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신도비: 높이 215.0cm, 너비 107.5cm, 두께 38.5cm / 묘방석: 높이 155.0cm, 너비 175.0cm, 두께 130.0cm, 둘레 500.0cm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산75-3
출토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산75-3
서체
해서(楷書)
찬자/각자/서자
정경세(鄭經世)
/ 미상
/ 본문 : 이산뢰(李山賚), 제액 : 김상용(金尙容)
지정사항
시도유형문화유산
연구정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학봉신도비및묘방석(鶴峯神道碑및墓傍石)
저작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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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慶尙北道 安東市 臥龍面 西枝里) 산 75-3번지에 있는 김성일의 신도비이다. 1634년(인조 12)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몸돌과 머릿돌을 하나로 세운 것으로, 비문은 정경세(鄭經世)가 짓고, 이산뢰(李山賚)가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을 쓴 것이다. 원문은 정경세의 문집인 『우복집(愚伏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김성일(1538~1593)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원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 23)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직되었다.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임명되어 의병활동을 도왔으며, 특히 관군과 의병을 화합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노력하다가 1593년(선조 26)에 생을 마쳤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영남학파의 중추역할을 하였다. 김성일의 묘역에는 신도비 외에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된 묘방석(墓傍石)도 있는데, 모두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김성일의 생애에 대한 정보 및 그가 당시 중앙 정치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만큼 당시 정치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비문이다.
공의 성은 김씨이고 휘는 성일(誠一, 1538~1593), 자는 사순(士純), 스스로 호를 학봉(鶴峰)이라 하였다.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가 아들 석(錫)이 있어 의성군(義城君)으로 봉하여졌으므로 자손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후에 이름이 용비(龍庇)라는 이가 있어 벼슬이 태자첨사(太子詹事)로 백성에게 공과 덕이 있었으므로 읍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지냈는데, 공은 그 후손이다. 고조의 휘는 한계(漢啓)이니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 명예와 인망(人望)이 있었으나 세조가 선위를 받자 병들었다 핑계 삼아 그만두고 돌아와 다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증조의 휘는 만근(萬謹)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로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에 증직되었다. 조의 휘는 예범(禮範)이니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고의 휘는 진(璡)이니 성균관 생원으로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조비(祖妣)는 영해(寧海) 신씨(申氏)이니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되었으며, 비(妣)는 여흥(驪興) 민씨(閔氏)이니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모두 공이 존숭을 받았기 때문에 증직된 것이다.
공은 더벅머리 때부터 영민하고 빼어나 범상한 아이와 달랐다. 아홉 살에 정부인이 돌아가시자 애모(哀慕)가 어른 같았다. 형 극일(克一)이 홍원(洪原) 임지(任地)에 있을 때에 일찍이 쫓아갔었는데, 하루는 성중에서 잘못하여 불이 났으므로 사람들이 관아로 달려가 불을 끄고 있었으나 공은 홀로 전패(殿牌)를 받들고 깨끗한 땅으로 피하였으므로 본 자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약관 시절에 아우 복일(復一)과 더불어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상서(尙書)를 읽다가 갑자기 한숨을 쉬면서 탄식하기를 “학문한다고 하면서 잘 살기에 뜻을 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지금의 유종(儒宗)이니 어찌 가서 가르침을 청하지 않으리오”하였다. 드디어 판서공에게 글로써 청하였더니, 판서공이 기뻐하면서 허락하므로 곧 도보로 가서 뵙고 인심(人心) · 도심(道心)의 설과 선기옥형(璿璣玉衡, 渾天儀)의 제도를 청하여 물었다. 물러나 아우와 더불어 되풀이하면서 연구하고 손수 스스로 그림도 그리면서 강론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므로 선생이 그 정성이 두터움을 아름답게 여겨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민첩하면서 학문하기를 즐겨하니 더불어 같이 공부하는데 매우 유익함을 깨닫겠다”하였으니, 그 기대함이 매우 컸다 하리라.
임술년(명종 17, 1562년)에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의 두번째 계비 윤씨)가 요망한 중 보우(普雨)의 말을 받아 들여 까닭 없이 희릉(禧陵, 중종의 첫번째 계비 윤씨)을 옮겼으며, 정릉(靖陵, 중종의 능)도 옮기기로 결정하였는데, 왕후의 아우(오라비) 윤원형(尹元衡)이 바야흐로 국권을 잡고 있으므로 온 조정이 감히 말을 못하였다. 공이 소를 지어 다섯가지 옳지 못한 것을 열거하였는데 말한 기운이 바르고 굳세어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판서공이 “직분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다가 화를 받으리라”하여 엄하게 말리므로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갑자년(명종 19, 1564년)에 진사에 올랐으며, 무진년(선조 1, 1568년)에 대과에 올랐다.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藝文館)을 옮겼을 때 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의 묘를 봉식(封植)할 것과 6신의 벼슬을 복직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임금의 덕과 당시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후에 봉식할 것과 6신의 후손을 기록하여 쓸 것을 명하였으니 대개 공이 먼저 말씀한 까닭이다.
계유년(선조 6, 1573년)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 선조대왕이 바야흐로 정신을 가다듬고 잘 다스리기를 구하여 날로 유신(儒臣)과 더불어 다스리는 길을 상의하였다. 하루는 범상한 임금이 된 것을 분개하고 부끄러이 여겨 탄식하였다. 아뢰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전하는 요(堯) · 순(舜)같은 임금입니다”하였는데, 공은 이르기를 “요·순도 될 수 있으며 걸(桀) · 주(紂)도 될 수 있습니다”하였다. 주상이 말씀하기를 “어째서 그런가?”하므로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시고 밝으시니 요·순의 일도 배울 수 있으나, 다만 간(諫)하는 말을 반대하시고 마음대로 하시는 병통이 있으니, 걸·주가 망한 까닭도 또한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주상도 또한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을 고쳤다.
공이 사관(史官)이 되었을 때 김규(金戣)가 아첨하는 태도가 있음을 보고 마음으로 더럽게 여겼다. 이 때에 규가 사간(司諫)이 되어 동료들이 장차 더불어 모여 앉으려는 것을 공이 앞질러 궁궐에 이르러 곧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이 엄숙하여졌다. 조금 있다가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겼다가 병조좌랑(兵曺佐郎)으로 옮겼으며 을해년(선조 8, 1575년)에 정랑(正郎)에 올랐다. 병자년(선조 9, 1576년)에 이조좌랑이 되었는데, 긴 휴가를 내어 글을 읽었다. 정축년(선조 10, 1577년) 봄에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북경으로 가서 국가 종계(宗系)의 거짓된 것을 바로 잡는데 힘을 매우 많이 썼다. 겨울에 정랑에 올랐으며, 무인년(선조 11, 1578년)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가 되었다.
