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편(1)10x8cm, 두께 0.8cm (2)길이 12.5cm (3)길이 20cm (4)길이 15cm (5)13x6cm (6)16.5x26.4cm (7)길이 7.4cm, 너비 9.8cm (8)길이 7cm, 너비 5cm (9)길이 7.5cm, 너비 6cm, 두께 1cm (10)6x9.5cm, 두께 1.3cm (11)길이 8.3cm, 너비 9cm, 두께 9cm (12)5.5x5cm, 두께 0.6cm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26-1 동국대학교서울캠퍼스 박물관
서체
미상
찬자
/각자
/서자
최치원(崔致遠)
/ 환견(桓蠲)
/ 미상
지정사항
비지정유산
연구정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숭복사비(崇福寺碑)
저작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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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숭복사비는 896년(진성여왕 10)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이다. 비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서산대사의 제자인 해안(海眼)이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불렀는데, 숭복사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은 바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숭복사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 외삼촌이며 왕비 숙정황후(肅貞王后)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에서 기원하였다. 곡사는 사원에 고니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인 명칭이다. 후에 원성왕릉을 곡사에 만들면서 사찰을 경주시 외동면(外東面) 말방리(末方里)의 현 숭복사터로 옮겨 새로 개창하였다. 뒤에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뵙고 사찰을 크게 수리하여 원성왕릉의 수호와 왕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885년(헌강왕 11)에 명칭을 숭복사로 바꾸고, 그 다음해에 최치원(崔致遠)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한동안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896년(진성여왕 10)에 완성하였다. 아마도 비는 대략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숭복사비는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사원의 땅에 원성왕릉을 만든 관행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비문에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모습,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 숭복사(崇福寺) 비문(碑文)은 진성왕(眞聖王) 10년(896)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이다. 최치원(857-?)은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자(字)는 고운(孤雲)으로 12세에 입당하여 18세에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20세에 율수현위(?水縣尉)가 되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24세에 황소(黃巢)의 난(亂) 토벌에 나선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4년 동안 군무(軍務)에 종사하였다. 28세인 헌강왕 10년(884)에 신라에 돌아와 헌강왕으로부터 시독(侍讀) 겸(兼)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직을 받았으나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대산(大山) 부성(富城) 천령(天嶺) 등의 태수(太守)를 맡다가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하고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듯하자 진성왕 8년에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왕에게 건의하여 받아 들여져 아찬(阿飡)의 위를 받았다. 그러나 개혁안의 시행도 확실하지 않은데다 효공왕 2년 아찬에서 면직되자 벼슬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들어 산중에 은거하다 어디서인지 모르게 만년을 마쳤다.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 외에 불교 관계의 저술도 많이 남겨 「사산비명(四山碑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불국사결사문(佛國寺結社文)」 등이 있다. 근년에는 현재 남은 글들이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으로 묶여 나왔다.본 「숭복사비」는 현재 비의 원형은 물론 탁본(拓本)도 남아있지 않고 최치원이 지은 선사들의 비문인 「성주사 낭혜화상비(聖住寺朗慧和尙碑)」, 「쌍계사 진감선사비(雙溪寺眞鑑禪師碑)」, 「봉암사 지증대사비(鳳巖寺智證大師碑)」와 함께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는 사본(寫本)으로만 전해올 뿐이다. 