 역시 이미 바닷가 계림에 즐거움을 주는 근본을 심었으며, 해뜨는 곳 신라에서 늘어나고 자라나는 보배가 빛났으며, 하늘이 착한 소원을 들어주시고 땅에서 특별히 뛰어난 선인이 솟았다. 이에 귀현한 근신이 있어 제 몸을 바치고, 임금이 삭발하였으며, 비구승이 서쪽으로 가서 배우고, 아라한이 동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혼돈의 상태가 능히 개벽되었으며, 인간 세계가 두루 교화되었으므로, 산천의 좋은 경개(景槪)를 가리어 토목의 기이한 공력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수도할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수행할 길을 밝히니, 신심(信心)이 샘물같이 솟아나고, 혜력(慧力)이 바람처럼 드날렸다. 과연 여(麗)·제(濟)를 크게 무찔러서〔㵱杵〕 재앙을 제거토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탑이 구름처럼 벌려져서 문득 빈 땅이 없고, 큰 북이 우뢰같이 진동하여 제천에서 멀지 않으니, 점차 번지어 물듦에 여유가 있었고, 조용히 탐구함에 싫증이 없었다.
그 교가 일어남에 있어, 아비달마대비파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이 먼저 이르자 우리나라에 사체(四諦::TEXT)의 법륜이 달렸고, 대승교가 뒤에 오니 전국에 일승(一乘)의 거울이 빛났다. 그러나, 의룡(義龍)이 구름처럼 뛰고, 율호(律虎)가 바람같이 오르며, 학해(學海)의 파도가 용솟음치고, 계림(戒林)의 가엽(柯葉)이 무성하며, 도가 모두 끝없는 데 융합하고, 정이 간혹 속이 있는 데 통하였으니, 문득 고인 물이 잔 물결을 잠재우고, 높은 산이 일광(日光)을 두른 듯한 사람이 대개 있었을 것이나, 세상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장경(長慶) 초에 이르러, 도의(道義)라는 중이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서당(西堂)의 오지(奧旨)를 보았는데, 지혜의 빛이 지장선사(智藏禪師)와 비등해져서 돌아왔으니, 현계(玄契)를 처음 말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마음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남쪽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는 잘못을 감싸고, 메추라기의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남해를 횡단하려는 대붕의 높은 소망을 꾸짖었다. 이미 외우는 말에만 마음이 쏠려 다투어 비웃으며 ‘마어(魔語)’라고 한 까닭에 빛을 지붕 아래 숨기고, 종적을 협소한 곳에 감추었는데, 동해의 동쪽에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에 은둔하였으니, 어찌 『주역(周易)에서 말한 “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이 없다”는 것이겠는가. 꽃이 겨울 산봉우리에서 빼어나 선정의 숲에서 향기를 풍기매, 덕을 사모하는 자가 산에 가득하였고, 착하게 된 사람이 골짜기를 나섰으니, 도는 폐(廢)해질 수 없으며 때가 그러한 뒤에 행해지는 것이다.
흥덕대왕(興德大王)께서 왕위를 계승하시고 선강태자(宣康太子)께서 감무를 하시게 됨에 이르러, 사악한 것을 제거하여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선을 즐겨하여 왕가의 생활을 기름지게 하였다. 이 때 홍척대사(洪陟大師)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도 역시 서당(西堂)에게서 심인(心印)을 증득하였다. 남악(南岳)에 와서 발을 멈추니, 임금께서 하풍(下風)에 따르겠다는 소청의 뜻을 밝히셨고, 태자께서는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기약을 경하하였다. 드러내 보이고 은밀히 전하여 아침의 범부가 저녁에 성인이 되니, 변함이 널리 행해진 것은 아니나, 일어남이 갑작스러웠다.
시험삼아 그 종취를 엿보아 비교하건대, 수(修)한 데다 수(修)한 듯 하면서 수(修)함이 없고, 증(證)한 데다 증(證)한 것 같으면서 증(證)함이 없는 것이다. 고요히 있을 때는 산이 서있는 것 같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울리는 듯 하였으니, 무위(無爲)의 유익함으로 다투지 않고도 이겼던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의 바탕이 허령(虛靈)하게 되었는데, 능히 정리(靜利)로써 해외를 이롭게 하였으면서도, 그 이롭게 한 바를 말하지 않으니 위대하다고 하겠다.
그 후 구도승의 뱃길 왕래가 이어지고, 나타낸 바의 방편이 진도(眞道)에 융합하였으니, 그 조상들을 생각하지 않으랴. 진실로 무리가 번성하였도다. 혹 중원에서 득도하고는 돌아오지 않거나, 혹 득법(得法)한 뒤 돌아왔는데, 거두(巨頭)가 된 사람을 손꼽아 셀 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靜衆寺)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금(益州金) 진주금(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北山)의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홍척(洪陟),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대안사(大安寺)의 혜철국사(慧徹國師), 혜목산(慧目山)의 현욱(玄昱), 지력문(智力聞), 쌍계사(雙溪寺)의 혜조(慧昭), 신흥언(新興彦), 통▨체(涌▨體), 진무휴(珍無休), 쌍봉사(雙峰寺)의 도윤(道允), 굴산사(崛山寺)의 범일(梵日), 양조국사(兩朝國師)인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보리종(菩提宗) 등인데,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나를 따르며,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쫓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교화가 중생세계에 미쳤고, 행적이 부도와 비석에 전하였으며, 좋은 형제에 많은 자손이 있어, 선정(禪定)의 숲으로 하여금 계림(鷄林)에서 빼어나도록 하고, 지혜의 물로 하여금 접수(鰈水::TEXT)에서 순탄하게 흐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따로 지게문을 나가거나 들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대도를 보며, 산에 오르거나 바다에 나가지 않고도 상보(上寶)를 얻어, 안정된 마음으로 의념을 잠재우고 담담하게 세상맛을 잊게 되었다. 저편의 중국에 가지 않고도 도에 이르고, 이 땅을 엄하게 하지 않고도 잘 다스려졌으니, 칠현(七賢)을 누가 비유로 취하겠는가. 십주(十住)에 계위(階位)를 정하기 어려운 사람이 현계산(賢溪山) 지증대사(智證大師) 그 사람이다.
처음 크게 이를 적에 범체대덕(梵體大德)에게서 몽매함을 깨우쳤고, 경의율사(瓊儀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마침내 높이 도달할 적엔 혜은엄군(慧隱嚴君)에게서 현리(玄理)를 탐구하였고, 양부령자(楊孚令子)에게 묵계(黙契)를 주었다. 법의 계보를 보면, 당(唐)의 제4조 도신(道信)을 5세부(世父)로 하여 동쪽으로 점차 이 땅에 전하여 왔는데, 흐름을 거슬러서 이를 헤아리면, 쌍봉(雙峰)의 제자는 법랑(法朗)이요, 손제자는 신행(愼行)이요, 증손제자는 준범(遵範)이요, 현손제자는 혜은(慧隱)이요, 내손제자(來孫弟子)가 대사이다. 법랑대사는 대의사조(大醫四祖)의 대증(大證)을 따랐는데, 중서령(中書令) 두정륜(杜正倫)이 지은 도신대사명(道信大師銘)에 이르기를, “먼 곳의 기사요 이역의 고인으로 험난한 길을 꺼리지 않고 진소(珍所)에 이르러, 보물을 움켜쥐고 돌아갔다” 하였으니, 법랑대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므로 다시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는데, 비장한 것을 능히 찾아낸 이는 오직 신행대사뿐이었다. 그러나 때가 불리하여 도가 미처 통하지 못한지라 이에 바다를 건너갔는데, 천자에게 알려지니, 숙종(肅宗)황제께서 총애하여 시구를 내리시되, “용아(龍兒)가 바다를 건너면서 뗏목에 힘입지 않고, 봉자(鳳子)가 하늘을 날면서 달을 인정함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신행대사가 ‘산과 새’, ‘바다와 용’의 두 구로써 대답하니 깊은 뜻이 담겼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삼대(三代)를 전하여 대사에게 이르렀는바, 필만(畢萬)의 후대가 이에 증험된 것이다.
그의 세속 인연을 상고해 보면, 왕도(王都) 사람으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다. 호는 도헌(道憲)이요 자는 지선(智詵)이다. 아버지는 찬괴(贊瓌)이며 어머니는 이씨(伊氏)이다. 장경(長慶) 갑진년(甲辰年)에 세상에 태어나 중화(中和) 임인년(壬寅年)에 세상을 뜨니, 자자(自恣)한 지 43년이고 누린 나이가 59세였다. 그가 갖춘 체상(體相)을 보면, 키가 여덟 자 남짓했고 얼굴이 한 자 쯤 이었으며, 의상(儀狀)이 뛰어나며 말소리가 웅장하고 맑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사람이었다. 잉태할 당시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기이한 행적과 숨겨진 이야기는 귀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 같아 붓으로는 기록할 수 없겠으나, 이제 사람들의 귀를 치켜세우도록 한 여섯 가지의 이상한 감응과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던 여섯 가지의 옳은 操行을 간추리고 나누어 나타낸다.
처음 어머니의 꿈에 한 거인이 나타나 고하기를, “나는 과거의 비파시불(毘婆尸佛)로서 말법의 세상에 중이 되었는데, 성을 낸 까닭으로 오랫동안 용보(龍報)를 따랐으나, 업보가 이미 다 끝났으니 마땅히 법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묘연에 의탁하여 자비로운 교화를 널리 펴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이내 임신하여 거의 4백일을 지나 관불회(灌佛會)의 아침에 태어났는데, 일이 이무기의 복생고사(復生故事)에 징험되고 꿈이 불모(佛母)의 태몽고사에 부합되어, 스스로 경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조심하고 삼가하게 하며, 가사를 두른 자로 하여금 정밀하게 불도를 닦도록 하였으니, 탄생의 기이한 것이 첫째이다.
태어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고, 짜서 먹이면 울면서 목이 쉬려고 하였다. 문득 어떤 도인(道人)이 문 앞을 지나다가 깨우쳐 말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도록 하려면 훈채(葷菜) 및 육류(肉類)를 참고 끊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따르자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 젖으로 기르는 이에게 더욱 삼가하도록 하고 고기를 먹는 자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게 하였으니, 오랜 풍습의 기이한 것이 둘째이다.
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너무 슬퍼하여 거의 훼멸하였다. 추복승이 이를 가련히 여기고 논하여 말하기를, “덧없는 몸은 사라지기 쉬우나 장한 뜻은 이루기 어렵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은혜를 갚으심에 큰 방편이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힘쓰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느끼고 깨달아 울음을 거두고는 어머니께 불도에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어머니는 그의 어린 것을 가엾게 여기고, 다시금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음을 염려하여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사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고사를 듣고 곧 도망해 가서 부석산에 나아가 배웠다. 문득 하루는 마음이 놀라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잠시 뒤에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다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뵈오니 병도 뒤따라 나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완효서에 견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대사에게 고질(痼疾)이 전염되어 의원에게 보여도 효험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점을 쳤더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부처에게 이름을 예속시켜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전의 꿈을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조심스럽게 네모진 가사를 몸에 덮고 울면서 맹세하기를, “이 병에서 만약 일어나게 된다면 부처님께 아들로 삼아 달라고 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틀 밤을 자고 난 뒤에 과연 완쾌되었다. 우러러 어머니의 염려하심을 깨닫고, 마침내 평소에 품었던 뜻을 이루어, 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식을 부처에게 선뜻 내주도록 하고, 불도를 미덥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성으로 신인을 감동시킨 것의 기이함이 셋째이다.
