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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묘지(黑齒常之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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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흑치상지묘지(黑齒常之墓誌)는 1929년 10월에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망산(邙山)에서 그의 아들 흑치준묘지와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묘지는 남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묘지는 41행으로 행마다 41자씩 모두 1604자이다. 탁본의 크기는 길이 72cm, 너비 71cm이다. 지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 모두 알 수 없다. 다만 지문을 지은 사람은 흑치상지와 군대에 같이 있으면서 그를 흠모하였던 인물이었음을 묘지의 내용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묘지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630년(무왕 31)에 태어나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관직생활을 하였고, 660년부터 663년까지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당에 항복하여 한동안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후에 서역에서 토번과 돌궐세력을 물리치는 데에 공을 세웠다고 한다. 흑치상지는 689년 10월에 모함을 받아 처형당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60세였다. 흑치상치에 관한 기록으로 『신당서(新唐書)』흑치상지열전이 가장 자세한데, 묘지는 여기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다수 보이고 있어 사서의 기록을 보충해준다. 또한 묘지에서 흑치씨가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히고 있고, 아울러 흑치씨 가문이 대대로 달솔(達率)에 임용되었다고 하여 백제 신분제도의 일면을 엿보게 해준다. 이밖에도 백제 옛땅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정책, 당나라에서의 백제유민들의 활약상을 전해주고 있다.
이 묘지는 1929년 10월에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망산(邙山)에서 그의 아들 묘지와 함께 출토되었다. 처음에 이근원(李根源)이 이를 구입하여 소장하였다가 소주(蘇州)의 문관회(文管會)에 기증되었고, 지금은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곡석정려장당묘지(曲石精廬藏唐墓誌)』의 저자 이희필(李希泌)은 이근원의 아들이다.
묘지는 41행으로 행마다 41자씩 모두 1,604자가 쓰여 있다. 탁본 크기가 길이 72cm, 너비 71cm인 것으로 보아 묘지석은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글을 지은이와 쓴이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지은이는 흑치상지와 군대에 같이 있으면서 그를 흠모하였던 인물이었다. 글씨는 구양순(歐陽詢) 서체의 단정한 해서(楷書)로 쓰였다. 그 중에는 측천무후가 만든 글자도 포함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모두 한자로 바꾸었다. 그리고 명백하게 글자가 누락되거나 잘못된 경우가 몇 군데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주 정성스럽게 만든 묘지는 아닌 듯하다.
흑치상지의 생애와 활동은 이미『구당서(舊唐書)』권109와『신당서(新唐書)』권110의 열전 및『삼국사기(三國史記)』권44의 열전에 실려 있고, 이들 책의 본기(本紀)에도 산견되어 나타난다. 이 중에서 가장 자세한 것은『신당서』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이다. 그런데 이 묘지가 발견됨으로써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들이 다수 보충될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묘지에는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던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 문헌 기록과 묘지를 바탕으로 그의 연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百濟) 무왕(武王) 31년(630): 출생. 증조부 문대(文大), 조부 덕현(德顯), 아버지 사차(沙次).
어릴 때:『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한서(漢書)』,『사기(史記)』등을 공부함.
20세 이전: 가문의 신분에 따라 달솔(達率)이 되어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함.
의자왕(義慈王) 20년(660): 당나라가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백제를 멸망시키자, 흑치상지도 항복함. 그러나, 소정방의 횡포가 심하자 임존성(任存城)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일으킴.
당(唐) 용삭(龍朔) 3년(663):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함. 이 때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만년현인(萬年縣人)으로 편입됨.
인덕(麟德) 초년(初年 : 664): 절충도위(折衝都尉)를 제수받고 부여융과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돌아와 진수(鎭守)함.
2년(665): 부여융과 함께 당으로 돌아감.
함형(咸亨) 3년(672): 공적에 따라 충무장군(忠武將軍)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를 더함.
얼마 뒤: 사지절(使持節) 사반주제군사(沙泮州諸軍事) 사반주자사(沙泮州刺史)로 옮기고, 상주국(上柱國)을 제수받음.