그리고 숭복사가 있던 절터에서 간헐적으로 발견된 몇 개의 비편(碑片)들이 숭복사비의 원모습을 알려줄 뿐이다. 그러나 이 단편적인 비편들에서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을 통해서도 찬자 자신의 할주(割註) 등 사본과 다른 몇 글자를 복원할 수 있다.『사산비명(四山碑銘)』은 오래전부터 비문의 전범으로서 그리고 신라 불교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 널리 읽혀져서, 서산대사의 제자인 중관(中觀) 해안(海眼 : 1567-?)이 이 네 개의 비문을 고운(孤雲)의 문집에서 뽑아 학인(學人)들에게 송습(誦習)토록 한 이래 많은 사본이 만들어지고 난해한 표현을 이해하기 쉽도록 주해도 베풀어졌다. 정조(正祖) 7년(1783) 몽암(蒙庵)이 주해(註解)한 『해운비명주(海雲碑銘註)』라든가 근세에 석전(石顚) 한영(漢永)이 주해한 『정교사산비명주해(精校四山碑銘注解)』(『계원유향(桂苑遺
香)』) 등이 그 대표적인 정주본(精註本)이다.숭복사는 경문왕의 모후(母后)인 소문왕후(昭文王后)의 외숙이며 경문왕비(景文王妃)인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부가 되는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세운 곡사(鵠寺)가 그 기원을 이루는 절로서 절에 고니 모양의 바위가 있어 이름붙인 것이다. 그런데 원성왕(元聖王)의 왕릉(王陵)을 조영하면서 풍수상(風水上) 길지(吉地)이던 이 절터를 왕릉 자리로 지목하니, 이에 따라 절은 원터를 비워주고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구 경주군) 외동면(外東面) 말방리(末方里)에 있는 현 숭복사지(崇福寺址)로 옮겨 개창(改創)하였다. 그러나 그 후 70여 년간 절은 큰 형세를 이루지 못하다가, 경문왕이 즉위하여 원성왕의 명응(冥應)을 받아 대규모로 중수하기 시작하여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절 이름도 숭복사로 바꾸었음을 비문은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본 비문은 헌강왕 12년에 최치원에게 짓도록 하였는데 헌강왕과 정강왕이 잇달아 승하하여 진성왕 때에야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 「숭복사비문」에는 경문왕과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으로 이어지는 2대(代) 4왕(王)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본 「숭복사비」는 다른 비문이 대체로 선사(禪師)들의 탑비(塔碑)인 것과 달리 왕실에서 세운 절에 대한 기록이어서 왕실과 중앙 귀족들의 불교 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리고 왕릉(王陵)을 조영하기 위해 이미 세워져 있는 사원을 옮겨서까지 길지(吉地)를 차지하는 풍수지리설의 성행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비문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지가(地價)를 지불하고 구입하는 왕토(王土)와 공전(公田) 등은 신라 말기의 토지(土地)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초월산(初月山) 대숭복사(大崇福寺)의 비명(碑銘) 및 서(序)
신이 듣건대 “왕자가 조종(祖宗)의 덕을 기본으로 하여 후손을 위한 계책을 준엄히 할 때, 정치는 인(仁)으로써 근본을 삼고 예교(禮敎)는 효(孝)로써 으뜸을 삼는다” 하오니, 인으로써 대중을 구제하려는 정성을 드러내고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모범을 드높여 홍범(洪範)에서 ‘치우침이 없는 것’을 본받지 않음이 없고 시경(詩經)에서 ‘효자가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따르지 않음이 없어야 합니다.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닦는데 성숙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없애고,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드는데 빈천과 같은 풀이라도 정결히 올림으로써 은혜가 백성에게 고루 미치게 하며 덕의 향기가 끝없는 하늘에 높이 사무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애를 쓰면서 더위먹은 백성에게 부채질을 해주며 죄인을 보고 우는 것이 어찌 중생을 크게 미혹한 데서 건져주는 것만 하겠으며, 힘을 다하여 조상을 하늘과 상제(上帝)와 함께 제사지내는 것이 어찌 높으신 혼령을 항상 즐거운 곳에 모시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에 조상과 후손의 돈독하고 화목함이 실로 삼보(三寶)를 계승하여 높이는데 있음을 알겠습니다. 하물며 옥호(玉毫)의 빛이 비치고 부처님의 입에서 게송이 나오는 것이 인도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동방세계에도 미쳤으니, 우리 태평한 승지(勝地)는 성질은 유순함을 낳고 기운은 만물을 생하는데 적합합니다. 산과 숲에는 고요하게 수도하는 무리들이 많아 인(仁)으로써 벗을 모으고, 강과 바다의 물은 더 큰 곳으로 흐르고자 함을 좇아 착함을 따르는 것이 물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풍도(風度)를 드날리고 부처의 도에 감화되는 것이 마치 진흙이 도장을 따르고 쇠가 용광로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군신(君臣)이 삼귀(三歸)에 뜻을 밝히고 사서(士庶)가 육도(六度)에 정성을 기울이며 나아가 국도(國都)에까지 아낌이 없어 탑이 즐비하도록 하였으니, 비록 그것이 섬부주(贍部洲)의 바닷가에 있으나 어찌 도솔천에 부끄러우리오. 뭇 미묘한 것 가운데 미묘한 것을 무슨 말로써 나타내겠습니까.
