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郞慧和尙塔碑)
개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사터에 있다. 탑비의 높이 263.8cm, 너비 156.6cm, 양측면 41.9cm이며, 글자는 5,120자로 상태가 양호하여 모두 판독이 가능하다. 탑비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주인공 낭혜화상(朗慧和尙)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8대손으로 그의 아버지 범청(範淸)이 김헌창의 반란에 연루되어 진골에서 신분이 득난(得難: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법호는 무염(無染)이며, 800년(애장왕 1)에 출생하여 13세에 출가하였다. 처음에 부석사에서 석징대사(釋澄大師)에게서 화엄학을 배웠고, 821년(헌덕왕 13)에 중국에 유학하여 선승 보철(寶徹)에게서 선법을 수학하였다. 중국에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다가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요청으로 성주사(聖住寺)에 머물렀다. 여러 번에 걸쳐 왕명을 받아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경문왕 사후에 성주사에 되돌아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888년(진성여왕 2)에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최치원이며, 비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략 890년(진성여왕 4)에서 얼마 멀지 않은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보인다. 비문에 낭혜화상의 불교 공부 과정이 언급되어 있어 이것은 신라 하대 불교 학풍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낭혜화상이 국왕의 자문에 응하여 유교경전 등을 인용하고 있어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도 필수적인 사료이다. 아울러 비문에 신라 골품제와 관련된 결정적인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서 골품제 연구의 핵심 사료로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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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해석문
해석문 | 최연식 |
신라국(新羅國) 고(故) 양조국사(兩朝國師) 고교시대낭혜화상(故敎諡大朗慧和尙) 백월보광탑비명(白月葆光塔碑銘) 및 서문(序文)
회남(淮南)에서 본국으로 들어와 (天子의) 국신(國信)과 조서(詔書) 등을 바친 사인(使人)이며 동면도통순관(東面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使), 내공봉(內供奉)을 지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당(唐)나라가 무공(武功)으로 (黃巢의) 난을 평정하고 연호를 ‘문덕(文德)’으로 고친 해(888년) 11월 17일 해가 질 무렵, 신라(新羅 : 海東)의 두 임금에 걸쳐서 국사(國師)를 지내셨던 선승(禪僧) (朗慧)화상(和尙)께서 목욕을 마치신 후 가부좌를 하신 채 돌아가셨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슬퍼함이 마치 두 눈을 잃을 정도로 심하였는데 하물며 그 문하의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아아! 이 땅에 태어나신 지 89년이 되었고, 승복을 입으신 지는 65년이 되었다. 돌아가신지 3일이 지나도 자리에 단정히 앉은 그대로였고, 얼굴 모습도 살아 계신 것 같았다. 문인(門人)인 순예(詢乂) 등이 소리내어 울며 유체(遺體)를 받들어 선실(禪室)에 임시로 모셔 두었다. 임금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글월로 조문(弔問)하시고, 곡식으로 부의(賻儀)하여 (葬禮의) 공양(供養)에 보탬으로써 죽은 분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셨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나서 돌을 다듬어 여러 층 되는 (스님의) 부도(浮圖)를 만들었는데 이 말이 서울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보살계(菩薩戒)를 받은, (스님의) 제자이면서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소판(蘇判)인 (金)일(鎰)과 집사시랑(執事侍郞)인 (金)관유(寬柔), 패강진도호(浿江鎭都護)인 (金)함웅(咸雄), 전주별가(全州別駕)인 (金)영웅(英雄) 등은 모두 왕족으로 임금님의 덕을 훌륭히 보필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스님의 은혜를 입곤하여서 비록 출가(出家)는 하지 않았지만 가까운 제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스님의) 문인(門人)인 소현대덕(昭玄大德) 석통현(釋通賢), 사천왕사(四天王寺) 상좌(上座) 석신부(釋愼符) 등과 함께 의논하기를 “스님이 돌아가셔서 임금께서도 슬퍼하셨는데 어찌 우리들은 풀이 죽은 채 아무 말 없이 스승에 대한 의리를 빠뜨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僧)·속(俗)이 함께 (대사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과 탑의 명(銘)을 지어줄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왕께서는 옳다고 여기시고, 곧 왕족인 병부시랑(兵部侍郞 : 夏官二卿)인 (金)우규(禹珪)를 시켜 중국에서 사신으로 온 시어사(侍御使) 최치원(崔致遠)을 부르셨다. (최치원이) 왕궁에 이르러 사람을 따라 계단을 오른 뒤, 주렴(珠簾) 밖에 꿇어 앉아 명령을 기다렸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신 성주대사(聖住大師)는 참으로 부처님이 세상에 나신 것과 같은 분이셨다. 전에 나의 부왕(父王 : 景文王)과 헌강왕(憲(獻)康王) 모두 스승으로 섬기셔서, 오랫동안 나라에 이로움을 주셨다. 나도 왕이 되어서는 선왕들의 뜻을 이으려 하였으나, 하늘은 (그런 분을) 남겨주지 않았다. 이에 나의 마음이 더욱 애달프다. 생각컨데 큰 일을 한 사람에게는 큰 이름을 주어야 하므로 시호를 ‘대낭혜(大朗慧)’, 탑의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고 하노라. 그대는 일찍이 중국에 가서 벼슬하고 이제 출세하여 고국에 돌아왔다. 전에 나의 부왕께서 (그대를) 국자(國子)로 뽑아 공부하게 하였고, 헌강왕(憲(獻)康王)께서는 (그대를) 국사(國士)로써 대우하였으니, 그대는 국사(國師)의 명(銘)을 지어서 그 은혜에 보답함이 마땅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치원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황공하옵게도 전하께서 저의 글이 벼에 알맹이는 없으면서 쭉정이만 많고, 계수나무에 향기만 있듯 실속이 없음을 용서하시고, 글을 지어 은혜에 보답하라 하시니 진실로 뜻밖의 행운이옵니다. 다만 대사(大師)께서는 유위(有爲)의 세상에서 무위(無爲)의 신비한 가르침을 널리 펴셨는데, 소신(小臣)의 한계가 있는 하찮은 재주로써 그 끝없이 큰 행실을 기록하려 한다면 약한 수레에 무거운 짐을 싣고, 짧은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의 물을 긷고자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행여 돌이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거나, 거북이 돌아보는 신조(神助)가 없으면 결코 산과 시내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숲과 골짜기의 물에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부디 글짓는 것을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사양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면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대는 힘써 행하라”라고 말씀하면서 크기가 방망이 만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어 내시로 하여금 전해주었는데 곧 (대사의) 문하 제자들이 올린 (대사의) 행장(行狀)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건데 중국에 유학한 것은 대사와 내가 같이 한 것인데, 스승이 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고, 그를 위하여 일을 해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은 높고,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를 위하여) 수고하여야 하는가. 그래서 옛날의 군자들이 배우는 것을 삼가하였던 것인가. 그러나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은 덕을 세우고,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은 말을 다듬으니, 그 덕은 말에 의지하여서야 비로소 그 내용을 제대로 전할 수 있고, 이 말은 덕에 의지하여서야 비로소 오래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덕의) 내용을 제대로 전하게 되면 마음을 멀리 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보일 수 있고, (말이) 오래 전해지게 되면 문장도 또한 옛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때에 하는 것이니, 어찌 다시 감히 실속 없는 글이라고 굳이 사양할 수 있겠는가.
