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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성정려비(吳三省旌閭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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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오삼성(吳三省, 1645~1714)의 정려각은 영양군 영양읍 영양창수로 477-4에 있다. 영양읍에서 영덕으로 향하는 918번 지방도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5㎞ 지점에 대천교회가 보인다. 대천교회 앞 돌담장으로 둘러싸인 정려가 있고, 그 안에 정려비가 있다. 정려는 현종 때 명정되어 영양읍 서부리에 건립하였고, 1700년(숙종 26) 이건하였다.
정려각 안에 세운 정려비는 옥개형(屋蓋形) 덮개돌과 방부형(方趺形) 받침돌을 갖춘 형식이다. 전면에 孝子靑巖咸陽吳公三省之㫌閭碑라 하고, 3면에 걸쳐 비문을 새겼다.
비문은 조헌기(趙獻基, 1887~1977)가 짓고, 후손 오효승(吳孝承)이 썼다.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 옥산(玉山) 마을은 함양오씨(咸陽吳氏)의 세거지이다. 오필(吳滭, 1493~1553)이 처음 진보에서 영양으로 옮겨왔고, 아들 오민수(吳敏壽, 1526~1613) 이후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오민수의 아들은 오극성(吳克成, 1559~1617)이고, 손자는 오흡(吳潝, 1576~1641)이다. 오흡의 호는 용계(龍溪)로 지역 인사들과 교유한 삼귀정(三龜亭)이 지금도 남아있다. 오흡이 세 아들 오이건(吳以建)·오이원(吳以遠)·오이달(吳以達)을 두었고, 오이건의 둘째 아들이 오삼성(吳三省, 1645~1714)이다.
오삼성의 자는 성오(省吾), 호는 청암(靑巖)이다. 어려서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묘갈명은 조술도(趙述道, 1729~1803)의 문집인 『만곡집(晩谷集)』 권13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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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강민식
[전면]
효자(孝子) 청암(靑巖) 함양(咸陽) 오삼성(吳三省)의 정려비(㫌閭碑).
[후면]
고을 동쪽 드러나지 않은 곳에 두 줄기의 용계(龍溪)가 있는데 그 위에 우뚝 솟은 정려각은 바로 청암선생(靑巖先生) 오공(吳公)의 정효각(㫌孝閣)이다. 사대부들이 그 아래를 지날 때는 모두 말에서 내려가는 것이 항식이니, 세상 사람을 깨우쳐 빛내고 다른 사람을 솟구쳐 춤추게 하러 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그 사손(嗣孫) 승협(承莢)과 그 재종손 승걸(承杰)이 공의 유사를 가지고 내게 찾아와 정려각을 드러낼 글을 청하여 말하길, “우리 선조가 살던 때는 지금보다 2백 년이나 오래되었으나 옛 현판을 고쳐 걸 겨를이 없었습니다. 저희들이 불초한 무리이나 진실로 죄가 있어 지금 작은 돌을 갖추었으니 원컨대 글을 지어 몽매함을 깨우쳐 주십시오.” 하였다. 돌아보니 나이가 구순이 임박하고 정신이 혼미하여 감히 이 일을 맡을 수가 없으나 대대로 나눈 정의가 두터워 끝내 사양하지 못했다. 삼가 가지고 온 바탕을 헤아려 써서 이른다.