677년 경: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겸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사마(司馬)로 옮기고, 부양군(浮陽郡) 개국공(開國公)과 식읍(食邑) 2천호(戶)에 봉해짐.
다시: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에 임명됨.
의봉(儀鳳) 3년(678) 가을: 이경현(李敬玄), 유심례(劉審禮)와 함께 토번(吐蕃) 발지설(跋地設)을 반격하였을 때에 홀로 공을 세워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검교좌우림군(檢校左羽林軍)으로 발탁되고, 하원도경략부사(河源道經略副使)로 승진함(『구당서(舊唐書)』권196상 참조).
조로(調露) 2년(680) 7월: 토번(吐蕃) 찬파(贊婆) 등이 다시 공격해오자 역시 이를 물리치는 데에 홀로 공을 세워 이경현을 대신하여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로 발탁됨(『구당서』권5).
개요(開耀) 원년(元年 : 681) 5월: 양비천(良非川)에서 토번과 싸워 물리침(『신당서』권3). 하원(河源)에 7년간 머물면서 봉수대를 설치하고 땅을 개간하여 적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함.
다시: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摠管)으로 옮김.
광택(光宅) 원년(元年) 즉 사성(嗣聖) 원년(元年 : 684) 11월: 서경업(徐敬業)이 모반을 하자 강남도행군대총관(江南道行軍大總管)이 되어 이들을 평정함(『신당서』권4, 권93).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위(檢校左羽林衛)에 임명됨(『구당서』권109).
수공(垂拱) 3년(687) 2월: 돌궐(突厥)의 골졸록(骨卒祿)이 창평(昌平)을 공격하자 이를 물리침(『신당서』권4).
말년(末年) : 돌궐(突厥)의 골졸록(骨卒祿)과 반역자 서경업(徐敬業)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우자, 천자가 제(制)를 내려 연국공(燕國公)과 식읍(食邑) 3천호를 봉하고, 다시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를 내렸으며, 나머지는 그 전대로 함.
다시: 회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 옮김.
영창(永昌) 원년(元年 : 689) 10월 : 조회절(趙懷節)의 모반에 연계되었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60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당함(『신당서』권4 참조).
성력(聖曆) 원년(元年 : 698) : 복권되어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됨.
2년(699) 2월 17일: 낙양(洛陽) 망산(邙山)의 남쪽, 관도(官道)의 북쪽에 이장함.
이상으로 보건대 흑치상지는 630년에 태어나서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고, 660년부터 663년까지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663년 항복하여 당으로 들어간 뒤로는 당의 관료 생활을 하게 되었다. 664년부터 이듬해까지 웅진성에 돌아와 유민을 안무하였고, 신라의 압박에 의해 당으로 돌아간 뒤에는 677년 경까지 명목적이나마 백제 옛 땅을 지배하는 관직에 있었다. 그 뒤 서역 지방에서 토번(吐蕃)과 돌궐(突厥)을 물리치는 데에 크게 공을 세웠고, 서경업(徐敬業)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에 일조를 하였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689년 10월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묘지가 발견됨으로써 백제사 연구에 몇 가지 새로운 자료를 첨가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흑치씨의 유래이다. 그의 선조는 원래 부여씨(扶餘氏)였는데 흑치 지방에 봉해졌기 때문에 흑치씨로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흑치씨의 유래를 문자 그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흑치 지방의 유력 세력이었다가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면서 부여씨의 일파로 윤색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 앞으로 검토의 여지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백제에서 중국적인 봉건제도가 시행되었는지 여부도 제기될 수 있다.
둘째는 신분제도 문제이다. 이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이 되었고, 흑치상지도 20살이 안되어 달솔이 되었다. 이로써 가문의 지위에 따라 신분이 계승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제1관등인 좌평(佐平)과 제2관등인 달솔 사이에는 신분적 한계선이 그어져 있었던 사실도 추측할 수 있다.
