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
2 (題額)
3
고려국(高麗國) 의흥(義興)
4 화산(華山)
5 조계종(曹溪宗)
6 인각사(麟角寺)
7 가지산하(迦智山下)
8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
9와 아울러 서서(序序)
원(元)나라 세조(世祖)로부터 조열태부(朝列太夫)
10와 한림(翰林)
11 직학사(直學士)
12의 직(職)을 받았고,
13 본조(本朝)로부터 정헌대부(正憲大夫)
14 밀직사(密直司)
15 좌승지(左承旨)
16 국학(國學)
17 대사성(大司成)
18 문한(文翰)
19 시강(侍講)
20 학사(學士)
21 충사관(充史館)
22 수찬관(修撰官)
23 지제고(知制誥)
24 지판도사(知版圖司)
25 사세자(事世子)
26 우유선(右諭善)
27 대부(大夫)
28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29 등직(等職)을 역임한 신(臣) 민지(閔漬)
30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죽허(竹虛)는 교칙(敎勅)에 의하여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기다
대저 맑은 거울과 탁금(濁金)
31이 원래 이물(二物)이 아니요, 혼파(渾波)
32와 담수(湛水)
33가 그 근원의 물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은 같으나, 지말(枝末)에 있어 다른 것은 거울의 같고 같지 않음과, 물의 요동(搖動)하고 요동하지 않는데 있을 뿐이다. 제불(諸佛)과 중생의 불성(佛性)도 또한 거울과 물의 경우와 같아서, 다만 미(迷)하고 오(悟)한 차별일 뿐이니, 누가 감히 우치하고 슬기로움이 따로히 종자(種子)가 있다고
34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지우(至愚)
35인 중생으로써 대각(大覺)
36인 세존(世尊)과 비교하면 소양(霄壤)
37보다 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한 생각을 돌이켜 전미개오(轉迷開悟)하면 곧 본각(本覺)인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가섭(迦葉)이 미소(微笑)
38함으로부터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천(西天)에서 중국에 온 이후, 법등(法燈)과 법등이 상속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러 온 것은, 모두 이것에 의한 것이다. 스승이 그의 마음을 전함에, 제자는 그 골수(骨髓)를 얻었다.
39
이로부터 혜일(慧日)을 우연(虞淵)
40에서 회전(廻轉)하여 그 신광(神光)
41을 상역(桑域)
42에 비추게 한 분은 오직 우리 보각국존(普覺國尊)뿐이라 할 것이다. 국존(國尊)의 휘는 견명(見明)이요, 자는 회연(晦然)이었으나, 뒤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속성은 김씨(金氏)요, 경주(慶州) 장산군(章山郡)
43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언필(彦弼)
44이니, 벼슬은 하지 않고 교사(敎師)로써만 일생을 살았으므로,
45 죽은 후에 좌복야직(左僕射職)
46을 추증(追贈)받았고, 어머니는 이씨(李氏)니,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47으로 봉(封)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의 꿈에 태양이 방안에 들어와 그 빛이 복부(腹部)에 비추기를 사흘 밤을 계속하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태화(泰和) 병인년(丙寅年)
48 6월 신유일(辛酉日)에 탄생하였다. 날 적부터 준매(俊邁)하여 의표(儀表)가 단정하고, 풍준(豊準)
49한 몸매에 입은 방구(方口)
50이며, 걸음은 우행(牛行)
51이고, 살핌은 호시(虎視)
52와 같았다.
어릴 적부터 세진(世塵)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어 나이 즉 연보(年甫)
53가 9살 때 해양(海陽)
54 무량사(無量寺)
55로 가서 취학(就學)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 총명
56함이 비길 자가 없었다. 유시(有時)에는 밤이 새도록
57 마치 말뚝처럼 위좌(危坐)
58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흥정(興定) 기묘년(己卯年)
59에 진전사(陳田寺)
60의 대웅장로(大雄長老)
61를 은사(恩師)로 하여 득도(得度)한 다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로부터 선방(禪房)
62으로 다니면서 참선하여 명성이 점점 높아져서
63 당시 사람들이
64 추대하여 구산(九山)
65 중 사선(四選)
66의 수장(首長)으로 삼았다. 정해년(丁亥年)
67 겨울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승과(僧科)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
68에 합격하였다. 그 후 포산(包山)
69 보당암(寶幢庵)
70에 주석하면서 마음에 간절히 선관(禪觀)을 닦았다. 병신년(丙申年) 가을
71에 병란(兵亂)
72이 있어 스님께서 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곧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
73를 염(念)하면서 감응(感應)을 기약하였더니, 홀연히 벽간(壁間)으로부터 문수보살이 현신(現身)하여 이르시기를 무주난야(無住蘭若)에 주석(住錫)하라고
74 계시하였다. 그 다음해 여름
75 다시 이 포산(包山) 묘문암(妙門庵)
76에 거주(居住)하였으니, 암자 북쪽에 난야(蘭若)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무주(無住)이므로, 곧 전일(前日)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기별(記莂)함을 깨닫게 되었다.