일찍이 임금의 자리 앞에서 조정의 대관(大官)들이 재물을 탐내는 것을 힘써 아뢰었다. 주상께서 성난 목소리로 묻기를 “누가 그런 짓을 하던가”하므로 공이 하나 하나 들어 아뢰었더니 동료들이 목을 움추렸다.
기묘년(선조 12, 1579년)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옮겼는데, 곧게 잡고 흔들리지 않았다. 하원군(河源君) 정은 왕실의 근친으로 은총만 믿고 법을 많이 범하였으나 아무도 이를 막지 못하였는데, 공이 그 종을 묶어 놓고 엄중히 국문(鞠問)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주상께서 경연(經筵)에서 물으시기를 “요사이 염치가 날로 없어지니 무슨 까닭인가”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대신이 뇌물 받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으니 소관들이 무엇을 법으로 삼겠습니까”하였다. 노수신(盧守愼, 1515~1590년)이 자리를 피하면서 이르기를 “신의 족인(族人)으로 변방의 장수가 된 자가 있는데, 신이 노모가 있다 하여 갖옷 한 벌을 부쳐온 것을 신이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성일의 말이 옳습니다”하였다. 주상께서 이르기를 “사헌부 장령의 바른 말에 대신이 허물을 자인하였으니 둘이 다 잘하는 일이다”하였다. 공은 본래 수신과 더불어 친한 사이였는데, 수신이 나오면서 사례하기를 “옛 도의를 오늘날 다시 보았으니 그대가 아니고는 그 누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검상(檢詳)으로 옮겼다가 사인(舍人)으로 올랐는데 의정부의 예전부터의 풍습이 노래와 여자를 좋아하였으며 방탕하기를 서로 숭상하였으므로 비록 뜻과 행실이 훌륭한 인물도 혹 면하지 못하는 자가 많았으나 공은 전연 못 본 체하면서 스스로 지켜 마침내 더럽히지 않았다.
가을에 명을 받들고 북관(北關, 함경도)을 순무(巡撫)하였는데, 더러운 관리는 기세를 보고 벼슬을 그만두는 자도 있었다. 경진년(선조 13, 1580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복(服)을 마친 후에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다.
계미년(선조 16, 1583년)에 사인이 되어 해서(海西, 황해도)를 순무하고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으나 특별히 나주(羅州)목사에 제수되었는데, 나주는 번화하고 중요한 땅이므로 혹 민정이 막힐 것을 두려워하여 북 하나를 문에 두고 백성이 원통한 자가 있으면 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자기 할 일을 다하였다.
나주에는 본래 선비의 자제가 많았으나 항상 공부할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땅을 골라 서원을 창설하고 그 후면에 사당을 세워 한훤당(寒暄堂) · 일두재(一蠹齋) · 정암(靜庵) · 회재(晦齋) · 퇴계 5선생을 향사(享祀)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스승의 표본이 되는 바를 알게 하였다. 공도 여가가 나는 대로 문득 달려가서 경서의 뜻을 강론하고 그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시험 보았다.
사직단에 불이 나서 재주(齋廚)가 모두 타 버렸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빨리 새로 짓고 상부에는 보고하지 말자”고 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죄를 짓고 숨기는 것이 더욱 그 죄를 더하게 하는 것이다”하면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탄핵하고 돌아왔다. 무자년(선조 21, 1588년)에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었다가 봉상시(奉常寺) · 예빈시(禮賓寺)로 옮겼다.
기축년(선조 22, 1589년)에 일본 사람 평수길(平秀吉)이 원씨(源氏)를 멸망시키고 대신 관백(關白)이 되었는데, 그의 심복인 현소(玄蘇) · 평의지(平義智)를 보내와서 사이좋게 지낼 것을 청하므로 조정에서 바야흐로 회답으로 사신 보낼 일을 의논하였으나 적의 정세를 측량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공이 집사람에게 이르기를 “빨리 행장을 준비하라. 내가 반드시 가게 될 것이다”하였더니 과연 부사(副使)로서 가게 되었다.
이듬해 여름에 배로 떠나 대양에 들어갔을 때 태풍이 크게 일어나므로 배 안의 사람들이 겁내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었으나 공은 홀로 단정히 앉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대마도에 이르렀을 때 평의지 등이 국분사(國分寺)에 가서 놀면서 구경하기를 청하므로 사신들이 갔다. 현소가 맞아들여 중당 (中堂)에 앉아 있는데 평의지는 나중에 와서 가마를 탄 채 뜰을 지나 들어왔다. 그러나 공은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1536~?)에게 이르기를, “제가 감히 우리를 이와 같이 짓밟으니 더불어 수작을 나누는 것은 스스로 욕되는 일입니다”하였다. 곧 일어나 관으로 돌아왔더니, 서장관 허성(許筬)도 따라왔다. 평의지는 괴이 여겨 자세히 물어본즉 역관(譯官) 진세운(陳世雲)이 “병이 났다”고 하였다. 공이 듣고 왜사(倭使)를 대면한 자리에서 곤장을 치면서 이르기를, “이 섬은 대대로 나라의 은총을 입어 우리의 동번(東藩)이 되었으니, 사신이 오게 되면 갈 때에는 뒤에서 호위할 것이요 볼 때에는 앞에 와서 절하는 것이 그의 분수일 것인데, 너는 전례에 있는 것을 증거로 대서 그들이 도리에 어긋나 오만해진 것을 꺾지 못하고 돌아보면서 임시 변통의 말로 사랑만 받으려 하느냐”하였다. 평의지가 부끄러이 여기고 후회하여 죄를 가마 멘 자에게 돌려 머리를 베어 가지고 엎드려 기어 들어와 사죄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충성과 순종할 것을 힘쓰라”는 말로 타일러 돌려보냈더니 이로부터 태도를 굽혀 감히 거만하지 못하였다.