셋째는 백제 귀족들의 학문적 소양이다. 이 묘지를 통하여 이들은 어렸을 때에『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한서(漢書)』,『사기(史記)』,『논어(論語)』등을 교재로 삼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당의 백제 옛 땅에 대한 통치책, 당에서의 백제 유민들의 대우 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묘지에는 그의 아들 흑치준(黑齒俊)의 묘지 내용과 다른 부분이 보인다. 그것은 조상들의 이름과 관직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흑치준의 묘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군(檢校左羽林軍) 증좌옥검위대장군(贈左玉鈐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 흑치부군(黑齒府君) 묘지문(墓誌文) 및 서문(序文)
하늘을 위로 이고 있으면서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것은 땅이고,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자라도 쓰여질 수 있는 것은 군율(軍律)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운수에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름다운 옥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밀산(密山) 위에서 노닐어야 하고, 지혜와 덕을 쌓은 사람이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면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부군(府君)은 이름이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氏)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 증조부는 이름이 문대(文大)이고, 할아버지는 덕현(德顯)이며, 아버지는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고상하였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으니, 가벼이 여기는 것은 기호와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가르침이었다. 가슴 속에는 깊은 마음을 가졌으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고, 정감의 폭은 너무나 넓었으니 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였다. 여기에 신중함과 성실함을 더하였고, 온화함과 선량함을 포개었다. 이런 까닭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스승과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나이 어려『소학(小學)』에서 공부할 적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및 반고(班固)의『한서(漢書)』와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를 읽었다. 이에 탄식하여 “좌구명(左丘明)이 이를 부끄럽다고 하였고, 공자도 역시 부끄럽다 하였으니, 진실로 나의 스승들이다. 이보다 더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찌 많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20세가 안되어 가문(家門)의 신분에 따라 달솔(達率)을 받았다. 당(唐) 현경(顯慶 : 656~660) 중에 당나라에서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그 나라를 평정하자, 그 임금(실제는 태자)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천자를 알현하였으니, 당에서는 이들을 만년현인(萬年縣人)에 소속시켰다.
인덕(麟德 : 664~665) 초년에 인망(人望)을 얻어 절충도위(折衝都尉)를 제수받고 웅진성(熊津城)에 진수(鎭守)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함형(咸亨) 3년(672)에는 공적에 따라 충무장군(忠武將軍),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를 더하였다. 얼마 안 있어 사지절(使持節), 사반주제군사(沙泮州諸軍事), 사반주자사(沙泮州刺史)로 관직을 옮기고 상주국(上柱國)을 제수받았다. 이에 지극히 공평한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는 것을 커다란 강령으로 삼았다.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겸 웅진도독부사마(熊津都督府司馬)로 직책을 옮기게 하였고, 부양군(浮陽郡) 개국공(開國公)과 식읍(食邑) 2천 호(戶)를 더하여 봉하였다. 이 때에 좋은 평판으로 물망(物望)에 오르내렸고, 조정의 인망이 날로 높아졌다. 마침 포해(蒲海)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난하(蘭河)에서 사변이 벌어져 부군으로 하여금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로 삼았으니, 실로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다. 부군은 품성이 빼어나고 굳셌으며,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하였다. 힘으로는 능히 무거운 문 빗장을 들어올릴 수 있었으나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았고, 지혜로는 능히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으나 지혜있는 것을 떠벌리지 않았다. 매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드러나게 하였고, 어리석은 듯이 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행실이 산처럼 똑바로 서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어질되 간사함을 기르지 않았고, 위엄을 갖추되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니, 상주고 벌주는 것은 반드시 원칙에 따랐고, 선을 권하고 악을 말리는 데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또한 5륜(倫)의 커다란 본보기를 이루었고, 3군(軍)의 크나큰 복이 되었으니, 이에 병사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고, 아랫 사람들은 그 잘못을 용납받을 수 없었다. 