열일곱 살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고 비로소 강단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빛이 선명한 것을 깨닫고 이를 더듬어 한 구슬을 얻었다. 어찌 마음을 두고 구한 것이겠는가. 곧 발이 없이도 이른 것이니, 참으로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비유한 바이다. 굶주려 부르짖는 것으로 하여금 제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넘어지는 것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도록 하였으니, 마음을 면려한 것의 기이함이 넷째이다.
하안거를 마치고 장차 다른 곳으로 가려 하는데, 밤에 꿈속에서 보현보살이 이마를 어루만지고 귀를 끌어당기면서 말하기를, “고행을 실행하기는 어려우나 이를 행하면 반드시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뒤 놀란 나머지 오한이 든 것 같았다. 잠자코 살과 뼈대에 새겨 이로부터 다시는 명주옷과 솜옷을 입지 않았고, 긴 실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삼이나 닥나무에서 나온 것을 사용하였으며, 어린 양가죽으로 만든 신도 신지 않았다. 하물며 새깃으로 만든 부채나 털로 만든 깔개를 사용하겠는가. 삼베옷을 입는 자로 하여금 수행에 눈을 뜨게 하고 솜옷을 입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였으니, 자신을 단속함의 기이함이 다섯째이다.
어렸을 때부터 노성한 덕이 풍부하였고, 게다가 계주(戒珠)를 밝혔는지라, 후생들이 다투어 따르면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큰 걱정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슬기롭게 하고자 해도 그것이 본보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모범이 되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큰 바다에 뜬 지푸라기가 제 자신도 건너갈 겨를이 없음에랴. 그림자에게 형체를 쫓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반드시 비웃음살 꼴이 되리라” 하였다. 뒤에 산길을 가는데 어떤 나뭇꾼이 앞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선각이 후각을 깨닫게 하는 데 어찌 덧없는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닫고는 와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으니, 계람산(鷄藍山) 수석사(水石寺)에 대나무와 갈대처럼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얼마 뒤에 다른 곳에 땅을 골라 집을 짓고는 말하기를, “매이지 않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나, 능히 옮겨가는 것이 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책의 글자만 보는 이로 하여금 세 가지를 반성하게 하고 보금자리를 꾸민 자로 하여금 아홉 가지를 생각하도록 하였으니, 훈계를 내린 것의 이상함이 여섯째이다.
태사에 추증된 경문대왕께서는 마음으로는 유(儒)·불(佛)·도(道) 3교에 융회한 분으로서 직접 대사를 만나 뵙고자 하였다. 멀리서 그의 생각을 깊이 하고, 자신을 가까이 하면서 도와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서한을 부쳐 말하기를, “이윤은 사물에 구애받지 않은 사람이고, 송섬은 작은 것까지 살핀 사람입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에 비유하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왕도 주위의 암거에도 자못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새가 앉을 나무를 가릴 수 있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황의 내의(來儀)를 아끼지 마십시오” 하였다. 근시 가운데 쓸만한 사람을 잘 골라 뽑았는데, 원성왕의 6대손인 입언(立言)을 사자로 삼았다. 이미 교지를 전함이 끝나자 거듭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시킴에 있어 고요한 곳을 버리고 어디로 나아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 않을 수 있다’는 분부는 저를 위하여 잘 말씀하신 것이오니, 바라건대 그냥 이대로 있게 해주시어, 제가 거듭되는 부름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더욱 진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그의 명예는 날개가 없이도 사방으로 전해졌으며, 대중은 말하지 않는 가운데 아주 달라졌다.
함통 5년(864) 겨울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을 자칭하며 당래불(當來佛)에 귀의하였다. 대사를 공경하여 자신을 하생(下生)이라 이르고 상공(上供)을 후히 하였으며, 읍사(邑司)의 영유인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여, 원학(猿鶴)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대사가 이에 그의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산의 이름이 현계(賢溪)이고 땅이 우곡(愚谷)과 다르며 절의 이름이 안락(安樂)이거늘, 중으로서 어찌 주지하지 않으리오” 하고는, 그 말을 따라 옮겨서 머무른즉 교화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산과 같이 더욱 고요하게 하고, 땅을 고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토록 하였으니, 진퇴의 옳음이 첫째이다.
어느날 문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고(故) 한찬(韓粲) 김의훈(金嶷勳)이 나를 僧籍에 넣어 중이 되게 하였으니, 공에게 불상으로써 보답하겠노라” 하고는, 곧 1장 6척되는 철불상을 주조하여 선(銑)을 발라, 이에 절을 수호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데 사용하였다. 은혜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날로 돈독하게 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처럼 따르도록 하였으니, 보답을 아는 것의 옳음이 둘째이다.
함통 8년(867) 정해년(丁亥年)에 이르러, 시주인 옹주가 여금(茹金) 등으로 하여금 절에다 좋은 전지와 노비의 문서를 주어 , 어느 승려라도 여관처럼 알고 찾을 수 있게 하고, 언제까지라도 바꿀 수 없도록 하였다. 대사가 그로 인해 깊이 생각해온 바를 말하되, “왕녀께서 법희(法喜)에 의뢰하심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불손(佛孫)인 내가 선열(禪悅)을 맛봄이 어찌 헛되이 그렇겠는가. 내 집이 가난하지 않은데 친척족당이 다 죽고 없으니, 내 재산을 길가는 사람의 손에 떨어지도록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문제자들의 배를 채워주리라”고 하였다. 드디어 건부(乾符) 6년(879)에 장(莊) 12구(區)와 전(田) 500결(結)을 희사하여 절에 예속시키니, 밥을 두고 누가 밥주머니라고 조롱했던가. 죽도 능히 솥에 새겨졌도다. 양식에 힘입어 정토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비록 내 땅이라 하더라도 임금의 영토 안에 있으므로, 비로소 왕손인 한찬(韓粲) 계종(繼宗)과 집사시랑(執事侍郞)인 김팔원(金八元), 김함희(金咸熙)에게 질의하여 정법사(正法司)의 대통(大統)인 석현량(釋玄亮)에게 미쳤는데, 심원한 곳에서 소리가 나 천리 밖에서 메아리치니, 태보(太傅)에 추증된 헌강대왕(獻康大王)께서 본보기로 여겨 그를 허락하시었다. 그 해 9월 남천군(南川郡)의 승통(僧統)인 훈필(訓弼)로 하여금 농장을 가리어 정장(正場)을 구획하도록 하였다. 이 모두가 밖으로는 군신이 땅을 늘리도록 도와주고, 안으로는 부모가 천계(天界)에 태어나도록 하는데 이바지한 것이다. 목숨을 이은 사람으로 하여금 인(仁)과 더불게 하고, 가기(歌妓)에게 후히 상을 준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뉘우치도록 하였으니, 대사가 시주로서 희사한 것의 옳음이 셋째이다.
건혜(乾慧)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심충(沈忠)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사의 이치를 분별하는 칼날이 선정과 지혜에 넉넉하고, 사물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천문과 지리를 환히 들여다 보며, 의지가 담란(曇蘭)처럼 확고하고 학술이 안름(安廩)과 같이 정밀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만나뵙는 예의를 표현한 뒤 아뢰기를, “제자에게 남아도는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에 있습니다. 봉암(鳳巖)·용곡(龍谷)으로 지경이 괴이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니, 바라건대 선사(禪寺)를 지으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내가 분신(分身)하지 못하거늘 어찌 이를 사용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나, 심충의 요청이 워낙 굳세고 게다가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전추(前騶)로 삼은 듯한 기이한 형상이 있었는지라, 곧 석장을 짚고 나뭇꾼이 다니는 좁은 길로 빨리 가서 두루 살피었다. 산이 사방에 병풍같이 둘러막고 있음을 보니,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 올라가는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띠처럼 두른 것을 보니,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놀라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얻음이 어찌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에 대한 방비를 기본으로 삼았는데, 기와로 인 처마가 사방으로 이어지도록 일으켜 지세를 진압케 하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중화(中和) 신축년(辛丑年)(881)에 전(前) 안륜사(安輪寺) 승통(僧統)인 준공(俊恭)과 숙정대(肅正臺)의 사(史)인 배율문(裵聿文)을 보내 절의 경계를 표정케 하고, 이어 ‘봉암(鳳巖)’이라고 명명하였다. 대사가 입적한 지 수년이 되었을 때, 산에 사는 백성으로 들도적이 된 자가 있어 처음에는 감히 법륜에 맞섰으나 끝내 감화하게 되었다. 능히 정심(定心)의 물을 깊이 헤아려서 미리 마산(魔山)에 물을 댄 큰 힘이 아니겠는가. 팔이 부러진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드러내도록 하고, 용미(龍尾)를 파는 사람으로 하여금 광기를 제어하게 하였으니, 선심(善心)을 개발한 것의 옳음이 넷째이다.
태보대왕(太傅大王)은 중국의 풍속으로써 폐풍(弊風)을 일소하고, 넓은 지혜로써 마른 세상을 적시게 하셨다. 평소에 영육(靈育)의 이름을 흠앙하시고, 법심(法深)의 강론을 간절히 듣고자 했던 터라, 이에 계족산(鷄足山)에 마음을 기울이시어 학두서(鶴頭書)를 보내 부르시며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소연(小緣)을 보호하다가 잠깐 사이에 한해를 넘겨버렸으니, 안으로 대혜(大慧)를 닦을 수 있도록 한번 와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임금의 낭함(琅函)에서 “좋은 인연이 세상에 두루 미침은 (불보살이) 인간계에 섞여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것에 감동하여, 옥을 품고 산에서 나왔다. 거마(車馬)가 베날듯이 길에서 맞이하였다. 선원사(禪院寺)에서 휴식하게 되자, 편안히 이틀 동안을 묵게 하고는 인도하여 월지궁(月池宮)에서 ‘심(心)’을 질문하였다. 그 때는 섬세한 조라(蔦蘿)에 바람이 불지 않고 온실수(溫室樹)에 바야흐로 밤이 될 무렵이었는데, 마침 달의 그림자가 맑은 못 가운데 똑바로 비친 것을 보고는, 대사가 고개를 숙여 유심히 살피다가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상쾌한 듯 흔연히 계합(契合)하고 말씀하시기를, “부처가 연꽃을 들어 뜻을 나타냈거니와, 전하는 유풍여류(遺風餘流)가 진실로 이에 합치되는구려!”라고 하였다. 드디어 제배(除拜)하여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대사가 대궐을 나서자, 임금께서 충성스런 신하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타이르도록 하며, 잠시 머물러 주기를 청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우대우(牛戴牛)라고 이르지만, 값나가는 바는 얼마 안됩니다. 새를 새의 본성에 따라 기르신다면 시혜(施惠)됨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작별하기를 청하오니 이를 굽히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서글퍼하시며, 운어(韻語)로써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베풀어도 이미 머물지 않으니 불문(佛門)의 등후(鄧侯)로다. 대사는 ‘지둔(支遁)이 놓아둔 학(鶴)’이나, 나는 ‘속세를 초월한 갈매기’가 아니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 십계(十戒)를 받은 불자인 선교성부사(宣敎省副使) 풍서행(馮恕行)에게 명하여 대사가 산으로 돌아가는 데 위송(衛送)토록 하였다. 토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루터기에서 떠나게 하고, 물고기를 탐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물 만드는 것을 배우도록 하였으니, 세상에 나가서 교화하고 물러와 도를 닦는 것의 옳음이 다섯째이다.
