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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준묘지(黑齒俊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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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흑치준묘지(黑齒俊墓誌)는 1929년 10월에 중국 하남성 낙양의 망산(邙山)에서 그의 아버지 흑치상지묘지와 함께 발견되었다. 탁본의 크기는 길이 53cm, 너비 52cm이다. 지석에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사각형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는데, 1행 26자씩 26행으로서 글자는 모두 642자이다. 지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 모두 알 수 없다. 묘지에 따르면, 흑치준은 그의 아버지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활동하던 때인 676년에 태어났고, 695년경에 군공(軍功)을 세워 관직을 수여받은 이래 당의 관리로 활동하다가 706년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흑치준묘지에 전하는 그의 가계와 흑치상지묘지에 전하는 가계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예를 들어 흑치상지의 할아버지를 아들 묘지에서는 '가해(加亥)'라고 표기하였고, 아버지 묘지에서는 '덕현(德顯)'이라고 표기하였다. 또 흑치상지 아버지의 경우 아들 묘지에서는 '사자(沙子)'라고, 아버지 묘지에서는 '사차(沙次)'라고 표기하였다. 한편 흑치상지묘지에서 그의 집안이 대대로 달솔을 역임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의 호부상서(戶部尙書)와 같다고 표기하였으나 흑치준묘지에서는 대대로 자사(刺史)와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고 표기하여 차이를 보였다. 이밖에도 백제의 관직, 관등, 그리고 양자의 관계 등에 대하여 기존의 기록과 다른 점이 보이고 있다.
이 묘지는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것도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사각형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한 글자씩 새겼는데, 1행마다 26자씩 26행으로서 모두 642자이다. 그러나 묘지석의 크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탁본의 크기는 길이 53cm, 너비 52cm이다. 글씨체는 정서(正書)로 되어 있다. 이 묘지에는 글을 지은 사람과 글을 쓴 사람이 드러나 있지 않다.
본문을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과 비교해보면 그의 가계(家系)에 대해서 약간 다른 부분이 눈에 뜨인다. 흑치상지의 할아버지 이름이 다른 것은 한자 표기로 보아 덕현(德顯)이 중국식 이름이고 가해(加亥)는 백제식 이름인 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또한 아버지 이름이 다른 것은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표기상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역임한 벼슬에 대해서는「흑치상지 묘지명(黑齒常之 墓誌銘)」에서 모두 달솔(達率)을 역임하였으니 중국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다고 하였으나,「흑치준 묘지명(黑齒俊 墓誌銘)」에서는 자사(刺史)와 병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백제의 관직, 관등 그리고 양자의 관계 등에 대해 기존의 기록과는 다른 점들이 보이므로 장차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주인공의 생애에 대해서 문헌 기록은 없고, 단지 이 묘지명과 함께 흑치상지의 묘지명이 참고가 될 뿐이다. 이들을 토대로 연보를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676년 : 출생. 증조부 가해(加亥), 조부 사자(沙子), 아버지 흑치상지(黑齒常之).
695년 경: 양왕(梁王)을 따라 서도(西道)로 종군함. 여기서 군공(軍功)을 세워 유격장군(游擊將軍) 행난주광무진장(行蘭州廣武鎭將) 상주국(上柱國)에 제수됨.
성력(聖曆) 원년(698): 아버지의 무고함이 풀려 추증될 때에 그도 우표도위익부좌랑장(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 임명됨.
그 뒤: 우금오위(右金吾衛) 수익부중랑장(守翊府中郞將) 상주국(上柱國)으로 옮김.
신룡(神龍) 2년(706) 5월 23일: 병환으로 낙양현(洛陽縣) 종선방(從善坊)에서 31세를 일기로 사망함.
같은 해 8월 13일: 북망산(北邙山) 언덕에 묻힘. 묘지 출토 정황으로 보아 아버지 무덤 옆에 묻힌 것으로 생각된다.
흑치준이 태어나던 676년은 흑치상지가 이미 당에 들어가 활동하던 시기이므로 흑치준은 당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그는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나이가 47세 때에 해당한다. 이것은 흑치상지의 백제 및 당에서의 활동과 관련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는 사항이다.