고종(高宗)이 매번 그의 선함을 칭찬하여 그를 지조와 학식있는 사군자(士君子)로서 대우하였다. 산서(西道 : 청해(靑海) 지방)에 있을 때에는 크게 공훈을 세웠다. 이 때에 중서령(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이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가 되자 군사들이 그의 지휘권을 빼앗았고, 역시 수군대사(水軍大使), 상서(尙書) 유심례(劉審禮)가 이미 패하여 죽자 장수들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 중에 부군이 홀로 높은 산마루와 같은 공훈을 세우면서 그 곤경을 극복함에 따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직책을 옮기고 이경현을 대신하여 대사(大使)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에 대한 풍문에 따른 것이다. 부군은 곁에 음악과 여색(女色)을 두지 않았고, 평상시에 노리개를 가지고 즐기지 않았다. 경서(經書)를 베개삼았으니 제준(祭遵)과 같이 예의를 중시하였고, 뛰어난 지략을 품었으니 두예(杜預)가 깃발을 많이 세워 적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같은 꾀를 지녔다. 오랑캐의 티끌이 깨끗하게 치워지니 변방의 말이 살찌고, 중원의 달이 훤하게 비치게 되니 하늘의 여우 기운이 사라졌다.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리하여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摠管)으로 벼슬을 옮겼다. 수공(垂拱 : 685~688) 말년에 천명(天命)이 장차 바뀌려 하였는데, 돌궐의 골졸록(骨卒祿)은 미친 도적으로 이미 자신의 미미함을 살피지 못하였고, 서경업(徐敬業)은 반역자로서 또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남쪽으로 회음(淮陰)과 해릉(海陵)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오랑캐 군사를 섬멸하는 데에 모두 큰 힘이 되었으니, 그의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천자가 제(制)를 내려 이르기를 “재간과 도량이 온화하고 우아하며, 기질과 정기가 고상하고 밝았으며, 일찍부터 어질고 의로운 길을 밟았고, 마침내 깨끗하고 곧은 곳을 밟았구나. 말한 것은 분명히 행하고 배운 것으로 자신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여러 차례 군사를 통솔하여 매번 충성스러움을 드러냈도다. 그러므로 겸국공(兼國公 : 燕國公)과 식읍(食邑) 3천 호를 봉할 만하다. 그리고 다시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를 내리고 나머지는 그 전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이곳의 포효하는 용감한 병사들을 통솔하여 저곳의 흉악하고 미친 무리들을 전멸시킴으로써, 오랑캐의 말이 남쪽에서 목축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중국의 사신들이 북쪽으로 가는 원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영주(靈州)와 하주(夏州)는 요충지로서 요사스런 오랑캐들이 가득하였으나, 부군의 위세와 명성은 이를 대신할 자가 없었다. 다시 회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 자리를 옮겨 떠도는 요기를 막기도 하였다. 마침 재앙이 악한 무리로부터 흘러나와 고고한 품격을 가진 부군에게 거듭 미치니, 의심이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어버려 옥과 돌이 섞여 구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옥에 갇혀 이윽고 하늘을 등지게 되니,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러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 나이 60세였다.
맏아들 준(俊)은 어려서 집안이 재난을 당하자 아버지의 분함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세웠다. 오랑캐의 조정에서 목숨바칠 것을 맹세하다가 천자가 보낸 사신에게 몸을 맡기니, 여러 차례 충성스러움을 드러냈고 누차 공명을 떨쳤다. 성력(聖曆) 원년(698)에 원한이 쌓여 풀지 못함을 천자가 바르게 살피시고 제(制)를 내려 이르기를, “고인이 된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위(檢校左羽林衛) 상주국(上柱國) 연국공(燕國公)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일찍이 가문의 지위에 따라 벼슬을 이어받아 군진(軍陳)에서의 영예를 두루 거쳤으며, 누차 군율(軍律)을 담당하여 공훈을 받들어 떨쳤도다. 지난 번에 사실 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의심받았던 죄는 판별되지 못하였었다. 근래에 이를 검토하여 살펴보니 일찍이 모반하였던 증거가 없고, 오로지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실로 한탄스럽기 그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니, 총애하는 표시로 관작을 더하여 삼가 죽은 이를 영광스럽게 만드노라. 따라서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노라. 그 아들 유격장군(游擊將軍) 행난주광무진장(行蘭州廣武鎭將) 상주국(上柱國) 준(俊)은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명성을 날렸고, 누차 진실된 정성을 드러냈으며, 아주 위급한 상황에도 이를 피하지 않았고,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도다. 마땅히 이를 포상하여 기록해둠으로써 크게 칭송함을 보이고자 하노니, 우표도위익부좌랑장(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 봉할 만하다.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아아, 성력(聖曆) 2년(699) 1월 22일에 천자가 칙을 내려 이르기를, “연국공(燕國公)의 아들 준(俊)이 아버지를 이장(移葬)하겠다고 요청하였으니, 물건 100가지를 내리고, 그 장례 일에 필요한 휘장, 일꾼 등 일체를 관청에서 공급하라. 그리고 6품에 해당하는 경관(京官) 1명으로 하여금 가서 살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즉 그 해 2월 17일에 망산(邙山)의 남쪽, 관도(官道)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에 받들어 이장하였으니, 이것은 예에 맞는 것이다.
