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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신도비(趙珩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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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2리(忠淸北道 陰城郡 笙極面 笙2里)에 자리한 조형묘소에 있는 조형신도비(趙珩神道碑)이다. 1645년(인조 23년)에 세워진 이 비의 비문(碑文)은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것으로, 그의 문집인 『명곡집(明谷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조형(1606~1679년)은 1630년(인조 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40여년 동안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 예조참판(禮曹參判), 대사헌(大司憲)과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655년(효종 6년)에는 대사간(大司諫)으로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다녀오기도 했었는데, 당시의 일을 『부상일기(扶桑日記)』로 남겨 17세기 한·일관계사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비문에는 그의 가계(家系)와 관력(官歷), 그리고 가족사항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공의 휘(諱)는 형(珩)이요, 자(字)는 군헌(君獻)이요, 자호(自號)는 취병(翠屛)이니, 풍양(豊壤) 사람이다. 시조(始祖) 휘 맹좌(孟佐)는 고려 태조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그 뒤 휘 지린(之藺)이 있었는데 천화사(天和寺)의 전직(殿直)을 지냈다. 10세 뒤에 이르러 정국공신(靖國功臣) 풍저창 수(豊儲倉守) 증(贈) 공조 판서(工曹判書) 풍양군(豊陽君) 휘 사훈(事勛)이 나왔는데 공의 증조부가 된다. 조부인 휘 기(磯)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고(考) 휘 희보(希輔)는 승정원 승지를 지냈는데 선조(宣祖) 때 여러 차례 대각(臺閣)에 들어갔다. 광해군 때에는 두문불출하고서 유유자적하게 생을 마쳤는데, 사후에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니 공이 현귀(顯貴)해져서 은혜를 미루어 입은 것이다. 어머니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대사헌 진(璡)의 증손(曾孫)인 감찰(監察) 황(?)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병오년(선조 39, 1606년) 10월, 광주(光州)의 임소(任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기품과 절도가 단정하고 분명하여 어려서도 장난하고 까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덟 살에 비로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일과로 주어진 과제를 충실히 복습하여 열다섯 살에는 여러 경전을 줄줄 외게 되었고 스무 살이 못 되어 경전 여러 군데의 의문점을 해결하고 높은 경지에 올랐다.
병인년(인조 4, 1626년)에 문과 별시에 뽑혔으나 마침 과거 시험을 관장했던 고관(考官)의 자제가 선발자 가운데 들었다 하여 대신(臺臣)들이 이를 탄핵하고 파방(罷榜 :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하던 일)하였다.
경오년(인조 8, 1630년)에 다시 명경과(明經科)에 1등으로 뽑혀서 괴원(槐阮 : 승문원<承文院>)에서 근무하다가 천거를 받아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당시는 잠치(潛治) 박공(朴公) 지계(知誡)가 바야흐로 묘당(廟堂)에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려는 논의를 주도하던 때였다. 이에 학생 허목(許穆)이 박공(朴公)을 유생 명단에서 축출하는 중벌을 가하였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공(李公) 귀(貴)가 이 사실을 인조에게 알리자 인조가 진노하여 사관(四館)에 명을 내려 허목(許穆)을 내쫓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 명을 속히 받들어 봉행하지 않았다. 상이 노하여 그를 관리에게 내려 부여(夫餘)로 유배 보냈다. 1년이 지나서 석방되어 돌아왔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에 처음으로 문신 전강(文臣殿講)에 나가 역경(易經)의 뜻을 매우 분명하고 조리 있게 변설하여 일등을 차지하였다. 김 상국(金相國) 류(?)가 크게 칭찬하여 상을 내렸고 상은 쌀 10가마를 하사하여 그를 포상하였으며, 전례에 따라 전적(典籍)에 올랐다. 그해 겨울에 청 나라 군사가 대거 쳐들어와 임금의 수레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공은 걸어서 수레 뒤를 따랐는데, 성안에서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었다.
정축년(인조 15, 1637년)에 환도(還都)하여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부모 봉양을 위해 개차(改差)해 줄 것을 청하여 영덕현(盈德縣)을 맡게 되었는데 청렴하고 깨끗하게 다스려 기강이 바로 서게 되었다. 그런데 병조 좌랑 지제교(知製敎)가 현령(縣領)으로 있으면서 이미 옥당(玉堂 : 홍문관)에 피선(被選)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한원(翰苑 : 한림원<翰林院>과 예문관<藝文館>)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어 오랫동안 근신해야 했다.