금성의 남쪽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산기슭에 숭복사(崇福寺)라는 절이 있사오니 이 절은 곧 선대왕(先大王)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첫 해에 열조(烈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의 능을 모시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옛 절이 생긴 기원을 상고하고 새 절이 이룩된 것을 살펴보건대, 옛날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은 소문왕후(炤文王后)의 외숙이요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부로서, 몸은 귀공자였으나 마음은 참다운 옛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마음껏 즐기듯이 가당(歌堂)과 무관(舞館)을 어엿하게 짓더니 나중에는 혜원(慧遠)이 여럿이 함께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기를 기약한 것처럼 그를 희사하여 불전(佛殿)과 경대(經臺)로 삼아, 예전에 피리 금슬 소리이던 것이 오늘날 금종(金鍾), 옥경(玉磬) 소리가 되었으니 시절이 변함에 따라 고쳐진 것으로 속계(俗界)를 벗어난 인연이었습니다. 절의 의지가 되는 것은 바위의 고니 모양인데 그로 인해 절 이름을 삼았습니다. 좌우의 익랑(翼廊)으로 하여금 길이 값지게 하고 불전(佛殿)으로 하여금 길이 빛나게 하였으니, 저 파라월(波羅越)의 형상과 굴인차(崛恡遮)의 이름으로 어찌 한 번에 천리를 나는 고니로써 비유하고 사라쌍수(沙羅雙樹)가 변한 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과 같겠습니까. 다만 이 땅은 위세가 취두산(鷲頭山)보다 낮고 지덕(地德)이 용이(龍耳)보다 높으니 절을 짓느니보다는 마땅히 왕릉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정원(貞元) 무인년(798년) 겨울에 (元聖大王께서) 장례에 대해 유교(遺敎)하시면서 인산(因山)을 명하였는데 땅을 가리기가 더욱 어려워 이에 절을 지목하여 유택(幽宅)을 모시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의문을 가진 이가 있어 말하기를, “옛날 자유(子游)의 사당과 공자(孔子)의 집도 모두 차마 헐지 못하여 사람들이 지금껏 칭송하거늘 절을 빼앗으려는 것은 곧 수달다장자( 須達多長者)가 크게 희사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사지내는 것이란 땅으로서는 돕는 바이나 하늘로서는 허물하는 바이니 서로 보익(補益)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담당자가 비난하여 말하기를,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福)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이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지맥(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묘지에 사상(四象)을 포괄함으로써 천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불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다만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는가. 또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왕의 인척에게 속하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웅려(雄麗)한 곳에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요 저 후문(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이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음이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정(鄭)나라 자산(子産)의 작은 은혜와 한(漢)나라 노공왕(魯恭王)이 도중에 그만 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는가.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용신(龍神)이 기뻐함을 보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절을 옮기고 이에 왕릉을 영조(營造)하니 두 역사(役事)에 사람이 모여 온갖 장인(匠人)들이 일을 마쳤습니다.
절을 옮겨 세울 때에 인연있는 대중들이 서로 솔선하여 와서 옷소매가 이어져 바람이 일지 않고 송곳 꽂을 땅도 없을 정도여서 무시(霧市)가 오리(五里)까지 이어져 나오며, 설산(雪山)까지 이어선 사람들이 일시에 어울려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기와를 거두고 서까래를 뽑으며 불경을 받들고 불상을 모시는데 번갈아 서로 주고 받으며 다투어 정성으로 이루니, 인부가 분주히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스님들의 안식처가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왕릉을 이루는데 비록 왕토(王土)라고는 하나 실은 공전(公田)이 아니어서 부근의 땅을 묶어 좋은 값으로 구하여 구롱지(丘壟地) 백여 결을 사서 보태었는데 값으로 치른 벼가 모두 이천 점(苫)[斞에서 한 말을 제한 것이 苫이고 열여섯 말이 斞이다]이었습니다. 곧 해당 관사와 기내(畿內)의 고을에 명하여 함께 길의 가시를 베어 없애고 나누어 묘역(墓域) 둘레에 소나무를 옮겨 심으니, 쓸쓸하게 비풍(悲風)이 잦으면 춤추던 봉황과 노래하던 난새의 생각이 커지지만 왕성한 기운으로 밝은 해가 드러나면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한 지세(地勢)의 위엄을 더해 줍니다.
그곳을 보니 땅은 하구(瑕丘)와 다르나 경계는 양곡(暘谷)에 맞닿아 있습니다. 기수(祇樹)의 남은 향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곡림(穀林)의 아름다운 기운이 더욱 무르녹아, 비단같은 봉우리는 사방 멀리에서 조알(朝謁)하는 것 같고 누인 명주같은 개펄은 한 가닥으로 눈앞에 바라보이니, 실로 교산(喬山)이 빼어남을 지니며 필맥(畢陌)이 기이함을 나타냈다고 할 것인바, 왕손들이 계림에서 더욱 무성하게 하고 또 신라에서 더욱 깊이 뿌리내리도록 할 것입니다.