비로소 방망이 같은 행장을 펼쳐보니, 대사께서 중국에 유학하고 신라에 돌아온 연대와, 계(戒)를 받고 선(禪)을 깨치신 인연,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사실, 사찰의 개창 등은 죽은 한림랑(翰林郞) 김입지(金立之)가 지은 성주사비(聖住寺碑)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부처의 제자로서 불법을 널리 전한 행적과 임금의 스승으로서 행한 업적, 세속을 진정시키고, 악마들을 항복시킨 위력, 세상에서 활동할 때는 붕(鵬)처럼 지내고, 은거하여서는 학(鶴)처럼 지낸 일 등은 태부(太傅)에 추증되신 헌강왕께서 직접 지으신 심묘사비(深妙寺碑)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다만 대사께서 열반에 드신 때와 우리 임금께서 탑의 이름을 높이신 것을 드러내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입과 손이 일을 의논하여 나의 생각하는 바대로 일을 진행하려 하는데 그때에 (대사의) 수제자(首弟子) 비구(比丘)가 와서 글을 재촉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러한 나의 생각을 드러내자, 그는 “(金)립지(立之)의 비는 세운지 오래 되어서 그 후 수십 년의 아름다운 행적이 빠져있고, 태부왕께서 신필로 지으신 글은 단지 특별한 대우가 있음을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그대는 옛 선인의 글을 읽고, 직접 임금의 명령을 받았으며, 대사의 행적에 대하여 실컷 듣고, 문하 제자들이 올린 행장을 자세히 보았으니 마땅히 두루 기억하여 빠뜨리지 말고 이야기하여 후대의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그들이 일의 시초와 끝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중국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품에 넣어 가지고 가서 중국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면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내가 어찌 (내용에) 덧붙임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대는 귀찮음을 꺼리어 재주를 숨기지 마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급히 대답하기를 “나는 초가 지붕을 매듯 (간략히) 하려 하였는데, 스님은 나에게 채소를 팔 듯 자세히 하길 바라시는군요”라고 하였다.
드디어 어지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억지로 붓을 움직이려 하니 『한서(漢書)』유후전(留侯傳) 끝 부분에 “(張)량(良)이 임금과 더불어 조용히 천하의 일을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지만 천하의 존망(存亡)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므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므로 대사가 살아 계실 때의 일들이 뛰어난 것이 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뒤의 학자들에 가르침이 되는 것이 아니면 또한 적지 않으려고 한다.
스스로 반고(班固)의 『한서』를 조금이라도 보았다고 자부하면서 이에 글을 적으니 다음과 같다.
빛이 왕성하고 충실하여 온누리를 비출 자질을 갖춘 것으로는 태양에 비길 것이 없고, 기(氣)가 온화하고 두루 통하여서 만물을 기를 능력을 갖춘 것으로는 봄의 바람만한 것이 없다. 이 큰 바람과 태양은 모두 동방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이 두 가지의 자질을 모으고, 산악이 신령한 정기를 내려서 군자의 나라에 태어나 사찰에 우뚝 서게 하였으니 우리 대사가 바로 그 분이다.
(대사의) 법호(法號)는 무염(無染)으로 달마대사의 10대 법손(法孫)이 된다.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 태종무열왕이 8대조이시다. 할아버지는 주천(周川)으로 골품(骨品)은 진골이고 한찬(韓粲)을 지냈으며, 고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조정에서는 재상, 나가서는 장수를 지내 집집에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는 범청(範淸)으로 골품이 진골에서 한 등급 떨어져서 득난(得難)이 되었다. [나라에 5품이 있는데 성이(聖而), 진골(眞骨), 득난(得難) 등이다. (得難은) 귀성(貴姓)을 얻기 어려움을 이야기한 것이다. 『문부(文賦)』에서 ‘혹 구하기는 쉽지만 얻기는 어렵다’고 말한 것을 따서, 6두품의 수가 많지만 귀성이 되기는 제일 낮은 관등[一命]에서 가장 높은 관등[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 4, 5품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만년(晩年)에는 무술을 좋아하였다. 어머니 화씨(華氏)가 꿈에 긴 팔을 가진 천인(天人)이 연꽃을 내려주는 것을 보고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얼마 후에는 다시 꿈 속에 서역의 도인(道人)이 나타나서 스스로 법장(法藏)이라고 하면서 10계(戒)를 주면서 그것으로 태교(胎敎)를 하게 하였다. 마침내 1년이 지나서 (대사가) 태어났다.
대사는 아해(阿孩)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니 중국말과 다르지 않다] 적에 걷거나 앉을 때 반드시 합장을 하고 가부좌를 하였으며,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로 무엇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불상이나 탑을 본떴다. 하루도 부모님의 곁을 떠나지 않다가 아홉 살 때에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눈으로 본 것은 반드시 입으로 암송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해동의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열두 살을 넘기고 나서(13세)는 여러 학문을 비루하게 여기고 불도(佛道)에 들어가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먼저 어머니에게 그 뜻을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이전의 꿈을 생각하고는 울면서 “예[우리말로 허락이다]”라고 하였다. 뒤에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자신이 늦게서야 깨달은 것을 후회하였으므로 기뻐하며 “잘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입으로는 경전을 부지런히 읽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데 힘을 다하였다.