계빈(堺濱)에 이르렀을 때 서해도(西海島)에 산다는 왜인이 사람을 보내 공경하는 뜻으로 잔치를 베풀겠다고 하였다. 글 가운데 “조선 사신이 내조(來朝)하였다”란 말이 있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 먹였다. 나중에 살펴보고 물은즉 이미 따라온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공은 황윤길과 허성에게 이르기를, “장차 어떻게 할 것입니까”하였다. 이르기를 “금수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나라를 욕되게 하면서 먹이는 것은 그 부끄러움이 호령하면서 발로 차는 것일 뿐만 아닌데 오히려 마음 편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먹여 준 것은 모두 시장에서 살 수 있으니 지금 만약 그 수량대로 사서 주면서 이르기를 네 주인이 공문을 잘못 썼으므로 이미 깨달은 바에는 그대로 받을 수가 없으니 너는 돌아가서 그렇게 보고하라 하면서 말은 엄정하고 의리는 바르므로 욕됨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곧 그대로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들 소인은 한자를 알지 못하며 여기에 보내온 글도 빌어서 쓴 것으로 그 글에 실언(失言)함이 있는 것도 실은 주인도 알지 못하오니 다시 써서 바칠 것을 허락하시기를 빕니다”하면서 굴복하여 사죄하기를 마지않으므로 드디어 그대로 두었다.
국도(國都)에 이르렀을 때, 황윤길 등이 설의(褻衣, 편복)으로 들어가므로 공이 이르기를 “봉사할 때에 예복을 갖추는 것은 임금의 명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남의 국도에 들어가면서 사복을 입는 것이 옳겠습니까’하였다. 세 번이나 되풀이하였어도 듣지 않더니, 이 날 왜인 사녀(士女)들이 거리를 메워 구경하는데 홀로 공에게만 두 손을 마주 잡고 공경하는 뜻을 보였으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흘겨보고 지나갔으므로 두 사람은 비로소 후회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관백이 국왕인 줄로 잘못 알고 국서에 알맞은 대등한 예로 썼으며 사신이 서로 보는 의식에도 또 일정한 지휘가 없었는데 이 땅에 이르러 비로소 그가 국왕이 아님을 자세히 알았다. 공은 일행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마땅히 기둥 밖까지 올라가서 절해야 합니다”하였는데, 허성은 “그것은 옳치 않습니다”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일본은 우리 조정과 동맹을 맺은 나라이며 일본을 주장하는 사람은 위황(僞皇, 거짓 황제)이고 관백은 특히 그 대신일 뿐입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국왕으로 여겨 특별히 대등한 예로 대우하였으니 그것은 너무 자기를 내리고 굽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미 그 실정을 자세히 알았으니 비록 전례에 없었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예에 의거하여 논쟁해 상견하는 예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하물며 이에 앞서 왔던 사신도 다 위에서 절하였는데 우리들은 어찌 홀로 굽혀 나라를 욕되게 하는 죄를 얻겠습니까?”하였다. 허성이 이르기를 “국서에 똑바로 어휘(御諱, 임금의 성명)를 썼고 수길을 국왕이라고 일컬었으니, 신하로서 어찌 감히 대등한 예로 하고 아래로 따르는 공손함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국서도 이제 와서 고칠 수 없으니 비록 올라가서 절한다 하더라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당초에 조정에서 잘 알지 못하여 이러한 타당치 않은 예가 있었으니 지금 비록 미루어 고칠 수는 없을지라도 사신이 서로 볼 때는 절로 마땅히 예와 같이 할 것인데 어찌 이렇게 고집하여 말합니까. 국왕을 일부러 만들어 가지고 반드시 뜰아래에서 절을 하여 위황(僞皇)의 배신(陪臣, 신하의 신하)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길 것입니까. 관백이 사신을 존대하여 당상에서 서로 보게 되면 이것은 우리 임금을 위황과 대등히 여길 뿐으로 감히 사신에게 항거하여 존대받지 못함으로써 우리 조정을 존대하는 것이니 또한 옳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허성이 이르기를, “말해 봐서 따르면 좋지만 저들이 만약 자기 나라 사신은 이미 귀국 뜰에서 절하였으니 무엇이 다를 것이오, 하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는 것이니 일본의 위황이 이미 나라의 주인이 되었은즉 관백은 비록 귀할지라도 이에 남의 신하이다. 사신이 위황을 볼 때는 뜰에서 뵙는 것이 예이고, 관백에게는 예가 아닐 것이다. 지금 관백이 뜰에서 뵙는 예로 받는다면 이것은 천황으로 자처하는 것이라 하여 만약 이런 의리로 순순히 말하면 저도 반드시 굽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또 조용히 현소에게 묻기를, “귀국의 제전(諸殿, 일본 50여 주의 자치령의 우두머리)이 관백을 뵐 때는 뜰아래에서 절합니까? 당상입니까?”하였다. 현소가 이르기를 “똑같이 천황의 신하이니 어찌 뜰에서 절하겠습니까!”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앞서 온 사신도 또한 다 영외(楹外)에서 예를 행하였겠구려”하였다. 현소가 이르기를 “진실로 그러하오”하였다. 공은 더욱 대개 현소 무리가 이미 우리에게 정배를 하였으니 혹 서로 상등한 방법으로 하자 할 것을 염려하여 먼저 은근히 풍자하여 거꾸로 말할 것을 막은 것인데 나중에 마침내 공의 말대로 하였다.그 때 수길은 관동(關東)지방을 순행하다가 이미 돌아왔는데, 의지가 와서 이르기를 “내일 이른 아침에 관백이 마땅히 천궁(天宮)에 갈 것이니 사신은 관광할 만 합니다”하였다. 공은 이르기를 “임금의 명령이 관에 있으니 의리로 보아 사사로이 나갈 수 없다”하였다. 굳이 청하는 것을 사양하였더니 왜승이 와서 말하기를 “의지가 청한 일은 실은 관백의 뜻으로 좇지 않으면 후회가 있으리라”하였다. 여럿이 모두 위태로이 여겨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수길은 여러 달을 미뤘다가 국서를 받았는데 뜻밖에 거짓말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였다. 이르기를 “잡아 가두는 욕됨이 있으리라”하였다. 꾀를 낸 사람이 있어 이르기를, “민부경(民部卿) 법인(法印)과 산구전(山口殿) 현량(玄亮)은 관백이 믿는 부하이며 지금 마침 주객(主客)이 되었으니 서로 사이좋게 사귀어 그 일을 도모하게 하시오”하였다. 