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액]
통제사(統制使) 충무이공(忠武李公)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본문]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통제사(統制使) 증시(贈諡) 충무공(忠武公)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知經筵) 춘추관(春秋館) 성균관(成均館) 의금부사(義禁府事) 이민서(李敏叙)
2가 비문을 짓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行)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정영(李正英)
3이 글을 쓰고,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衞都摠府都摠管) 김만중(金萬重)
4 전액(篆額)을 썼다.
만력(萬曆) 25년(선조 30, 1597) 정유(丁酉) 9월에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명량(鳴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로 인하여 적이 크게 꺾여 감히 전라도[海右]를 지나거나 충청·경기도[湖圻]로 다가오지 못하다가 그 이듬해 도적이 드디어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가니 중흥(中興)의 전공(戰功)은 세상에서 공이 제일(第一)이라 이르렀고, 명량의 전쟁이 가장 뛰어났다고 말하였다.
공이 처음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있다가 도적이 이르렀다 듣고, 강개(慷慨)하여 부하들과 맹세하고 영남(嶺南)으로 나아가 바닷가의 도적을 맞아 싸웠다. 처음에 옥포(玉浦)에서 싸우고, 두 번째는 당포(唐浦)에서 싸웠다가 다시 고성(固城)의 당항포(唐項浦)에서 싸웠는데 모두 적은 군대로 죽인 왜적의 수를 셀 수 없었다. 마침내 한산(閑山)에서 크게 이겨 위세(威勢)를 바다 한가운데에 떨치니 이에 통제사의 벼슬을 내려 삼도[慶尙·全羅·忠淸]의 수군을 모두 총괄하게 하였다.
공이 한산에 몇 해 동안 주둔하게 되자 왜적은 바닷길에 나오는 것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왜적이 크게 일으켜서 지난날의 패한 일을 거울삼아 분을 머금고 기를 쓰며 바닷길을 뚫고 바로 올라오려 하였다. 그 때 공이 바야흐로 모함을 입어 잡혀갔다가 명(命)으로 백의(白衣)를 입고 도원수(都元帥)를 따르더니 다시 옛날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때는 원균(元均)이 이미 공을 대신하여 많은 군사로 왜적과 싸우다가 마침내 져서 군사와 무기, 군량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한산도 이미 무너졌다.
돌아보니 공은 무너진 뒤를 이어 싸울 군사가 없으므로 관문을 점검하고 바다 위를 다니며 겨우 얼마 안 되는 패전한 군사를 모으고 전함(戰艦) 십여 척을 거두어 드디어 명량을 억눌렀다. 적군의 누로(樓櫓)가 바다를 덮고 와서 공은 여러 장수들에게 바다로 나가기를 재촉하고 좁은 목에다 뱃머리를 잇대어 닻을 내리고 흐르는 바다 중간을 끊어 적들을 기다렸다. 명량은 목이 좁고, 조수는 마침 들어와서 물결이 더욱 빠른데다가 적군들이 상류 쪽으로 조수를 따라 덮쳐오니 형세는 마치 산이 누르는 것 같았다. 우리 군사들은 풀이 죽으므로 기운을 더욱 돋우고 기회를 따라 쳐부수게 하니 장수들은 죽기를 맹세하였다. 전선(戰船)은 나가고 들어가고, 대포는 사방에서 터지며 바닷물은 뒤끓어서 적선은 불타고 깨져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셀 수 없게 되니 마침내 적들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처음 싸움이 한창 격렬해졌을 때 거제현령 안위(安衛)가 뒤로 물러나니 공이 뱃머리에 서서 큰소리로 안위의 목을 자르라 호령하였다. 안위도 두려워서 뒤돌아 날쌔게 싸워 이날 적군의 배를 오백 척이나 쳐부수었고,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의 목도 베었다. 그 때 남쪽 백성들이 적을 피해 공을 따르는 배가 백여 척인데 싸우기 전에 공은 그 배들을 바다에 벌려 세우고 싸우는 배처럼 꾸몄다. 전투가 벌어지자 배에서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 얼굴빛이 질리며 공은 군사가 적어서 마땅히 패할 것을 걱정하였으나 적이 물러가고 싸움이 끝난 뒤에 우리 전함들이 그냥 아무 탈 없음을 보고는 모두 경탄하며 달려와 치하하니 이로부터 우리 해군의 위세가 또 다시 크게 떨쳤다.