생각컨대, 부군은 외따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뛰어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재간있는 사람들 사이에 표상이 되었고, 거울을 걸어 놓은 것처럼 허상과 융화되었으니 선인의 도리와 합치되는 사람들 사이에 우러름의 대상이 되었다. 말은 곧고 뜻은 넓었으니 지엽적인 일들이 근본적인 것을 가리는 일이 없었고, 계획을 세우면 일이 이루어졌으니 처음의 일들이 마지막과 일치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은 항상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 두었으며, 곤경에 처하여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고 뜻은 항상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데에 두었다. 군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면 그 생각은 아예 고려도 하지 않았고, 선왕이 물려준 바가 아니면 그 교훈은 아예 마음 속에 두지 않았다. 군문(軍門)에서 스스로 수레를 밀어 변방에서 절개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나쁜 말을 하지 못하였고, 아무리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좋은 말을 찾지 못하였다. 지혜있는 사람이 그를 보면 지혜롭다 하였고, 어진 사람이 그를 보면 어질다 하였다. 재물을 멀리하고 자신을 잊어버렸으며, 의를 중시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목이 달아날지라도 이해를 따지지 않았고, 몸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올바른 길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겁많은 사람도 그로 인해 용감하게 되었고, 탐욕스런 사람도 그로 인해 청렴하게 되었다. 이것은 굳이 저울을 논하지 않아도 잘못된 무게를 바로잡는 것과 같았고, 준족을 가진 빠른 말로 인하여 느린 말이 원대함을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관리로서 마음이 곧고 재간이 있었으니, 글을 쓰매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스스로 자책하였고, 인륜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능력을 갖추었으니, 잠자코 있더라도 천금이 그 값어치를 발휘하였다. 진실로 지금의 시대에만 본받을 바가 아니었고, 대체로 뭇사람으로부터 우뚝 솟은 인물의 표준이 되었다. 영예와 굴욕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삶과 죽음은 타고난 것인데, 어차피 귀착하는 바가 동일하다면 어찌 부인의 손 안에서 목숨을 마치겠는가? 내가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참의소(參義所)에 있었는데, 그의 도리에 감복하였고 그의 공훈을 칭송하였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5악(嶽)을 말하는 사람은 천태산(天台山)이 병풍처럼 첩첩이 서 있는 모습을 알지 못하고, 4독(瀆)을 바라보는 사람은 운주(雲洲)에 핀 붉은 꽃을 깨닫지 못하네. 삼가 듣건대 김일제(金日磾)는 한나라의 칼집이 되었고, 백리해(百里奚)는 진나라의 사다리가 되었도다. 참으로 사리에 밝다 말할 수 있으니 뭇사람을 즐겁게 할 정도로 뛰어났고, 가는 곳마다 보배가 되었으니 어디에 간들 명석하다 아니할 것인가. 공이 동쪽으로부터 왔도다, 마치 봄바람 불어 오듯이. 예악(禮樂) 제도가 그로 인해 본색을 드러냈고, 소리와 광채가 그를 기다려 뜻을 이루었도다. 끝이 없구나 군사들의 깃발이여, 가지런하구나 수레들의 덮개여. 커다란 종을 치니 북이 울고 퉁소가 화답하는구나. 이는 누구의 영화인가 나를 두고 덕이 있다 하는 소리도다. 사방에 걸쳐 오랑캐의 근심을 없앴고, 천 리에 걸쳐 공(公)과 후(侯)들의 성을 지켰도다. 공훈을 이미 펼치니 충성과 의로움이 벌써 드러났도다. 