대당(大唐)의 고인(故人) 우금오위(右金吾衛) 수익부중랑장(守翊府中郞將) 상주국(上柱國) 흑치부군(黑齒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공(公)의 이름은 준(俊)이니, 즉 당나라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의 아들이다. 바닷가의 땅을 나누어 나라를 이루매 목화(木華)가 지은 「해부(海賦)」에서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늪지가 많은 나라에서 우두머리를 칭하매 좌사(左思)가 지은 「삼도부(三都賦)」에서 그 소중함을 얻을 수 있도다. 먼 오랑캐의 땅에서 부락을 크게 일으켰고, 중국에 들어와서 누차 벼슬을 하였구나.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니 해와 달을 그린 깃발에 그의 명성이 걸렸고,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우니 연대순으로 적은 역사책에 그의 덕이 기록되었도다. 증조부는 이름이 가해(加亥)로서 본국에서 자사(刺史)를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는 사자(沙子)로서 본국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이들은 모두 형산(荊山)에서 옥(玉)이 빼어난 것 같았고, 위포(蔚浦)에서 진주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해뜨는 동방에서 비단옷에 빛을 발하니 풍속의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고, 머나먼 하늘 끝에서 선서(仙署)를 어루만지니 ▨대(▨臺)가 때맞추어 질서가 잡혔다. 아버지는 상지(常之)로서, 당나라의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연국공(燕國公)이 되었고,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에 추증되었다. 그의 재주는 뛰어난 재주꾼들 중에서도 으뜸이었고, 그의 행동은 훌륭한 씨족들 중에서도 빛이 났다. 공훈은 천지를 덮었으니 관부(灌夫)와 같이 장군을 맡았었고, 포상은 산하(山河)에 무성하였으니 소공(召公)과 같이 연국(燕國)에 봉해졌었다. 죽어서도 능히 그러하였으니 그를 기려 추증함에 영예가 가득하였다.
공은 장군의 가문에서 가르침을 받아 일찍부터 무략(武略)을 품었다. 도겸(陶謙)처럼 어려서 놀 때에는 깃발을 펼치면서 놀았고, 이광(李廣)처럼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도 반드시 군진(軍陣)을 그리면서 즐겼다. 이런 까닭으로 먼 이역(異域)에서 공을 세우려는 원대한 계획을 품었으며, 군대의 진퇴(進退), 공수(攻守)를 자유자재로 하는 기묘한 기술이 뛰어났다. 스무살의 나이에 별주(別奏, 관직 또는 특별히 주청하여?)로서 양왕(梁王)을 따라 서도(西道)로 종군하였다. 이에 군공(軍功)을 세워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제수되었고, 우표도위익부좌랑장(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우금오위익부중랑장(右金吾衛翊府中郞將) 상주국(上柱國)으로 옮겼다. 높이 구름에 잇닿아 있는 누각을 밟았고, 고개 숙여 가을의 수렵 놀이를 따랐으며, 진(晉)나라 때의 아름다운 담비 꼬리를 꽂았고, 한(漢)나라 때의 수레와 의복을 엄숙히 갖추었다. 바야흐로 7대에 걸쳐 경사스러움을 전하여 서한(西漢)의 김일제(金日磾)와 같은 영광을 향유하고자 하였으나, 어찌 병마(病魔)를 (피할 수 있겠는가?) 얼마 뒤 북망산에 오르는 대열을 따르게 되었으니, 신룡(神龍) 2년(706) 5월 23일에 병환으로 낙양현(洛陽縣) 종선방(從善坊)에 있는 (집에서) 사망하였다. 이 때의 나이는 31세였다. 아아 슬프도다, 온 장안에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온 나라가 병들어 초췌하듯 하였도다. 생각컨대, 공은 의지와 기개가 굳세고 맹렬하였으며, 재능과 도량이 높고 깊었다. 비록 더할 나위없는 최상의 공을 세웠고, 힘들여 싸우면서 전장에서 고생하였지만, 불운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마침내 제후에 봉해지지도 못하였다. 갑자기 현량한 사람이 돌아가게 되니 조정에 있는 사람이나 재야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슬퍼하고 아깝게 여겼다. 그런즉 신룡(神龍) 2년 병오년(丙午年) 8월, 초하루 임인일(壬寅(壬申)日), 13일에 북망산(北邙山) 언덕에 장례를 치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 초(楚)나라의 슬픈 상여꾼 노래 소리 길따라 이어지고 주(周)나라의 퉁소 소리 길게 빼는 가운데, 무덤 속 광중을 문득 열어 관을 넣고 급히 닫기에 이르렀구나. 땅을 높여 봉토 쌓기를 이미 끝내고, 무덤가에 심은 비취색 잣나무가 바야흐로 푸르른데, 이제 ▨옥(▨玉)에 여한(餘恨)을 기록하고자 하니, 비석의 글자가 마치 황금에 새긴 것과 같기를 바라노라. 명문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아아, 요(堯) 임금은 현명한 사람을 구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니, 퇴당(頹當)이 쓰여지게 되었고 김일제(金日磾)가 벼슬을 얻었구나. 서융(西戎)의 외로운 … 이고 동이(東夷)의 자손으로서, 구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하는 듯이 끝없이 하였으니, 여기에 그의 조그마한 착한 일들을 기록해두노라. 이것이 첫째이다.