계미년(인조 21, 1643년)에 비로소 부교리(副校理)에 제수되었다가 곧 수찬(修撰)으로 체차되었다. 재이(災異)가 발생하자 차자(箚子)를 올려 덕을 기르고 하늘에 응하는 방법에 대해 수천 마디의 말로 깊이 아뢰었다. 인하여 논하기를 궁인(宮人) 가운데 무술(巫術)로 저주한 자가 있으니 마땅히 왕옥(王獄)에 가두어 그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인조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의(御醫)가 말하기를 사특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서 불침을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논하고 마음을 다스려 질병을 물리칠 것을 청하였던 것이다.
갑신년(인조 22, 1644년)에 수찬(修撰), 교리(校理), 헌납(獻納), 사서(司書)에 제수되었다. 그가 옥당에 있을 때 논한 바는 모두 관리 임용을 신중히 하고 민생을 보살피는 요체에 대한 것이었다. 얼마 후 이조 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공(金公) 익희(益熙)가 대신(臺臣)으로서, 전랑(銓郞 : 이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의 천망(薦望 : 벼슬아치를 윗자리에 천거하는 것)은 조령(朝令)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상이 엄하게 교시를 내려 전후로 전랑(銓郞 : 이조 정랑과 이조 낭청)을 역임한 자들을 유배 보낼 것을 명하였다. 이에 공도 역시 유배 길에 올랐다.
대신(臺臣)은 공이 처음에 아무런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고 상소하여 말하기를, “조형(趙珩)은 순후(淳厚)하고 근실(謹悉)하며 성품이 침착하고 고요합니다. 또한 신인(新人)으로 전랑(銓郞)의 직임을 맡았으니 실로 죄가 없습니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연명으로 글을 올려 용서해 줄 것을 청하여 결국 유배에서 풀려났다.
병술년(인조 24, 1646년)에 다시 두 번째로 수찬(修撰)이 되고 다시 이조에 들어가 이조 정랑이 되었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직임에 나아갔다. 사헌부 집의(執義)에 제수되고, 응교(應敎), 필선(弼善),을 거쳐 군기시(軍器寺)로 자리를 옮겼다가 천거를 받아 의정부 사인(舍人)에 제수되었다. 또 집의(執義)와 사간(司諫)에 제수되었다.
무자년(인조 26, 1648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복제 기간이 끝나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제수되었다가 보덕(輔德), 집의(執義)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강계 부사(江界府使) 오빈(吳?)이 인삼 장수를 옥에 가두어 다스렸는데 그 일이 대군(大君)의 집안과 관련이 있었다. 이에 효종(孝宗)이 몹시 화를 내고 빈(?)을 체포하여 무거운 벌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정신(廷臣)들이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사건을 접하여 법을 적용하는 것은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공정한 일입니다. 어찌 애매한 말로 인해 아랫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단정하여 임어(臨御)하시는 데 있어서 정도(正道)를 잃으려 하십니까.” 하였다. 상이 그 말을 가상하게 받아들여 오빈에 대한 처벌을 그만두었다.
신묘년(효종 2, 1651년)에 응교(應敎) 사인(舍人)에 제수되어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 돌아와서 보덕(輔德)이 되었다. 춘궁(春宮)이 관례(冠禮)를 행할 때 전례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다. 또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있을 때 호서(湖西) 관찰사로 나갔는데 그 다스림이 풍습을 잘 교화(敎化)하고 폐막(弊?)을 줄이고 없애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한번은 차역(差役) 하나가 새로 제정된 규정을 어겼는데, 벌을 가하지 않고 위문한 일로 인해 원주(原州)로 귀양을 갔다가 얼마 안 있어 용서를 받고 돌아왔다.
갑오년(효종 5, 1654년) 겨울에 다시 은대(銀臺 : 승정원)에 들어갔다. 을미년(효종 6, 1655년)에 일본에 사신을 보내야 했는데 적임자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조정에서는 공을 추천하였다. 이해 4월 대사간(垈司諫)으로서 통신상사(通信上使)가 되어 바닷길 수천 리를 건너게 되었다. 태풍과 거친 파도를 자주 만나 배 안에 탔던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였는데 공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아침저녁으로 고문(古文)을 외고 읊조렸다. 드디어 수속(殊俗)을 만났는데, 한결같이 성실과 믿음으로 대하여 그 역시 예(禮)와 공경(恭敬)을 다하였다.