공의 휘는 삼성(三省), 자는 성오(省吾), 호는 청암(靑巖)이다. 오씨의 윗대에 휘 광휘(光輝)가 있으니 신라[東京] 때 원훈(元勳)으로 함양(咸陽)을 식읍으로 받으니 자손들이 드디어 관향으로 삼았다. 다음 세대에 휘 엄(儼)은 대사헌(大司憲)과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는데 화산(花山)의 임하(臨河)에 우거하면서 호를 임강헌(臨江軒)이라 하였다. 증손 중부장(中部將) 휘 필(滭)에 이르러 또 영양(英陽)으로 옮겨 세거하였다. 할아버지의 휘 흡(潝, 1576~1641)은 좌랑으로 명이 망한 후 절의를 지켜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았다. 아버지 휘 이건(以建, 1606~1680)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으나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선생과 더불어 도(道)로 교유하였다. 숭정(崇禎) 을유(乙酉, 1645) 3월 30일 대천(大川) 선제(先苐)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인품은 인자하고 효성이 뛰어났으며 총명하고 아는 것이 많았으니 뛰어남을 말할 수 없다. 나이 겨우 15세 때 아버지를 모시고 같은 방에서 함께 잠들었는데, 강도 20명이 칼을 들고 불을 밝히며 돌입하여 처사공을 찌르려 하였다. 공이 처사공을 감싸며 크게 외치길, “나를 죽이고 우리 아버지는 상하게 하지 말라.”하였으니 대여섯 군데 상처를 입었어도 끝내 피하지 않았다. 도적이 이내 감동하여 둘을 풀어주었다. 이 소식이 미치자 놀라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칼에 베어 살이 벌어진 곳이 여럿인데 며칠 되지 않아 상처난 곳이 봉합되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현종 때 정려(旌閭)를 명하고 이내 복호(復戶)되었다. 공은 과정에 따라 공부하며 채근하지 않아도 능히 깨달았으니 무릇 <판독 불가> 석계(石溪) 이선생(李先生) 시명(時明)이 일찌기 이곳을 지나다 장려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680) 처사공이 병으로 눕자 손가락을 잘라 드시게 하니 수일 연명하였다. 상례에 여묘 3년을 하니 몸이 수척하고 …. 마침내 갈암(葛庵) 이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우리 유학을 계승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 용계공의 삼구정(三龜亭)이 오래도록 퇴락하여 터만 남아 여러 친지들과 비용을 마련하여 중건하고 <판독 불가> 공이 갑오년(甲午年, 1774) 4월 13일 정침에서 졸하니 향년 70이었다. 공이 돌아가신 후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이 안절사(按節使)로 산남(山南, 영남)을 순행하다 본현(本縣)에 이르러 정려 아래에서 예를 갖추고 인하여 자손을 방문하여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또 조정에 알려 포증(褒贈)을 청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공의 첫 부인은 영천이씨(永川李氏)로 진사 형직(亨直)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백륜(白㫻)에게 시집갔다. 부인 영해신씨(寧海申氏)는 생원 이겸(履謙)의 딸이다. 두 딸을 두었는데 김언국(金彦國), 남붕정(南鵬程)에게 시집갔다. 부인 대흥백씨(大興白氏)는 진사 진흥(震興)의 딸이며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학태(學泰), 학중(學仲), 학계(學季)이며 딸은 임명대(任命大), 류성현(柳成鉉)에게 시집갔다. 학내는 3남을 두었으니 필대(必大)와 주대(柱大), 규대(規大)이며 딸은 김상철(金相喆), 이우상(李宇常)에 시집갔다. 학중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분대(賁大)와 관대(觀大)이며 딸은 박세호(朴世豪)에게 시집갔다. 학계는 1남 2녀를 두어 아들은 진대(震大)이며 딸은 조상기(趙尙麒), 백서옥(白瑞玉)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많아 기록하지 못한다.
유명(遺命)에 따라 나방산(羅方山) 선고(先考) 묘 아래에 모셨다. 전부인 이씨(李氏)의 묘는 주현(注峴) 좌랑공(佐郞公)의 묘 왼쪽에 있고, 신씨(申氏)와 백씨(白氏)는 나란히 공의 무덤 동쪽 미향(未向) 언덕에 합장하였다. 공이 정려를 명받았을 때 옥천(玉川) 조선생(趙先生) 덕린(德鄰)이 기문을 써서 걸고 받들어 광중에 모셨다. 옥천 조덕린, 밀암(密庵) 이재(李栽), 하▧(荷▧) 권두경(權斗經), 고재(顧齋) 이만(李槾), 산택(山澤) 권태시(權泰時), 적암(適庵) 김태중(金泰重), 청사(晴沙) 권두기(權斗紀), 주강(柱江) 조시광(趙是光) 등 여러 선생 중 만사(挽詞)와 뇌사(誄詞)를 집어들면 가히 한 때 사우(師友)의 성함을 볼 수 있다. 또한 마음을 움직여 보여준 공의 특별한 효가 천고(千古)의 세월이 지나 없애려야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드디어 명을 지어 가로되,
산악은 때가 되면 무너지고 금석(金石)은 때가 되면 뚫린다.
오직 선생의 특별한 효는 천지와 더불어 모두 가릴 만큼이라.
어찌 허투루 맡아 다시 새길까, 영원히 이 돌로 말하리라.
계축(癸丑, 1973) 오추(梧秋, 7월)에 한양(漢陽) 조헌기(趙獻基, 1887~1977)가 삼가 짓고, 계축년 10일 모일 방예손(傍裔孫) 오효승(吳孝承, 1906~1974)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