이 절에 법성선사(法性禪師)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일찍이 중국에 가서 능가선(楞伽禪)을 배웠었다. 대사는 이분에게 수년간 배웠는데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이었으므로 법성선사가 말하기를 “빠른 발로 달린다면 뒤에 출발하여도 먼저 도착한다는 것을 나는 너에게서 직접 보았다. 나는 아는 것이 적어서 그대에게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 너와 같은 사람은 중국에 유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사는 “알았습니다” 하였다..
밤중의 새끼줄은 뱀으로 속기 쉽고, 허공의 베올은 분간하기 어렵다. 물고기는 나무에 올라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토끼는 나무 그루터기를 지킨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승이 가르친 것과 내가 깨달은 것에는 서로 나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진주를 얻고, 불을 피웠으면 조개와 부싯돌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도(道)에 뜻을 둔 사람들에게 어찌 꼭 정해진 스승이 있겠는가.
곧 그곳을 떠나 부석산(浮石山)의 석징대덕(釋澄大德)에게 화엄(華嚴)을 배웠는데, 하루에 서른 사람 몫의 공부를 하니 푸른 색과 붉은 색이 남초(藍草)와 천초(茜草)의 원래 색을 무색케 하는 것 같았다. 대사는 조그만 구멍에 담긴 물에서는 잔이 뜰 수 없듯,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곳에서는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생각하고서 “동쪽을 바라보기만 하다가는 서쪽의 담(중국)은 보지 못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가 멀지 않을 터인데 어찌 살던 곳만 고집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선뚯 산에서 나와 바다로 나아가 중국으로 건너갈 기회를 엿보았다. 때마침 나라의 사신이 天子가 하사한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천자에 조회할 일이 있었으므로 그 배에 의지하여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거칠어져서 큰 배가 깨어지니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대사는 벗 도량(道亮)과 함께 한장 널판지에 걸터앉아 바람에 맡긴 채 떠다니게 되었다. 밤낮없이 반달 가량을 떠다닌 후에 검산도(劒山島 : 黑山島)에 표착(漂着)하게 되었다. 무릎 걸음으로 물가에 도착하여 한참이나 실의에 잠겨있다가 말하기를 “물고기 배 속에서도 간신히 몸을 건졌으니 용의 턱밑에도 손을 넣어 (바라는 구슬을) 아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구르는 돌이 아니니 물러남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장경(長慶 : 821~824) 초에 조정사(朝正使)로 가게된 왕자 흔(昕)이 당은포(唐恩浦)에 배를 대었기에 태워줄 것을 부탁하니 그러라고 하였다. 마침내 지부산(之罘山) 기슭에 도착해서는 전에는 어려웠던 일이 이제 쉽게 됨을 생각하고서 해약(海若 : 바다의 신)에게 공손히 절하고서 “큰 파도를 자제하고, 바람의 마군과 잘 싸우셨습니다”고 하였다.
(스승을 찾아) 다니다가 대흥성(大興城) 남산(南山)의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러서는 화엄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부석사에서 배운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 한 얼굴이 검은 노인이 말을 걸고서 “멀리 자신 밖의 사물에서 (道를) 구하려 하기보다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닫고서 이때부터 경전 공부하는 것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불광사(佛光寺)에서 여만(如滿)에게 도(道)를 물었다. 여만은 강서마조(江西馬祖)에게서 심인(心印)을 얻었고, 향산(香山)의 백상서(白尙書) 악천(樂天)과는 불법을 같이 이야기하는 벗이었지만 (대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매우 부끄러워 하면서 “내가 여러 사람을 겪어 보았지만 이 신라사람같은 사람은 있지 않았다. 후일에 중국에서 선(禪)이 사라진다면 곧 동이(東夷)에 가서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곳을 떠나 마곡(麻谷) 보철화상(寶徹和尙)을 찾아가 모시면서 힘든 일을 하는 것을 가리지 않고, 남이 하기 어려워 하는 것을 쉽게 해내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선문(禪門)에 있어서 유검루(庾黔婁)와 같은 남다른 행실을 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보철화상은 대사의 노력을 현명히 여기고서 하루는 불러서 말하기를 “전에 나의 스승인 마화상(馬和尙 : 馬祖道一)께서 나와 헤어질 때에 말씀하시길 ‘봄에 꽃이 많으면 가을에 열매가 적은 법이다. 보리수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을 슬프게 여긴다. 지금 너에게 심인(心印)을 전하니 후일에 제자 가운데 재주가 뛰어나서 북돋아 줄만한 사람이 있으면 북돋아 주어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간다는 말은 거의 예언에서 나온 말이니 해뜨는 곳(동쪽)에서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바탕이 거의 완숙해졌을 것이다. 만일 네가 동쪽 사람으로서 눈으로 말할 만한 사람을 얻어 잘 이끌어 지혜의 물이 바다 바깥(중국 바깥)에 까지 덮도록 한다면, 그 덕이 적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다. 스승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네가 왔으니 기쁘구나. 이제 심인(心印)을 전하여 동방에서 선종의 으뜸가는 사람이 되게 하니 가서 삼가 실행하거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지금은 강서(江西) 마조(馬祖)의 수제자이고, 후세엔 해동(海東) 선문(禪門)의 할아버지가 될 터이니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구나”고 하였다.
그곳에 머무른 지 얼마 안되어 보철화상이 세상을 떠나 묵건(墨巾)을 머리에 쓰고 이내 말하기를 “큰 배가 이미 떠나버렸는데 작은 배가 어디에 묶여 있을 것인가”라 하고 이때부터 각지를 유랑하였는데 바람처럼 하여 그 기세를 막을 수 없고,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분수(汾水)를 건너고 곽산(崞山)을 오르기까지 오래된 (불교의) 자취는 반드시 찾아가고, 참된 승려는 반드시 만나 보았다. 머무르는 곳은 인가를 멀리하였으니 그것은 위태로운 것을 편안히 여기고 고생을 달게 여기며, 몸은 종처럼 부리되, 마음은 임금처럼 받들기 위해서였다. 이런 가운데도 오로지 병든 사람을 돌보고, 고아와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도와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지독한 추위나 더위가 닥쳐,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손이 트고 얼음이 박히더라도 전혀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 이름을 듣는 사람은 멀리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의를 표하면서 동방(東方)의 대보살(大菩薩)이라고 크게 떠들어댔다. (중국에서의) 30여 년간의 행적은 이와 같았다.