황윤길은 그러려니 하여 예폐(禮幣)라고 청탁하여 그에게 뇌물을 후히 주려 하였다. 그러나 공이 이르기를 “빈주(賓主) 사이에는 진실로 예폐가 있을 것이나 명을 전달한 후라면 예폐가 될지라도 오늘 주면 이것은 뇌물이 되는 것으로 우리들이 성주(聖主)의 밝으신 명을 받들고 와서 위덕(威德)은 아직 선양하지 못하고, 하여금 조대(朝臺) 아래에서 이마를 조아리게 하면서 도리어 뇌물을 써서 권신에게 아첨한다면 너무도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비록 죽어도 못하겠습니다”하였다. 마침내 황윤길도 굽히고 말았다. 명령을 전달한 후에 수길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서계(書契)는 뒤따라 마땅히 닦아 보낼 것이니 사신은 계빈으로 가서 기다리도록 하라”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국서를 받지 않았으니 이것은 일을 마치지 못한 것으로 앞질러 나갈 수 없다. 하물며 계빈은 멀리 백리 밖에 있으니 만약 서로 마땅히 다툴 만한 일이 생기면 또 어찌 하겠는가”하였다. 그러나 일행이 다 호구(虎口)에서 몸이 벗어난 것만을 다행히 여겨 수레를 빨리 몰아 앞질러 떠났으므로 공도 다투지 못하고 계빈으로 돌아와 수십일 만에 서계가 비로소 왔다. 말씨가 매우 어그러져 전하(殿下)를 각하(閣下)라 하였고 예폐를 방물(方物)이라 하였다. 또 “한 번 뛰어 똑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겠으니 귀국은 먼저 몰아 입조(入朝)하라” 등의 말이 있었으므로, 공은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글을 지어 현소에게 주었으니, 이르기를 “서계를 고치지 않으면 사신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였다. 현소는 간사한 말로 “대명국으로 입조한다”는 말로 해석하였고, 다만 ‘각하’ · ‘방물’ 두어 자만 고치겠다 하였다. 공은 두 번째로 글을 주어 낱낱이 서계의 말을 들어 구절을 따라 분석함으로써 그의 억지로 꾸며서 하는 말을 깨뜨렸다. 그리고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예를 중히 여겨 귀국으로 더불어 폐백으로 사귄 지가 200년이 가까웠으나 일찍이 거만한 말을 한 일이 없었던 것은 귀국도 또한 잘 아는 바이다. 이제 귀국에서는 포로를 돌려보내고 죄 지은 자의 목을 베어 바치면서 예전에 좋아하던 정의를 다시 닦을 것을 청하므로 우리 전하께서도 그 신의를 아름답게 여겨 특히 사신을 보내셨다. 이것은 양국의 아름다운 일을 중개하는 것인데도 서계 가운데는 은혜를 갚고 덕을 사례하는 뜻은 간략히 하고 이에 도리어 장황히 자랑만 빛냈다. 위로 대국을 엿보고 옆으로 이웃 나라를 위협하여 방자히 공갈하는 말을 하였으니, 예절로 이웃과 사귀는 것이 어찌 마땅히 이럴 것인가”하였다. 현소가 보고 두려운 듯이 탄식하면서도 오히려 앞서 말한 대로 고집하였다. 황윤길 등은 위험한 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억지로 다투려 하지 않았다. 공이 이르기를 “입조란 두 글자를 고치지 않으면 본조(本朝)는 왜놈의 번복(藩服, 부속된 나라)이 되며 온 나라의 예의를 지키던 선비가 모조리 배신이 될 것이니 또한 마음 아프지 않습니까. 송(宋) 고종(高宗)은 이미 신하로서 금(金)을 섬기면서 한결같이 조서로 깨우친다고 이름하였다. 호담암(胡澹庵)은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달갑게 여길지언정 구차히 소조(小朝, 부속국의 조정)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물며 당당한 우리 나라는 저들과 더불어 이웃하여 있으면서 도리어 입조란 욕되는 말을 달게 여겨 죽기로 다투지 않을 것입니까”하였다. 황윤길이 말하기를 “현소의 답이 이와 같으니 아직 그대로 믿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공은 이 말을 빌어서 후일 자기 몸을 벗어날 여지를 만들고자 합니까?”하였다. 허성이 말하기를 “돌아가 보고한 후에 조정에서는 절로 처치가 있을 것으로 사신이 알 바는 아닙니다”하였다. 이르기를 “악하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대부로서 강토에서 나왔을 때 사직을 편히 하고 국가에 이로울 만한 일이 있으면 전단(專斷)하여 처리하는 것은 옛부터 도리인데 하물며 이런 욕되는 말은 고치기를 청하여 죽기로 다투더라도 어찌 전단하였다는 죄를 받을 것이며, 일신의 이해만 위하여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면서 입으론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고 이에 이르기를 내가 알 바가 아니라 하여 욕됨을 싣고 가서 군부(君父)에게 넘겨 줄 것인가”하였다. 드디어 다시 현소에게 답서를 쓰고 또 글로써 선위사(宣慰使) 평행장(平行長)에게 되풀이하면서 논변하여 반드시 고칠 것을 기약하였다. 일행이 모두 일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서로 선동하였으며, 황윤길은 정사로서 행사를 지휘하므로 방해하고 억압함이 많았다. 공은 이에 바다 가운데 그 글을 던져버리고 시를 지어 분함을 적었으니, “물 밑에 있는 어룡은 빽빽이 글자를 알아보리라”란 구절이 있다. 대명 일통지(一統志)에 실려 있는 본국 풍속의 한 조목에 근거 없는 것을 주워 모았는데 대개가 비루하고 거칠어 진실하지 못함을 공이 늘 병통으로 여겼었는데 왜승 종진(宗陳)이 마침 이 글을 가지고 와서 보이였다. 공이 나라에 현재 행하고 있는 예절과 풍속을 열거하고 조목을 따라 논평하고 증거를 세워 그 거짓을 변명하였는데 조선국풍속고이(朝鮮國風俗考異)란 책을 만들어 주었다. 일행이 돌아올 때에 제추(諸酋)가 각각 전별이 있는 것을 모조리 기다리고 있던 관의 중들에게 주고 터럭 끝만큼도 스스로를 더럽게 하지 않았다.
신묘년(선조 24, 1591년) 봄에 부산에 돌아와 내렸는데 여행 짐이 쓸쓸하여 오직 석창포(石菖蒲) · 종려목(棕櫚木) 두어 분재뿐이었다. 안동을 지날 때에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환조하여서는 사인으로서 복명하였다.
벼슬이 통정(通政)으로 올라 특별히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다가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겼을 적에 맨 먼저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이 무고를 입어 말라죽은 형상을 매우 자세히 논하였다. 얼마 안 되어 영경이 벼슬을 복직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여러 사람의 심정이 크게 쾌하였다.