77 이 암자(庵子)에 주석하면서 항상 생계가 불감(不減)하고, 불계(佛界)가 불증(不增)
78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참구(參究)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활연대오(豁然大悟)하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금일(今日)에야 비로소 삼계(三界)가 환몽(幻夢)임을 알고 보니, 진대지(盡大地)가 섬호(纖豪)만치도 장애(障礙)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비수(批授)
79받았으며, 병오년(丙午年)
80에는 이어 선사(禪師)의 법계를 받았다. 기유년(己酉年)
81에 정상국(鄭相國)인 안(晏)
82이 남해(南海)에 있는 사제(私第)
83를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84 정림사(定林寺)라 이름하고, 스님을 청하여 주지로 추대하였으며, 기미년(己未年)
85에 이르러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받았다. 중통(中統) 신유년(辛酉年)
86에 왕명을 받들어 개경(開京)으로 가서 선월사(禪月社)
87에 주석하면서 개당(開堂)
88하고 목우화상(牧牛和尙)
89 지눌(知訥)의 법통을 요사(遙嗣)
90하였다. 지원(至元) 원년(元年)
91 가을에 이르러 여러 차례 남환(南還)을 요청받고, 오어사(吾魚社)
92에 우거(寓居)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인홍사(仁弘社)
93 주지만회(萬恢)
94가 일연(一然)에게 주석(主席)을 넘겨 주었는데, 학려(學侶)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무진년(戊辰年)
95 여름 왕명에 의하여 이름이 높은 선사(禪師)와 강사(講師) 등 1백 명을 초청하여 대장경(大藏經) 조조(彫造) 낙성법회(落成法會)
96를 운해사(雲海寺)
97에 개설하고, 스님을 청하여 주맹(主盟)
98으로 모시고, 낮에는 금문(金文)
99을 독송하고, 밤에는 종취(宗趣)
100를 담론(談論)하니, 제가(諸家)들이 의심하던 바를 스님께서 모두 해박하게 부석(剖釋)하였으니,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유연하여 핵심적인 뜻이 귀에 속속 들어와서 경복(敬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스님께서 인홍사(仁弘社)에 주석한지 11년만에 이 절이 창건한지 아미 오래되어 전당(殿堂)이 퇴락할 뿐아니라, 또 추애(湫隘)
101 즉 지반이 내려앉고, 너무 비좁아서 중수(重修)하거나, 신건(新建)하여 회곽(恢廓)
102하게 확장하고 조정(朝廷)에 주청하여 인홍사를 고쳐 인흥사(仁興寺)라 이름하고, 어필(御筆)로 제액(題額)을 하사받았으며,
103 또 포산(包山)의 동쪽 기슭에 있는 용천사(涌泉寺)
104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
105로 개칭하였다. 충렬왕이 즉조(卽祚)한지 4년
106 정축(丁丑)에는 임금이 운문사(雲門寺)
107 주지(住持)로 추대하여 현풍(玄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께서는 스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날로 깊어져 다음과 같은 찬시(讚詩)를 지어 보냈다.
밀전(密傳)함에 어찌 구의(摳衣)
108를 필요(必要)하랴?
금지(金地)
109서 서로 만남 기이(奇異)할 뿐일새
연공(璉公)
110도 왕청(王請) 받아 궐내(闕內)로 갔거늘
스님은 어찌 백운(白雲)
111만 그리십니까?
신사년(辛巳年)
112 여름 왕이 동정(東征)
113으로 인하여 동도(東都)
114로 행차하여 스님께 부행(赴行)
115하기를 청하여 주중(駐中)에서 법문을 듣고, 크게 존경심을 일으켜 불일사(佛日社)에서 결사(結社)하게 된 그 결사문(結社文)
116에 제압(題押)
117하여 불일사에 보관토록 하였다.
다음해 가을
118 근시(近侍) 장작윤(將作尹)
119 김군(金頵)
120을 보내서 조서(詔書)를 가지고
121 궐하(闕下)로 맞이하여 대전(大殿)에서 선법문(禪法門)을 청해 듣고, 용안(龍顔)에 기꺼움이 가득하였다. 이어 왕명으로 유사(有司)
122에게 시켜 광명사(廣明寺)
123 내에 원관(院舘)
124을 짓게 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입원(入院)케 한 날 밤중에 어떤 사람이 방장실(方丈室) 밖에
125 서서 이르기를 “저 왔습니다.”라고 하므로, 세 번이나 문을 열고
126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127. 겨울 12월에는 충렬왕이 수레를 타고 친히 스님을 방문하여 법문을 들었다.
128 다음해 봄
129 임금께서 군신(群臣)들에게 이르기를
130 나의 선왕(先王)들은 모두 석문(釋門) 중에 덕이 높은 스님은 왕사(王師)로 모시고, 또 더 큰 스님은 국사(國師)로 추대하였거늘, 부덕(否德)만이
131 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운문화상(雲門和尙)
132은 도(道)가 높고, 덕(德)이 커서 모든 국민이 함께 숭앙(崇仰)하거늘, 어찌 과인(寡人)이 스님의 자택(慈澤)을 크게 입었음이랴! 마땅히 모든 국민들과 함께 존숭하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우승지(右承旨)
133인 염승익(廉承益)
134을 보내서 윤지(綸旨)
135를 받들어 청하여 합국존사(闔國尊師)
136의 예를 행하려 하였으나, 스님은 표장(表狀)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사신을 보내서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고, 상장군(上將軍)
137 나유(羅裕)
138 등을 보내어 책봉하여 국존(國尊)
139으로 삼고, 호를 원경충조(圓徑冲照)
140라 하였다. 4월
141 신묘일(辛卯日)에 대내(大內)
142로 맞이하고, 왕이 몸소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구의(摳衣)의 예(禮)를 행한 다음, 국사를 고쳐 국존이라 하게 된 것은, 대조(大朝)[원(元)]의 제도인 국사(國師)란 칭호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143 스님은 평소에 경연(京輦)
144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노모를 곁에서 모시기 위해 구산(舊山)
145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비는 그 사의(辭意)가 심히 간절하여 임금께서 거듭 그 뜻을 어기고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윤허하시고, 근시(近侍)
146 좌랑(佐郞)
147 황수명(黃守命)
148에 명해서 귀산(歸山)을 호행(護行)하여 영친(寧親)
149토록 하였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출가자(出家者)로써 희유(希有)한 효심(孝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 다음해에
150 노모께서 96세로 별세(別世)하였다. 그 해에 바로 조정(朝廷)에서는 인각사(麟角寺)로써 스님의 하안지지(下安之地)
151로 삼고, 근시 김용일(金龍釰)
152에게 명하여 절을 수즙(修葺)
153케 하고, 또 토지(土地) 백여경(百餘頃)
154을 헌납하여 상주(常住)
155를 갖추도록 하였다. 스님께서 이 절에서 구산문(九山門)의 도회(都會)를 개설하니, 총림의 성황(盛況)이 근고(近古)에 비길데 없었다.