회창(會昌) 5년(845)에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황제가 (외국 승려들을 귀국하도록)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여러 성(城)과 바꿀 수 있는 귀한 보배가 다시 돌아왔으니 이것은 하늘이 해주신 일로 땅에는 복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마치 벼와 삼같이 빽빽하였다. 서울에 들어와 어머니를 찾아뵈니 (어머니는) 크게 즐거워하면서 “돌이켜 보니 전에 내가 꾼 꿈이 우담화가 한 번 드러난 것이 아니겠느냐. 바라건대 내세를 제도하라. 나는 다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에 곧 북쪽으로 나아가서 종신토록 몸 붙일 곳을 찾아다녔다. 그때 마침 왕자 흔(昕)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산중(山中)의 재상(宰相)으로 불렸는데 우연히 바라는 바가 합치되었다. (昕이) 말하기를 “스님과 나는 함께 용수(龍樹) 을찬(乙粲)을 조상으로 하고 있으니, 스님은 안팎으로 모두 용수(龍樹)의 자손입니다. 참으로 놀라와 감히 미칠 바가 못됩니다. 그러나 바다 밖에서 함께 했던 일이 있으니 옛적의 인연이 결코 얕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웅천주(熊川州) 서남쪽 모퉁이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나의 조상인 임해공(臨海公) [휘(諱)는 인문(仁問)이고, 당나라가 예맥(濊貊 : 실은 高句麗를 말함)을 정벌할 때에 공이 있어서 임해공(臨海公)으로 봉해졌다]께서 봉토로 받은 곳입니다. 그 사이 커다란 불이 일어나 사찰이 반쯤은 재가 되어버렸으니, 자비롭고 현명하신 분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대사는 대답하기를 “인연이 있다면 머물러야겠지요”라고 하였다.
대중(大中 : 847~859) 초에 그곳으로 가서 머물기 시작하면서 말끔히 단장하였던 바, 얼마 되지 않아 도(道)가 크게 행하여지고 절은 크게 번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의 먼 곳에서부터 도(道)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천리 먼 길을 반걸음처럼 가깝게 여기고 찾아오니 그 수가 이루 셀 수 없었다. 이처럼 무리가 많아졌지만 대사는 종이 늘 쳐주기를 기다리고 거울이 얼굴을 비춤에 피곤해 하지 않듯, 온 사람은 모두 지혜의 횃불로 그 눈을 이끌어 주고, 불법의 즐거움으로 배를 채워주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을 이끌어 주고 무지(無知)한 습속을 변화시켰다.
문성대왕(文聖大王)께서는 대사가 행하는 일이 왕도(王道)를 행함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들으시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기셔서 급히 어찰을 보내어 위로하였으며, 또한 대사가 산중(山中) 재상(宰相)에게 대답한 네 마디 말[有緣則住]을 중하게 여기셔서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바꾸고 대흥륜사(大興輪寺)에 편입시키도록 하셨다. 대사가 왕의 사자(使者)에게 대답하기를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지어주신 것만 하여도 절로서는 영광스럽고 지극한 총애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중이 외람되게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이것은 바다새가 바람을 피해오자 뭍의 새가 봉황으로 오해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흐린 날에는 숲에 숨어서 자신의 무늬를 윤택하게 한다는 표범에게는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즉위 전의) 헌안대왕(憲安大王)께서는 사찰의 시주(施主)인 계서발한(季舒發韓)인 위흔(魏昕)과 더불어 남북(南北) 재상(宰相)[각기 자신의 관사에 있어 좌상(左相), 우상(右相)과 비슷하였다] 이었는데, 멀리서 제자의 예를 행하며 향과 차를 예물로 보내어 한달도 그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렇게 (大師의) 명성이 온 나라에 가득하여 선비들은 대사의 선문(禪門)을 모르는 것을 일세의 수치로 여길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대사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물러나와서 반드시 감탄하면서 “직접 뵈니 귀로 듣던 것보다 백배나 낫다. 입으로 말씀하지 않아도 벌써 마음에 와 있었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래서 원숭이나 호랑이가 관(冠)을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사람들도 곧 그 조급함을 떨치고, 사나운 마음을 고쳐서 착한 길로 다투어 달려 나갔다. 헌안왕께서 즉위하심에 이르러 대사에게 글을 보내어 도움이 될 말을 청하였는데, 대사는 대답하기를 “주풍(周豊)이 노공(魯公)에게 대답한 말이 뜻이 깊습니다. 예경(禮經)에 적혀있으니 자리 옆에 새겨 두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사(太師)를 추증받으신 선대왕(先大王 : 景文王)께서 즉위하셔서도 (대사를) 공경하고 존중하심이 선조(先朝 : 憲安王) 때와 같아서 대우해 주는 것이 나날이 두터워졌다. 일을 시행할 때에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어 물어본 후에 거행하였다. 함통(咸通) 12년(871) 가을에 (왕께서는) 대사에게 교서(敎書)를 급히 보내고 사람을 시켜 부르면서 말하기를 “산림(山林)을 어째서 가까이 하시면서 도성(都城)은 멀리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대사는 제자들에게 “갑자기 진후(晉侯)가 백종(伯宗)을 부르듯하니 (산문에서 밖에 나오지 않았던) 혜원공(慧遠公)에게는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도(道)를 행해지게 하려면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부처께서 (불법이 전해지도록) 부촉(付囑)하신 바를 생각하니 내가 가야 되겠다”라고 말하고 즉시 서울에 도착하여 왕을 뵈었다. 선대왕께서는 면복(冕服) 차림으로 절을 하여 스승(王師)으로 삼았고, 왕비와 세자, 그리고 왕의 동생이신 상국(相國) [돌아가신 후에 왕으로 높이고 시호를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고 하였다]과 여러 왕자, 왕손들이 빙 둘러싸고 한결같이 우러렀는데 마치 옛날 가람의 벽 그림에 서역의 여러 왕들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제자가 말 재주는 없습니다만, 글 짓는 것은 조금 좋아합니다. 전에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유(有)에만 얽매이거나, 무(無)만을 고집하면 편벽된 이해에 나아갈 뿐이다. 