처음 절을 옮김에 있어 비록 보탑이 솟아나오듯 빠르긴 했으나 아직 절다운 모양을 갖추지는 못하여 가시덤불을 제거하고서야 언덕과 산을 구별할 수 있었고 지붕에 띠를 섞고서야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겨우 70여 년을 넘긴 사이 갑작스럽게 아홉 왕이나 바뀌어 여러 번 전복을 당하여 미처 꾸밀 겨를이 없었는데 경문대왕(景文大王)의 뛰어난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천 년의 보운(寶運)이 이그러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대왕(先大王)께서는 무지개같은 별이 화저(華渚)에 빛을 떨치듯이 오산(鼇山)에 자취를 내리시어 처음 옥록(玉鹿)에서 이름을 드날리고 화랑의 기풍을 특별히 떨치시더니 얼마 뒤엔 높은 지위에서 모든 관직을 통섭하시고 궁벽한 나라의 습속을 바로잡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임금 될 자리에서 덕을 심으시며 대궐 안에 살면서 마음을 계발하셨으니 말씀을 하면 곧 어진이가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었고 정치를 도모하면 곧 도로써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덟 가지의 중요한 권병(權柄)을 모두 일으키고 예의염치(禮義廉恥)의 떨어진 실마리를 이에 신장시키며 여러 난관을 차례로 겪었지만 이로움이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얼마 안있어 나라에 우환이 생겨 왕위가 비어 산이 흔들리는 듯한데 비록 왕위각축의 양상은 없었지만 간혹 까마귀처럼 모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질며 유순함으로써 임하였고 노성함과 인자함을 지녀 백성들의 추숭하는 바가 되었으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이에 대저(代邸)에서 몸을 편히 하고 자문(慈門)에 뜻을 기울이며 조종(祖宗)에게 부끄러움이 될까 하여 불사(佛事) 일으키기를 발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분황사의 승 숭창(崇昌)에게 청하여 절을 중수하여 받들겠노라는 뜻을 부처님께 고하며 다시 김순행(金純行)을 보내어 조업(祖業)을 높이 펼치겠노라는 성심(誠心)을 사당에 고하도록 하셨으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화락하고 단아한 군자여! 복을 구함이 그릇되지 않도다”라고 한 것이요 『서경(書經)』에 이른바 “상제(上帝)가 이에 흠향하시어 아래 백성이 공경하며 따른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지극한 정성이 가만히 감응되고 좋은 욕망이 잘 이루어졌으며 공경(公卿) 사대부(士大夫)의 뜻이 점괘와 더불어 합치되었으니 동국을 빛나게 하여 임금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이에 신하를 (당나라에) 보내어 (憲安王의) 돌아가심을 고하고 (경문왕의) 사위(嗣位)하심을 아뢰게 하였더니, 드디어 함통(咸通) 6년(865년)에 천자께서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호귀후(胡歸厚)에게 우리나라 사람으로 전(前) 진사(進士)였던 배광(裵匡)의 허리에 어대(魚袋)를 두르고 머리에 치관(豸冠)을 쓰게 하여 부사(副使)로 삼아 왕사(王使) 전헌섬(田獻銛)과 함께 와서 칙명을 전하여 말하기를, “영광스럽게 보위(寶位)를 이어받음으로부터 훌륭한 계책을 잘 받들어 잘 계승하는 이름을 드날리고 진실로 지극히 공정한 추거(推擧)에 부응하였으니 이에 그대를 명하여 신라왕으로 삼노라”고 하고는 이에 검교태위(檢校太尉) 겸(兼) 지절충녕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의 직함을 내렸으니, 지난 날에 제(齊)나라와 같은 것을 변화시켜 빼어남을 나타내고 노(魯)나라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 향내를 드날리지 못했다면 천자께서 어찌하여 조서를 보내 외역(外域)의 제후를 총애하고 용(龍)을 그린 기(旗)를 내려 대사마(大司馬)에 가섭(假攝)함이 이와 같았겠습니까. 또한 이미 천자의 은택(恩澤)에 영광스럽게 젖었으니 반드시 장차 몸소 선왕(先王)의 능에 참배할 때 임금의 행차를 준비하였으나 어찌 많은 비용을 소모하겠습니까.