기축(己丑)년
156 6월 병(病)이 일어났고, 7월 7일에 이르러 손수 대내(大內)에 올릴 편지를 쓰고,
157 또 시자(侍者)를 시켜 편지를 써서 상국(相國)인 염승익(廉承益)
158에게 보내어 장왕(長往)
159을 알리도록 하고는, 모든 선로(禪老)들과 더불어 날이 저물도록
160 문답하였다. 이날 밤 1척이나 되는
161 큰 별이 방장실(方丈室) 후원에
162 떨어지는 징후가 있었다. 다음 날 을유(乙酉)일 새벽 일찍이 일어나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 대중(大衆)에 이르기를, 내가 오늘 떠나려 하는데, 혹시 중일(重日)
163이 아닌지? 하고 물었다. 시자가 대답하되 중일은 아닙니다. 그러면 좋다 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법고(法鼓)
164를 치게 하고 스님께서는 선법당(善法堂)
165 앞에 이르러 선상(禪床)에 걸터 앉아 인보(印寶)
166를 봉함하여 장선별감(掌選別監)
167인 김성고(金成固)
168에 명하여 다시 거듭 봉필(封畢)하고, 천사(天使)
169가 오거든 노승(老僧)
170의 말후사(末後事)
171를 알리라 하였다. 어떤 스님이 국존(國尊)의 앞에 나타나 묻기를 “석존(釋尊)께서는 학림(鶴林)
172에서 열반에 드셨고, 화상(和尙)은 인령(麟嶺)
173에서 입적(入寂)하시니, 그 상거(相去)[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174 알 수 없나이다.” 하니, 스님께서 주장자를 잡고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175 “상거가 얼마냐?”고 반문하였다. 나외여 이르되 “그렇다면 금(今)과 고(古)가 마땅히 변천함이 없어 분명하게 목전(目前)에 있나이다.” 하니, 스님께서 또 주장자(柱杖子)를 잡고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분명히 목전에 있다.”라고 하였다. 나외여 이르되, “뿔을 세 개 가진 기린이 바다에 들어가고, 공여(空餘)
176에 달린 조각달이 물속에서 나오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훗날 다시 돌아오면 상인(上人)과 더불어 거듭 한 바탕 놀자.”고 하였다.
또 어떤 스님이 묻기를, “화상께서 백년후에 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다만 일상생활 이것뿐이라.”고
177 했다. 나외여 이르되 “군왕(君王)과 더불어 일개(一箇) 무봉탑(無縫塔)
178을 조성하더라도 무방(無妨)하겠습니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기를 “어느 곳으로 왔다 갔다 하는가?”
179 하였다. 나외여 이르되, “법(法)을 묻고자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시길 “이 일은 모두 아는 사실이니, 더 이상 묻지 말라.” 하였다. 또 어떤 스님이 화상에게 묻기를 “스님은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마치 세상에 없는 것과 같으며, 몸을 보되 또한 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더 오래도록 세상에 살아 계시면서, 대법륜(大法輪)을 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이 세상에 있거나, 저 제상에 있거나, 가는 곳마다 불사(佛事)를 하고 있느니라.” 하였다. 이와 같이 문답이 끝난 다음, 스님께서 모든 선덕(禪德)에게 이르시되, “날마다 공부하는 경지(境地)를 보고하라. 가려운 통양지(痛痒之)
180[유념(有念)]와 가렵지 않은 불통양지(不痛痒之)[무념(無念)]가 모호
181하여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고는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이것이 곧 통양(痛痒)이라.” 하고, 또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이것은 불통저(不痛底)라.” 하며, 세 번째 내리치고는 “이것은 통지(痛之)냐? 부통지(不痛之)냐? 시험삼아 자세히 살펴보라.”
182 하고는, 법상에서 내려와 방장실(方丈室)로 돌아가서 조그마한 선상(禪床)에 앉아서 담소함이 평소와 같았다. 잠시 후
183 손으로 금강인(金剛印)
184을 맺고 조용히 입적하시니, 오색 광명이 방장실 뒤쪽에서 일어났는데, 곧기가 당간(幢竿)
185과 같고, 그 단엄하고 욱욱(煜煜)함은 불꽃과 같으며, 화염상(火炎上)에는 백운(白雲)이 일산(日傘)과 같이 덮인 속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떠나갔다. 때는 가을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얼굴 모양은 생전과 같이 선백(鮮白)하고 지체(支體)는 윤택하며, 굴신(屈伸) 작용은 생시와 같이 유연하였다. 원근(遠近)으로부터 참관(參觀)하러 찾아온 사람이 운집하여 마치 담장처럼 주변을 가득 채웠다.