이듬해 봄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대간(大諫)의 천거에 의해 영남(嶺南) 절도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조정의 의론은 -- 원문 몇 자 해독 불능-- 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使)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경기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지방을 다스림이 호서(湖西) 관찰사로 재임했을 때와 같았다. 임기가 만료되어 도승지로 체차되었다가 또 다시 병조 참판 대간 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었다.
기해년(효종 10, 1659년)에 예조 참판이 되어 능각(陵閣) 보수를 감독하였으며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5월에 효종이 승하하였는데 공은 지신사(知申事)로서 내의원(內醫院) 제조(提調)를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삭출(削黜)되었다. 겨울에 현종(顯宗)이 책임 여부를 판단하여 가려내 다시 은대(銀臺)에 들어갔다.
경자년(현종 1, 1660년) 봄에 다시 경기 절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전년 겨울에 은대(銀臺)에 있을 때 시약(侍藥)한 노고 때문이었다.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8월에 형조 판서로 임용되고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축하 사절로 연경(燕京)에 갔다. 이듬해 봄에 돌아와 공조 판서 겸 지춘추(知春秋)에 제수되었으며 또 형조 판서가 되었다. 가을에 대사헌(大司憲)으로서 반송사(伴送使 : 중국의 사신을 호송하던 임시 벼슬)가 되었다. 당시 재신(宰臣)이던 조경(趙絅)이 상소하여 윤선도(尹善道)를 구원하였다. 공이 글을 올려, 그가 좋아하는 이에게 아부함이 성급함을 지척(指斥)하여 논하였다.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이 전에 형조 판서로 있을 때 형조의 관리인 이갑남(李甲男)의 일을 다스리면서 나이가 만 70이 된 자에게는 형벌을 가하지 않는 것으로 아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사헌이 됨에 미쳐서 동료들이 갑남에게 다른 죄가 있는 것을 찾아내고 인하여 전날에 올린 장계(狀啓)에 대해 말하였다. 공은 자료를 조사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고서 드디어 갑남에게 첨죄(添罪)하여 형벌을 시행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원상(元相) 두표(斗杓)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공이 갑남(甲男)을 다스림에 전후에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당시 공이 그와 함께 입시하고 있었는데,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을 못하여 창졸간에 잘못 대답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공이 물러나 나와 상소를 올리고 스스로 하리(下吏)를 조사하였다.
이에 상이 크게 노하여 공이 상을 기망(欺罔)하였다고 여겨 심지어 고문(拷問)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정원(政院)과 삼사(三司)가 전후로 번갈아가며 부당함을 쟁론하였으나 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 대신이 차자(箚子)를 올려 공이 실정을 숨김이 없었음을 변론하였고 원상(元相) 역시 상의 처사가 과중함을 말하였다. 상은 마음이 조금 풀려 평산(平山)에 유배 보냈다.
계묘년(현종 4, 1663년) 가을에 가뭄이 들었다. 형조에서 서옥(庶獄)을 심리하여 비로소 방환(放還)되었다. 동지사(冬至使)에 차임(差任)되어 연경(燕京)에 갔다가 이듬해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작은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
을사년(현종 6, 1665년)에 여러 차례 좌참찬, 우참찬, 공조 판서 겸 의금부 총관(摠管)에 제수되었다. 계축년(현종 14, 1673년) 여름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고 판의금(判義禁)에 특제(特除)되었다. 대사간 이숙(李?)이 공을 유약하고 착하다고 지목하고서는 판의금에서 체차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비답(批答)을 내려 공에게 직임에 나올 것을 명하였으나 공은 힘을 다해 사양하여 마침내 체차되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제수되었다. 신명주(申命主), 이정기(李鼎基)가 영릉(寧陵)의 복토관(覆土官)이었는데, 석역(石役)에 연루되고 근실하지 못한 이유로 하옥되었다. 상이 그들을 죽게 놔두고자 하였으나 공은 재이(災異)가 발생되는 등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간하여 마침내 사죄(死罪)에서 감면되도록 하였다. 참찬에서 예조 판서로 옮겼다.