참된 근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반야(般若)의 절대적인 경지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절대적인 경지가 무엇인지 가르침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경지가 이미 절대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설명할) 이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전하는 것(心印)이니 말없이 행해질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과인은 조금 더 배우기를 청합니다”고 하자 대사는 제자 중의 뛰어난 자에게 번갈아 가며 질문을 하게 하여 차근차근 속속들이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주어 막힌 것을 해결하고 번거로운 것을 떨쳐 버리기를 마치 가을 바람이 어두침침한 노을을 밀어내듯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셔서 대사를 늦게 만나본 것을 안타까와 하시며 말씀하시길 “성인께서 자연스럽게 바른 길(南宗)을 가리켜 주셨는데, 순(舜)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라고 어찌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궁에서 나오자 재상들이 다투어 마중하니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일반 백성들이 뒤쫓으며 따르니 떠나고자 하여도 그럴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귀한 보배(佛性)가 있음을 깨달아 이웃집의 보석을 탐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새장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생활을 괴롭게 여겨서 (서울을) 떠나고자 하였다. 임금께서는 억지로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곧 교서(敎書)를 내려서 상주(尙州)의 심묘사(深妙寺)가 서울로부터 멀지 않으니 선종의 별관으로 삼아 머무르라고 하셨다. 대사는 거역할 수 없어 그곳에 가서 머물렀는데, 잠시 머물지라도 반드시 수리하였으니 곧 엄연한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부(乾符) 3년 (876) 봄에 선대왕(先大王)께서 병환이 나셨는데 근시(近侍)에게 “빨리 우리 대의왕(大醫王)을 모셔오라”고 명하셨다. 사자가 오자 대사께서는 “산승(山僧)의 발이 왕궁에 이르는 것은 한 번만 하여도 심하다고 할 것이므로 나를 아는 사람은 ‘성주(聖住)가 머무르는 곳이 없게 되었다 [無住]’고 말할 것이고,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염(無染)이 물이 들었다 [有染]’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임금과 서로 맹세한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임금께서 도리천에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찌 가서 작별인사를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다시 왕궁으로 가서 약이 되는 말씀을 하여 주고, 잠계(箴戒)를 베푸시니 (왕께서) 깨닫는 가운데 병이 조금 나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한 달이 지나서 (경문왕이 돌아가시고) 헌강대왕께서 거상(居喪)을 하게 되었다. (왕께서는) 울면서 왕족인 훈영(勛榮)을 통하여 뜻을 전하였으니 “내가 어려서 부모의 상을 당하여 정사를 담당할 수 없습니다. 임금을 인도하고 부처를 받들어 사해(四海)의 사람을 널리 구제하는 것은 자기 한 몸만을 착하게 하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컨데 대사께서는 멀리 계시지 마시고 (서울에서) 머무를 곳을 고르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사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스승의 가르침은 6경(經)에 기록되어 있고, 지금 보필할 사람은 3경(卿)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늙은 산승(山僧)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누리[蝗]처럼 앉아서 땔나무와 곡식을 축낼 뿐입니다. 단지 세 마디 말로 남겨드릴 만한 말씀이 있으니 ‘관리를 잘 등용하라 [能官人]’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산의 무리를 이끌고 새처럼 떠나고 말았는데, 이때부터 역마(驛馬)들이 왕명을 전하려고 산중에 그림자를 이었다. 역졸(驛卒)들은 가야할 곳이 성주사인 것을 알면 곧 모두 뛸듯이 기뻐하며 손을 모아 말고삐를 고쳐잡고 왕명이 한걸음이라도 늦을까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왕명을 전하는 근시(近侍)들은 급히 전할 말이 있어도 쉽게 행해질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건부제(乾符帝)가 헌강대왕의 즉위를 인정한 해(878년)에 (임금께서는) 나라 안의 진언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가져오고 해로움을 없앨 수 있는 계책을 올리게 하였는데 특별히 우리나라의 종이를 사용하여 말을 적게 하였다. 천자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다. 나라에 이익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사는 하상지(何尙之)가 송(宋) 문제(文帝)에게 바친 말로써 대답하였다. 태부왕(太傅王)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동생인 예부령(禮部令 : 南宮相)에게 말씀하시길 “삼외(三畏)는 불교의 삼귀의(三歸依)에 비교될 수 있고, 오상(五常)은 불교의 오계(五戒)와 비슷하다. 왕도(王道)를 잘 실천하는 것이 부처의 마음에 부합되는 것이다. 대사의 말이 옳은 것이다. 너와 나는 성실하고 부지런히 실천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건부제(乾符帝)가 (黃巢의 亂을 피하여) 서쪽으로 피난한 중화(中和) 원년 (881쪽) 가을에 임금께서 시인(侍人)에게 “나라에 커다란 보배 구슬이 있는데 평생토록 궤에 감추어 두는 것이 잘한 일인가 ?”하고 묻자 “아닙니다. 때때로 꺼내어서 많은 백성들의 눈을 뜨게하고 사방 이웃 나라의 마음을 쏠리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나에게 마니(摩尼)의 귀한 구슬이 있는데 숭엄산(崇嚴山)에서 빛을 감추고 있다. 만약 그 감춘 것을 열기만 한다면 3천세계를 환히 비출 수 있으니 수레 열둘을 비춘다는 구슬이야 비교가 되겠는가. 나의 부왕께서 간절히 맞이하셨을 때, 두 번이나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옛날에 소하(蕭何)는 한 고조가 한신(韓信)을 대장(大將)으로 임명하면서 아이 부르듯 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 하면서 상산(商山)의 네 노인을 부를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하였다. 지금 천자께서 피난하셨다는 말을 들었으니 달려가서 위로해 드려야 할 것인데, 천자를 위로함에는 부처에게 의지함이 가장 우선일 것이다. 이제 대사를 맞아들임에 있어서는 반드시 세상의 평판에 따를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왕이라고 하여 나이 많고 덕이 높으신 분에게 무례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며 관직이 높은 사람을 사자(使者)로 보내고 말을 겸손하게 하여 부르셨다. 이에 대사는 “외로운 구름이 산에서 나오는 것이 어찌 다른 마음이 있어서이겠는가. 대왕의 정치에 인연이 있으니 고집함이 없는 것이 뛰어난 선비[上士]의 도리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와서 왕을 뵈었다. 임금께서 대사를 인견함은 선조(先朝 : 景文王) 때의 예절과 같았는데 예에 덧붙여진 것으로서 손꼽을 만한 것으로는, 임금께서 직접 음식을 봉양한 것이 첫째이고, 손으로 향을 전하신 것이 둘째이며, 몸·입·뜻의 삼업(三業)으로 세 번이나 경의를 표하신 것이 셋째이며, 작미로(鵲尾爐)를 잡고 영생의 인연을 맺은 것이 넷째이며, 법칭(法稱)에 ‘광종(廣宗)’을 더하여 준 것이 다섯째이며, 다음날 어진 이들에게 대사가 머무는 절에 나아가 기러기처럼 열을 지어 인사드리도록 한 것이 여섯째이며, 나라 안의 시(詩)를 짓는 사람들에게 대사를 송별하는 시(詩)들을 짓게 하여서 재가제자(在家弟子)인 왕족 소판(蘇判) 억영(嶷榮)이 가장 먼저 시(詩)를 지으니 그것을 거두어서 두루마리로 만들고, 시독(侍讀)이며 한림관(翰林官)인 박옹(朴邕)이 거기에 인(引)을 붙여서 떠날 때에 준 것이 일곱째이며, 행차를 담당하는 관리들에게 정결한 방을 준비하도록 거듭 명하여 그곳에서 작별하신 것이 여덟째이다.