186 정해일(丁亥日)에 도유(闍維)
187하고 영골(靈骨)
188을 수습하여 선실중(禪室中)에 안치하고, 문인(門人)이 유장(遺狀)과 인보(印寶)를 가지고
189 역마를 타고 화급히 임금께 주문(奏聞)하였다.
190 부음을 접한 임금은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를 보내어 척연(倜然)
191하게 식종(飾終)의 예식
192을 거행토록 하고, 또 안렴사(按廉使)
193에 명하여 장례를 감호(監護)케 하고는,
194 이어 제조(制詔)를 내려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조(靜照)
195라 하였다. 10월 신유일(辛酉日)에 탑을 인각사의 동쪽 산등성이에 세웠는데, 세수는 84이고, 법랍은 71세였다. 스님은 사람 됨됨이가 말할 때에는 농담하는 일이 없고, 천성(天性)은 가식(假飾)하는 일이 없다.
196 항상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고, 많은 대중과 같이 있으나, 마치 홀로 있는 것과 같이 조용하였다.
197 국존의 위치에 있으나, 항상 자신을 낮추었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스승으로부터 수학(受學)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통달하였다.
이미 도를 깨닫고는 온실(穩實)
198하고 자유자재하여 무애변재(無礙辯才)를 갖추어 고인(古人)들의 기연어구(機緣語句)
199가 반근(盤根)
200과 착절(錯節)
201처럼 얽히고 설키며, 와선(渦旋)
202과 파험(波險)
203같이 복잡한 부분을 해박하게 결척(抉剔)
204하여 막힌 부분을 소통케 하므로서 마치 거울처럼 훤히 보게 하여
205 주시니, 그 회회언(恢恢焉)
206하며 유인유여(游忍有餘)
207한 솜씨를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참선하는 여가(餘暇)에는 다시 장경을 열람하여 제가(諸家)의 장소(章䟽)를 연구하고, 곁으로 유서(儒書)를 섭렵하는 한편, 백가제서(百家諸書)를 겸수(兼修)하여 곳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되, 그 연마한 묘용(妙用)이 종횡 무애하였다. 무려 50년 동안 닦은 법도(法道)가 고매하여 있는 곳마다 서로 다투어 경모(景慕)
208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스님의 당하(堂下)
209를 참방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비록 저마다 괴걸(魁傑)
210이라 자부하던 자라도, 다만 스님의 유방여윤(遺芳餘潤)
211 곧 법문을 들으면, 모두 심취하여 망연자실
212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머님을 봉양하는 지극한 효심은 목주(睦州) 진존숙(陳尊宿)
213의 가풍을 흠모한 것이다.
214 자호(自號)를 목암(睦庵)이라 하였고, 나이 모기(耄期)
215에 이르러서도 총명은 조금도 쇠퇴하지 아니하여,
216 학인을 가르침에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아니하였으니, 지덕(至德)과 진자(眞慈)를 갖춘 이가 아니면 누가 능히 이와 같으랴!
처음 용일(龍釰)이 인각사를 중수하라는 명을 받고 오는 도중
217 마산역리(馬山驛吏)의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천사(天使)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
218의 주처(住處)를 보수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 날 과연 지나갔으니, 스님의 덕행(德行)이 이미 사람들을 이롭게 한 것으로 관(觀)하건대, 김용일(金龍釰)의 꿈이 허황되지 않음을 알겠도다. 그 나머지 이적(異跡)과 기몽(奇夢)이 매우 많으나, 어괴(語怪)
219하다고 여길까 염려되어 이들은 모두 생략하는 바이다. 저서는 『語錄』2권
220·『偈頌雜著』3권
221이 있고, 그 편수(編修)한 바로는 『重編曺洞五位』2권
222·『祖派圖』2권
223·『大藏須知錄』3권
224·『諸乘法數』7권
225·『祖庭事菀』30권
226·『禪門拈頌事菀』30권
227 등 백여권이 세상에 유행(流行)하고 있다. 문인(門人) 운문사(雲門寺) 주지(住持) 대선사(大禪師) 청분(淸玢)
228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엮어 임금께 주문(奏聞)하였다.
229 행장을 전해 받은 임금께서 저로 하여금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시었으나,
230 신(臣)은 학식이 황천(荒淺)하여
231 스님의 지극한 도덕을
232 제대로 드날릴 수 없어 미정 미정 미루어 수년이 지났지만,
233 문도의 간청이 계속될 뿐아니라, 왕명 또한 끝까지 거역하기 어려워서
234 부득이하여 삼가 비문을 짓고 송명(頌銘)하여 가로되
서천(西天)에서 깃발을 높이 세우고,
235
대천세계(大千世界) 두루한 광장설(廣長舌)이여!
236
제법(諸法) 중(中)에 으뜸인 심인법(心印法)이여
237
이심전심(以心傳心) 비밀(秘密)히 단전(單傳)
238하였네! ①
축건(竺乾)
239엔 이십팔수(二十八宿) 별과 같으며
240
중하(中夏)
241엔 오조(五祖)
242까지 전(傳)하였으니
시간(時間)은 전후(前後)이나 사람은 같아
법등(法燈)의 그 광명(光明)은 상접(相接)하였다. ②
육조(六祖)의 가풍(家風)이신 조계일파(曺溪一派)
243가
동쪽나라 부상(扶桑)
244에 유입(流入)한 이후(以後)
혁혁(赫赫)한 지일(智日)
245 성천(性天)에 떠오르니
우리 스님 그 광명(光明) 융창(隆昌)시켰네! ③
불타(佛陀)께서 열반(涅槃)한 말법세상(末法世上)에
각박(刻薄)한 세상인심(世上人心) 흉악(凶惡)만 하니
덕(德) 높으신 지인(至人)
246이 있지 않으면
불쌍한 중생(衆生)들 의지(依支)할 곳 없다.