갑인년(현종 15, 1674년) 2월에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승하하였다. 앞서 기해년(1659년)의 효종상에서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이 장렬대비(莊烈大妃)의 복을 방례(邦禮)를 따라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였다. 그 후에 논자들은 기년복으로 정한 것이 고례(古禮)와 어떻게 다른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은 예관(禮官)의 수장(首長)으로서, 장렬대비가 현종의 상에 입어야 할 복(服)을 감정(勘定)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기년복으로 정했다가 다시 대공복(大功服 : 9개월간 입는 상복)으로 고쳤다. 상이 일에 급하게 닥쳐서 결정을 번복하였다 하여 조옥(詔獄 : 왕족이나 양반 계급의 범죄자를 가두던 감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에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였다.
7월에 영남(嶺南) 사람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복제(服制)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말이 심히 음습하고 편파적이었다. 상이 대신(大臣)과 육경(六卿), 삼사(三司)가 빈청(賓廳)에 모여 기년복과 대공복 중 어떤 것이 옳은지를 수의(收議)하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여러 차례 엄한 유지를 내려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고 예관(禮官)을 다시 하옥하게 하였다.
얼마 후 현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 숙종<肅宗>)이 왕위에 올랐는데, 공을 양주(楊州)의 속역(屬驛)으로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듬해 봄에야 풀려나 돌아오자 다시 서용(敍用)할 것을 명하였다. 이해에 공의 나이가 70세였다. 전례(前例)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비록 사면을 받긴 하였으나 공은 그대로 풍양(豊壤)의 별채에 머물면서, 시골 노인들과 어울려 좋은 경치를 구경하면서 소요하였는데, 일찍이 시사(時事)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었다.
정사년(숙종 3, 1677년)에 고묘(古廟 : 왕실이나 집안에 변고가 있을 때 그 일을 종묘나 사당에 고하던 일)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공은 빈청에서 제공(諸公)들과 모여 의논한 후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죄(待罪)하기를 오랫동안 하였다. 무오년(숙종 4, 1678년)에 좌참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여론이 크게 놀라 시끄럽게 다투었으나 마침내 잠잠해졌다. 조정에서 병자년에 공이 호종(扈從)한 공로를 뒤늦게 기려서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를 올렸다.
기미년(숙종 5, 1679년) 6월 18일에 서울 집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이 74세였다. 조정에서는 조의를 표하여 조회를 하지 않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상제(喪祭)를 의례(儀禮)대로 지내 주었다. 후일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충정(忠貞)이라 하였다. 시법(諡法)에서는 곧고 단정하고 공정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청렴하고 절개를 지키는 것을 정(貞)이라 한다.
애초에 양주(楊州) 풍양(豊壤)에 무덤을 썼으나, 신유년(숙종 7, 1681년)에 충주(忠州) 성동(省洞)의 산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사천 목씨(泗川睦氏)인데, 참판 장흠(長欽)의 따님이다. 모두 4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상변(相?)은 현감이고, 차남 상정(相鼎)은 진사인데 일찍 죽었다. 삼남 상개(相?)는 부사이고, 막내아들 상우(相愚)는 예조 판서이다. 사위는 현감 이두징(李斗徵), 목사 심추(沈樞), 장령 이선원(李善源)이다.
손자 이수(?壽)는 생원이고, 기수(棋壽)는 직장(直長)이며, 유수(裕壽)는 주부(注簿)이다. 손녀는 현령(縣令) 홍처우(洪處宇), 황현(黃鉉), 현감 오수일(吳遂一)의 처이다.
장남인 현감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인수(仁壽)는 도사(都事)이며, 차남 대수(大壽)는 응교(應敎)이다. 장녀는 첨정(僉正) 이성조(李成朝), 차녀는 첨정 심정협(沈廷協)에게 시집갔다. 차남인 진사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창수(昌壽), 성수(星壽), 최수(最壽)이며 딸은 박태승(朴泰升)에게 시집갔다. 삼남인 부사는 3남 5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태수(泰壽)인데 도사(都事)이고, 차남은 해수(海壽), 삼남은 두수(斗壽)이다. 딸은 이필흥(李泌興), 권익문(權益文), 심경(沈璟), 조하장(曺夏章), 이저형(李著亨)의 처이다. 판서인 막내아들은 외손자 하(河)가 있는데 정랑(正郞)이다. 딸은 이희재(李喜栽), 승지 조성보(趙聖輔), 이중빈(李重頻), 부사 홍우협(洪禹協)의 처이다.