공도 또한 임금이 잘 알고 대우해 주는데 감격하여 잘못을 꾸짖고 착함을 아뢰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여러 차례 수천 마디의 차자(箚子)를 올려 당시의 중요한 사건, 천재(天災)가 일어나는 까닭, 민원(民怨)이 일어나는 까닭, 정치 교화의 폐단이 되는 까닭, 재력(財力)이 소모되는 까닭 등을 일일이 지적하여 극론(極論)하였다. 말을 아뢰는 데는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더욱 대궐 안을 엄하게 다스릴 것과 교화와 근원을 맑게 할 것과 궁방(宮房)의 폐단과 외척이 풍습으로부터 세자를 세우고 왕자를 가르칠 일에 이르기까지 간절히 아뢰어 꺼려하고 숨기는 일도 피하지 않고 모조리 말하여 매양 차자가 올라갈 때마다 더욱 알맞고 적절하였다. 그래서 사방에서 전하여 가면서 외었으며 바른 논설이라 하여 칭찬하였으나, 좌우에 있는 권력 있고 귀한 사람들은 모두 깊이 미워하였다.
조금 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겼다가 오래지 않아 체직(遞職)되었다.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제수되었다. 그 때 조정 의논이 왜국을 근심하였고, 영남이 마땅히 먼저 싸움을 만날 것이라 하여 무사 중에 군사일을 잘 아는 자를 가려 추천하여 병사로 맡기려 하였는데, 주상께서 특별히 공에게 우병사(右兵使)로 제수하시었다.
공은 명을 받들고 곧 가다가 충주에 이르러 적의 배가 이미 바다를 덮었으며 부산·동래가 잇달아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주야로 달려 장차 쭉 곧게 본영(本營, 함안)으로 가려 하였다. 의령(宜寧)에 이르러 휘하의 사졸이 서로 모의하기를 “도둑이 깊이 들어왔으므로 똑바로 가다가는 위태로우니 진주(晋州)를 경유하여 함안으로 나가서 적세를 관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주수(主帥, 兵使)가 반드시 듣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다른 말로 청탁하기로 하자”하였다. 공의 둘째 아들 역에게 부탁하여 들어가 아뢰기를 “정진(鼎津)은 물이 불었는데 배가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하였다. 공은 군교(軍校) 김옥(金玉)을 시켜 가보고 오라 하였는데 옥이 돌아와서 또한 속였다. 공이 이르기를 “일이 급하니 길을 돌 수 없다”고 하였다. 곧 달려가 본즉 배가 있으므로 곧 옥과 역을 내려놓고 장차 베려 하는 것을 제장(諸將)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퉜고 옥도 또한 적을 만나면 앞장서서 자기의 죄를 속할 것을 원하므로 이에 당분간 살려 주었다.
본영에 이르기 30리 앞에서 전(前) 병사(兵使) 조대곤(曺大坤)이 병영을 버리고 물러나 장차 도망하다가 뜻밖에 공이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영접하면서 인(印)을 교부한 후에 사양하고 가려 하였다. 공이 낯빛을 바로 하고 이르기를 “장군은 가장 가까운 곳에 군사를 이끌고 있으면서 김해를 적에게 넘겨주었으니 군율로써 용서할 수 없다. 하물며 대대로 녹 먹는 신하이며, 싸움에 경험 많은 장군으로 이 지경을 당하여 의리로 보아 도망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 때 마침 그 편비가 따라와서 이르기를 “일본이 본영을 함락하였습니다”하였다. 공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수죄(數罪)하기를 “너는 병사의 휘하로 성을 지키면서 화살 한 대도 적을 향하여 즐겨 쏘지 않고 와서는 다른 사람을 현혹케 하느냐”하였다. 곧 베어 순직케 하였더니, 조대곤은 혼이 빠진 듯 하였다. 이튿날 정탐병이 “적이 온다”고 하므로, 공이 이르기를 “거리가 얼마나 되는 곳이냐”한즉,“5리 지경입니다”하였다. 이에 정예한 군사를 뽑아 둘 것을 명하였더니, 조금 있다가 말탄 적 두 놈이 은투구에 금탈(金面)로 칼을 휘두르면서 전진해 오므로 장수와 사병들이 다리를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은 승상(繩床)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더니, 적도 정말인지 거짓인지를 의심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공은 선발한 수십인을 시켜 “돌격하라”하고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빨리 말을 타지 않는 자는 베겠다”하였다. 김옥을 불러 이르기를 “너는 오늘 앞장서지 않겠느냐”하였다. 수십인이 한꺼번에 돌진하여 수리를 쫓아 따라가다가 적의 복병을 만나 꽤 오래도록 싸웠다. 군교 이숭인(李崇仁)이 활을 쏴서 금탈을 쓰고 도전하던 자를 거꾸러뜨림으로써 나머지 적은 모두 달아났다. 두 적을 베고 그들의 건장한 말과 금 안장과 보검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적이 상륙하고서부터 열진(列鎭)이 기와가 깨어지듯 하여 한 사람도 그 칼날을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공은 고립된 군대로 그 날카로움을 꺾었다. 이로부터 군사의 마음이 조금 떨쳤으며 적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도 생기게 되었다. 드디어 이숭인을 보내서 치계(馳啓)하고 헌괵(獻馘, 적의 머리 벤 것을 바치는 것)도 하였다.
처음 공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에 중외가 시끄럽고 두려워하여 조석을 보존하지 못할 듯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바깥 도둑이 아직 오지 않아도 국내에서 먼저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자못 진정시키는 말을 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을 때의 차자에도 또한 이르기를, “오늘날 두려워할 바는 섬 오랑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심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근본을 튼튼히 하라는 논설이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변방의 보고가 날로 급하였으므로 서울도 크게 들끓었다. 주상은 공이 앞서 말한 것을 꾸짖어 잡아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 좌상(左相, 좌의정) 유성룡(柳成龍)과 대관(臺官,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관리)이 풀어 주려고 구원하였어도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며칠 안 되어 이숭인이 이르렀다. 주상께서 재신(宰臣)에게 이르기를 “김성일의 장계(狀啓)에 한 번 죽어 나라에 갚겠다는 말이 있으니, 성일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하셨다. 유성룡이 대답하기를 “김성일의 소견은 혹 미급한 데가 있을지라도 충성은 남음이 있습니다. 그가 이 말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은 신이 책임질 만합니다”하였다. 왕세자도 또한 힘써 구원하여 이에 놓아주고 초유사(招諭使)를 제수하여 나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공은 처음 명령을 받고 가다가 직산(稷山)에 이르러 선전관(宣傳官)이 빨리 달려온다는 말을 듣고 따라가던 자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호곡(號哭)하였다. 그러나 공은 얼굴색을 변치 않고 뒷일을 지시하였더니, 이르러 본 즉 이에 은혜로운 명령이었다.