247 ④
국존(國尊)께서 세상(世上)에 출현(出現)한 것은
서원(誓願)코 모든 중생(衆生) 구(救)함이었네!
학문(學問)은 깊고 깊어 백가(百家)에 정통(精通)
천차(千差)의 방편(方便)으로 제도(濟渡)했도다. ⑤
남김없이 섭렵(涉獵)한 제자(諸子) 백가(百家)의
현묘(玄妙)한 그 진리(眞理)를 탐구하여서
반근착절(盤根錯節) 그 의심(疑心) 풀어주시니
밝은 거울 비추듯 명석(明晳)하도다. ⑥
선림(禪林)
248에선 그 조령(祖令) 호소(虎嘯)와 같고
교해(敎海)
249에는 그 변재(辯才) 용음(龍吟)과 같네!
갑자기 일어나는 구름과 같이
250
학인(學人)들은 침침(駸駸)
251히 모여 들도다. ⑦
고해(苦海) 중생(衆生) 모두를 구제(救濟)하시니
252
빛나는 그 공덕(功德)은 영원(永遠)하리라.
253
오십년간(五十年間)
254 온 국민(國民)의 추앙을 받아
국존(國尊)으로 불교(佛敎) 위상(位相) 크게 높혔네! ⑧
임금께서 정성껏 법(法)을 청(請)하니
백성(百姓)들도 모두가 뜻이 같도다.
여러 차례 청(請)하여 국존(國尊)이 되니
높고 높은
255 그 도덕(道德) 국중(國中)에 제일(第一) ⑨
개발(開發)한 귀(貴)한 보물(寶物)
256 높이 쳐들고
자항(慈航)으로 고해(苦海) 중생(衆生) 건지시도다.
방황하는 궁자(窮子) 고향을 찾게 하니
257
미(迷)한 길 어찌 다시 걸어 가리요! ⑩
고요한 한 밤중 방장실(方丈室) 뒤쪽에
떨어진 별의 크기 한 자나 되고
웅장(雄壯)한 큰 법당(法堂)이 무너지시니
오고 감에 자유(自由)한 스님의 경지(境地)!
진공(眞空)이란 그 공(空)은 공(空)이 아니고
묘유(妙有)라는 그 유(有)는 유(有)가 아닐새
자취와 명상(名相) 모두 없어지고야
영원(永遠)한 열반상(涅槃床)에 오를 수 있네!
박촉(迫促)하신 왕명(王命)은 갈수록 지엄(至嚴)
신하(臣下)된 입장에서 피(避)할 길 없어
마지 못해 귀모필(龜毛筆)
258 손에 잡고서
무형(無形)의 몰자비문(沒字碑文)
259 쓰게 되었다.
괴겁(壞劫)의 맹화(猛火)
260가 대천계(大千界)를 태워
산하대지(山河大地) 모두가 소진(燒盡)하여도
위대(偉大)한 이 비석(碑石)만 홀로 남아서
이 비문(碑文)도 영원(永遠)히 남아지어다
원정(元貞) 원년(元年)
261 을미(乙未) 8월 일에 문인(門人) 사문(沙門) 죽허(竹虛)
262가 왕명을 받들어진(晋)
263의 우군(右軍)
264이었던 왕희지(王羲之)
265의 글씨를 집자(集字)하고, 문인 내원당(內願堂)
266 겸 주지 통오(通奧) 진정태선사(眞靜太禪師)
267 청분(淸玢)
268은 비석을 세우다.
【陰記】
보경사(寶鏡寺)
269 주지(住持) 통오진정대선사(通奧眞靜大禪師) 산립(山立)
270이 짓고,
인각사(麟角寺) 보각국사(普覺國師) 정조탑비(靜照塔碑) 음기(陰記)
271
※가야산납(伽倻山衲) 이지관(李智冠)의 교감(校勘) 수증(修證) 보완본(補完本)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번역한다.
신천자(新天子)
272가 즉위한 원년(元年) 을미(乙未) 초여름 4월 초에, 인각장로(麟角長老)
273가 나를 찾아와 부탁하기를, 선사(先師)
274께서 열반하신지 홀연히 이미 6·7년이 지났습니다.
275 그러나 국조(國朝)의 은례(恩禮)는 조금도 변함이 없어서
276 중신(重臣)
277에게 명하여 일연(一然) 선사의 비문을 지어 완염(琬琰)
278에 새겨 본원(本院)
279에 세우고, 또한 칙조(勅詔)하여 문도들이 체대(替代)
280로 사자상승(師資相承)하여 향사(香祀)를 받들게 하는 것으로 식종(飾終)의 예(禮)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스님의 공도(公徒)를 비(碑)의 음면(陰面)에 열거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낙송(絡誦)과 부묵(副墨)
281이 원래로 그 유서(由緖)가 있음을 알게 하려 하오니, 이 일은 오직 스님만이
282 오배(吾輩)를
283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나는 이를 좋다 하고
284 받아 들였다.