첫째 사위인 이 현감(李縣監)은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인서(麟瑞)는 별제(別提)이며, 차남 봉서(鳳瑞)는 도사(都事)이며, 삼남 구서(龜瑞)는 주서(注書)이다. 둘째 사위인 심 목사(沈 牧使)는 아들 덕흠(德欽)을 낳았다. 셋째 사위인 이 장령(李掌令)은 계자(繼子)이다. 내외의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이 모두 200여 명이다.
이봉서(李鳳瑞 -- 원문은 심봉서이나 문맥에 맞게 고쳤음)의 장남은 호(浩)라고 하며 첨정인데, 호(浩)의 첫째 딸이 세자빈(世子嬪)에 책정되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은 자품이 인후(仁厚)하고 거동은 침착하고 무게가 있었으며 기질은 온화하고 용모는 수려하였다. 사람들과 더불어 말을 할 때 성의(誠意)가 우러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잘못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성급하게 말을 하거나 급히 낯빛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행실을 돈독히 닦았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항상 깨끗이 청소를 하고 고요하게 앉아 서적을 보는 것으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바둑이나 장기 같은 오락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찬성공(贊成公)이 돌아가셨을 때, 공은 아직 어렸는데도 염빈(殮殯)에서부터 봉분(封墳) 때까지 모두 직접 참여하여 예를 다하였다. 곡읍(哭泣)을 몹시 애통하게 하여 두 눈이 거의 실명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부인(大夫人)을 좌우에서 섬기면서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직접 반찬을 살폈다.
대부인의 병환이 심해져서 왕왕 거의 숨이 넘어가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그때마다 성의를 다해 좋은 의원을 구하여 백방으로 치료하였다. 얼마 후 대부인이 병환이 점점 심해지자 밤에도 의관과 띠를 벗지 않고 간호하였다. 마침내 모친상을 당하자 늘 거적자리에서 거처하며 날마다 미음만 조금 먹었다. 장사를 지내고서야 비로소 나물 반찬과 나물국을 상에 올렸으며 조금이라도 기름기 있는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평소 거처할 때에는 항상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에 배례(拜禮)하였는데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폐하는 법이 없었으며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제사에 임하여서는 청재(淸齋)하여 정성을 다하였으며, 심한 병에 걸린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몸소 제사를 지냈다.
백씨(伯氏)를 모시기를 엄한 부친을 모실 때와 같이 하여, 늘 혹시라도 그 뜻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였다. 만년(晩年)에 유일하게 누이동생이 하나 남아 기향(畿鄕)에 살았는데, 누이동생이 병에 걸렸다. 공은 누이동생을 집으로 오게 하여 손수 약을 달여 구료(救療)하였다. 이런 정성을, 선조를 받들고 종족을 화목하는 데에 미루어 나가서 기쁘게 그 일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은 문장이 일찍 성취되었다. 필법(筆法) 또한 미려하였으나 문장이나 필법에 대해 공 스스로 기뻐하지는 않았다. 병인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나이가 스무 살이었는데, 얼굴에 동요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고 파방(罷榜)하여 합격이 취소되었을 때에도 태연하게 받아들여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공에게 원대한 도량이 있음을 알았다.
상촌(象村) 신 상국(申相國)은 평소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鑑識眼)이 있었는데, 공이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자주 말하였다. 월사(月沙) 이 상공(李相公)은 그의 손자 일상(一相)에게 말하기를, “신진(新進) 가운데 오직 조(趙) 아무개만이 벗 삼을 만하다.” 하였다. 이공(李公)이 드디어 공과 더불어 교분을 맺었다.
이공은 일찍이 벗들의 이름을 기록하고서 각각 품제(品題)를 달았는데, 공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군자는 밖으로 화합하고 안으로는 성냄이 없으니 마치 대나무에 마디가 있는 것과 같고, 송백(松柏)에 절개가 있는 것과 같다. 사시(四時)를 통틀어 변함이 없으며 잎의 색이 변치 않는 자, 바로 나의 벗 조군(趙君)이로다.” 하고는 공에게 그것을 바쳤다. 공이 선배와 벗들에게 칭송을 받은 것이 한결같이 이와 같았다.
