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 <篆題>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정헌대부(正憲大夫) 행전라좌도수군절도사(行全羅左道水軍節度使) 겸 충청전라경상삼도수군통제사(兼 忠淸全羅慶尙三道水軍統制使)로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効忠仗義迪毅恊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 영경연사(兼 領經筵事)를 추증(追贈)받은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시호(諡號) 충무(忠武) 이공(李公)의 수군대첩비명(水軍大捷碑銘) 및 서문(序文)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영호성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위성효충분의병기익사분충병의결기형난공신(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効節協榮扈聖竭忠盡誠同德賛謨佐運衛聖効忠奮義炳幾翼社奮忠秉義決幾亨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2 지음.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김현성(金玄成)
3 씀.
정헌대부(正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겸 오위도총부도총관(兼 五衛都摠府都摠管) 김상용(金尙容)
4이 전액(篆額)을 씀.
지난 임진(壬辰)년에 남쪽 오랑캐들이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뱃머리를 연하여 바다를 건너와서 경상도를 거쳐 호남지방으로 향하였다. 이때에 그들을 방비한 곳이 한산도(閑山島)이고, 그들과 경계를 지은 곳이 노량(露梁)이고, 그들을 가로 막은 곳이 명량(鳴梁)이었다. 만약 한산도를 잃어버렸다면 노량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고, 곧바로 명향으로 짓쳐들어와 기내(畿內)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능히 능력을 발휘하여 이 세 곳을 막아낸 것은 바로 원후(元侯)
5와 같은 통제사(統制使) 이(李)공이시다.
하늘같은 임금께서 심부름을 시키시려 나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시찰하게 하였다. 떠나려 할 대에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은 왕실을 보위하고 우리 남쪽 울타리를 막아 지켜내었으되 그에 걸맞는 큰 녹봉을 받지 못하고 죽으니 내가 오로지 근심하고 애석해하는 바이다. 묘우(廟宇)를 세우지 못한다면 어찌 후대에 그 충성심을 본받게 할 수 있겠는가? 너는 가서 그것을 잘 살피도록 하여라.”고 하셨다.
신이 명을 받들고 물러나와 두루 제사에 관한 법전들을 살펴보니, 죽음으로써 왕을 섬긴 자는 제사지내고, 능히 큰 환란을 막은 이도 제사지낸다고 하였으니, 바로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가! 옛 고을에 기록이 남아 있음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전란의 초기에 공의 직무는 호남(湖南)을 지키는 것으로 그 지키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나라에 해가 됨을 심히 부끄러워하고 이웃 고을에 미친 재앙을 마치 자신에게 미친 것처럼 걱정하여, 남해를 넘어 도적들의 소굴로 쳐들어갔다. 옥포(玉浦)전투·노량(露梁)전투·당포(唐浦)전투·율포(栗浦)전투·한산(閑山)전투와 안골(安骨)전투에서 적선(賊船) 220여 척을 불태우고 적군 590여 명을 목 베었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에 넣지 않았다. 적들은 죽을 지경이 되어 감히 공의 요새 근처에도 가까이 오지 못하니, 이에 한산도에 진을 쳐서 적의 요충지를 가로 막았다. 정유년(1597년)에 이르러 충성스런 신하를 바꾸니
6 한산도가 패몰(敗沒)하였다. 이때에 수군의 패장(敗將)과 달아난 군졸들 및 남쪽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탄식하며 한결같이 말하기를 “만약 이통제사가 있었더라면 어찌 적들로 하여금 호남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엿보게 하였겠는가?”하니, 조정에서 급히 공을 찾아 이전의 관직을 다시 제수하였던 것이다. 공이 단기(單騎)로 군사들을 거두고 소집하여, 나아가 명량(鳴梁)에 진을 쳤다. 갑자기 야습(夜襲)을 당하여 적은 군사로 목숨을 내 놓고 싸워 새로 모은 13척의 배로 바다를 가득 덮은 수만의 적과 싸워 30여 척을 깨뜨리고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니 적이 드디어 물러나 도망갔다. 무술년(1598년)에 명나라에서 크게 군사를 보내어 구원할 때에 명나라 수군제독(水軍提督) 진린(陣璘)이 공과 함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공을 특별히 존중하여 반드시 이야(李爺)라고 부를 뿐 그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적군이 세력을 합하여 크게 공격하여 와서 노량(露梁)에 이르렀다. 공이 스스로 날랜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아가 그 선봉과 맞닥뜨렸는데, 명나라 군대가 와서 함께 앞뒤에서 공격하게 되었다. 이날 닭이 울 무렵에 물의 신이 길을 안내하고 바람의 신이 그 위세를 부드럽게 하니, 사방이 모두 날아오르는 듯하니 진성(軫星)이 새벽에 정남쪽에 있을 때