285 국존께서 살아 계실 때, 산립(山立)은 인연(因緣)이 차탈(差奪)
286하여 스님의 문도열(門徒列)에 참예하지 못한 것을 항상 회한(悔恨)하였는데, 다행히 불후(不朽)의 부촉
287을 받았으니, 또한 당래(當來)에 반부(攀附)
288할 인연이 맺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라,
289 어찌 감히 하명(下命)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삼가 계수(稽首)
290하여 배수(拜手)
291하고 이르되, 화상(和尙)의 문풍(門風)이 광대(廣大)하여 모든 것을 갖추어 어떠한 말과 생각으로도 사의(思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언이폐지(一言以廢之)
292하고 나라가 존경하고, 모든 사람이 스스로 추앙한다라고 함이 가할 것이다. 그러나 존경하고 추앙하는 그 인유(因由)를 살펴보면, 마치 바구미가 해혜(醢醯)
293의 냄새를 인(因)하지 않고 모여드는 자가 없는 것과 같다.
294 그 중요한 원인은 스님께서 상구보제(上求菩提)인 실천 수행의 도덕이 고매하여
295 생사거래(生死去來)가 마치 몽환(夢幻)과 같음을 증득(證得)한 후, 하화(下化) 중생(衆生)인 지(智)·비(悲)·행(行)·원(願)
296으로 감득(感得)한 결과인 것이다. 국존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그가 임종(臨終)할 때, 대중을 모아 놓고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297 기(氣)도 다 끊어지고 많은 시간이 흘러간 후,
298 선원(禪源) 정(頂)스님
299이 어찌할 바를 몰라 실성
300하여 울부짖으면서 황망 중에 입탑(立塔)할 장소
301를 물어볼 겨를도 없이
302 이미 입적하시었으니, 후회막급이라면서 대중과 함께 탄식하였다. 이때 스님께서 적정(寂定) 삼매(三昧)
303로부터 조용히 깨어나, 대중을 돌아보고 이르되, 여기서 동남쪽으로 약 4·5리(2㎞) 쯤 지나서 임록(林麓)이 있는데, 지형의 기복이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등이 제대로 짜이고 안은(安隱)한 곳이 있는데,
304 마치 고총(古塚)과 같다. 이곳은 길상지(吉祥地)인 명당(明堂)이니,
305 탑(塔)을 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라고 하고는,
306 다시 처음과 같이 눈을 감았다.
307 제자들이 곁에 가서 흔들어 보니, 이미 서거(逝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까 생각되어
308 비문에는 모두 생략하였다.
옛날 광복(廣福) 선(禪)이라는 스님
309이 있었는데, 입적하여 다비(茶毗)를 하기 위해 영구(靈柩)를 화장 섶나무인 시붕상(柴棚上)
310에 놓고 거화(擧火)를 하려는 순간, 곽을 뚫고 다시 일어나 유나(維那)에게 당부하되, 남행자(藍行者)로 하여금 남겨 둔 쌀과 돈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와 같은 신비와 이적(異跡)을 어찌 감히 의심할 수 있겠는가? 다비를 마치고 장차 입탑(入塔)하려는 때, 운흥사(雲興寺) 인공(印公)
311이 암자에 있을 적에 마침 꿈에 일연 스님이 찾아옴을 보고,
312 맞아들여 묻기를. “다비를 하려는 순간 다시 일어났으니, 이는 무슨 도리입니까?” 스님이 대답하되, “죽지 아니한 이치이니라.” 또 묻되
313 “그렇다면
314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하는 것입니까?” 대답하되, “그러하느니라.” 또 묻되, “그러시다면
315 명일(明日)에 탑을 세우는데, 스님께서 다시 들어가시렵니까?” “다시 들어갈 것이니라.” “그러시다면 탑이 문득 스님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너무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또 묻기를 “▨▨▨▨▨ 그렇다면 꿈과 생시가 같은 동열(同列)
316인 것입니까?” 대답하되 “같은 것이라.” 하였다. 운흥사 인공이 꿈을 깨어나, 이상하게 여겨 말하되, “다비한 다음 다시 탑을 세움에 곧 탑 속으로 들어간 것이 마치 청풍(淸風)이 소요(逍遙)하게 거래(去來)하고, 백운(白雲)이 자재(自在)히 출몰(出沒)하는 것과 같으니, 그 어찌 지인(至人)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하고, 곧 찬사를 지어 스님을 추경(追敬)하였다.
또 산립이 일연이 학인(學人)을 제접(提接)한 기연(機緣)
317이 자못 기이한 점을 보고, 범부(凡夫)의 위치에서는 도저히 이러한 이적을 나타낼 수 없으니, 그는 55위(位) 중 어느 위치에 이르렀는가 하고, 항상 의심이 풀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한 고찰(古刹)에 이르니, 당시 그 절에 보연화좌(寶蓮花座)를 베풀고 스님께서 그 위에 앉아 있다가 잠시 후 하좌(下座)하여 늦은 걸음으로 주변을 지제(遲際)
318하므로, 산립이 인흥사(仁興寺)의 선린(禪麟) 스님
319과 함께 뒤를 따랐다. 이때 인흥(仁興)이 나에게 이르기를, 스님은 우리 스님의 행적을 보십시오. 이미 성과(聖果)
320를 증득한 까닭에, 맨발로 칼을 밟고 지나가도 발바닥이 전혀 상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321 산립이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돈독하여지고, 전에 가졌던 모든 의심이 마치 얼음 녹듯 풀렸다. 이상과 같은 수단(數段)의 최후 입적할 때의 인연(因緣)
322에 의거하건대, 비록 부자(夫子)의 원장(垣牆)이 높아 몇 길이나 되더라도
323 그 집안의 상황을 거의 엿볼 수 있다는 말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한 번 왔다 가는 것을, 마치 몽각(夢覺)와 같다고 하였다.