남으로 가서 함양(咸陽)에 이른즉, 열읍(列邑)은 이미 비었으며 선비와 백성은 모두 새·짐승같이 숨어버렸다. 공은 그 자리에서 격문을 지어 깨우쳤는데 충의로 고무하여 말뜻이 의분에 찼으므로 그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김면(金沔)은 거창(居昌)에서 기병하였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기병하였으며 그 밖에도 향병(鄕兵)을 단결하여 적을 치겠다고 성명한 자가 곳곳마다 무리를 지어 일어났으므로 바로 바람같이 움직였다.
곽재우(郭再祐)는 난초부터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자기 집 재산을 흩어 군사를 먹였으며 계속할 수 없을 때는 비어 있는 읍의 창곡(倉穀)을 내서 지급하였으므로 이웃 읍 수령에게 토적(土賊)이라고 지목되어 군사들이 싸울 마음을 잃었다. 곽재우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장차 버리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마침 공이 이르러 글을 주어 장려하였으므로 사기가 다시 떨쳤다.
공은 진주가 호남을 보전하고 막아야 할 곳으로 적이 반드시 다툴 것이라 하였다.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을 시켜 군사를 수집하였는데 수천 명을 얻어 성과 못을 수리하고 살받이터를 계산하여 대를 나눠 죽기로 지킬 계책을 삼았다. 조금 있으려니까 김면이 우현(牛峴)을 지키고 있는 것을 여러 적이 합세하여 치려 한다는 말이 들렸다. 드디어 달려가 본즉 이웃 읍의 군사가 모두 모여 힘을 아울러 죽기로 싸웠으므로 적은 물러갔다.
창원 적은 공이 진주를 떠났으므로 진주의 군비가 허술해졌음을 엿보고 알아 진해 적과 더불어 와서 도둑질하였다. 공은 단성(丹城)으로 돌아와서 함양 등 네 읍 군사를 모조리 내서 구원하게 하고 김시민에게 경계하여 굳게 지키게 하였다. 곽재우도 또한 먼저 이에 입성하였으므로 군의 세력이 자못 성하였다. 적은 남강(南江)까지 이르러 감히 다가오지 못하였는데 공이 이에 이르자 여러 장군은 더욱 명령대로 움직였으므로 적은 패하여 도망하였다. 드디어 사천(泗川) · 진해 · 고성 등의 읍을 회복하였다. 또 곽재우 등을 시켜 현풍(玄風) · 창녕 · 영산 3읍의 적을 격퇴하였으므로 낙동강 좌우가 이로부터 트였다.
처음에 관찰사 김수(金睟)의 행동이 너무 급히 서둘러서 견실하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열읍에 공문을 보내 군사의 부대를 나누는데, 의장(義將)에게 예속되어 있는 자를 많이 빼앗아가므로 여러 사람의 노여움이 더욱 격동하였다.
곽재우가 격문을 전하고 베려 하므로 김수는 군사를 벌려 놓고 자위하고 있으면서 폭도라고 아뢰어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공은 곽재우에게 글을 주어 의리로 깨우쳤더니, 곽재우는 크게 감격하고 깨달았다. 그리고 곧 진주가 포위된 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달려갔다. 공은 또 김수를 조정하여 감정을 풀고 일을 같이 하도록 하였다. 또 조정에서 사정을 잘 살피지 못하고 패역(悖逆)이라고 베이기라도 하면 형을 잘못 집행함으로써 일도(一道)의 인심을 잃을 것을 염려하여 곧 사유를 갖춰 치계하였으므로 드디어 무사하였다. 이 해 가을에 행조(行朝)에서 공으로 좌도(左道) 관찰사를 삼았으므로 선비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이르기를 “공이 가면 의병은 흩어질 것이고 영남은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공은 이 곳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서는 안됩니다”하였다. 그러나 이미 함부로 머무를 수도 없음을 알고 사잇길로 행재(行在)까지 가서 소로 아뢰었더니, 우도로 바꿔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창원 적은 부산 · 김해의 여러 적과 더불어 합세하여 진주에서 패전한 것을 보복하려 하였다. 그 때 김시민은 이미 승진하여 목사가 되었다. 공은 “죽을 결심으로 은총을 갚는데 힘쓰라”하였다. 여러 장수에게 전령을 내려 혹 지키고 막는데 협력도 하고 혹 강 언덕에서 군의 위엄도 드날리게 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모집하여 활과 화살을 많이 주어 밤으로 성중에 들여보냄으로써 장수와 사졸을 장려하여 죽기로써 지키게 하였더니 사람들은 모두 감격하여 용기를 떨쳤다. 김시민은 또 방략을 많이 베풀어 막았으므로 적은 둘러싸고 일곱 낮 밤을 공격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쌓여 있는 시체를 불태우고 끌고 가 버렸다.
겨울에 주상은 공의 수고한 공적을 아름다이 여겨 가선의 벼슬을 제수하셨다. 처음에 공이 병사가 되면서부터 병무가 마음을 태워 밤낮으로 여가가 없었다. 서명하고 결재하여 보내는 일까지 비록 미세한 일이라도 반드시 친히 하였으므로, 누군가가 그 너무 번거로움을 간하였다. 공은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의 죄는 죽어도 다 갚지 못할 것인데 수고로움을 어찌 감히 꺼리겠는가”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싸움으로 황폐한 나머지 염병이 번져 백성들이 서로 베개 베듯이 죽어갔다. 몰고 달리면서 식량을 주어 구제하는 일을 근심하고 수고함이 더욱 심하여 혹 식사에 임하였다가도 숟가락을 도로 놓기도 하므로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여 자애하기를 청하면 “스스로 삼키지 못할 뿐”이라 하고, 다스리는 일을 그만두고 좋지 못한 기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하였다. 마침내 병을 얻어 위독하였으므로 약을 바쳐도 마시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나는 약을 마시고 나을 병이 아니다”하였다. 아들 역도 또한 옆방에서 심하게 앓고 있었으나 한 번도 물어 보는 일이 없었다. 그 때 후부인(側室)도 떠돌아다니다가 가까운 곳에 와 있었는데 여종을 보내와 문병하는 것도 뿌리치고 들이지 않았다. 오직 나라를 근심하는 일념만 마음에 맺혀 잊지 못하였다. 비록 혼미하여 인사를 살피지 못하면서라도 입 안에서 하는 말이 꿈꾸면서 헛소리하듯 하는 것이 다 국사(國事)에 대한 말이었다.