그러나 만물에는 곧고 굳건한 것을 꺼리는 일도 있고, 행실이 높으면 도리어 해를 당하는 일도 있구나.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그 높이를 잃게 되었고, 어두운 무덤 속에는 빛이 사라지게 되었구나. 천하가 그를 위해 애통해 하였고, 4해(海)가 그의 현량(賢良)함을 애처롭게 여겼도다. 천자가 이를 깊이 헤아리니, 살아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포상이 미쳤도다. 내가 실로 감모하여 그를 기리는 글을 짓노라. 그에게 바쳐진 말들이 영원할 것이며, 그의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로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1992)]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세운 무주(武周 : 690~705)를 가리킨다. 이 비가 만들어진 것이 699년이므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런 까닭으로 이 비문에는 무후(武后)가 만든 글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
좌무위위(左武威衛)는 당나라 16위(衛)의 하나이다. 16위는 황제가 직접 통솔하였던 중앙군이다. 좌무위위(左武威衛)는 684년에 좌효위(左驍衛)를 개칭한 것으로 705년에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갔다. 이 당시에는 대장군이 최고의 직책으로서 정3품에 해당한다. 대장군 위에 상장군(上將軍)을 둔 것은 정원(貞元) 2년(786)에 해당한다. ↩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하나는 가관(假官)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다른 하나는 문서를 검토하는 관직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전자를 가리킨다. 당(唐)나라에서는 가관(加官)의 일종으로서 태사(太師)로부터 원외랑(員外郞)에 이르기까지 모두 검교가 있었다. ↩
당나라 6군(軍) 중의 하나. 여기서는 가관(加官)의 형태로 좌우림군대장군(左羽林軍大將軍)에 봉해진 것을 의미한다. ↩
좌옥검위(左玉鈐衛)는 당나라 16위(衛)의 하나이다. 원래 좌령군위(左領軍衛)였는데, 684년에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705년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증(贈)은 사망한 뒤에 추증된 것을 의미한다. ↩
당나라 경조부(京兆府) 경조군(京兆郡)의 영현(領縣). 지금의 서안시(西安市) 남쪽에 해당한다. 원래 수나라의 대흥현(大興縣)이었으나 당 무덕(武德) 원년(618)에 만년현으로 개칭하였다(『구당서(舊唐書)』권38 지리지 참조). 한편,『구당서(舊唐書)』권4에 의하면 인덕(麟德) 원년(664) 8월에 만년현에 죄수를 내려주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때 흑치상지가 이곳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16위(衛)에 소속되어 있었던 부병(府兵)은 내부(內府)와 외부(外府)로 나뉘어 있었는데, 외부가 절충부에 해당한다. 절충도위는 절충부의 규모에 따라 달라서 정4품상에서 정5품하에 이르렀다.『신당서(新唐書)』권49상 백관지(百官志) 제위절충도위부(諸衛折衝都尉府) 참조. ↩
본래 백제의 죽군성(竹軍城)으로 당이 백제 옛 땅에 설치한 7개 주(州)의 하나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권37 참조). ↩
본래 백제의 호시이성(号尸伊城)으로 당이 백제 옛 땅에 설치한 7개 주의 하나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권37 참조 ↩