대사는 세간에서 도를 행함에 있어 멀고 가까움과 평탄하고 험준함을 가림이 없었고, 일찍이 말이나 소에게 노고를 대신토록 하지 않았다. 산으로 돌아감에 미쳐서는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 넘고 건너는 데 지장을 주므로, 이에 임금께서 종려나무로 만든 보여(步輿)를 내리시니, 사자에게 사절하며 말하기를, “이 어찌 정대춘(井大春)의 이른바 단순한 ‘인거(人車)’이겠습니까. 뛰어난 인물들을 우대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바이거늘, 하물려 삭발한 중으로서야. 그러나 왕명이 이미 이르렀으니, 그것을 받아 괴로움을 구제하는 도구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병으로 말미암아 안락사(安樂寺)에 옮겨가고 나서 석장을 짚고도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사용하였다. 병을 병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공을 깨닫도록 하고,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니, 취사(取捨)의 옳음이 여섯째이다.
겨울 12월 기망(旣望)의 이틀 뒤에 이르러 책상다리를 하고 서로 말을 나눈 끝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아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떨어졌도다.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 진동하니 그 소리는 호계(虎溪)의 울부짖음과 같았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꺾으니 그 빛깔은 사라수(沙羅樹)와 같았다. 외물이 감응함도 이같이 극진하거늘, 사람의 슬픔이야 헤아릴 만하다. 이틀 밤을 넘겨 학계산(賢溪山)에 임시로 유체를 모셨다가, 1년 뒤의 그 날에 희야(曦野)로 옮겨 장사지냈다.
사(詞)에 이르기를,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능히 흑을 지키었네. 두 교가 한껏 천하의 본보기라 일컬었지만, 석가는 힘 겨루는 것을 나무랐으니, 십만 리 밖에 서역의 거울이 되었고, 일천 년 뒤에 동국의 촛불이 되었네.
계림의 지경은 오산의 곁에 있으며, 옛부터 선과 유에 기특한 이가 많았네. 아름다울손 희중이여! 직부에 게으르지 않고, 다시금 불일을 맞아 공과 색을 분별하였구나. 이로부터 교문이 여러 층으로 나뉘었으며, 그로 인해 말의 길이 널리 뻗게 되었네.
몸은 토끼굴에 의지하였으나 마음은 편안키 어려웠고, 발을 양기(羊崎)에 내딛으니 도리어 눈이 현혹될 정도였네. 법해(法海)가 순탄하게 흐를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데, 마음으로 안결(眼訣)을 얻었으니 참되고 극진함을 포괄하였구나. 득(得) 가운데의 득(得)은 망상(罔象)의 얻음과 같은 것이나, 묵(黙) 중의 묵(黙)은 한선(寒蟬)의 울지 않음과 다르도다.
북산의 도의(道義)가 홍곡(鴻鵠)의 날개를 드리우고, 남악의 홍척(洪陟)이 대붕(大鵬)의 날개를 펼쳤네. 해외에서 알맞은 때에 귀국하매 도는 누르기 어려웠으니, 멀리 뻗은 선의 물줄기가 막힘이 없구나.
다북쑥이 삼대에 의지하여 스스로 곧을 수 있었고, 구슬을 내 몸에서 찾으매 이웃에게 빌리는 것을 그만 두었네. 담연자약한 현계산의 선지식이여! 열두 인연이 헛된 꾸밈이 아니로다.
무엇하러 참바를 잡고 말뚝을 박을 것이며, 무엇하러 종이에게 붓을 핥도록 하고 먹물을 머금게할 것인가. 저들은 혹 멀리서 배우고 고생하며 돌아왔지만, 나는 능히 정좌(靜坐)하여 온갖 마적을 물리쳤도다.
의념(意念)의 나무를 잘못 심어 기르지 말고, 정욕(情欲)의 밭에다 농사를 그르치지 말며, 수없는 항하사(恒河沙)를 두고 만(萬)이다 억(億)이다 논하지 말고, 외로이 뜬 구름을 두고 남북을 논하지 말라.
덕행의 향기는 사방원지(四方遠地)에 치자나무 꽃처럼 알려졌고, 지혜의 교화는 한편으로 사직을 편안케 하였네. 몸소 임금의 은총을 받들어 누더기를 펄럭였고, 마음을 물에 비친 달에 비유하여 선식(禪拭)을 바쳤네.
집안의 대를 이을 부유한 처지에서 과연 누가 형극의 길에 들 것인가. 썪은 선비의 도로 대사의 정상(情狀)을 들추기가 부끄럽도다. 발자취가 보당처럼 빛나니 이름을 새길 만한데, 나의 재주가 금송(錦頌)을 감당하지 못하여 글을 짓기 어렵도다. 시끄럽고 번거로운 창자로 선열의 공양에 배부르고자, 산중으로 와서 전각을 살펴보노라.
<음기>
태보왕(太傅王)께서 의원을 보내 문병하시고 파발마를 내려 재(齋)를 지내도록 하셨다. 중정(中正)·공평(公平)하게 정무를 보시느라 여가가 없으시면서도, 능히 시종 한결같으셨으니, 보살계를 받은 불자요 건공향(建功鄕)의 수령인 김입언(金立言)에게 특별히 명하여, 외로운 여러 제자들을 위로하게 하고 ‘지증선사(智證禪師)’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호를 내리셨다. 이어 비석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대사의 행장을 적어 아뢰라 하시니, 문인인 성견(性蠲)·민휴(敏休)·양부(楊孚)·계미(繼徽) 등은 모두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인지라, 묵은 행적을 거두어 바쳤다.
을사년(乙巳年)(885)에 이르러 국민 가운데 유도(儒道)를 매개로 하여 황제의 나라에 시집가서 이름을 계륜(桂輪)에 높이 걸고 관직이 계하사(桂下史)에 오른 이가 있어 최치원(崔致遠)이라고 하는데, 당제(唐帝)의 조서를 두 손으로 받들고 회왕(淮王)이 준 의단(衣段)을 함께 가져 왔으니, 비록 이 영광을 봉새가 높이 나는 것에 비하기는 부끄러우나, 학이 청초하게 돌아온 것엔 자못 비길 만하리라. 임금께서 신신(信臣)으로서 청신남(淸信男)인 도죽양(陶竹陽)에게 명하여, 대사의 문인들이 쓴 행장을 치원에게 주도록 하고 수교(手敎)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누더기를 걸친 동국(東國)의 선사(禪師)가 서방(西方)으로 천화(遷化)함을 이전에 슬퍼하였으나, 비단 옷을 입은 서국의 사자(使者)가 동국으로 귀환함을 매우 기뻐하노라. 불후의 대사가 인연이 있어 그대에게 이르게 된 것이니, 절묘한 작품을 아끼지 말아 장차 대사의 자비에 보답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신이 비록 무인(武人)의 재목이 아니기 때문이긴 하나, 문인이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바야흐로 마음껏 재주를 부리려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주상전하의 승하하심을 당하였는데, 다시 나라에서 불서(佛書)를 중히 여기고 집에서는 승사(僧史)를 간직하며, 법갈(法碣)이 서로 바라보고 선비가 가장 많게 되었다. 두루 아름다운 글을 보고 시험삼아 새롭지 못한 글도 찾아 보았는데, “무거무래(無去無來)”의 말이 다투어 말(斗)로 헤아릴 정도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말이 움직이면 수레에 실을 지경이었지만, 일찍이 『춘추(春秋)』에서와 같은 신의가 없었고, 간혹 조공(周公)의 구장(舊章)만을 쓴 것과 같을 뿐이었다. 이로써 돌이 말하지 못함을 알았고 도가 멀다고 하는 것을 더욱 체험하였다. 오직 한스러운 것은, 대사께서 돌아가신 것이 이르고 신의 귀국이 늦었다는 것이다. ‘애체(靉靆)’라는 두 글자를 두고 누가 지난 날을 알려줄 것인가. 소요원(逍遙園)에서 처럼 설법을 하셨으나, 참다운 비결을 듣지 못하였으니, 매양 감당할 수 없는 처지임을 걱정만 하였지, 서둘러 지어야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때가 늦음을 탄식하자면 이슬처럼 지나고 서리같이 다가와, 갑자기 근심으로 희어진 귀밑머리가 시들어 쇠약한 것 같고, 도의 심원함을 말하자면 하늘같이 높고 땅처럼 두터워, 겨우 뻣뻣한 붓털을 썩힐 뿐이다. 장차 얽매임이 없는 놀음에 어울리고자 비로소 공동산(崆峒山)처럼 아름다운 행실을 서술한다.
문인인 영상(英爽)이 와서 글을 재촉하였을 때 금인(金人)이 입을 다물었던 고사에 따라 돌같은 마음을 더욱 굳히었다. 참는 것은 뼈를 깎아내는 것보다 고통스럽고 요구는 몸을 새기는 것보다 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림자는 8년 동안 함께 짝하였으며, 말은 세번을 되풀이했던 것에 힘입었다. 저 여섯 가지의 기이한 일과 여섯 가지의 옳은 일로 글을 지은 것에 부끄러움이 없고 용력(勇力)을 과시하기에 여유가 있는 것은, 실로 곧 대사가 안으로 육마(六魔)를 소탕하고 밖으로 육폐(六蔽)를 제거하여, 행하면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포괄하고 좌선(坐禪)하면 육신통(六神通)을 증험하였기 때문이다. 일은 꽃을 따서 모은 것과 같은데, 글은 초고 없애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그 결과 가시나무를 쳐내지 않는 것과 같게 되었으니, 쭉정이와 겨가 앞에 있음이 부끄럽다. 자취가 ‘궁전에서의 놀음’을 따랐으매, 누구인들 ‘月池宮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을 우러르지 않겠는가. 게(偈)는 칠언연구(七言聯句)를 본받았으니, 바라건데 해뜨는 곳에서 고상한 말로 비양(飛揚)하라.