드디어 재상(宰相)인 태제(太弟)[시호를 높여 惠成大王이라 함]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에 재(齋)를 올리게 하고 대신하여 능(陵)에 배알(拜謁)토록 하셨으니, 아름답구나! 왕족들의 훌륭함이 드날리고 형제들의 무성함이 빼어났도다. 풍년이 오래 계속되니 길이 밭 가는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고 시절이 화평하니 재상으로서 소가 헐떡이는 까닭을 물을 필요가 없구나. 들을 꾸미고 시내를 채색하니 보는 사람이 구름과 같도다. 이에 반점 생긴 늙은이와 흰 눈썹의 스님이 있어 손뼉을 치며 서로 기뻐하고 크게 하례하여 말하기를, “귀하신 왕제(王弟)의 이번 행차로 거룩하신 천자의 은광(恩光)이 드러나고 우리 임금의 효성이 이루어졌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의와 풍속이 침착하고 유연하여, 마침내 바닷 물결이 잠잠하고 변방의 풍진이 깨끗하며 사철이 고르고 땅의 산물이 불어나게 되어 선대(先代)를 이어 절을 중수하고 능을 잘 호위하시니 바로 지금이 그 기회인즉 이때를 버리고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에 효성이 두루 사무치고 생각이 꿈과 부합하게 되었으니, 곧 (꿈에) 성조(聖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을 뵈온즉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의 선조이니라. 네가 불상을 세우고 나의 능역(陵域)을 꾸며 호위하고자 하는데, 조심하고 삼가할 것이며 일을 서두르지 마라. 부처님의 덕과 나의 힘이 네 몸을 감싸줄 것이니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아 하늘이 주는 복록을 길이 마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동호(銅壺)에서 맑은 소리가 나고 옥침(玉寢)에서 깨어나셨는데 열 가지 햇무리로 길흉을 점치지 않아도 꿈에서 일러준 대로 될 것 같았습니다. 급히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법회를 경건하게 베풀도록 하여 화엄대덕(華嚴大德)인 결언(決言)이 이 절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닷새 동안 불경을 강(講)하였으니 효성스러운 생각을 아뢰고 명복(冥福)을 드리려는 바이었습니다. 이에 하교(下敎)하시기를,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경전에서 경계하는 바이다. ‘네 조상을 생각하지 않으랴’고 하는 시(詩)를 어찌 잊겠는가. 돌보아주심이 번방(藩邦)에 있는데다 절을 중수하고자 할진대 혼과 통하여 감응이 이루어지니 송구함이 가득차 마음이 떨리는구나. 이미 삼년 동안 세월만 보낸 것은 부끄럽지만 ‘비록 잠시 머물지라도 반드시 집을 수리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였는데 백윤(百尹)과 어사(御事)는 이해(利害)가 어떻다고 하느냐. 비록 ‘자식을 팔고 아내를 잡혔다’는 비방이 없음은 보장하겠으나 혹 ‘귀신이 원망하고 사람들이 괴로와한다’는 말이 있을까 염려된다. 옳은 것을 권하고 그른 것을 못하도록 하여 그대들은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종신(宗臣)인 계종(繼宗)과 훈영(勛榮) 이하가 협의하여 아뢰기를, “묘원(妙願)이 신명(神明)을 감동시켜 자애로운 조령(祖靈)께서 꿈에 나타나셨는바 진실로 왕의 뜻이 먼저 정해짐으로 인하여 과연 중의(衆議)가 모두 같은 것으로 나타났으니 이 절이 이루어지면 구친(九親)에게 기쁜 일이 많을 것입니다. 