이경현(615~682), 의봉(儀鳳) 원년(676)에 유인궤(劉仁軌)를 대신하여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조로(調露) 2년(680)에 토번(吐蕃)이 쳐들어오자 고종(高宗)이 그를 조하도대총관(洮河道大總管) 겸 안무대사(安撫大使)로 삼아 토번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묘지에서는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로 적혀 있다. 부장(副將) 유심례(劉審禮)가 선봉으로 토번군을 공격하였으나 이경현이 무서워 도망함으로써 유심례가 패하여 죽었다. 이 때 편장(偏將) 흑치상지(黑齒常之)가 홀로 적을 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경현은 좌천되었다(『구당서(舊唐書)』권81 이경현전 및『신당서(新唐書)』권106 이경현전 참조). ↩
좌무위(左武衛)는 당나라 16위(衛)의 하나. 장군(將軍)은 대장군(大將軍) 다음의 지위로서 종3품에 해당한다. ↩
제준(?~33), 후한인(後漢人)이다. 어려서부터 경서(經書)를 좋아하였다. 광무제(光武帝)를 따라 하북(河北)을 평정하여 이 공으로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되었다. 그는 전쟁중이라도 조두(俎豆) 즉 제기(祭器)를 잊지 않을 정도로 예의(禮儀)를 중시하였다고 한다(『후한서(後漢書)』권20 제준전(祭遵傳) 참조). ↩
두예(222~284), 서진(西晉) 두릉인(杜陵人)으로, 박학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는 태강(太康) 원년(280) 정월에 오(吳)의 강릉(江陵)을 공격할 적에 8백 명의 기습 군대를 보내어 밤에 강을 건너게 한 뒤, 낙향(樂鄕)을 습격하여 깃발을 많이 세우고 파산(巴山)에 불을 질러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다(『진서(晋書)』권34 두예전 참조). ↩
두예(222~284), 서진(西晉) 두릉인(杜陵人)으로, 박학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는 태강(太康) 원년(280) 정월에 오(吳)의 강릉(江陵)을 공격할 적에 8백 명의 기습 군대를 보내어 밤에 강을 건너게 한 뒤, 낙향(樂鄕)을 습격하여 깃발을 많이 세우고 파산(巴山)에 불을 질러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다(『진서(晋書)』권34 두예전 참조). ↩
당나라 16위(衛)의 하나로서 원래 좌무위(左武衛)였는데, 684년에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705년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대장군은 정3품에 해당한다. ↩
683년 12월에 고종(高宗)이 죽고 중종(中宗)이 즉위하였으나, 이듬해 2월에 측천무후가 중종을 폐위하고 그 후 측천무후가 전권을 장악하였다. 여기서 천명이 장차 바뀌려 하였다는 것은 아마 이를 지칭하는 것 같다. ↩
골졸록(?~693), 골돌록(骨咄祿), 또는 골독록(骨篤祿)이라고도 한다. 동돌궐(東突厥)의 가한(可汗)으로서 당나라를 자주 침범하였고 거란, 구성철륵(九姓鐵勒) 등을 공격하였다. 수공(垂拱) 3년(687)에 골돌록이 공격해오자 흑치상지가 이를 물리쳤다. 그가 죽은 뒤에 동생 묵철(黙啜)이 왕이 되었다(『구당서(舊唐書)』권194상 돌궐전 및『신당서(新唐書)』권215상 돌궐전 참조). ↩
서경업(?~684), 원래 이경업(李敬業)으로 이적(李勣)의 손자이다. 사성(嗣聖) 원년(684)에 유주사마(柳州司馬)로 좌천되자 양주(揚州)에서 난을 일으켜 측천무후에 대항하였으니, 세력을 크게 떨쳐 무리가 10여 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측천무후는 이효일(李孝逸)을 파견하여 이를 격파하도록 하였고, 그의 조상들의 관작을 삭탈하여 본래의 성인 서(徐)씨로 되돌렸다. 이 때 흑치상지로 하여금 강남(江南) 지방의 군사를 이끌고 이효일을 돕도록 하였다. 결국 서경업이 패하여 해릉(海陵) 부근으로 도망하였으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중종 반정을 맞아 복권되었다(『구당서(舊唐書)』권67 이경업전 및『신당서(新唐書)』권93 이경업전 참조). ↩