분황사의 중 혜공(慧江)이 나이 83세에 글씨를 쓰고 아울러 글자를 새기다. 원주인 대덕 능선(能善)·통준(通俊), 도유나(都唯那)인 현일(玄逸)·장해(長解)·명선(鳴善), 또 시주로서 갈(碣)을 세웠으며 서▨대장군(西▨大將軍)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착용한 소판(蘇判) 아질미(阿叱彌), 가은현장군(加恩縣將軍) 희필(熙弼), 당현(當縣)(마멸). 용덕(龍德) 4년(924) 세차(歲次) 갑신(甲申) 6월 일에 건립을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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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 朝鮮金石總覽 |
唐新羅國故鳳巖山寺」
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幷序」
入朝賀正兼▨奉 皇花等使朝請大夫前守兵部侍郞充瑞書院學士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 敎撰」
叙曰五常分位配動方者曰仁心三敎立名顯淨域者曰佛仁心卽佛佛目能仁則也道郁夷柔順性源達迦衞慈悲敎海寔猶石投水雨聚沙然矧東諸侯之外守者莫我大而地靈旣好生爲本風俗亦交讓爲主▨▨大地之春▨」
隱上古之化加姓叅釋種遍頭居寐錦之尊語襲梵音彈舌足多羅之字是乃天彰西顧海引東流宜君子之鄕也 法王之道日日深又日深矣且自魯紀隕星漢徵佩日像跡則百川含月法音則萬籟號風或▨▨縑緗或綵華琬琰」
故監雒宅鏡秦宮之事跡照照焉如揭合璧苟非三尺喙五色毫焉能措辭其間駕說于後就以圀觀圀考從鄕至鄕則風傳沙嶮而來波及海隅之始昔當東表鼎峙之秋有百濟蘇塗之儀若甘泉金之祀▨▨西▨▨▨于▨如」
攝東入勾驪阿度度于我如康會南行時迺梁菩薩帝反同泰一春 我法興王剬律條八載也亦旣海岸植與樂之根日鄕耀增長之寳天融善願地聳勝因爰有中貴捐軀上仙剔髮苾▨西學羅漢東遊因爾混沌能▨▨▨▨」
開娑婆遍化莫不選山川勝槩窮土木奇功藻宴坐之宮燭徐行之路信心泉涌慧力風揚果使㵱杵蠲灾鍵槖騰慶昔之𦸤爾三國今也壯哉一家鴈刹雲排將無隟地鯨枹雷振不遠諸天漸染有餘幽求無斁其敎之興也▨▨▨」
毗婆娑先至則四郡駈四諦之輪摩訶衍後來則一國耀一乘之鏡然能龍雲躍律虎風騰洶學海之波濤蔚戒林之柯葉道咸融乎無外情或涉乎有中抑止水停漪高山佩▨者盖有之矣世未之知洎長慶初有僧道美▨▨▨▨」
西泛睹西堂之奧智光侔智藏而還智始語玄契者縛猿心護奔北之短矜鷃翼誚圖南之高旣醉於誦言竸嗤爲魔語是用韜光廡下歛迹壺中罷思東海東終▨北山豈太易之無悶中庸之不悔者邪華秀冬嶺▨定▨▨▨▨▨」
螘慕者彌山雁化者出谷道不可廢時然行及 興德大王纂戎 宣康太子監撫去邪毉國樂善肥家有洪涉大師亦西堂證心來南岳休足𪅶冕陳順風之請龍德慶開霧之期顯示密傳朝凡暮聖變非蔚也興且▨▨▨▨▨▨」
勃焉試覷較其宗趣則修乎修設修證乎證設證其靜也山立其動也谷應無爲之益不爭而勝於是乎東人方寸地虗矣能以▨利利海外不言其所利大矣哉爾後觸騫河筌融道無念爾祖寔繁有徒▨▨或歛化▨▨▨▨▨▨」
津或珠還合浦爲巨擘者可屈指焉西化則靜衆無相常山慧覺禪譜益州金鎭州金者是東歸則前所叙北山義南岳陟而降夫大▨國師慧目育智力聞雙溪照新興彥涌▨軆珍無休雙峯雲孤山曰兩 朝國▨▨▨▨▨▨▨」
師聖住▨菩提宗德之厚爲父衆生道之尊爲師王者古所謂逃名名我隨避聲聲我追者故皆化被恒沙蹟傳豐石有令兄弟宜爾子孫俾定林標秀於鷄林慧水安流於▨水矣別有不戶不牖而見大道不山不海而得」
上寳恬然息意澹乎忘味彼岸也不行而至此土也不嚴而治七賢孰取譬十住難定位者賢鷄山智證大師其人也始大成也發蒙于梵軆大德禀具于瓊儀律師終上達也探玄于慧隱巖居乎默于楊孚合于法胤唐四祖爲五世」
父東漸于海遡游數之雙峯子法朗孫愼行曾孫遵範玄孫慧隱來孫大師也朗大師從大毉之大證按杜中書正倫纂銘叙云遠方奇士異域高人無憚險途來至▨所則掬寶歸止非師而誰▨知者不言復藏于密能撢秘藏唯行」
大師然時不利兮道未亨也乃浮于海聞于天肅宗皇帝寵貽天什曰 龍兒渡海不憑筏鳳子冲虛無認月師以山鳥海龍二句爲對有深旨哉東還三▨▨大師畢萬之後斯譣矣其世緣則王都人金姓子號道憲字智詵父讃瓌」
母伊氏長慶甲辰歲現乎世中和壬寅曆歸乎寂恣坐也四十三夏歸全也五十九年其具體則身仞餘面尺所儀狀魁岸語言雄亮眞所謂威而不猛者▨▨洎滅奇蹤秘說神出鬼沒笔不可紀今探其感應聳人耳者六異操履驚」
人心者六是而分表之初母夢一巨人告曰僕昔勝見佛季世爲桑門以謓恚故久隨龍報報旣旣矣當爲法孫故侂妙緣願弘慈化因有娠幾四百日灌佛▨旦誕焉事驗蟒亭夢符像室使佩韋者益試擁毳者精修降生之異一也」
生數夕不嚥乳糓之則號欲嗄欻有道人過門誨曰欲兒無聲忍絶焄腥母從之竟無恙使乳育者加愼肉食者懷慙宿習之異二也九歲喪父殆毀滅有追福僧憐之論曰幻軀易滅壯志難成昔佛報恩有大方便子勉之因感悟輟」
哭白所主請歸道母慈其幼復念保家無主確不許耳踰城故事則亡去就學浮石山忽一日心驚坐屢遷俄聞倚閭成疾遽歸省而病隨愈時人方阮孝緒居無何染沉疴謁毉無効枚卜之僉曰宜名𨽻大神母追惟曩夢誡覆以方」
袍而泣誓言而斯疾若起乞佛爲子信宿果大瘳仰悟慈親終成素志使䑛犢者割受飮虵者擇疑孝感之異三也至十七受具始就壇覺袖中光熠熠然探之得一珠豈有心而求乃無脛而至眞六度經所喩矣使飢嘑者自飽醉偃者」
能腥勵心之異四也坐雨竟將它適夜夢遍吉菩薩撫頂提耳曰苦行難行行之必成形開痒然默篆肌骨自是不復服繒絮焉修綫之湏所必麻楮不穿達屣矧羽翣毛茵餘用矣使縕黂者開眼衣蟲者厚顏律身之異五也自綺年」
飽老成之德加瑩戒珠可畏者竸相從求益 大師拒之曰人大患好爲師强欲慧不惠其如摸不摸邪况浮芥海鄕自濟未暇無影逐爲必笑之態後山行有樵叟礙前路曰先覺覺後覺何湏拾空殻就之則無見焉爰媿且悟不阻」
來求森竹葦于鷄籃山水石寺俄卜築他所曰不繫爲懷能遷是貴使佔畢者三省營巢者九思垂訓之異六也贈大師景文大王心融鼎敎面謁輪工遙深𠇍思覬俾我卽乃寓書曰伊尹大通宋▨小見以儒辟釋自邇陟遠甸邑巖」
居頗有佳所木可擇矣無惜鳳儀妙選近侍中可人鵠陵昆孫立言爲使旣傳敎已因攝齊焉答曰修身化人捨靜奚趣鳥能之命善爲我辭幸許安塗中無令在汶上 上聞之益珍重自譽▨▨於無翼衆一變於不言咸通五年」
冬端儀長翁主未亡人爲稱當來佛是歸敬謂下生厚資上供以邑司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乃告其徒曰山號賢溪地殊愚谷寺名安樂僧無住持從之徙焉▨▨▨▨矣使樂山者益靜擇地者愼思行」
藏之是一焉他日告門人曰故韓粲金公嶷勳度我爲僧報公以佛乃鑄丈六玄金像傅之以銑爰用鎭仁宇導冥路使行恩者日篤重義者風從知報之是二焉至八年丁亥檀越翁主使▨▨▨伽藍南畝曁臧獲本籍授之爲懷」
袍傳舍俾永永不易 大師因念言王女資法喜尙如是矣佛孫味禪悅豈徒然乎我家匪貧親黨皆歿與落路行人之手寧充門弟子之腸遂於乾符六年捨莊十二區田五百結𨽻寺爲飰孰▨▨▨能銘鼎民天是賴佛土可期雖」
曰我田且居 王云始資疑於王孫韓粲繼宗執事侍郞金八元金咸熈▨及正法大統釋玄亮聲九臯應千里贈太傅獻康大王恕而允之其年九月敎南川郡統僧訓弼擇别墅劃正場斯▨外佐 君臣益地内資父母生天使續」
命者與仁賓歌者悛過檀捨之是三焉有居乾慧地者曰沈忠聞大師刃餘定慧鑒透乾坤志確曇蘭術精安廩禮足已白言弟子有▨地在羲陽山腹鳳巖龍谷境駭橫目幸▨禪宮徐答曰吾未能▨身惡用是忠請膠固加山靈」
有甲騎爲前騶之異仍錫挺樵蹊而歷相焉且見山屛四迾則鸑趐掀雲水帶百▨則虬腰偃石旣愕且唶曰獲是地也庸非天乎不爲靑衲之居其作黃巾之窟遂率先於衆防後爲基▨▨▨四注以厭之鑄鐵像二軀以衛之至」
中和辛丑年 敎遣前安輪寺僧統後恭肅正史裴聿文標定疆域艿賜牓爲鳳巖焉及 大師化往數年有山甿爲野冠者始敢拒輪終能食菓得非深𣂏定水預魔山之巨力歟使折臂者探義掘尾者制狂開發之是四焉 太」
傅大王以花風掃獘慧海濡枯素欽靈育之名渴聽法深之論乃注心鷄足灑翰鶴頭以徵之曰外護小緣念踰三際內修大惠幸許一來大師感動琅凾言及勝因通世同璧率土懷玉出山轡織迎途至憇足于禪院寺錫安信宿引」
問心于月池宮時屬纖蘿不風温樹方夜適覩金波之影端臨玉沼之心 大師俯而覬仰而告曰是卽是餘無言 上洗然▨▨▨金仙花▨所傳風流固▨於此遂拜爲忘言師及出俾藎臣譬旨幸宜小停答曰謂牛戴▨所直無」
幾以鳥養鳥爲惠不貲請從此辭枉之則折 上聞之喟然以韻語歎曰施旣不留空門鄧侯 師是支鶴吾非超鷗乃命十戒弟子宣敎省副使馮恕行援送歸山使待兎者離株羡魚者學網出處之是五焉 在世行無遠近夷險」
未甞代勞以蹄角及還山霓便跋踄乃以栟櫚步輿寵行謝使者曰是豈井大春▨所云人車耶顧英君所不須矧形毁者乎然命旣至受之爲濟苦具及移疾于安樂練居杖不能起始乘之使病病者了空賢賢者離執用捨之是」
六焉 至冬抄旣望之二日趺坐悟言之際泊然無常嗚呼星廻上天月落大海終風吼谷則聲咽虎溪積雪摧松則色侔鵠樹物 感斯極人悲可量信而假殯于賢溪日而遂窆于羲野▨其詞曰」