또한 신장(神將)이 부병(府兵)
324이라 자칭하고 스님을 맞이하여 호위하고, 산령(山靈)이 신도(信徒)에게 현몽하여 스님에게 식량을 보내도록 한 것과, 화장(火葬)할 때 시붕상(柴棚上)에 앉아 있으니, 화염이 반대쪽으로 불었고, 임종(臨終)할 때 오색 광명의 줄기가 금당(金幢)
325과 같이 솟았다가 스러진 등등 이러한 영종(靈蹤)과 이서(異瑞)는 모두 성인(聖人)의 분상(分上)에는 쓸데없는 말변사(末邊事)에 속하는 것이므로,
326 이들은 모두 인기(引記)하지 아니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위의 수단인연(數段因緣)은 모두 세상 사람을 현혹시키는 일이라고 부정하여 혹자는 불자(拂子)를 들고,
327 주장자로 때리며, 고성(高聲)으로 갈(喝)을 하면서 부정하기도 하였다. 평상 세계의 꿈이요 50일에 한 번 깨어나는
328 각시(覺時)로써 허(虛)를 삼고, 몽시(夢時)를 실(實)이라 하였은 즉 스님의 입장에서는 이 성시(醒時)와 몽시가 뒤바뀐 허와 실도 또한 가정(可定)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 국존께서는 삼세(三世)가 환몽(幻夢)과 같은 경지를 증득(證得)하여 출생과 입사(入死)에 항상 몽환불사(夢幻佛事)를 시행(施行)하였으니,
329 이 또한 스님께서 자비로 ▨▨▨▨▨ 누구나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이에 대하여 무슨 의심(疑心)을 품을 것이 있을 것이며 어찌 감히 그에 대하여 왈가 왈부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스님의 분상(分上)에 있어, 국존의 도덕의 고매함을 애모(愛慕)하여 흑백(黑白)
330인 많은 승속(僧俗)들이 귀부(歸附)
331하는 것이니, 하지 못하도록 아무리 구책(驅策)
332하더라도 능히 막을 수가 없다. 항상 스님을 따르고 친부(親附)하여 피부(皮膚)를 얻거나, 골수(骨髓)를 얻었으며,
333 종지(宗旨)의 천양(闡揚)을 도운 모든 스님
334과 외호(外護)의 일을 맡은 재가(在家) 제자(弟子),
335 그리고 스님의 법유(法乳)
336를 받은 경사(卿士)
337와 대부(大夫) 등을 모두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대선사(大禪師)
영각사(靈覺寺)의 굉훈(宏訓)
보경사(寶鏡寺)의 신가(神可)
가지사(迦智寺)
338의 혜림(慧林)
마곡사(麻谷社)의 수예(守倪)
법흥사(法興寺)
339의 한운(旱雲)
인흥사(仁興社)
340의 선린(禪麟)
가지사(迦智寺)의 월장(月藏)
운흥사(雲興社)
341의 동우(洞愚)
주륵사(朱勒寺)
342의 영이(永怡)
용암사(龍巖寺)
343의 연여(淵如)
화장사(花藏社)
344의 육장(六藏)
사자원(師子院)
345의 지우(志于)
심산사(深山寺)
346의 충연(冲淵)
무위사(無爲寺)
347의 보정(寶精)
보연사(普淵寺)
348의 법열(法悅)
해룡사(海龍寺)
349의 경분(勁芬)
천룡사(天龍社)
350의 곡지(谷之)
인각사(麟角寺)의 청분(淸玢) (입비(立碑)를 주선 감독한 스님)
운주사(雲住寺)
351의 혜여(惠如)
수좌(首座)
홍화사(弘化寺)
352의 선인(宣印)
법연사(法緣寺)
353의 인서(印西)
월성사(月星寺)
354의 입기(立其)
향산사(香山寺)
355의 천이(天怡)
용화사(龍華寺)
356의 여환(呂桓)
오어사(吾魚寺)
357의 계잠(戒岑)
도봉사(道峯寺)
358의 수침(守琛)
중령사(中嶺寺)
359의 충담(冲憺)
인각사(麟角寺)의 정생(定生)
지론사(智論寺)
360의 현안(玄安)
운주사(雲住寺)의 청원(淸遠)
불일사(佛日寺)
361의 영숙(英淑)
선사(禪師)
견암사(見巖社)
362의 각령(覺靈)
도원사(桃源社)
363의 장리(慈一)
조암사(祖嵓社)
364의 지순(之純)
등억사(登億寺)
365의 대인(大因)
묘덕사(妙德寺)
366의 선연(禪演)
재악사(載岳社)
367의 선염(禪燄)
경암사(瓊嵓寺)
368의 수연(守淵)
형암사(兄巖寺)
369의 자인(慈忍)
청원사(淸源寺)
370의 인응(仁應)
형원사(瑩原寺)의 신구(信丘)
보문사(普門社)
371의 회희(灰喜)
거조사(居祖社)
372의 천과(天果)
삼중(三重)
373심문(心聞)
지자(智慈)
유장(由壯)
신영(神英)
서거(西去)
경이(景伊)
인정(仁正)
찬영(贊英)
양지(良之)
몽유(夢由)
월주(月珠)
대진(大眞)
대일(大逸)
현지(玄智)
덕수(德守)
신령(信令)
도한(道閑)
홍조(弘調)
조운(祖云)
홍민(弘敏)
가관(可觀)
가열(可悅)
가안(可安)
굉우(宏右)
법상(法常)
지▨(知▨)
조순(祖詢)
내환(內幻)
신한(神閑)
원희(元希)
주환(周幻)
몽립(夢立)
선식(旋息)
형기(瑩其)
심찬(心贊)
행이(行伊)
가월(可月)