공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귀하여도 가난한 생활을 견딜 줄 알았으니 집 안에는 귀하게 되었다 하여 한 가지라도 더 보태거나 꾸민 것이 없었고, 의복은 다만 몸을 가리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러나 궁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데에는 인색하거나 쩨쩨하게 구는 법이 없었다. 가난하여 스스로 생활하기가 곤란한 집안 형제에게 돈을 대 주고 교육을 시켜서 성취하게끔 한 자가 많았다. 공은 비록 일찌감치 조정에 오르고 지위가 고관(高官)의 반열에 올랐지만 평소에 남에게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남을 좇아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벼슬살이를 할 때 자주 견제와 배척을 받았다.
중년 이후에는 가솔을 거느리고 한가하게 거처하였다. 사이사이 뜻하지 않은 시비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태연하게 처신하였다. 계축년에 간원(諫院)에서 공을 탄핵하였을 때 공은 말하기를, “횡역(橫逆)이 닥쳐왔을 뿐이니 반드시 상소하여 억울함을 호소할 필요는 없다. 진실로 나에게 잘못이 없다면 남들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말한 자들이 부끄러워하고 감복하였다. 이들은 공의 상(喪)을 당하여 더욱 슬퍼하였다.
아아, 공이 관직에 나간 뒤부터 조정에서는 붕당(朋黨)의 논의가 더욱 치성(熾盛)하였다. 사대부로서 혹 부화뇌동하는 자도 있었으며 무리를 지어 일어나 다투고 논쟁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붕당을 등에 업고 세력을 키우는 자도 계속 나와 급기야 붕당의 화가 만연하게 되었다. 공의 지망(志望)과 사람됨으로는 어디인들 미치지 못했을까만, 공은 뒷걸음질치며 붕당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 가운데 끼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세상에서는 공이 요직에 앉지 못하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여겼으나 공은 조금도 그것에 구애되지 않고 편안함과 태평함을 유지하여 수명과 복록이 아울러 융성하였다. 만년에 비록 이름이 당비(黨碑)에 오르긴 하였으나 화가 심하지는 않았으니, 공은 가히 완인(完人 : 신분이나 명예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부인은 매우 부도(婦道)가 있는 분으로 집안에 틈을 낼 만한 말이 없게 하였다. 집안 친척들을 따뜻이 맞이하고 보살피고 접대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부족한 살림에도 궁핍함을 알리지 않았다. 점을 치거나 기도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자손을 가르침에 매우 엄하여, 사치한 생활을 통렬히 경계하였다. 만년에 자식이 현달(顯達)함으로 인해 성대한 복을 누리게 되었으나 생활은 또한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판서 형제는 석정(錫鼎) 부자(父子)와 교유하였는데, 석정은 일찍이 공의 집에서 공의 풍채와 거동을 보고서 평소 공의 덕의(德義)를 흠앙(欽仰)해 왔다. 이제 묘문(墓文)을 지어 줄 것을 부탁받게 되었으니 의리상, 글을 짓지 못하겠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고 명(銘)을 하니,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훌륭하신 군자여,
아름다운 덕(德)으로 장수를 누렸도다
그 덕은 옛사람에 뒤지지 않았으며
끝을 신중히 하고 처음을 생각하였도다
안으로 행업(行業)을 잘 닦았으며
밖으로 명성이 드러났도다
오로지 한 길을 걸어
족적이 멀리까지 뻗었도다
임금을 섬김에 나의 충성 생각나니
무엇이 두렵고 무엇을 꺼리랴
참된 정성 가득한
믿음직스런 경사(卿士)여
왕이 이르기를, 동린(東?)의 사절로
그대가 가라 함에,
하늘과 맞붙은 어두운 바닷길
험한 그 길을 지척인 듯 여겼도다
여러 차례 연경에 달려감에
또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도다
복제를 정하고 예(禮)를 담당함에
조정의 심리를 받게 되었나니
앞길에 혹 비탈길이 있어도
태연하게 평지를 걸어가듯 하였노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니
헌궤(軒?)가 빛나도다
누가 그 실마리를 열어
복이 이어지게 하였는지
어진 자손 많으니
아름다운 경사가 다하지 않았도다
이 언덕에 비석을 세우나니
남은 혼백이여 여기에 머무소서
후인들을 위하여
명(銘)을 새겨 보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