고별에 임하여 임금께서 신묘한 비결(秘訣)을 구하시니, 이에 제자들에게 눈짓하여 진요(眞要)를 들려주라고 하였다. 순예(詢乂), 원장(圓藏), 허원(虛源), 현영(玄影)과 같은 이는 사선(四禪)을 행하여 청정(淸淨)을 얻은 사람들로서, 지혜의 실을 뽑아 깊은 뜻을 짜냈는데, 뜻을 기울여 소홀함이 없었고, 임금의 마음을 계발(啓發)함에 여유가 있었다. 임금께서 매우 즐거워하여 두 손을 마주잡고 경의를 표하며 말씀하기를 “전에 저의 부왕(父王)께서는 증점(曾點)과 같은 현인이셨는데, 지금 저는 증삼(曾參)과 같은 아들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를 이어서 덕이 있는 사람에게 지극한 도리를 얻고, 그것을 받들어 간직함으로써 뒤엉켜진 근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 위수(渭水)가에서 낚시하던 강태공(姜太公)은 사실은 명예를 낚으려는 자였으며, 흙다리 위의 장량(張良)도 그런 전철을 밟았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여도 단지 세 치의 혀를 놀린 것에 불과하니 어찌 나의 스승께서 은밀한 말로써 마음을 전한 것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받들어 실천하고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부왕(太傅王)께서는 아름다운 말과 시문(詩文)을 잘하셔서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도 관계없이 입을 여시면 짝이 맞는 말을 만드셨는데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하여 둔 것 같았다.
대사께서 왕궁을 물러나온 후에 다시 왕손인 소판(蘇判) 일(鎰)의 청함을 받아들였다. 같이 여러 차례 이야기를 주고 받고선 (대사께서) 감탄하여 말씀하시길 “옛날의 임금들은 장수하는 분은 있어도 생각이 깊지 못하였는데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그 둘을 겸비하셨고, 신하들은 재상이 될만한 재주는 있어도 그러한 덕망이 없었는데 그대는 두루 갖추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마땅히 덕을 좋아하십시오.”라고 하고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산으로 돌아가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에 임금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방생장(放生場)의 경계를 표시하니 새와 짐승이 즐거워하였고, 뛰어난 글씨로 ‘성주사(聖住寺)’의 제액(題額)을 써주시니 마치 용과 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좋은 일도 끝이 있고 한창 때도 끝나는 법이다. 정강대왕(定康大王)께서 즉위하셔서는 (景文王과 憲(獻)康王) 양조(兩朝)에서 은혜를 베푼 것을 본받아 행하고자 하여 승려와 속인으로 거듭 사신을 보내어 맞아 오게 하였으나 (대사는)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하였다. 태위대왕(太尉大王 : 眞聖王)께서는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온 나라를 덮었고 덕있는 사람을 존경하기를 높은 산을 바라보듯 하였다. 즉위하신 지 9개월만에 안부를 묻는 사자가 10번이나 다녀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는 허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國醫가) 도착하여 아픈 정도를 물으니 대사는 살짝 웃으며 “노병(老病)일 뿐이니 번거롭게 치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國醫가) 미음을 하루에 두 번 들이되 반드시 (朝夕공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은 후에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대사께서 식력(食力)을 잃게 될까 걱정하여 몰래 종 치는 사람에게 거짓으로 (여러 번) 치도록 부탁하였다. 하지만 대사께서는 직접 창 밖을 내다보시고 그 거짓을 알고 그만두게 하셨다. 돌아가실 즈음에 옆의 시중드는 사람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유훈(遺訓)을 남기셨다. “내 나이 이미 80[中壽]을 넘었으니, 죽음[大期]을 피하기 어렵다. 나는 멀리 떠날 것이니 너희들은 잘 지내도록 하라. 공부하기를 한결같이 하며, (수행의 태도를) 지키고 잃지 말라. 옛 관리들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지금 선(禪)을 닦는 사람들이야 힘써 노력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대사는 성품이 공손하고 삼가하여, 말이 좋은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았다. 『예기(禮記)』에 이른바 “몸은 겸손하고, 말은 잘 못하는 듯이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학승(學僧)들을 반드시 ‘선사(禪師)’라고 불렀으며,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그 사람의 신분이 다르다고 해서 대우를 다르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방에 가득한 자비에 제자들이 즐거워하며 따랐다.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는 5일을 기한으로 하여 의심나는 것을 묻게 하였다.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은 마땅히 마음의 스승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음이 걱정이지, 도(道)가 너희를 멀리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배우지 못한) 시골뜨기라고 할지라도 속세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달리면 반드시 나아가게 될 것이니, 부처와 스승이라고 해서 별다른 종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저 사람이 마신 것이 나의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저 사람이 먹은 것이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니, 노력하여 스스로 마시고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다르다는 종지(宗旨)를 보지 못하였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이고, 나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생활하며, 교사(巧詐)한 마음을 버리는 것, 이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행동에 가까울 것이다. (부처의) 그 말은 분명하니 그대로 따르고, (부처의) 그 뜻은 오묘하니 그대로 믿으라. 도(道)를 부지런히 행할 뿐 샛길 속의 샛길은 보지 말아라.”