계사년(선조 26, 1593년) 4월에 진주 공관에서 졸하였으니, 나이는 56세이다. 그 후 두달만에 성이 함락되면서 낙동강 오른쪽(江右)은 점령되었다. 아!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
공의 벗 박성(朴惺) · 이로(李魯)는 처음부터 늘 군중에 있으면서 공과 더불어 먹고 자기를 함께 하였다. 이에 이르러 그 상사(喪事)를 주장하여 지리산 기슭에 임시로 묻었다. 맏아들 집(潗)이 사잇길로 남으로 가 산중에서 여막을 지켰다. 12월에 돌아와 안동부 북편 가수천(嘉樹川) 오향(午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을사년(선조 38, 1605년)에 조정에서 공의 훈을 선무원종(宣武原從)으로 기록하였으며 한 자품 올려 이조참판으로 증직하였다.
공의 천품은 뛰어나고 시원하였으며, 성질은 굳세고 엄하고 분에 복받쳤으며 감정이 고조되어 용감히 나아가는 기질이 있었다. 스승의 문에 오름에 미쳐 더욱 스스로 기운을 내어 독실한 수양으로 거두어들이는데 힘썼다. 일찍이 이르기를 “내 평생에 말 한 구절을 얻었으니, 나의 허물을 공격하는 자가 즉 나의 스승이라는 말이다”하였다. 또 이르기를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세 글자는 모름지기 종신토록 마음에 지녀 착함을 행하고 악함을 버릴 것이니 한 가지라도 성실치 못한 것이 있으면 이것은 다 거짓이다”하였다. “너그럽고 크게 생각하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벽상에 걸어 놓고 급한 성질을 늦추려는 뜻을 붙였다.” 염락(濂洛, 성리학)의 모든 글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더욱 이황선생이 지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좋아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읽고 이해하여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으며 마음으로 깊이 납득하고 실천하여 몸에 지니고 표준으로 삼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수양이 날로 평탄하고 진실하여져서 진실한 모양으로 다시는 용감히 분기하는 기상이 없이 쌓은 수양은 더욱 깊고 두터웠으며 실력을 발휘하는 데는 더욱 빛을 발휘하였다. 일에 임하여 행동을 결정하는 데는 오직 의리만 생각하여 마땅히 할 일이라면 곧게 나가 담당하였으며, 이해화복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엎어지고 넘어져 험난한 때를 당하여 죽고 삶이 당장에 닥칠 형편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 정신을 더욱 차렸으니 그의 평생 업적은 뛰어나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증자(曾子)가 이르는바 “큰 절의에 임하면 빼앗을 수 없다”는 말과 소식이 이르는바 “충성은 임금의 노여움을 범하고 용기는 3군의 장수도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니 천하의 큰 용기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할 수 있으리오”한 말이 아마도 공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마음을 세우는 데 이르러서는 편안하고 용서함으로 주를 삼았으며 논의하는 데는 편당을 경계하였다. 바야흐로 조정이 분열되어 각각 서로 물리치고 도와주고 할 때에 홀로 이르기를 “자기와 다른 자라 하여 반드시 다 소인일 수 없으며, 자기와 같다 하여 어찌 반드시 모두 군자이겠는가. 피차를 논하지 않고 어진 자인가 아닌가를 보아 쓰고 버리기만 하면 국론이 정하여질 것이다”하였다. 그가 대사성(國子長)이 되었을 때 제생(諸生)을 불러 이르기를 “배우는 자의 임무는 오직 글을 읽고 도덕을 강론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깨끗이 하는 데 있으니, 조정의 시비는 마땅히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자기의 분수를 돌아보지 않고 교화의 모범이 돼야 할 곳에서 시사만 서로 말하고 의논한다면 군자에게 버림받을 것이요, 국가에서 선비를 기르는 뜻도 아니다”하였다. 정성껏 타이르고 깨우쳐 경박하고 날뛰는 것을 진정시키는 데 힘썼으며 선비의 풍습을 일변(一變)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서 공을 논하는 자가 한갓 그 정직함과 강직하여 굴하지 않음만 사모하고 그가 마음에 가지고 있는 너그럽고 평탄함과 가엾게 여기고 슬퍼함은 알지 못하니 이것으로는 아직 공을 참으로 안다 할 수는 없다.
공의 성질은 지극한 효성으로 늘 선부인(先夫人)을 미처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항상 마음 아파하였다. 유학(遊學)과 벼슬하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찍이 판서공의 옆을 떠나지 않아 그의 충성과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판서공이 나이 81세로 위독하였으므로 여러 형제와 더불어 주야로 부축하면서 모시고 있었고 친히 약을 짓고 맛보고 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그 슬픔을 다하였으며 빈소를 차리기 전에는 물과 장을 입에 넣지 않았고 장사하기 전에는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안장한 후에는 묘 옆에 여막살이 하여 최질(衰姪)을 끄르지 않았고 입으로 집일을 말하지도 않았다.
형제간의 우애와 친척간의 화목함에는 두터웠다. 판서공이 공은 치산(治産)하지 않는다 하여 따로 전장을 주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형제의 가난한 자에게 양여하였다. 맏누이가 그 남편을 여의고 서러워하다가 죽으므로 두 어린 고아는 외가에 의탁하였는데, 가르치고 양육함이 두 가지가 다 지극하여 자기 아들과 간격이 없기에 이르렀다. 한 누이가 가난하여 업이 없어 먹고살 길이 없으므로 여종을 주었다. 서삼촌도 땔나무와 물을 길어 주었다. 종제(從弟)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두루 구휼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여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내외의 모든 족척들도 자립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자기 소유를 모조리 던져 주어 일어나게 하였다. 비록 방안 살림살이가 텅 비었어도 개의치 않았다.
집을 다스리는 데는 엄하여 법도가 있어, 매양 삭망(朔望)에는 자질(子姪)들을 시켜 차례로 서서 참배하기를 일체 사마공(司馬公)의 집 의식과 같이 하였으며 비복도 또한 정조(正朝)에는 일제히 절함으로써 일가의 어른 아이가 모두 가장을 섬기는 예절을 알게 되었으며, 출입하는 문과 뜰이 엄숙하였다.