다행히 농사철이 아닌 때를 당하였으니 청컨대 목공 일을 일으키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건례선문(建禮仙門)에서 걸출한 인재를 가리고 소현정서(昭玄精署)에서 고매한 스님을 기용하여 종실의 세 어진 이인 단원(端元), 육영(毓榮), 유영(裕榮)과 불문의 두 호걸인 현량(賢諒), 신해(神解) 그리고 찬도승(贊導僧)인 숭창(崇昌)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또 임금께서 시주가 되시고 나라의 선비들이 담당자가 되었으니 힘이 이미 넉넉하고 마음도 능히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만들려 하는데 어찌 새것에 옛것을 뒤섞어서야 되리오마는 그러나 단계(檀溪)의 오랜 소원을 저버릴까 두렵고 내원(㮈苑)의 전공(前功)을 손상하지 않으려 옛 재목을 골라 모아 높게 다진 터로 옮겼습니다. 이에 별을 점치고 날을 헤아려서 넓게 개척하여 규모를 크게 하였으며 진흙을 이기고 쇠를 녹여 부어 다투어 묘기를 나타냈습니다. 구름사다리는 수(倕)와 같은 솜씨로 다듬은 재목을 험한 데에 건너지르고 서리같은 도벽(塗壁)은 요(獿)와 같은 재주로 만든 색흙에 향을 이겨 넣으며, 바위로 된 기슭을 깎아 담을 돋우고 시냇물을 내려다보며 앞이 탁 트이게 창을 내며, 거친 층계를 금테두른 섬돌로 바꾸고 보잘 것 없는 곁채를 무늬새긴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겹으로 된 불전은 용이 서린 듯한데 가운데에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인으로 모셨으며, 층층 누각엔 봉황이 우뚝 섰는데 위에다 수다라(修多羅)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고래등같은 마룻대를 높이 설비하고 난새같은 난간을 마주보게 하며, 비단같은 천정엔 꽃을 포개었고 수놓은 주두엔 곁가지를 끼우니 날개를 솟구쳐 날아갈 듯하여 볼 때마다 눈이 아찔하도다. 그밖에 더 높이고 고쳐 지은 것으로는 초상화를 모신 별실과 스님들이 거처할 요사며 음식을 헤아리는 식당과 밥을 짓는 넓은 부엌이었습니다. 더욱 새기고 다듬는 데 교묘함을 다하고 채색하는데 정밀함을 다하였으니 암혈(巖穴)과 골짜기가 함께 맑으며 안개와 노을이 서로 빛나도다. 옥찰간(玉刹竿)에 봉명(蓬溟)의 달이 걸렸으니 두 떨기 서리같은 연꽃이요 금방울에 송간(松澗)의 바람이 부딪히니 사철의 천연 음악이로다. 절승(絶勝) 경개(景槪)를 보면 외딴 구석에서 걸출하였으니 왼편의 뾰족한 봉우리들은 닭의 발이 구름을 끌어당기는 듯하고 오른편의 습한 들은 용의 비늘이 태양에 번쩍이는 것 같도다. 앞에 나가면 메기같은 산이 검푸르게 벌려 있고 뒤로 돌아보면 봉황같은 산등성이가 잇닿아 있도다. 그러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높고 기이하고 가까이 가서 살피면 상쾌하고 아름다우니 가히 낙랑(樂浪)의 선경(仙境)이요 참으로 즐거운 나라이며 초월(初月)이란 명산(名山)은 곧 환희의 땅이라고 이를 만 하도다.
잘 세워서 모든 일이 두루 잘 되었고 부지런히 닦아서 복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우리나라를 크게 비호하며 위로 왕의 보수(寶壽)에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망라하여 네 경계를 삼으며 오백년을 셈하여 한 봄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번산(樊山)에서 표범을 사냥하여 바야흐로 꼬리세움을 기뻐하시다가 형산(荊山)에서 용을 걸터 타고 갑자기 떨어진 수염을 잡고 울 줄이야 어찌 기약하였겠습니까.
헌강대왕(憲康大王)께서는 젊은 나이에 이미 덕이 높으셨고 정신이 맑고 몸이 건강하여 우러러 침문(寢門)에서 환관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게 됨을 슬퍼하시고 머리 숙여 익실(翼室)에서 거상(居喪)하는 것을 준수하시었습니다. 등(滕)나라 문공(文公)이 예(禮)를 다하여 거상(居喪)함으로써 마침내 극기(克己)할 수 있었고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때를 기다려 정사를 다스림으로써 실로 사람을 놀라게 하였거늘, 하물며 천성이 중화(中華)의 풍도를 따르시고 몸소 지혜의 이슬에 젖으시며 조종(祖宗)을 높이는 의리를 들어올리시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정성을 분발하셨음에랴.