麟聖依仁仍據德 鹿仙知白能守黑 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确力 十萬里外鏡西域 一千年後燭東圀 雞林地在鼇山側 仙儒自古多奇特 可憐羲仲不▨▨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
言路因之理溝洫 身依兎窟心難息 足蹋羊歧眼還惑 法海安流眞叵測 心得▨訣苞眞極 得之得類罔象得 默之默異寒蟬默 北山義與南岳陟 垂鵠翅與展鵬翼 海外時來▨難抑 遠流禪河無雍塞」
蓬託麻中能自直 珠探衣內休傍貸 湛若賢溪善知識 十二因緣匪虛飾 何用▨絙兼杙 何用紙筆及含墨 彼或遠學來匍匐 我能靜坐降魔賊 莫把意樹誤栽植 莫把檀▨枉▨▨ 莫把恒沙論萬億」
莫把孤雲定南北 德馨四遠聞詹蔔 惠化一方安社稷 面奉天化飄縷𧙢 心憑水月呈禪拭 㝦嗣佳綿誰入棘 腐儒玄狀慙摘埴 跡▨寳幢名可勒 才輸錦頌文難𦀂 ▨▨▨飮▨▨食 來向山中看篆刻」
(裏 面)
大傅王馳▨問疾降𩢲營齊不暇無偏無頗▨▨▨」
始有卒特敎菩薩戒弟子建功卿令金立言▨▨▨」
孤賜謚智證禪師塔號寂照仍許勒石俾錄▨▨▨」
人▨蠲役▨楊▨繼徽等咸得鳳毛者歛陳▨▨▨」
至乙已歲有圀民媒儒道嫁帝鄕而名掛輪中職」
攀柱下者曰崔致遠捧漢后龍緘齎淮王鵠幣雖」
慙鳳擧頗類鶴歸 上命信臣淸信者陶竹陽授門」
人狀賜手 敎曰縷褐東師始悲遷化繡衣西使深」
喜東還不朽之爲有緣而至無恡外孫之作將酬大」
士之慈臣也雖東箭非材而南冠多幸方思運斧遽」
値號弓况復▨國重佛家藏僧史法碣相望禪碑㝡」
多遍覽色絲試搜殘錦則見無去無來之說竸把斗」
量不生不滅之譚動論車載曾無魯史新」
意或用同公舊章是知▨不能言益驗道」
之云遠唯懊 師化去早臣▨來지遲靉靆字誰」
告前日逍遙義不聞眞決每憂傷手莫悟伸拳歎時」
則露往霜來遽涸愁鬢談道則天高地厚廑腐頑毫」
將諧汗漫之遊始述崆峒之美有門人英爽來趣受」
辛金口是資石心彌固忍踰刮骨求甚刻身影伴八」
冬言資三復抑六異六是之屬辭無媿賈勇有餘者」
實乃大師內蕩六魔外除六蔽行苞六度坐證六通」
故也事譬採花文難削藁遂同榛楛勿翦有▨糠粃」
在前跡追蘭殿之遊誰不仰月池佳對偈効柏梁之」
作庶幾騰日域高譚」
芬皇寺釋慧江書幷刻字歲八十三」
院主大德能善」
通俊」
都唯那等」
玄逸」
長解」
鳴善」
旦越成碣西▨大將軍着紫金魚袋蘇判阿叱彌 加恩縣將軍熈弼」
當縣▨刃治▨▨▨于德明」
龍德四年歲次甲申六月 日竟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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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 허흥식 |
大唐新羅國故曦陽山鳳巖寺」
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并序」
入朝賀正兼延奉 皇花等使朝請大夫前守兵部侍郞充瑞書院學士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 敎撰」
叙曰五常分位配動方者曰仁三敎立名顯淨域者曰佛仁心即佛佛目能仁則也 道郁夷柔順性源達迦衞慈悲敎海寔猶石投水雨聚沙然矧東諸侯之外守者莫我大而地靈旣好生爲本風俗亦交讓爲先熙熙太平之春隱」
隱上古之化加以性叅釋種遍頭居寐錦之尊語襲梵音彈舌足多羅之字寔迺天彰西顧海印東流宜君子之鄕染法 王之道日日深又日深矣且自魯紀隕星漢徵佩日像跡則百川含月法音則萬籟號風或緝懿縑緗或綵華琬琰」
故濫觴洛宅懸鏡秦宮之事跡照照焉如揭合璧苟非三尺喙五色毫焉能措辭其間駕說于後此以圀觀圀考從鄕至鄕則風傳沙嶮而來波及海隅之始昔當東表鼎峙之秋有百濟蘇塗之儀若甘泉金人之祀厥後西晋曇始始之貊如」
攝騰東入勾驪阿度度于我如康會南行時迺梁菩薩帝反同泰一春 我法興王剬律條八載也亦旣海岸植與樂之根日鄕耀增長之寶天融善願地聳勝因爰有中貴捐軀上僊剔髮苾蒭西學羅漢東遊因爾混沌能」
開娑婆遍化莫不選山川勝槩窮土木奇功藻宴坐之宮燭徐行之路信心泉湧慧力風揚果使㵱杵蠲灾鞬騰慶昔之蕞爾三國今也壯哉一家鴈刹雲排將無𨻶地鯨桴雷振不遠諸天漸染有餘幽求不斁其敎之興也」
毗婆娑先至則四郡驅四諦之輪摩訶衍後來則一國耀一乘之鏡然能義龍雲躍律虎風騰洶學海之波濤蔚戒林之柯葉道咸融乎無外情或涉乎有中抑止水停漪高山佩旭者盖有之矣世未之知洎長慶初有僧道義」
西泛賭西堂之奧智光侔智藏而還始語玄契者縛猿心護犇北之短矜鷃翼誚圀南之高旣醉於誦言竸嗤爲魔語是用韜光廡下歛迹壺中罷思東海東終遁北山北豈太易之無悶中庸之不悔者耶然秀東嶺芳定林」
蟻慕者彌山鷹化者幽谷道不可廢時然後行及 興德大王纂戎 宣康太子監撫去邪毉國樂善肥家有洪陟大師亦西堂證心來南岳休足鷩冕陳順風之請龍樓慶開霧之期顯示密傳朝凡暮聖變非蔚也興且」
勃焉試覷較其宗趣則修乎修設修證乎證設證其靜也山立其動也谷應無爲之益不爭而勝於是乎東人方寸地虗矣能以𩇕利利海外不言其所利大矣哉爾後觸騫河筌融道無念爾祖寔繁有徒或釼化」
延津或珠還合浦爲巨擘者可屈指焉西化則靜衆無相常山慧覺益州金鎭洲金者是東歸則前所叙北山義南岳陟而降大安徹國歸慧目育智力聞雙溪照新興彥涌岩軆珍丘休雙峯雲孤山日兩 朝國」
師聖住染菩提宗德之厚爲父衆生道之尊爲師王者古所謂逃名名我隨避聲聲我追者故得皆化被恒沙蹟傳豐石有令兄弟宜爾子孫俾定林標秀於鷄林慧水安流於鰈水者矣別有不戶不牗而見大道不山不海而得」
上寶恬然息意澹乎忘味彼岸也不行而至此土也不嚴而治七賢孰取譬十住難定位者賢溪山智證大師其人也始大成也發蒙于梵軆大德禀具于瓊儀律師終上達也探玄于慧隱巖君受默乎楊孚令于法胤唐四祖爲五世」
父東漸于海遡流數之雙峯子法朗孫愼行曾孫遵範玄孫慧隱末孫大師也朗大師從大毉之大證按杜中書正倫纂銘云遠方奇士異域高人無憚險途來至珎所則掬寶歸止非師而誰第知者不言復藏于密能探秘藏唯行」
大師然時不利兮道未亨也乃浮于海聞于天肅宗皇帝躬貽天什曰 龍兒渡海不憑筏鳳子冲虛無認月師以山鳥海龍二句爲對有深旨哉東還三傳至大師畢萬之後斯驗矣其世緣則王都人金姓子號道憲字智詵父賛瓌」
母伊氏長慶甲辰歲現乎世中和壬寅曆歸于寂宴坐也四十三夏歸全也五十九年其具體則身仞餘面尺所儀狀魁岸語言雄亮眞所謂威而不猛者始孕洎滅奇蹤秘說神出鬼沒笔不可紀今撮其感應聳人耳者六異操履驚」
人心者六是而分表之初母夢一巨人告曰僕昔勝見佛季世爲桑門以瞋恚故久堕龍報報旣旣矣當爲法孫故侂妙緣願弘慈化因有娠幾四百日灌佛之旦誕焉事驗蟒亭夢符像室使佩韋者益戒擁毳者精修降生之異一也」
生數夕不嚥乳之則號欲嗄欻有道人過門誨曰欲兒無聲忍絶葷腥母從之竟無恙使乳育者加愼肉飡者懷慙宿習之異二也九歲喪父殆毀滅有追福僧憐之喩曰幻軀易滅壯志難成昔佛報恩有大方便子勉之感悟輟」
哭白所生請歸道母慈其幼復念保家無主礭不許耳踰城故事則亡去就學浮石山忽一日心驚坐屢遷俄聞倚閭成疾遽歸省而病隨愈時人方之阮孝緒無居何染沉疴謁毉無効枚卜之僉曰宜名隷大神母追惟曩夢試覆以方」
袍而泣誓言斯疾若起乞佛爲子信宿果大瘳仰悟慈親終成素志死䑛犢者割愛受飲蛇者釋疑孝感之異三也至十七受具始就壇覺袖中神光燿燿然探之得一珠豈有心而求乃無脛而至眞六度經所喩矣使飢嘑者自飽醉偃者」
能醒勵心之異四也坐雨竟將它適夜夢遍吉菩薩撫頂提耳曰苦行難行行之必成形聞痒然默篆肌骨自是不復服繒絮焉條綫之湏用必麻楮不穿達屣矧羽翣毛茵餘用矣使縕黂者開眼衣蟲者厚顏律身之異五也自綺年」
飽老成之德加瑩戒珠可畏者競相從求益 大師拒之曰人 大患好爲 師强欲慧不惠其如摸不摸何耶况浮芥海鄕自濟未暇無影逐爲必笑之態後山行有樵叟假礙前路曰先覺覺後覺何湏拾空殻就之則無見焉爰媿且悟不阻」
來求森竹葦于鷄籃山水石寺俄卜築他所曰不繫爲懷能遷是貴使佔畢者三省營巢者九思垂訓之異六也贈大師景文大王心融鼎敎面渴輪工遙深尒思覬俾我即乃寓書曰伊尹大通宋纎小見以儒譬釋自邇陟遐甸邑巖」
居頗有佳所木可擇矣無惜鳳儀妙選近侍中可人鵠陵昆孫立言爲使旣傳敎已因攝齊焉答曰修身化人捨靜奚趣爲能之命善爲我辭幸許安塗中無令在汶上 上聞之益珍重自是譽四飛於無翼衆一變於不言咸通五年」
冬端儀長翁主未亡人爲稱當來佛是歸敬爲下生厚資上供以司邑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大師乃告其徒曰山號賢溪地殊愚谷寺名安樂僧盍住持從之徙焉居則化矣使樂山者益靜擇地者愼思 行」
藏之是一焉他日告門人曰故韓粲金公嶷勲度我爲僧報公以佛乃鑄丈六玄金像傅之以銑爰用鎭仁宇導冥路使市恩者日篤重義者風從知報之是二焉 至八年丁亥檀越翁主使茹金等持伽藍南畝曁贓獲木籍授之爲懹」
袍傳舍俾永永不昜 大師因念言王女資法喜尙如是矣佛孫味禪悅豈徒然乎我家匪貧親黨皆歿與落路行人之手寧充門弟子之腹遂於乾符六年捨莊十二區田五百結隷寺焉飰孰譏囊粥能銘鼎民天是賴佛土可期雖」
曰我田且居 王土始資疑於王孫韓粲繼宗執事侍郞金八元金咸熈及正法大統釋玄亮聲九臯應千里贈太傅獻康大王恕而允之其年九月敎南川郡統僧訓弼擇别墅劃生場斯盖外佐 君臣益地内資父母生天使續」
命者興仁賞歌者悛過檀捨之是三焉有居乾慧地者曰沈忠聞大師刃餘定慧鑒 透乾坤志確曇蘭術精安廩禮足已白言弟子有剩地在曦暘山腹鳳巖龍谷境駭橫目幸搆禪宮徐答曰吾未能分身惡用是忠請膠固加以山靈」