이일(李鎰)
5과 신립(申砬)
6이 패한 뒤로는 관군과 의병들이 적을 만나기만하면 무너지고 적들의 칼날에 맞설 길이 없었다. 천자가 많은 군사를 보내주어 크게 깨트리니 삼도(三都)도 차례로 수복하였다. 그러한 뒤에 우리 군대들도 점차 적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연안(延安)
7과 행주(幸州)
8의 승첩은 비록 한때 훌륭했다고 하나 이는 모두 천병(天兵)의 위세에 힘입어 겨우 성을 막아서 지켰을 뿐이니 오로지 제 힘으로 혼자 한 방면을 당해내어 적을 모두 무찔러 완전히 승리를 거둔 것은 오직 공만이 한 일이다. 그래서 적들이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에 진을 친 지 6,7년에 이르도록 감히 서쪽 바다를 한 걸음도 밟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남원(南原)이 이미 함락되자 적의 기세가 더욱 세어졌으나 오히려 뒤를 돌아볼 뿐 나오지 못한 것도 아, 공 때문이었다. 노량(露梁)의 싸움에 이르러서는 크게 싸우고 또한 크게 이겼으며 진중(陣中)에서 운명하여 마침내 몸을 나라에 바쳤고 공이 돌아가시자 적도 또한 물러갔다. 그 뒤에 조정에서 적을 평정한 공로를 논의하여 공을 원훈(元勳)으로 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좌의정(左議政)의 벼슬로 추증하였으며, 노량에 충민사(忠愍祠)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공의 이름은 순신(舜臣)이고 자는 여해(汝諧)이니 아산 사람이다. 공은 평소에 거처할 때는 부드럽고 온순하며 단아하고 조심스러워 마치 선비와 같았으나, 난리에 임하여 적을 토벌할 때는 계책을 내는 것이 신기하여 비록 옛날의 명장(名將)이라도 더 할 수 없었고, 또 충의를 떨쳐 분발하여 저 해와 달을 꿰고 귀신까지 감동하게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가는 곳마다 승첩(勝捷)이 있었으며, 위세는 왜적들을 두려워하게 하였고, 의리는 중국을 감동시켰으니 공과 같은 이는 이른바 옛날부터 진정한 장군으로 큰일을 맡을 만한 분이지 다만 한 때의 승리를 들어 귀중하다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의 모든 행적과 군사의 책략은 국사(國史)나 다른 저술에 자세히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명량을 지나가다 공의 싸우던 터를 보고 분개하여 한숨 쉬며 오래 거닐면서 그의 인격을 상상하여 본 일이 있었다. 지금 남쪽 사람들이 그곳에 돌을 세우고 사람을 시켜 비문을 짓기를 청하니 의리에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옛날에 들은 이야기를 대략 적고 사(詞)를 이어 붙인다. 사에 이르기를
명량(鳴梁)의 입구여 좁고도 단단하니
조수가 밀려오면 양쪽의 땅이 잠길 듯하구나.
지리를 잘 이용하여 기이한 계략을 내었으니
새까많게 몰려들던 추한 무리들 버틸 수가 없었네.
사졸들이 분발하고 북소리 울리니
잠깐 사이에 적들을 섬멸하여 말끔히 쓸어버렸다네.
오직 장군만이 용기와 의협심 모두 갖추어
바닷길 지켜내니 바다에 아무 근심 없었다네.
성난 파도 부딪치어 마치 고래들이 달리는 듯
옛 싸움터 바라보며 가슴 속에 영웅을 그리네.
영혼은 아름답고도 성하게 바다 한 편에 빛나고 있으니
별들을 호령하고 바람과 천둥을 부리는 듯 하도다.
이 바닷물 마르지 않고 돌이 닳지 않듯이
밝고도 씩씩한 기상 영원토록 빛나리.
숭정(崇禎) 후 을축(숙종 11, 1685) 3월 일에 비문을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박신주(朴新胄)가 무진년(숙종 14, 1688) 3월 일에 세우다. 감역(監役) 출신(出身) 한시달(韓時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