중화(中和) 을사년(885년) 가을에 하교하시기를, “그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일을 이어받아 잘 따르며 길이 후손에게 좋은 일을 물려주는 것이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니 선대(先代)에 세운 곡사(鵠寺)의 명칭을 바꾸어 마땅히 대숭복(大崇福)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경(經)을 몸에 지니는 보살과 시무(寺務)의 대강을 맡은 청정한 승려가 좋은 전지(田地)로써 공양과 보시에 이바지하였는데 한결같이 봉은사(奉恩寺)[봉은사는 聖德大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의 전례를 따르라. 고(故)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희사한 땅의 산물로부터 얻는 이익을 운반하는 일이 중대하니 마땅히 정법사(正法司)에 위임토록 하라. 그리고 따로 덕망이 있는 두 고승을 뽑아 사적(寺籍)에 올려 상주(常住)토록 하면서 명로(冥路)에 복을 드린다면 윗자리에 있는 나로서 유계(幽界)까지 살피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고 대연(大緣)을 맺은 이로서도 감응이 있어 반드시 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종소리는 공중에 울려 퍼지고 발우엔 향적여래(香積如來)가 주는 밥이 가득 담기며, 창도(唱導)함에 육시(六時)로 옥경(玉磬)이 울리고 수지(修持)함에 만겁(萬劫) 동안 구슬이 이어지듯 하리니, 위대하도다! 공자(孔子)의 이른바 “근심이 없는 이는 오직 문왕(文王)일진저. 아비가 일으키고 아들이 이어받았구나”하는 것을 얻으심이 아니겠습니까.
경사스러운 병오년(886년) 봄에 하신(下臣) 치원(致遠)을 보고 이르시되, “예기(禮記)에 이르지 않았던가. ‘명(銘)이란 스스로 이름함이니 그 조상의 덕을 칭송하여 후세에까지 밝게 드러내려는 것은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라고. 선조(先祖)께서 절을 지으실 당초에 큰 서원(誓願)을 발하셨는데 김순행(金純行)과 그대의 아비 견일(肩逸)이 일찍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명(銘)이 한 번 일컬어지면 과인과 그대가 모두 얻게 되리니 그대는 마땅히 명(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臣)은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월계(月桂)의 향기를 훔쳤지만 우구자(虞丘子)의 긴 슬픔만 남겼고 계로(季路)의 헛된 영화만을 누릴 뿐이었는데, 왕명(王命)을 받자오매 두렵고 놀라와 몸을 어루만지며 슬퍼 목이 메입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중국에서 벼슬할 때 일찍이 유자규(柳子珪)가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 적어 놓은 글을 읽으니 서술한 바가 바르고 조리가 있어 왕도(王道) 아님이 없었는데 이제 우리 국사(國史)를 읽어보니 완연히 성조대왕조(聖祖大王朝)의 사적(事跡)이었습니다. 또 전하는 말을 들으매 중국의 사신 호귀후(胡歸厚)가 복명(復命)함에 한껏 채집한 풍요(風謠)를 두고 당시의 재상에게 이르기를, “제가 다녀온 지금부터 무부(武夫)는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라에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신라왕이 시로써 그려내어 주시거늘 제가 일찍이 배웠던 것에 힘입어 운어(韻語)를 지음으로써 억지로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화답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해외(海外)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관리들이 옳다고 여겼다 하옵니다. 이는 오로지 열조(烈祖)께서 시(詩), 서(書), 예(禮), 악(樂)으로 터전을 마련하시고 선왕(先王)께서 육경(六經)으로 세속을 교화하심이니 어찌 후손을 위하여 그러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능히 문물을 빛나게 하셨으니 명(銘)을 지어도 부끄러운 말이 없을 것이오 붓을 들어도 넘치는 용기가 있을 것입니다.
드디어 감히 하늘을 엿보고 바닷물을 헤아려 비로소 평범한 말을 엮어 보았는데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져 별안간 긴 한탄만이 일게 될 줄 뉘 알았겠습니까. 뒤미처 정강대왕(定康大王)께서 남기신 숫돌에 공을 이루시니 부시던 지(篪)에 운(韻)이 맞으셨습니다. 이미 왕위(王位)를 이으시어 왕업(王業)을 지키시며 장차 남은 사업을 이어 이루시려고 그 지위에서 편한 날이 없으시어 그 글을 마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멀리 해같은 형님을 쫓으시다가 갑자기 서산(西山)에 그림자를 만나시니 높은 달같은 누이에게 의지하여 길이 동해(東海)에 빛을 전하셨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대왕전하께서는 아름다운 꽃받침이 꽃과 이은 듯하고 왕가의 계통이 매우 밝으며 빼어난 곤덕(坤德)을 체득하고 아름다운 천륜(天倫)을 계승하셨나니, 진실로 이른바 신주(神珠)를 품고 채석(採石)을 불린 것이어서 이지러진 데는 모두 기우고 좋은 일이라면 닦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우경(寶雨經)』에서 부처님 말씀으로 분명히 수기(授記)하신 것이라든지 『대운경(大雲經)』에 나오는 옥같은 글이 완연히 부합됨과 같음을 얻으셨습니다.