7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 이름. 오랑캐와 옥사(獄事)를 상징한다. 별이 마치 뛰는 것처럼 요동을 치면 오랑캐 군사가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한다(『사기(史記)』권27 천관서(天官書) 서궁(西宮) 참조). ↩
묘지의 표제어에는 검교좌우림군(檢校左羽林軍)으로 되어 있으므로, 위(衛)자는 군(軍)의 잘못이다. ↩
우표도위(右豹韜衛)에 소속되었던 부병(府兵)의 하나인 익부(翊府)의 좌랑장(左郞將)을 의미한다. 우표도위(右豹韜衛)는 당나라 16위(衛)의 하나로서 원래 우위위(右威衛)였는데, 684년에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705년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16위에 속하였던 부병은 다시 내부와 외부로 나뉘는데, 내부에는 친부(親府) 1, 훈부(勳府) 2, 익부(翊府) 2개가 있었고, 외부에는 절충부(折衝府)가 있었다. 각 부에는 중랑장이 책임을 맡고 있었고 그 아래에 좌,우의 낭장(郎將)이 있었으니, 좌,우 낭장은 정5품상에 해당하였다. ↩
우표도위(右豹韜衛)에 소속되었던 부병(府兵)의 하나인 익부(翊府)의 좌랑장(左郞將)을 의미한다. 우표도위(右豹韜衛)는 당나라 16위(衛)의 하나로서 원래 우위위(右威衛)였는데, 684년에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705년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16위에 속하였던 부병은 다시 내부와 외부로 나뉘는데, 내부에는 친부(親府) 1, 훈부(勳府) 2, 익부(翊府) 2개가 있었고, 외부에는 절충부(折衝府)가 있었다. 각 부에는 중랑장이 책임을 맡고 있었고 그 아래에 좌,우의 낭장(郎將)이 있었으니, 좌,우 낭장은 정5품상에 해당하였다. ↩
원래는 한 쌍의 구슬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북위(北魏) 때에 육위(陸暐)가 동생 공지(恭之)와 함께 유명하였는데, 낙양령(洛陽令) 가정(賈楨)이 그 형제를 보고 탄복하여 “내가 늙어서 다시 쌍벽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위서(魏書)』권40 육개전(陸凱傳) 참조). ↩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으나, 집 안에서 죽지 않고 밖에서 의롭게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귀절이 반문(反文)투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도 그러하고, 또한 이 묘지가 만들어진 699년은 아직도 측천무후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로 그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
중국에서 국가의 진(鎭)으로 존숭된 5개의 명산. 천자가 이곳에 순행하기도 하고 제사도 지냈다. 당나라 때의 5악은 동악(東嶽) 대산(岱山), 남악(南嶽) 형산(衡山), 중악(中嶽) 숭산(嵩山), 서악(西嶽) 화산(華山), 북악(北嶽) 항산(恒山)이었다(『구당서(舊唐書)』권24 예의지(禮儀志) 참조). ↩
『좌전(左傳)』환공(桓公) 2년조에 “夫德儉而有度, 登降有數, 文物以紀之, 聲明以發之, 以臨照百官.”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문물(文物)의 문(文)은 옷의 문양을 가리키고, 물(物)은 옷에 오색으로 그려 놓은 물건 그림을 가리킨다. 또 성명(聲明)의 성(聲)은 방울과 같은 소리로 임금의 덕음(德音)을 나타낸 것을 가리키고, 명(明)은 해와 달을 그려 하늘의 광명을 나타낸 것을 가리킨다. ↩
『좌전(左傳)』환공(桓公) 2년조에 “夫德儉而有度, 登降有數, 文物以紀之, 聲明以發之, 以臨照百官.”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문물(文物)의 문(文)은 옷의 문양을 가리키고, 물(物)은 옷에 오색으로 그려 놓은 물건 그림을 가리킨다. 또 성명(聲明)의 성(聲)은 방울과 같은 소리로 임금의 덕음(德音)을 나타낸 것을 가리키고, 명(明)은 해와 달을 그려 하늘의 광명을 나타낸 것을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