봉선의(奉先儀)와 길흉경조지식(吉凶慶吊之式)이란 책을 지었으니 주자의 말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모든 선비가 평론한 것을 참작하였는데 예문과 습속이 알맞았다. 정의와 예문도 서로 융화되었는데 자제들에게 가르쳐 강하고 행하게 하였다. 청성산(靑城山)에 집을 지어 낙동강 물을 내려다 볼 수 있으니 현판에 이르기를 ‘석문정사(石門精舍)’라 하고 그 가운데 단정히 앉아 태연히 스스로 만족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후생들이 학업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되풀이하면서 정신을 쏟아 그 처음부터 끝까지를 분명히 하였으며, 매양 의리를 판단하고 구별하는 것으로 의(義)의 첫째로 삼았다. 일찍이 칼을 모든 아들에게 나눠주면서 이르기를 “원컨대 너희들이 악한 생각이 일어날 때에 당하여서는 곧 이 칼로 두 토막을 내게 하라”하였다. 문장을 지을 때는 위태롭고 가시 돋친 말을 일삼지 않았으며 평탄하고 법에 맞는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였으므로 그 글을 본 자는 인의의 말임을 알 수 있다. 지은 바 소·차자·시문은 모두 병화에 잃어버리고 지금 유고 약간 권과 해사록(海槎錄) 3권이 있어 집에 소장하고 있다.
읍의 사자들이 공이 살던 임하현(臨河縣)의 서편에 사당을 세워 향사하더니 후에 여강(廬江) 이선생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공의 배위는 정부인 권씨이니 안동 사람으로 고려 태사(太師) 행(幸)의 후손이며 산계(散階) 덕봉(德凰)의 딸이다. 숙덕(淑德)이 있어 공을 40년 동안 섬겼는데 공경하고 조심하기가 하루 같았다. 무릇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르기를 “의리에 틀리지 않는가”하여, 헤아려 보고, 아뢰어서 잘 안 후에 행하였다. 공이 몰한 후 30년 동안 예법으로써 문호(門戶)를 지키면서 모친의 도리를 매우 잘 하였다. 공과 더불어 같은 무술(중종 33, 1538년) 생으로 수하기를 85세를 마쳤으므로 공의 묘 왼편에 부장하였다.
아들이 셋으로, 집(潗)은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이고 역(㴒) · 굉(浤)이다. 딸이 셋으로 맏이는 홍수약(洪守約)에게 시집갔으니 장사랑(將仕郎)이고, 다음은 권태일(權泰一)에게 갔으니 사간원 대사간이고, 다음은 김영조(金榮祖)에게 갔으니 길주목사(吉州牧使)이다. 배위 수안 이씨에서 아들이 넷이니, 잠(潛) · 심(深) · 침(沈) · 명(溟)이며, 딸이 둘이니, 이사첨(李士瞻) · 정연종(鄭連宗)에게 갔다.
집이 아들 네 사람을 낳았으니 시추(是樞)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고, 시권(是權)은 권지학유(權知學諭)이고, 시강(是杠)은 생원이고, 시절(是梲)이다. 딸도 네 사람으로 맏이는 오여발(吳汝撥)에게 시집갔으니 홍문관 교리이고, 다음은 김연조(金廷祖)에게 갔으니 권지(權知)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이고, 다음은 권상충(權尙忠) · 김석중(金錫重)이다. 역은 딸이 하나인데 권태정(權泰精)에게 갔다. 서얼(庶孼) 아들은 시가(是榎)이다. 굉은 아들이 없으므로 시절로써 뒤를 삼았으며 두 딸은 흥덕현감(興德縣監) 김응조(金應祖)와 병조좌랑 신열도(申悅道)에게 갔다. 내 외손과 증손이 남녀가 무릇 백여 인이다.
세마군(洗馬君)이 한강(寒岡)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선공(先公)이 몰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무덤가의 나무도 아름드리가 되었다. 묘도(墓道)에 새긴 돌은 아직 없으므로 불초고(不肖孤)는 늘 이 까닭으로 두려워하였다. 지금 다행히 행장을 지은 글이 이 노인에게서 나왔다. 이만하면 넉넉히 후세에 미더움을 전할 만하니 원컨대 선생은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드러나게 하는 시를 지어 주십소서”하였다. 경세(經世)는 미칠 바가 아니므로 부탁하는 것을 사양하다 못해 드디어 삼가 그 행장을 참고하여 그 큰 것만 엮어서 쓰고 이어 명(銘)하였으니, 명에 이르기를,
옛 성인이 말하기를 굳센 자를 보지 못하였다 하였으니
예전에도 능한 이가 드물었는데 하물며 지금은 더욱 못하리라
기품과 격렬한 오직 공만은 굳세고 바르기가 하늘에서 타고났네
뜻과 기운이 굳고 끄떡없어 아무도 능히 굽히지 못하였네
단정히 홀을 잡고 조정을 다스리는데 그 곧기가 화살 같더라
혹 뇌성벽력이 일어나더라도 그 비수만은 잃어버리지 않았거니
법을 존귀한 자도 지키게 하였으니 누가 감히 올바른 일 막으리
범이 큰 길에 버티고 있는 것 같으니 여우과 살괭이는 멀리 피할 수밖에
깃발을 펄렁이며 바다를 건넜는데 용절(龍節)만은 손에 잡고 있었네
바다신과 약속하였는데도 평지에 큰 파도와 큰 바람이 일어났어라
오랑캐 놈이 매우 교활하여 우리 나라를 시험해 보려 하였다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두렵게 하면서 방자히 제멋대로 뛰었으나
공은 없은 듯이 보았으며 터럭 끝도 끄덕 안하였으니
의리는 떨쳤으며 말은 엄하였다 흉악한 추물도 기운을 빼앗겼네
산과 들을 가릴 것 없이 나라 전체가 병화를 입었네
창해가 갑자기 무너지는 듯 땅이 꺼지고 하늘이 뒤집히는 듯
공만이 절의를 지켜 동남에 우뚝 솟았더라
칼을 짚고 피를 뿌리면서 이 난에 꼭 이길 것을 맹세하였네
기운도 다하고 힘도 다하여 중도에서 넘어졌으니
어쩌면 덕은 강하면서 명은 약하였던가
공은 전일에도 많은 곤경을 당했는데 하늘도 어찌 공에게 운구가 꽉 막히게 한지
모진 불이 옥돌을 태우는 것은 그 덕을 시험함이니
어찌 조금만 늦춰 큰 책임을 내리지 않았던가
이름은 풍성하였어도 지위는 낮았으니 하늘은 아마도 자세히 알리
가수천 언덕에 심어 놓은 나무가 언덕만큼이나 자랐구려
공의 형체는 여기 있으나 공의 혼은 하늘에 있네
숭정(崇禎) 4년(인조 9, 1631년) 정월일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정경세(鄭經世)가 글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