착한 일을 기록함은 무엇을 이름인가? 갓을 쓰고 갓끈을 매게 되니, 충성스러움으로 업적을 이루었고, 효성스러움으로 이름을 떨쳤도다. 미쁘구나 아버지여, 맑고 곧은 심성을 가지기에 겸손히 힘썼도다. 효성스럽구나 아들이여, 아버지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구나. 이것이 둘째이다.
그 명성이란 무엇인가? 장군 가문에서 무장의 덕을 이어받았고, 성 밖에서 장군으로서의 명을 받들어, 이역(異域)에서 공을 세웠도다. 재앙과 난리를 능히 평정하였고, 난리를 피운 적들을 깨끗이 쓸어버렸으니, 편종(編鍾) 소리는 그의 현명함을 기리는 것이고, 그에게 내려준 수레와 의복은 그의 덕을 드러내는 것이로다. 이것이 셋째이다.
수레와 의복이란 무엇인가? 금오위(金吾衛)에서 가장 많이 받았으니, 아름답도다 대부(大夫)여, 천자의 총애를 이처럼 받았구나. 높은 누각은 구름에 잇대었고, 관에 꽂은 화려한 담비 꼬리는 거듭 빛났으니, 착한 일을 많이 하여 그 즐거움을 여기에서 누릴 뿐 아니라, 그 응보로 경사가 부디 자손에게 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노라. 이것이 넷째이다.
경사스러움이 이어지지 못해 갑자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여기 대들보가 무너졌는 데에도 저기 푸르른 것은 하늘이로다. 쑥이 더부룩한 무덤에는 상여꾼의 노래 소리 구슬프고, 소나무 심은 무덤 길에는 퉁소 소리 울리는데, 밝은 날에 한 번 묻히니, 무덤 속에서 영원히 머물 것이로다. 이것이 다섯째이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1992)]
우금오위(右金吾衛)에 소속되었던 부병(府兵)의 하나인 익부(翊府)의 중랑장(中郞將)을 의미한다. 우금오위(右金吾衛)는 당나라 16위(衛)의 하나이다. 16위에 속하였던 부병은 다시 내부와 외부로 나뉘는데, 내부에는 친부(親府) 1, 훈부(勳府) 2, 익부(翊府) 2개가 있었고, 외부에는 절충부(折衝府)가 있었다. 각 부에는 중랑장이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정4품하에 해당하였다. 수(守)는 행수법(行守法)에 의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하면 품계가 관직보다 낮을 경우 관직 앞에 ‘수(守)’자를 붙였다. ↩
목화(木華)의 자(字). 그는 서진(西晋) 광천인(廣川人)으로, 일찍이 양준부(楊駿府)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의 문장은 아주 미려한데,『문선(文選)』권12에 「해부(海賦)」 1편이 실려 있다. ↩
목화(木華)의 자(字). 그는 서진(西晋) 광천인(廣川人)으로, 일찍이 양준부(楊駿府)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의 문장은 아주 미려한데,『문선(文選)』권12에 「해부(海賦)」 1편이 실려 있다. ↩
좌사(左思)의 자(字). 그는 진(晋)나라 임치인(臨淄人)으로, 용모나 언변이 뛰어나지 못하였으나 문장은 아주 훌륭하였다고 한다. 처음에 「제도부(齊都賦)」를 1년만에 지었다가 다시 「삼도부(三都賦)」를 10년만에 지었는데, 사람들이 서로 베끼려고 하여 낙양에서 종이가 귀하게 되었다고 한다(『진서(晉書)』권92 좌사전(左思傳) 및『문선(文選)』권4,5,6 삼도부(三都賦) 참조). ↩
변화(卞和)가 옥(玉)을 얻은 곳이라고 하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형산의 옥’은 이곳에서 나온 옥을 이르지만, 전하여 현량(賢良)한 사람을 가리킨다. ↩
한(漢)나라 영음인(潁陰人) 관부(灌夫 : ?~기원전 131)의 자(字). 그는 오(吳), 초(楚)의 7국(國)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와 함께 종군하였는데, 아버지가 전사하자 군법에 따라 상귀(喪歸)하지 않고 오(吳)나라 군대를 무찔러 원수를 갚았다. 이 공으로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사기(史記)』권107 관부전 및『한서(漢書)』권52 관부전 참조). ↩
소공(邵公), 소공(召公), 소강공(召康公)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석(奭)이고 시호는 강(康)이다. 일찍이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을 멸망시켰다. 그의 아들이 연국(燕國)에 봉해졌었기 때문에 그는 명목상 연국의 시조가 되었다. ↩
도겸(132~194), 후한 말기 단양인(丹陽人)으로 자(字)는 공조(恭祖)이다.『오서(吳書)』에 의하면, 14살 때에 비단을 꿰매서 번(幡)을 만들고 죽마(竹馬)를 타고 놀았는데 동네 아이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고 한다(『후한서(後漢書)』권73 도겸전 및『삼국지(三國志)』권8 도겸전 참조. 특히『삼국지』의 도겸에 관한 주(註)를 참조 바람). ↩