(대사는) 젊어서부터 노년(老年)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낮추어서 먹는 것을 남과 다르게 하지 않았고, 입는 것은 늘 같은 옷이었다. 건물을 짓고 수리할 때에는 남들보다 앞장서서 일하고 늘 “가섭조사(迦葉祖師)께서도 진흙을 이기신 적이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잠깐이라도 편히 지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때로는 물을 길어 나르고, 땔나무를 나르는 일까지도 직접 하시면서 “산이 나 때문에 더럽혀졌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기도 하였다. 자기의 몸을 다스리고 일에 힘쓰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대사께서는 어려서 유가(儒家)의 경전을 읽었고, 그 공부한 것이 여전히 입에 남아 있었으므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에는 위와 같이 韻을 맞춰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문하(門下)의 제자로서 이름을 들 수 있는 사람이 거의 2천여 명이 되고,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 사찰을 주재하는 이는 승량(僧亮), 보신(普愼), 순예(詢乂), 심광(心光) 등이다. 그리고 문하의 손자에 해당하는 자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무리가 번성하니 실로 마조도일이 용의 새끼를 길렀고, 동해(東海 : 新羅)가 서하(西河 : 중국)를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논(論)하여 말한다. 『춘추(春秋)』에 말하지 않았던가. 훌륭한 집안[公侯]의 자손은 반드시 그 조상을 본받는다고. 옛날 무열대왕께서 을찬(乙粲)으로서 예맥[실은 백제와 고구려]을 무찌를 군사를 빌기 위하여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명을 받들고 소릉황제(昭陵皇帝)를 알현했을 때, 직접 황제에게 중국의 역법(曆法)을 시행하고 의복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기를 청하였었다. 이에 황제가 허락하고 중국 의복을 하사하고, 특진(特進)의 관작(官爵)을 내려주셨다. 하루는 (황제께서) 여러 나라의 왕자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는데, 술을 크게 베풀고 온갖 보화를 쌓아놓고 마음대로 가지라고 하셨다. 대왕께서는 술 드시는 것은 예의를 지켜 어지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셨고, 화려한 비단은 지혜를 써서 많이 얻으셨다. 하직인사를 드릴 때, 황제께서는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며 “나라의 인재로다”라고 감탄하셨고, 중국을 떠나올 때에 황제께서 직접 짓고 쓴 온탕(溫湯)과 진사(晉祠)의 두 비문(碑文)과 직접 편찬하신 『진서(晉書)』 한 질을 내려 주셨다. 당시 비서감(秘書監 : 蓬閣)에서 이 책을 베껴 두 질을 올렸는데 한 질은 황태자에게 주시고, 다른 한 질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었다. 또한 높고 귀한 관리들에게 장안성(長安城) 동문(東門) 밖에 나아가 전송하라고 명하셨으니, 이러한 각별한 은총과 두터운 예우에는 지혜에는 어두운 사람일지라도 보고 들어서 놀라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미개에서 문명국으로 되었는데, 그로부터 8세손(世孫)인 대사께서는 중국에 유학하여 배운 것으로 우리나라를 교화시켜서 이상적인 나라로 변화시키셨으니 (그 공은) 비할 데 없이 크다. 이런 분이 아니라면 누구를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선조(先祖)는 두 적국(敵國)을 평정하고 문명에 접하게 하여주셨고, (後孫인) 대사께서는 불법을 방해하는 악한 것을 물리쳐서 마음의 덕을 닦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두 임금께서는 스승으로 모셨고, 사방의 백성은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는데, (대사가) 원하는 대로 따르면서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그러니 5백년 마다 현인(賢人)이 나타난다는 말대로 성인이 이 세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니겠는가. ‘(훌륭한 집의 자손은 반드시) 조상을 본받는다’는 말에 어찌 부족함이 있는가.
전에 장량(張良)은 한(漢) 고조(高祖)의 스승이 되었으면서, 만호(萬戶)에 봉(封)해지고 제후가 된 것을 크게 자랑하여 한(韓)나라 정승의 자손으로서 지극히 명예로운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비루한 일이다. 비록 신선술(神仙術)을 공부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태양 위로 날아 갈 수 있겠는가. 중간에 그쳐서 학(鶴) 위에 한 몸을 얹고 다니는 데에 머무를 뿐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 대사가 세속의 무리 가운데 뛰어나서, 여러 중생을 구제하고, 스스로를 깨끗이 하는 것으로 시종일관 한 것에 견줄 수 있겠는가.
뛰어난 덕의 모습을 칭송하는 데에는 옛날부터 송(頌)을 사용하였으니, (불교의) 게송(偈頌)도 비슷한 것이다. 침묵을 깨고서 명(銘)을 지으니 다음과 같다.