7였다. 두 나라의 군대가 나란히 진군하니 천개의 돛이 바람에 춤을 추는데, 공이 먼저 뛰어들어 날카롭게 쳐들어가니 적이 무너졌다. 적은 마치 개미처럼 흩어져 오직 목숨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북소리 아직 쇠하지 않았는데 장군의 별은 그 광채를 잃었구나. 공이 새벽녘에 총탄에 맞아 쓰러졌으나, 오히려 여러 사람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우리 군사들이 기운이 꺾일까 두렵다.”고 하였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 배에 몸을 던지기를 세 차례나 하며 말하기를 “가히 더불어 할 만한 이를 잃었구나.”고 하였다. 명나라 군사들도 또한 고기를 물리치고 먹지 않았으며, 남쪽의 백성들은 뛰어다니면서도 길에서 울고 글을 지어 제사지내며,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을 막고 통곡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아아, 공과 같은 이는 가히 죽음으로써 임무를 다하여 커다란 환란을 막아내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땅히 그 공훈(功勳)은 으뜸이 되고, 작위(爵位)는 재상의 우두머리가 되며, 모토(茅土)
8를 나누어주고, 그 초상화를 인합(麟閤)
9에 그리며, 식읍(食邑)의 보상은 한없이 주어야 할 것이다. 또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 하니
10 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천고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만하다. 하물며 나는 왕명을 받들어 남쪽의 일을 맡았으니 어찌 좋은 계획을 마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에 통제사(統制使) 이시언(李時言)이 이 말을 듣고는 감격하여 실제로 모든 일을 주관하였는데, 모든 군중의 장교(將校)와 병사들로 공의 덕을 본 사람들이 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춤을 추며 좋아하고, 공의 죽음을 비분강개(悲憤慷慨)히 여겼다. 일천 무리의 사람들이 참새가 날뛰듯이 몰려와 만개의 도끼가 번개처럼 번뜩이니,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아 사당(祠堂)의 공사가 끝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갑인(甲寅)년에 해서절도사(海西節度使) 유형(柳珩)이 급히 글을 올려 말하기를 노량(露梁)에서 있었던 일을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공의 덕(德)은 남쪽 백성들에게 있으니 그들의 입이 비석(碑石)이 되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공의 공(功)은 사직에 있으니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太史)가 대쪽에 기록하여 전할 것이니 어찌 비를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집에 있을 때에 홀로된 조카를 마치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으니, 이것은 집안에서의 순박한 행동이라 할 것이다. 군에 있는 수년 동안 크게 소금을 굽고 고기잡이를 하며 둔전(屯田)을 넓혀서 군대에 물자가 모자라지 않게 하였으며, 전투에서 상으로 받은 것은 모두 남김없이 아랫사람에게 나누어주니 이것은 바깥에서의 행실이 갖추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온화하고 대범한 덕과, 과단성있게 판단하는 재주와, 상과 형벌을 공평하게 집행하는 용기는 보통 사람이라면 족히 백세(百世)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겠지만, 공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하찮은 일일 것이니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지난 임진(壬辰)년에 미친 도적들이 역심을 품고 이웃 나라를 침범해 왔다네.
여러 고을들이 궤멸되고 수 많은 적들은 마치 무인지경을 밟듯이 하네.
이 때 오직 이공만이 그 기세를 더욱 떨쳐 바닷가를 지키셨네.
천자가 무위(武威)를 떨쳐 많은 군대를 보내고 진린(陣璘)을 장군에 임명하셨네.
번개가 깃발을 흔들고 바다의 신은 시각을 맡아 도우니 적들이 곤궁하여 벙어리 신세가 되었네.
좁은 항구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그 벼랑 끝에서 큰 싸움을 벌리니 화살은 뱀에게 집중되네.
죽은 뱀이 꼬리를 흔들어 공의 몸에 독을 뿌리는데 신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였네.
노량(露梁)은 어슴푸레 흐릿하고 물은 오직 깊은데 여기에 비석을 세우노라.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고 공의 이름 우뚝하여 영원토록 으뜸가는 제사를 받으소서.
만력(萬曆) 43년(광해군 7, 1615)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