이광(?~기원전 119), 전한 시대의 명장(名將). 문제(文帝) 때에 흉노를 쳐서 공을 세웠고, 경제(景帝), 무제(武帝) 때에도 흉노가 그를 무서워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그를 가리켜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그는 상을 받으면 아랫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고, 다른 사람이 도저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활을 잘 쏘았다. 또한 어눌하여 말을 적게 하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땅에 그림을 그려 군진(軍陣)을 만들고 활쏘기 시합을 하면서 즐겼다고 한다(『사기(史記)』권109 이광전 및『한서(漢書)』권54 이광전 참조). ↩
연함호경(燕頷虎頸) 또는 연함호두(燕頷虎頭)와 같은 의미로 후한 반초(班超)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장건(張騫)과 같이 먼 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봉후(封侯)가 되는 상(相)을 가리킨다. ↩
원비지세(猿臂之勢)를 이르는 것으로, 군대의 진퇴, 공수를 자유자재로 하는 것을 가리킨다. ↩
이 시기에 양왕에 봉해졌던 인물은 측천무후의 조카였던 무삼사(武三思 : ?~707)밖에 없으므로 그를 가리키는 듯하다(『구당서(舊唐書)』권183 무삼사전 및『신당서(新唐書)』권206 무삼사전 참조). ↩
우표도위(右豹韜衛)에 소속되었던 부병(府兵)의 하나인 익부(翊府)의 좌랑장(左郞將)을 의미한다. 우표도위(右豹韜衛)는 당나라 16위(衛)의 하나로서, 원래 우위위(右威衛)였는데, 684년에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705년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16위에 속하였던 부병은 다시 내부와 외부로 나뉘는데, 내부에는 친부(親府) 1, 훈부(勳府) 2, 익부(翊府) 2개가 있었고, 외부에는 절충부(折衝府)가 있었다. 각 부에는 중랑장이 책임을 맡고 있었고, 그 아래에 좌,우의 낭장(郎將)이 있었으니, 이들은 정5품상에 해당하였다.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명에 의하면 이 관직은 아버지 흑치상지에 대한 누명이 벗겨진 뒤에 제수받은 것이다. ↩
한(漢)나라 때에 시중(侍中), 상시(常侍)의 관(冠)에는 담비 꼬리를 꽂고, 금으로 만든 관 장식을 달고, 매미를 붙여 장식을 하였다. 후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
서한[西漢 : 전한(前漢)]의 김일제(金日磾)가 무제(武帝) 때에 시중(侍中), 부마도위(駙馬都尉),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역임하였는데, 그 후손들도 모두 내시(內侍)의 근신(近臣)이 되어 7대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후대에는 여러 대에 걸쳐 현귀(顯貴)해진 것을 찬양하는 문귀로 사용되었다. ↩
질병, 병마를 가리킨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이 꿈 속에서 질병이 두 아이로 변하여 심장과 명치 사이에 숨은 것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전하여 침이나 약으로 고치지 못할 병을 지칭한다. ↩
병오년(丙午年)을 가리킨다. 당 고조의 아버지 이병(李昞)을 피휘하기 위해서 경오라 하였다. ↩
706년 8월 초하루는 임인(壬寅)이 아니고 임신(壬申)이다. 임인이 초하루인 때는 7월과 9월이다. ↩
성 밖이라는 뜻으로 ‘곤외지임(閫外之任)’ 즉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는 장군의 직책을 가리킨다. 고대(古代)에 성 안은 천자가 다스리고, 성 밖은 장군이 통제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사기(史記)』권102 풍당전(馮唐傳)에 “曰, 閫以內者, 寡人制之, 閫以外者, 將軍制之.”란 말이 나온다. ↩
악기의 하나인 가종(歌鍾) 즉 편종(編鍾)을 가리킨다. 노래의 곡조를 조절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
“積善之家 必有餘慶.” 즉 “선한 일을 많이 하면 그 응보로 경사가 자손에게 까지 미친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
“積善之家 必有餘慶.” 즉 “선한 일을 많이 하면 그 응보로 경사가 자손에게 까지 미친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
“蒼天曷有極”에서 나온 말인데, 이것은 “하늘은 반드시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
태산(泰山) 남쪽의 산 이름.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이 와서 머문다는 곳으로 무덤을 가리키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