선고(先考) 경문대왕(景文大王)께서 절을 이룩하시고 헌강대왕(憲康大王)께서 스님들의 공양을 베푸시어 이미 불교계를 높이셨으나 아직 비문을 새기지 못하였기에 용렬한 신(臣)에게 명을 내리시어 힘없는 붓을 놀리게 하셨는데, 신이 비록 못이 먹물로 변함에 부끄럽고 붓이 꿈속에서 서까래만함에 욕되오나, 장융(張融)이 두 왕씨(王氏)의 필법이 없음을 한탄하지 않은 것에 가만히 비할 것이오며, 조조(曹操)가 어쩌다 여덟자의 찬사를 풀이했던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설령 재가 부딪쳐 못을 메우고 먼지가 날아 바다에 넘칠지라도 임금의 후예는 무성하여 약목(若木)과 나란히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며 두터운 비석은 빼어나 옥초(沃焦)를 마주보며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정성을 가다듬고 손 모아 절하며 눈물을 씻고 붓을 들어 빛나는 발자취를 더듬어 명(銘)을 지어 올립니다.
가비라(迦毘羅)의 부처님은 해돋는 곳의 태양이시라
서토(西土)에 나타나시고 동방(東方)에서 돋으셨구나.
먼 곳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어 인연 있는 자들이 크게 일어났네.
정찰(淨刹)에 공이 높았고 왕릉에 복이 미치었도다.
열렬하신 영조(英祖)께서는 덕업(德業)이 순(舜)임금과 부합하셨으니
큰 숲에 드심이 무난하여 문득 천하를 얻었네.
우리의 자손을 보호하시고 백성들의 부모가 되옵시니
뿌리는 동방에 깊었고 갈래는 동해에 뻗었도다.
신불(蜃紼)과 용순(龍輴)으로 산릉에 편안히 모셨으며
유택(幽宅)에 수도(隧道)를 열고 솟은 탑을 이웃에 옮기셨도다.
오래도록 애모하는 예(禮)는 모든 이의 깨끗한 인연일지니
절에 이로움이 많고 임금의 일족이 길이 번성하리라.
효손(孝孫)이 깊고 아름다와 천지의 이치를 밝게 아시매
봉황이 날고 용이 뛰니 금규(金圭)가 상서로움에 부합되었도다.
조령(祖靈)을 기원하매 어둡지 않고 바라던 복도 곧 이르니
그 은덕 갚으려고 불사를 잘 일으키셨네.
나라의 인걸 잘 뽑으시고 나라의 명공(名工)을 두터이 대하시며
농사철 아닌 때에 대처하여 부처의 궁전을 이룩하셨네.
채색 난간엔 봉황이 모이고 아로새긴 들보엔 무지개가 걸쳤으며
둘러싼 담장엔 구름이 피어 오르고 그림벽엔 노을이 엉키었구나.
터전이 시원스레 툭 트이고 눈에 드는 경치는 맑고 깨끗하다.
쪽빛 묏부리는 어울려 솟아 있고 맛 좋은 샘물은 쉬지 않고 솟아난다.
꽃이 아름다운 봄산이며 달이 높이 뜬 가을밤이 있으니
비록 해외(海外)에 있지만 천하에 홀로 빼어나구나.
진(陳)에서는 보덕(報德)에 힘 기울이고 수(隋)에서는 흥국(興國)을 외쳤네.
어찌 가복(家福)이라고만 하랴 국력을 높이심이라.
불당(佛堂)에선 미묘한 소리 드높고 주방에는 정결한 음식이 푸짐하다.
사군(嗣君)의 끼치신 덕화 만겁 동안 무궁하리라.
아름다울손 여왕이시어! 효제(孝悌)의 정이 돈독하시도다.
안행(雁行)을 아름답게 이루시고 왕자(王者)의 도를 삼가하여 훌륭하게 하셨도다.
글은 썩은 붓을 놀린 듯 부끄럽고 글씨는 팔목을 당긴 듯 수치스러우나
고래구렁이 비록 마를지라도 거북 위의 옥돌은 썩지 않으리라.
▨▨▨수(▨▨▨手) 환견(桓蠲) 등 새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