도(道)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늘 몸에 지니는 것은 풀 위의 이슬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고, 불법에 나아가 참된 부처가 되는 것은 물 속의 달을 잡는 것과 같다. 그런데 도를 늘 몸에 지니고 참된 부처가 된 사람은 해동(海東)의 김상인(金上人)이다. 본래 성골(聖骨)의 자손이고, 상서로운 연꽃을 인연으로 하여 태어났네. 오백년만에 땅을 골라 태어나서, 열세 살에 속세를 벗어났네. 화엄이 불법에의 길을 열어주었고, 배를 타고 求法에 나섰네. (하나)
중원에서 두루 공부하고서, 어느 것에 집착하지 않음을 깨쳤네. 선진(先進)들이 모두 감탄하네, 수행에 따를 자 없다고. 중국에서 불교가 도태되어 귀국한 것은 하늘이 기회를 주신 것이네. 깨우침의 구슬이 마곡(麻谷)에서 빛나고, 거울 같은 눈이 우리나라를 비추었네. (둘)
이미 봉황의 훌륭한 모습, 뭇 새가 다투어 따르네. 한번 용의 변화하는 재주를 보라. 보통 생각으론 헤아리지 못하리. 온나라에 능력을 보이고서 성주사(聖住寺)에 힘써 머무르셨네. 여러 절을 두루 돌아다님에 바위 사이 길 다니지 않음이 없었네. (셋)
임금의 총애를 바라지 않았고, 임금의 뜻에 영합하지도 않았네. 때가 이르면 나아갔으니 그것은 옛 인연과 불법을 전하라는 부처의 부촉을 위해. 두 왕이 존경하니 온 나라가 부처의 가르침에 젖었네. 용이 나오면 골짜기가 가을빛, 구름이 돌아가면 바다와 산이 저녁. (넷)
세상에 나오면 섭룡(葉龍)보다 귀하였고, 세상을 벗어나면 기러기보다 더 높이 날았네. 물을 건너 나옴은 소부(蘇父)를 비루하게 여겼기 때문이고, 산에서 수도할 땐 승량(僧朗)보다 열심이었네. 한 번 귀국한 뒤로 세 번 궁중에 갔네. 어리석은 사람은 그르다고 생각하지만, 지극한 이치엔 다름이 없네. (다섯)
이 도(道)는 담백하여 맛이 없지만, 힘써서 마시고 먹어야 하네. 남이 마신 술 내가 취하지 않고, 남이 먹은 밥 내가 부르지 않네. 대중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지라 했나, 명예는 겨처럼 부귀는 쭉정이처럼. 세속의 몸가짐은 무엇을 권했나, 인(仁)을 갑옷으로 의(義)를 투구로. (여섯)
이끌어 지도함에 빠뜨림 없어, 실로 인류의 스승이시다. 전에 살아계심엔 온나라가 유리(琉璃)같더니, 돌아가심에 온통 가시밭이네. 열반은 왜 이리 빠른지, 전과 지금 다같이 슬프네. (일곱)
탑(塔)을 만들고 비(碑)를 새겨서 형체는 감추고 자취는 드러낸다. 사리탑은 푸른 산에 자리하고, 거북이 업은 비석은 푸른 절벽에 버티고 섰네. 이것이 어찌 여태까지의 마음이 되리오마는, 다만 문자로라도 살펴서 뒤에 오는 사람이 오늘을 알게 함이니, 지금에 옛일이 드러남과 같은 것. (여덟)
임금의 은혜, 천년을 흐르고, 대사의 교화는 만대(萬代)에 존경되리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로 인재를 키우고, 누가 줄없는 거문고로 가르침을 이을까. 선경(禪境)을 비록 지키지 못한다 해도 번뇌야 어찌 들어오리오. 계족산(鷄足山) 아래서 미륵을 기다림이니, 어서 동쪽 계림(鷄林)에 나타나소서.
종제(從弟)인 조청대부(朝請大夫), 전(前)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인연(崔仁滾)이 왕명을 받들어 씀.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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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 허흥식 |
有唐新羅國故 兩朝國師教諡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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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 고운선생문집 |
無染和尚碑銘(幷書)奉 敎撰(下同)
帝唐揃亂以武功(乾符戊戌滅黃巢)易元以文德之年暢月(仲冬曰暢月)月缺之七日日蘸咸池時(咸池星在紫微內垣天潢傍卽未時)海東兩朝國師禪和尙盥浴已趺坐示滅(新羅眞聖主二年十一月十七日)國中人如喪左右目矧門下諸弟子乎嗚呼應東身者八十九春(新羅哀莊王六年十二月二十八日生)服西戌者六十五夏去世三日倚繩座儼然面如生門人詢乂等號奉遺體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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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 朝鮮金石總覽 |
有唐新羅國故 兩朝國師敎謚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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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 최연식 |
淮南1入本國2
送國信3 詔書4等使前東面都統巡官5 承務郞6 侍御史7 內供奉8賜紫金魚袋9臣崔致遠奉敎10撰」
帝唐揃亂11以武功易元以文德之年12 暢月13月缺之七日14日蘸15 咸池16時海東兩朝17國師禪和尙18盥浴已趺坐示滅19國中人如喪左右目20矧門下諸弟子乎嗚呼應東身21者八十九春服西戎22者六十五夏去世三日倚繩座23儼然面如生門人詢乂等號奉」
遺身本假肂24禪室中上25聞之震悼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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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 劉喜海 |
有唐新羅國故 兩朝國師教謚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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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논문 | 2003 | 김창호, 2003, 「新羅 無染和尙碑의 得難條 해석과 건비 연대」『新羅文化』22, 東國大 新羅文化硏究所 |
단행본 | 2002 |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 |
논문 | 2002 | 「최치원의 중국역사탐구와 그의 마지막 행보」 |
논문 | 2002 | 「신라 하대 전기 고승추모비의 건립」 |
논문 | 2002 | 장일규, 2002, 「崔致遠의 儒佛認識과 그 의미」『韓國思想史學』19, 韓國思想史學會 |
논문 | 2002 | 南東信, 2002, 「聖住寺 無染碑의 得難條에 대한 考察」『韓國古代史硏究』28 |
단행본 | 2001 | 曺凡煥, 2001, 『新羅禪宗硏究 -朗慧無染과 聖住山門을 중심으로-』, 서울 一潮閣 |
논문 | 2001 | 金英美, 2001, 「朗慧無染의 禪思想」『성주사와 낭혜』, 서경문화사 |
논문 | 2001 | 南東信, 2001, 「聖住寺와 無染에 관한 자료 검토」『성주사와 낭혜』, 서경문화사 |
논문 | 2001 | 曺凡煥, 2001, 「朗慧無染의 求道行과 南宗禪 體得」『성주사와 낭혜』, 서경문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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