有甲騎爲前騶之異乃錫挺樵溪而相歷焉且見山屛四列則鸑趐掀雲水帶百圍則虬龍腰偃石旣愕且唶曰獲是地也庸非天乎不爲靑衲之居其作黃巾之窟遂率先於衆防後爲基起起瓦簷四注而壓之鑄鐵像二軀以衛之至」
中和辛丑年 敎遣前安輪寺僧統俊恭肅正史裵聿文標定疆域芸賜牓爲鳳巖焉及 大師化徃數年有山甿爲野寇者始敢拒輪終能食菓得非深㪺定水預魔山之巨力歟使臂者探義掘尾者制枉開發之是四焉 太」
傅大王以華風掃慧海濡枯素欽靈育之名渴聽法深之論乃注心鷄足灑翰鵠頭以徵之曰外護小緣念踰三際內修大惠幸許一來大師感動琅凾言及勝因通世同塵率土懷玉出山轡織迎途至憇足于禪院寺錫安信宿引」
問心于月池宮時屬繊蘿不風溫樹方夜適覩金波之影端臨玉沼之心 大師俯而覬仰而告曰是卽是餘無所言上洗然欣契曰金仙花目所傳風流固協於此遂拜爲忘言師及出俾藎臣譬旨幸宜小停答曰謂牛戴牛所直無」
幾以鳥養鳥爲惠不貲請從此辭枉之則折 上聞之喟然以䪨語歎曰挽旣不留空門鄱侯 師是支鶴吾非趙鸜乃命十戒弟子宣敎省副使馮恕行援送歸山使待兎者離株羨魚者學綱出處之是五焉 在世行無遠近夷險」
未甞代勞以蹄角及還山水雪便跋踄乃以栟櫚步輿窮行謝使者曰是豈井大春所云人車耶爲顧英所不須矧形毁者乎然命旣至矣受之爲濟苦具及迻疾于安樂 練居杖錫不能起始乘之使病病者了空賢賢者離執用捨之是」
六焉 至冬抄旣望之二日趺坐晤言之際泊然無常鳴呼星廻上天月落大海終風吼谷則聲咽虎溪積雪摧松則色侔鶴樹物 感斯極人悲可量信而假殯于賢溪朞而遂窆于曦野 其詞曰」
麟聖依仁仍㨿德 鹿仙知白能守黑 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确力 十萬里外鏡西域 一千年後燭東圀 雞林地在鰲山側 仙儒自古多奇特 可憐羲仲不曠聀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
言路因之理溝洫 身依兎窟心難息 足蹋羊歧眼還惑 法海安流直叵測 心傳眼詖苞眞極 得之得類罔象得 默之默異寒蟬默 北山義與南岳陟 垂鵠翅與展鵬翼 海外時來道難抑 遠泒禪河無壅塞」
蓬託麻中能自直 珠探衣內休傍貸 湛若賢溪善知識 十二因緣匪虛飾 何用攀絙兼材 何用䑛笔及含墨 彼或遠學來匍匐 我能靜坐降魔賊 莫抱意樹誤栽植 莫抱情田枉稼穡 莫抱恒沙論萬億」
莫挹孤雲定南北 德馨四遠聞薝蔔 慧化一方安社稷 面奉天花飄縷𧙢 心憑水月呈禪拭 寯副佳綿誰入棘 腐儒玄杖慙埴 跡耀寳幢名可勤 才輪錦頌文難裁 囂腹欲飮禪悅食 來向山中看篆刻」
(陰 記)
太傅王馳醫問疾降𩢲營齊不暇無偏無頗能諧有」
始有終持敎菩薩戒弟子建功鄕令金言立慰勉諸」
孤賜諡智證禪師塔號寂照仍許勒石俾錄狀聞門」
人性蠲敏休楊孚繼徽等咸得鳳尾者歛陳迹以獻」
至乙已歲有圀民媒儒道嫁帝鄕而名掛輪中職居柱」
下者曰崔致遠奉漢后龍緘淮王鵠幣雖」
慙鳳擧頗類鶴歸 上命陪臣淸信者陶竹陽授門」
人狀賜手 敎曰縷褐東師始悲西化繡衣西使深」
喜東還不朽之爲有緣處至無恠外孫之作將酬大」
師之德臣也雖東箭非材而南冠多幸方思運斧遽」
値號弓况復國重佛家藏僧史法碣相望禪碑最」
多遍覽色絲試搜錦則見無去無來之說竸把斗」
量不生不滅之譚動論車載曾無魯史新」
意或用周公舊章是知石不能言益驗道」
之大遠唯懊 師化去早臣歸來遲靉靆字誰」
告前因逍遙義不聞眞訣每憂傷手莫悟伸拳歎時」
則露往霜來遽涸愁鬢談道則天高地厚僅腐頑毫」
將諧汗漫之遊始述崆峒之美有門人英爽來趣受」
辛金口是資石心彌固忍踰刮骨求甚刻身影伴八」
冬言資三復抑六異六是之屬辭無愧賈勇有餘者」
實乃大師內蕩六魔外除六蔽行包六度坐證六通」
故也事譬採花文難消藁遂同榛楛勿翦有慙糠粃」
在有跡追蘭殿之遊誰不仰月池佳對偈效柏樑之」
作庶幾勝日域高譚」
芬皇寺釋慧江書幷刻字歲八十三」
院主大德能善」
通俊」
都唯那等」
玄逸」
長解」
鳴善」
旦越成碣西▨大將軍着紫金魚袋蘇判阿叱彌 加恩縣將軍熈弼」
當縣▨刃㳯治▨▨▨于德明」
龍德四年歲次甲申六月 日竟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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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唐新羅國故鳳巖山寺1
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幷序
入朝賀正2 兼3 迎4奉皇花5等使朝請大夫前守兵部侍郞6充瑞書院7」
學士賜紫金魚袋臣崔致遠8奉敎撰」
敍9曰五常分位配動方10者曰仁心11 三敎12立名顯淨域13者曰佛仁心卽佛佛目能仁14則也道郁夷15柔順性源達迦衛16慈悲敎海寔猶石投水17 雨聚沙18然矧東諸侯19之外守者莫我大而地靈旣好生爲本風俗亦交讓爲主20 熙熙太平之春21 隱22」
隱上古之化加以姓23參釋種遍頭24居寐錦25之尊語襲梵音彈舌足多羅之字26 是乃27天彰西顧海引28東流宜君子之鄕也29 法王30之道日日深又日深矣且自魯紀隕星31 漢徵佩日32像跡則百川含月法音則萬籟號風或緝懿33 縑緗34或綵華琬琰35」
故濫雒宅36 鏡秦宮37之事跡照照焉如揭合璧38苟非三尺喙39 五色毫40焉能措辭其間駕說于後就41 以國觀國42考從鄕至鄕則風傳沙嶮43而來波及海隅44之始昔當東表鼎峙之秋有百濟蘇塗45之儀若甘泉金人之祀46 厥後西晉曇始始之貊47如」
攝騰48東入句驪49 阿度50度于我如康會51南行時迺梁菩薩帝52反同泰53一春我法興王54剬律條八載也亦旣海岸植與樂之根55日鄕耀增長之寶56天融善願地聳勝因57爰有中貴捐軀上僊58剔髮苾芻59西學羅漢60東遊因爾混沌61 能62」
開63 娑婆64遍化莫不選山川勝槪窮土木奇功藻宴坐之宮燭徐行65之路信心泉湧慧力風揚果使㵱杵66蠲灾鍵櫜67 騰慶68昔之蕞爾69三國今也壯哉一家雁刹70雲排將無隙地71 鯨枹72雷振不遠諸天73漸染有餘幽求無斁74其敎之興也」
毗婆娑75先至則四郡76驅四諦77之輪摩訶衍78後來則一國耀一乘79之鏡然能龍雲躍80 律虎風騰81洶學海之波濤蔚戒林之柯葉道咸融乎無外情或涉乎有中抑止水停漪82高山佩旭83者 盖有之矣世未之知洎長慶84初有僧道義85」
西泛睹86 西堂87之奧智光侔智藏而還智88始語玄契者縛猿心89護奔北90之短矜鷃翼誚圖91 南之高92旣醉於誦言競嗤爲魔語是用韜光廡下93 斂94迹壺中95罷思東海東96終遁97 北山98豈大易之無悶99中庸之不悔100者邪101 華秀冬嶺102 芳定林103」
蟻慕104者彌山雁化105者出106谷道不可廢時然後107行及興德大王108 纂戎109 宣康太子110 監撫111 去邪毉國112 樂善肥家113有洪陟114大師亦西堂證心來南岳休足鷩冕115陳順風之請龍樓116慶開霧117之期顯示密傳朝凡暮聖118變非蔚也興且」
勃119焉試覷較其宗趣則修乎120 修沒修證乎證沒證121其靜也山立其動也谷應無爲之益122 不爭而勝123於是乎東人方寸地124虛矣能以𩇕利125利海外不言其所利大矣哉爾後觴騫河126 筌127融道無念爾祖寔繁有徒128或劍化」
延津129或珠還合浦130爲巨擘者可屈指焉西化則靜衆無相131 常山慧覺132 禪譜133益州金鎭州金者是東歸則前所敍北山義134 南岳陟135而降大安徹136 國師137 慧目育138智力聞雙溪照139 新興彦140 涌岩體141 珍丘休142 雙峰雲143 孤山日144兩朝國145」師聖住染146菩提宗147德之厚爲父衆生道之尊爲師王者古所謂逃名名我隨避聲聲我追者故148皆被恒沙149蹟傳豊石有令兄弟宜爾子孫俾定林標秀於鷄林慧水安流於鰈水150者矣別有不戶不牗而見大道不山不海而得上寶恬然息意151澹乎忘味彼岸也不行而至此土也不嚴而治七賢152孰取譬十住153難定位者賢鷄山154智證大師其人也始大成也發蒙于梵體大德155稟具于瓊儀律師156終上達也探玄于慧隱嚴君157 乎158黙于159 楊孚160 令子161法胤唐四祖162爲五世」
父東漸于海遡游163數之雙峰子法朗164孫愼行165曾孫遵範166玄孫慧隱來孫167大師也朗大師從毉之大證按杜中書正倫168纂銘敍169云遠方奇士異域高人無憚險途來至珍170所則掬寶歸止非師而誰第171 知者不言172復藏于密能撢173秘藏唯行」
大師然時不利兮道未亨也乃浮于海聞于天肅宗皇帝174 寵175貽天什176曰龍兒渡海不憑筏鳳子沖虛無認月177師以山鳥海龍二句178爲對有深旨哉東還三傳至179大師畢萬180之後斯驗矣其世緣則王都人金姓子號道憲字智詵父贊瓌」
母伊氏長慶甲辰歲181現乎世中和壬寅曆182歸乎183寂恣坐184也四十三夏歸全也五十九年其具體則身仞185餘面尺所186儀狀魁岸187語言雄亮眞所謂威而不猛者始孕188洎滅奇蹤秘說神出鬼沒筆不加紀今探189其感應聳人耳者六異操履驚」
人心者六是,而分表之初母夢一巨人告曰僕昔勝見佛190 季世191爲桑門192以謓恚193故久隨龍報報旣旣矣當爲法孫故侂妙緣願弘慈化因有娠幾四百日灌佛194 之195旦誕焉事驗蟒亭196夢符像室197使佩韋198者益試199 擁毳200者精修降生之異一也」