선련(禪璉)
대미(大迷)
문일(聞一)
송지(松智)
입선(入選)
374
천굉(天宏)
일승(日昇)
영인(英印)
마가(摩訶)
일회(日迴)
죽지(竹之)
지온(志溫)
가홍(可弘)
성회(性迴)
현지(玄智)
익현(益玄)
신일(神日)
인조(印照)
온홍(溫弘)
영월(令月)
지영(知永)
승원(昇遠)
탄홍(坦弘)
비지(庇之)
▨통(▨通)
산림(山林)
375
원응(元應)
심분(心賁)
선랑(禪朗)
천박(天朴)
시수(時守)
지회(知恢)
인조(仁照)
열여(悅如)
계숭(戒崇)
설기(雪其)
지인(志因)
자신(孜信)
선홍(宣弘)
조한(祖閑)
굉지(宏智)
홍령(弘令)
유기(由己)
가항(可恒)
참사(參事)
376
성현(性賢)
담지(湛之)
자송(自松)
태인(太印)
신찬(神贊)
수눌(守訥)
영규(令規)
인환(仁渙)
신장(信庄)
충연(沖淵)
죽허(竹虛) (왕희지(王羲之) 글씨를 집자(集字)한 스님)
백여(白如)
주열(朱悅)
영세(令世)
유엄(有渰)
지량(之亮)
유세(有世)
외우(外又)
기성(己成)
신여(信如)
인원(仁元)
지안(志安)
법기(法奇)
혜견(惠見)
현조(玄照)
학산(學山)
원선(遠宣)
유세(有世)
진안(眞眼)
한세(閑世)
효대(孝大)
회정(迴正)
선본(善本)
명계(明戒)
효총(曉聰)
가천(可千)
대휴(大休)
조송(祖松)
비환(庇桓)
묘덕(妙德)
득심(得心)
계중(階重)
가삼(可杉)
인각(印覺)
지현(智玄)
영인(令印)
지환(智桓)
도연(道淵)
조선(祖宣)
가매(可枚)
피기(彼己)
형현(瑩玄)
태의(兌宜)
중태(重太)
종자(宗資)
중계(中契)
조운(祖云)
보관(寶觀)
학생(覺生)
영숙(英淑)
법▨(法▨)
지가(志可)
온홍(溫弘)
지승(知丞)
조균(祖均)
각현(覺玄)
문일(聞一)
조남(祖南)
심체(心體)
지호(之毫)
현조(玄照)
신일(神日)
선본(善本)
득심(得心)
태사(太師)
자려(自侶)
삼품(三品)
377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378
부지밀직사(副知密直事) 감찰대부(監察大夫) 민훤(閔萱)
379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김군(金頵)
380
부지밀직사(副知密直事) 상장군(上將軍) 이덕손(李德孫)
381
판비서보문서(判秘書寶文署)
382 학사(學士) 공문백(貢文伯)
383
수문전(修文殿)
384 대학사(大學士)
385 임동(任銅)
386
지첨의사(知僉議事)
387 대학사(大學士) 상장군(上將軍) 김▨▨(金▨▨)
지첨의사(知僉議事) 보문서(寶文署) 대학사(大學士) ▨▨▨
지첨의사(知僉議事) 보문서(寶文署) 대학사(大學士) ▨▨▨
부지밀직사(副知密直事) 좌상시(左常侍) 상장군(上將軍) ▨▨▨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박▨▨(朴▨▨)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이영주(李英柱)
388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보문서(寶文署) 대학사(大學士) 김지(金砥)
389
대학사(大學士) 국자제주(國子祭酒)
390 지제고(知制誥) 최령(崔寧)
391
참지정사(參知政事)
392 상장군(上將軍) 박송비(朴松庇)
393
대학사(大學士) 상장군(上將軍) 김주정(金周鼎)
394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정가신(鄭可臣)
395
좌복사(左僕射) 참지광정원사(參知光政院事) 상장군(上將軍) 홍자번(洪子藩)
396
한림원사(翰林院事) 이장용(李藏用)
397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장군(上將軍) 송송례(宋松禮)
398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399 전현사(典現事) 원부(元傅)
400
참문학사(參文學士)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401 김구(金坵)
402
참문학사(參文學士) 찬성사(贊成事)
403 박항(朴恒)
404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도순문사(都巡問使) 염승익(廉承益)
405
추밀원(樞密院) 부성사(副成事) 김련(金璉)
406
상장군(上將軍) 오예(吳睿)
407
상장군(上將軍) 정수기(鄭守棋)
408
비서(秘書)
409 윤사재(尹司宰)
410
위위윤(衛尉尹)
411 최자혁(崔資奕)
412
사품(四品)
413
기간(己干)
414 김오(金吾)
415
전리사(典理司)
416 근시중(近侍中) ▨▨▨
원정(元貞) 원년(元年)
417 을미(乙未) 8월 일에 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