生數夕不嚥乳穀之則號欲嗄欻有道人過門誨曰欲兒無聲忍絶焄腥201母從之竟無恙使乳育者加愼肉飡者懷慙宿習202之異二也九歲喪父殆毁滅有追福僧憐之論203曰幻軀易滅壯志難成昔佛報恩有大方便子勉之因204感悟輟」
哭白所生205請歸道母慈其幼復念保家無主確206不許耳踰城故事207則亡去就學浮石山208忽一日 心驚坐屢遷209俄聞倚閭210成疾遽歸省而病隨愈時人方211 阮孝緖212 居無何213染沈疴214謁毉無效枚卜之僉曰宜名隷大神215母追惟曩夢誡216覆以方217」
袍218而泣誓言斯疾若起乞佛爲子信宿果大瘳仰悟慈親終成素志使舐犢219者割愛220 飮蛇221者釋疑孝感之異三也至十七受具始就壇覺袖中神光熠熠222然探之得一珠豈有心而求乃無脛而至眞六度經223所喩矣使飢嘑者自飽醉偃者」
能醒勵心之異四也坐雨224竟將它適夜夢遍吉菩薩225撫頂提耳曰苦行226難行行之必成形開227 痒然228黙篆肌骨自是不復服繒絮焉修綫229之須所230必麻楮不穿達屣231矧羽翣232毛茵餘用矣使縕黂者開眼衣蟲233者厚顔234律身之異五也自綺年235」
飽老成之德加瑩戒珠加畏者競相從求益大師拒之曰人大患好爲師236强欲慧不惠其如模不模237何耶況浮芥238海鄕自濟未暇無影逐爲必笑之態後山行有樵叟假碍前路曰先覺覺後覺何須捨空殼就之則無見焉爰媿且悟不阻來求森竹葦于鷄籃山水石寺239俄卜築他所曰不繫爲懷能遷是貴使佔畢240者三省241營巢者九思242垂訓之異六也贈大師景文大王心融鼎敎243面謁244 輪工245遙深爾思覬俾我卽乃寓書曰伊尹大通246 宋纖小見247以儒辟248釋自邇陟遠249甸邑巖」
居頗有佳所木可擇矣無惜鳳儀250妙選近侍中可人251 鵠陵252 昆孫253立言爲使旣傳敎已因攝齊254焉答曰修身化人捨靜奚趣鳥255能之命善爲我辭幸許安塗中256無令在汶上257上聞之益珍重自是譽四飛於無翼衆一變於不言咸通五年258」
冬端儀長翁主259未亡人爲稱當來佛是歸敬謂260下生厚資上供以邑司261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乃262告其徒曰山號賢溪地殊愚谷263寺名安樂僧盍住持從之徙焉居則化矣使樂山者益靜擇地者愼思行264」
藏265之是一焉他日告門人曰故韓粲266 金公嶷勳267度我爲僧報公以佛乃鑄丈六玄金像268傅之以銑269爰用鎭仁宇270導冥路使行271恩者日篤重義者風從272知報之是二焉至八年丁亥檀越翁主使茹金等伽273藍南畝274曁臧獲275本籍授之爲懷276」
袍277 傳舍278俾永永不易大師因念言王女資法喜尙如是矣佛孫味禪悅豈徒然乎我家匪貧親黨皆歿與落路行人之手寧充門弟子之腹遂於乾符六年279捨莊十二區田五百結280隷寺焉飯孰譏囊281 粥能銘鼎282 民天283是賴佛土可期雖」
曰我田且居王土始資疑於王孫韓粲繼宗284執事侍郞金八元285 金咸熙286及正法大統287釋玄亮聲九皐288應千里贈太傅獻康大王㤎而允之其年九月敎南川郡僧統289訓弼擇別墅劃正場斯盖外佐君臣益地內資父母生天使續290」
命者與仁291 賞歌292者悛過檀捨之是三焉有居乾慧地293者曰沈忠聞大師刃餘定慧294 鑑透乾坤295志確曇蘭296術精安廩297禮足已白言弟子有剩地在曦陽298山腹鳳巖龍谷境駭橫目299幸構禪宮徐答曰吾未能分身惡用是忠請膠固加以山靈」
有甲騎爲前騶之異乃錫挺樵溪而歷相300焉且見山屛四迾301則獄鳥302翅掀雲303水帶百圍則虬304腰偃石旣愕且唶曰獲是地也庸非天乎不爲靑衲305之居其作黃巾306之窟遂率先於衆防後爲基起瓦▨307 四注308 以309壓之鑄鐵像二軀以衛之至」
中和辛丑年310敎遣前安輪寺僧統俊恭肅正史311裵聿文標定疆域芸賜爲鳳巖焉及大師化往數年有山甿爲野冠312者始敢据輪終能食葚313得非深𣂏定水預汳魔山之巨力歟使折臂者314 標315義掘尾者316制狂317開發之是四焉太傅大王318以華風掃弊慧海濡枯素欽靈育319之名渴聽法深320之論乃注心鷄足321灑翰鶴頭322以徵之曰外護小緣念踰三際323內修大惠幸許一來大師感動琅函324言及勝因通世同塵325率土懷玉出山轡織326迎途至憩足于禪院寺錫安信宿引」問心于月池宮327時屬纖蘿不風溫樹328方夜適覩金波329之影端臨玉沼之心大師俯而覬仰而告曰是卽是餘無言330上洗然欣契曰金仙331 花目332所傳風流固協於此遂拜爲忘言師及出俾藎臣333 譬旨334幸宜小停答曰謂牛戴牛335所直無」
幾以鳥養鳥爲惠不貲請從此辭枉之則折上聞之喟然以韻語歎曰施336旣不留空門鄧侯337師是支鶴338吾非超339 鷗340乃命十戒341弟子宣敎省342副使馮恕行援送歸山使待兎者離株羨魚者學網出處之侍五焉在世行無遠近夷險」
未嘗代勞以蹄角343及還山氷霓344 梗345跋涉乃以栟櫚步輿346 寵347行謝使者日是豈井大春348▨所云人車耶顧英君349所不須矧形毁者乎然命旣至矣受之爲濟苦具及移疾于安樂練居杖350不能起始乘之使病病者351了空賢賢者352離執用捨之是」
六焉至冬抄353旣望之二日趺坐悟言354之際泊然355無常嗚呼星廻上天月落大海終風吼谷則聲咽虎溪356積雪摧松則色侔鵠樹357物感斯極人悲可量信358而假殯于賢溪其日而遂窆于羲359野其詞曰」
麟聖360依仁仍據德 鹿仙361 知白能守黑362 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363難确力 十萬里外鏡西域 一千年後燭東國 鷄林地在鼇山364側 仙儒自古多奇特 可憐羲仲365不曠職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366 言路因之理溝洫367 身依兎窟心難息 足蹋羊岐368眼還惑 法海安流眞叵測 心得眼訣苞眞極 得之得類罔象369得 黙之黙異寒蟬370黙 北山義與南岳陟 垂鵠翅與展鵬翼 海外時來道難抑 遠流禪河無壅塞」
蓬托371 麻中能自直372 珠探衣內休傍貸373 湛若賢溪善知識 十二因緣374匪虛飾 何用攀絚375兼杙376 何用舐筆及含墨377 彼或遠學來匍匐 我能靜坐降魔賊378 莫把意樹379誤栽植 莫把情田枉稼穡 莫把恒沙論萬億380」
莫把孤雲定南北381 德馨四遠聞詹382蔔 惠383化一方安社稷 面奉天花384 飄縷𧙢385 心憑水月呈禪拭386 ▨▨佳綿誰入棘387 腐儒玄杖388慙摘埴389 跡耀寶幢名可勒390 才輸391錦頌文難𦀂 ▨腸▨飮禪悅食 來向山中看篆刻」
(음기)
太傅王馳醫問疾降𩢲營齊392不暇無偏無頗能諧有」
始有終特敎菩薩戒弟子建功鄕令金立言393慰勉諸」
孤賜諡智證禪師塔號寂照仍許勒石俾錄狀聞門」
人性蠲敏休楊孚繼徽等咸得鳳毛394者𣫍395陳迹以獻」
至乙巳歲396有國民媒儒道嫁帝鄕而名掛輪中397職攀柱398」
下399者曰崔致遠捧漢后400 龍緘401賚淮王402 鵠幣403雖」
慙鳳擧404頗類鶴歸上命信臣淸信者405陶竹陽授門」
人狀賜手敎曰縷褐東師始悲遷化繡衣西使深」
喜東還不𣏓406之爲有緣而407至無恡外孫408之作將酬大409」
士410之慈臣也雖東箭411非材而南冠412多幸方思運斧413遽」
値號弓414況復415國重佛▨家藏僧史法碣相望禪碑最」
多遍覽色絲416試搜殘錦417則見無去無來之說競把斗」
量不生不滅之譚動論車載曾無魯史新418」
意419 或用同公舊章420 是知石不能言421益驗道」
之元422遠唯懊師化去早臣歸來遲靉靆423字誰」
告前日逍遙義424不聞眞決每憂傷手425 莫悟伸擧426歎時」
則露往霜來遽涸愁鬢談道則天高地厚厪427腐頑毫」
將諧汗漫之遊428始述崆峒之美429有門人英爽來趣受430」
辛431 金口432是資石心彌固忍踰刮骨求甚刻身影伴八」
冬言資三復433抑六異六是之屬辭無媿434賈勇有餘者」
實乃大師內蕩六魔435 外除六蔽436行苞437 六度438坐證六通439」
故也事譬採花文難削藁440遂同榛藁勿翦有慙糠粃441」
在前442跡追蘭殿之遊443誰不仰月池佳對444偈效柏梁445 之446」
作447庶幾騰448日域高譚」
芬皇寺449釋慧江450書幷刻字歲八十三」
院主大德能善451」
通俊」
都唯那452等」
玄逸」
長解」
鳴善」
旦越成碣453西▨大將軍着紫金魚袋454 蘇判455阿叱彌 加恩縣456將軍熙弼」
當縣▨刃㳯457治▨▨▨于德明」
龍德四年458歲次甲申六月 日竟建」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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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 유희해 |
大唐新羅圀故鳳巖山寺」
敎謚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并序」
入朝賀正曾迎奉 皇花等使朝請大夫前守兵部侍郞充瑞書院學士賜紫金魚袋臣 崔致遠奉 敎撰」
叙曰五常分位配動方者曰仁心三敎立名顯淨域者曰佛仁心卽佛佛目能仁則也道郁夷柔順性源達迦衛慈悲敎海寔猶石投水雨聚沙然矧東諸侯之外守者莫我大而地靈旣好生爲本風俗亦交▨爲主▨▨▨▨之▨▨」
隱上古之化加姓叅釋種遍頭居寐錦之尊語襲梵音禪舌足多羅之字是乃天彰西顧海引東流宜君子之鄕▨ 法王之道日日深又日深矣且自魯紀隕星漢徵佩日像跡則百川含月法音則萬籟號風或▨▨▨▨▨▨▨▨」
琰故濫雒宅鏡秦宮之事跡照照焉如揭合璧苟非三尺喙五色毫焉能措其閒駕說于此以圀觀圀考從卿至卿則風傅沙畍而来波及海隅之始昔當東表跱之秌有百濟塗之儀若甘泉金之祀▨▨西▨▨▨▨▨▨」
攝東入句驪阿度度于我如康會南行時迺梁菩薩帝及同泰一春 我法興王剬律條八載也亦旣海岸㨁与樂之根日鄕耀憎長之寶天融善地聳因爰有中▨捐𨈬上仙剔苾茤西學羅漢東遊因▨▨▨▨▨▨▨▨」
閒娑婆遍化莫不選山川槩窮土木奇功藻宴坐之宮燭徐行之路信心泉涌慧力風揚果使㵱杵蠲災鍵▨騰慶昔之蒙尒三圀今也壯㢤一家鴈𠛴雲排將無隟地鯨枹雷振不遠諸天漸染有餘幽求無外其敎之▨也▨▨▨」
毗婆娑先至則四郡駈四諦之輪摩訶衍來則一圀耀一乘之鏡然能龍雲躍律虎風騰洶學海之波濤蔚戒林之柯𦯧道咸融乎無外情或涉乎有中抑止水停淵高山偶▨者葢有之矣世未之知洎長慶初有得道▨▨▨▨▨」
西泛睹西堂之奧智光侔智藏而還智始語玄契者縛猿心護奔北之短矜鷃翼誚圀南之高旣醉誦言復嗤爲魔語是用韜光廡下歛迹壺中罷思東海東終還北山豈大易之無悶中庸之不悔者邪▨秀東嶺▨▨▨▨▨▨▨」
螘慕者弥山鴈化者出谷道不可廢時然行及 興德大王纂戎 宣康太子監撫去邪毉圀樂善肥家有洪法大師亦西堂▨心来南岳休足鷩冕陳順風之請龍樓慶開霧之期顯示宀傳朝凡暮聖變非蔚也▨▨▨▨▨▨▨▨」
勃焉試▨較其宗趣則修乎修沒修證乎證沒證其靜也山立其動也谷應無爲之益不爭而是乎東人方寸地虛矣能以▨利利海外不言其所利大矣哉尒後觴騫河筌融道無念尒祖寔繁有徒▨▨▨▨▨▨▨▨▨▨▨」
津或珠還合浦爲巨擘者可屈指焉西化則靜衆無相常山慧覺禪譜益州金鎭洲金者是東歸則前所叙北山義南岳陟而降▨▨▨圀師慧目育智力聞雙溪照新興彥涌▨躰珎▨休▨▨雲於山日▨▨▨▨▨▨▨▨▨▨▨」
師聖住▨菩提宗德之厚爲父衆主道之尊爲師王者古所謂逃名名我隨避聲聲我追者故皆化被恒沙蹟傅豊石有令兄弟宜尒子孫俾定林標秀雞林梵水安流於鯨水矣別有不戶不牖而見大道不山不海而得▨▨▨▨」
上寶恬然息意澹乎忘味彼岸也不行而至此土也不嚴而治七賢孰取譬十住難定位者賢雞山智證大師其人也始大成也發蒙于梵躰大德禀具于瓊儀律師終上達也探玄于慧隱▨居乎默于楊孚令子法胤唐四祖爲五▨」
父東漸于海遡游數之雙峯子法朗孫愼行曾孫遵範玄孫慧隱来孫大師也朗大師從大毉之大證按杜中書正倫墓銘叙云遠方奇士異域高人無憚▨途来至珤所則掬▨歸止非師而誰▨知者不言復藏于密能撢秘藏唯▨」
大師然時不利道未享也乃浮于海聞于天肅宗皇帝寵貽天什曰 龍兒渡海不憑筏鳳子冲虛無認月師以山鳥海龍二句爲對有深旨哉東辶▨▨▨大師畢萬之斯譣矣其世緣則王都人金姓子號道憲字智詵父▨▨」
母伊氏長慶甲辰歲現乎世中和壬寅曆歸乎寂恣坐也四十三夏歸也五十九年其具體則身仞餘面尺▨儀狀魁岸語言雄亮眞所謂威而不猛者▨▨▨滅奇蹤秘說神出鬼沒笔不可絶今探其感應聳人耳者六異操履▨」
人心者六是而分表之初母夢一巨人告曰僕昔見佛季世爲桒門以謓恚故久隨龍報報旣旣矣當爲法孫故亻妙緣弘慈化因有娠幾四百日灌佛▨旦誕焉事驗▨亭夢符像室使佩韋者益試擁毳者精修降生之異一也」
生數夕不嚥乳穀之則號欲嗄欻有道人過門誨曰欲兒無聲忍絶焄腥母從之竟無恙使乳育者加愼肉食者懷慙宿習之異二也九歲喪父殆毀滅有追福僧憐之論曰幻軀易滅壯志難成昔佛報恩有大方便子勉之因感悟輟」
哭自所生請歸道母慈其功復念保家無主礭不許耳踰域故事則亡去就學浮石山忽一日心驚坐屢遷俄聞猗門成疾遽歸省而病隨愈時人方阮孝緒居無何染沉疴謁毉無効枚卜之僉曰宜名隷大神母追惟曩夢誡慮以方」
袌而泣誓言斯疾若起乞佛爲子信宿果大瘳仰悟慈親終成素志使舐犢者割愛飲虵者釋疑孝感之異三也至七七受具始就檀覺袖中灮熠熠然探之得一珠豈有心而求乃無脛而至眞六度經所喩矣使飢嘑者自飽醉偃者」
能腥勵心之異四也坐雨竟將它適夜夢遍告菩薩撫頂提耳曰苦行難行行之必成形聞疒然默篆肌骨自是不𣸪服繒絮焉修綫之須所必麻楮不穿達▨矧羽▨毛▨餘用▨使縕黂者開眼衣蠹者厚顏律身之異五也自綺年」
飽老成之德加瑩戒珠可畏者相從求益 大師拒之曰人大患好爲師强欲慧不惠其如模不模邪氵浮▨海鄕自濟來則無影逐爲必笑之態山行有樵叟礙前路曰先覺覺覺何須拾空殻就之則無見焉爰媿且悟不▨」
来求森竹葦于鷄籃山水石寺俄卜築他所曰不繫爲懷能遷是貴使佔畢者三省營巢者九思垂訓之異六也贈大師景文大王心融敎面謁輪工遙深尒思覬俾我即乃寓書曰伊尹大通宋▨小見以儒辟釋自迩能遠▨邑▨」
居頗有佳所木可擇矣無惜鳳儀妙選近侍中可人鵠▨昆孫立言爲使旣傅敎已因攝齊焉荅曰修身化人捨靜奚趣烏能之命善爲我辭幸許安塗中無令在汶上 上聞之益珎重自▨▨▨▨無翼衆一變不言▨咸通五年」
冬端儀長翁主未亡人爲稱當來佛是歸敬謂下生厚資上供以邑司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乃告其徒曰山号賢溪地殊愚谷寺名安樂僧▨住持從之徙焉▨▨▨▨▨使樂山者益靜擇地者愼思▨」
藏之是一焉他日告門人曰故韓粲金公嶷勳度我爲僧報公以佛乃鑄丈六玄金像傅之以銑爰用鎭仁宇道㝠路使行恩者日篤重義者風從知▨之是二焉 至八年丁亥檀越翁主使▨▨▨▨藍南畝曁臧獲木藉授之爲▨」
袍傅舍俾永永不昜 大師因念言王女資法喜尙如是矣佛孫味禪悅豈徒然乎我家匪貧親黨皆歿与落路行人之乎寧門弟子之腹遂扵乾符六年捨莊十二區田五百結隷寺焉▨孰▨▨▨能銘民天是賴佛土可期雖」
曰我田且居 王云始資疑王孫韓粲継宗執事侍郞金八元金咸凞▨及正法大統釋方亮聲九臯應千里贈太傅獻康大王㤎而允之其年九月敎南川郡統僧訓▨▨别墅▨正塲斯▨外▨▨君臣益地内資父母生天使▨」
命者与仁賞欲者悛過檀捨之是三焉 有居乾慧地者曰沈忠聞大師刃餘定慧鑒透乾坤志確曇蘭術精安廩礼足乙白言弟子有▨地在羲暘山腹鳳巖龍谷境駭橫目▨▨禪宮徐荅曰吾未能兮身𢙣用是忠請膠固加山▨」
有甲騎爲前騶之異乃錫挺樵蹊而厯相焉旦見山屛四迾則獄鳥翅掀雲水帶百▨則虬𦝫偃石▨愕且唶曰獲是地也庸非天乎不爲靑衲之居其作黃巾之窟遂率先衆防爲基▨▨▨四注以厭之鑄鐵像二軀以衛之▨」
中和辛丑秊 敎遣前安輪寺僧統俊恭肅正史裴聿文標定彊城乃賜牓爲鳳巖焉及 大師化往數年有山甿爲野冠者始敢拒輪終能食葚得非深𣂏定水預魔山之巨力歟使折者標義掘尾者制狂開發之是四焉 太傅」
大王以花風▨獘慧海濡枯素欽靈育之名渴聽法深之論乃注心鷄足灑翰鸖頭以徵之曰外小緣念踰三際內修大恵希許一来大師感動琅凾言及勝因通世同▨▨▨懷玉出山轡織迎途至憇足于禪院寺錫安信宿▨」
聞心于月池宮時屬纖蘿不風溫樹方夜適覩金波之影端臨玉沼之心 大師俯而觀仰而告曰是即是▨▨▨▨之▨然▨▨▨金▨▨曰所傳風▨固怯此遂拜爲▨言比及出俾藎臣譬旨幸宜小停荅曰謂牛戴牛所直▨」
幾以鳥養鳥爲恵不貲請從此枉之則折 上聞之喟然以韻語歎曰施旣不▨空門▨▨▨師▨支鶴吾非超鷗乃命十戒弟子宣教省副使馬恕行▨送歸山使待兔者離株羨魚者學網出處之是五焉▨在世行無遠近夷險」
未甞代勞以蹄角及還山外霓梗跂涉乃㠯栟櫚步輿寵行謝使者曰是豈井大春▨所云人車耶顧▨▨所不顧矧▨▨者▨然命▨至受之▨濟苦具▨移疾于安樂練居杖不能起始乘之使病▨者了空賢▨者離▨用捨之是」
六焉 至冬▨旣望之二日趺坐悟言之際泊然無常嗚呼星廻上天月落大海終▨▨▨谷則聲咽虎溪積雪摧松則色侔鵠樹物感斯極人悲可量▨而假殯于賢溪其日而遷窆于羲野 其詞曰」
麟聖依仁仍據德 鹿仙知白能守黑 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确力 十萬里外▨西域 一千年燭東圀 雞林地在鼇山側 仙儒自古多奇特 可憐羲仲不▨▨ 更▨佛日▨▨色 敎門從此分▨▨」
言路因之理溝洫 身依兔窟心難息 足蹋羊歧眼還惑 法海安流直叵測 心▨▨訣苞眞悊 得之得類因象得 默之默異寒蟬默 北山▨与南岳陟 雲鵠翅与展鵬翼 海外時▨▨▨▨ 遠▨禪▨▨广▨」
蓬托麻中能自直 珠探衣內休傍貸 湛若賢溪善知識 十二因緣匪虛飾 何因▨▨絙▨▨ 何用舐笔及含墨 彼或遠學來匍匐 我能前坐降魔賊 莫把意樹誤𦀂埴 莫把▨▨枉▨▨ 莫把恒沙論万億」
莫挹孤雲定南北 德馨四遠聞蔔 恵化一方安社稷 面奉天花▨▨▨ 心▨▨▨呈禪▨ ▨▨▨▨▨入棘 腐儒玄▨慙▨▨ 跡▨▨▨名可勒 才輪飾頌文難𦀂 ▨▨▨▨▨▨ 来向山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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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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