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 태사 김공 신도비명 병서
지난 숙종(肅宗) 을해년(1695) 10월에 우리 태사 부군의 묘단(墓壇)이 비로소 이루어졌는데, 지금까지 230여 년이 지나도록 오히려 새겨서 드러내는 것[비석]이 없는 것은 아마도 비문(碑文)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손 서규(瑞圭)가 단소(壇所)에 성묘
2하고 온 집안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기를 “태사 부군의 풍성한 공훈과 성대한 공렬(功烈)은 역사책
3에 실려 있으니, 비석을 기다리지 않아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덕을 나타내어 게시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한층 우러러보고 길이길이 세대마다 혹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비석뿐인데, 비석을 어찌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돈을 모아 돌을 다듬고 나(영한)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였는데, 보잘것없고 얕은 배움으로 그 어떻게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맡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문간공(文簡公:김창협(金昌協))이 지은 《시조태사묘단기(始祖太師墓壇記)》에 내용이 곡진하고 마땅함을 자세하게 다했으니 감히 한마디 말도 덧붙일 수 없음이겠는가? 이에 삼가 《시조태사묘단기(始祖太師墓壇記)》를 그대로 써서 서문으로 삼았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
“시조 태사 김 공의 휘(諱)는 선평(宣平)이고, 신라 말에 고창성주(古昌城主)가 되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토벌할 때 공이 권행(權幸)·장길(張吉)과 더불어 군(郡)으로 돌아가 고려 태조에게 붙었으니, 태조가 힘을 얻어서 마침내 병산(甁山, 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서 승리했다.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의로운 명성을 더욱 떨쳐서 마침내 견훤을 멸했으니 본래 공을 비롯한 세 분의 힘이었다. 공(功)을 책록(策錄)함에 먼저 공(公)으로 대광(大匡)을 삼고, 권행과 장길로 대상(大相)을 삼고, 함께 호를 내려주기를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4과 태사의 벼슬을 하사하고, 고창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공이 이미 돌아가심에 안동의 백성들이 그 공덕을 사모하여 관아에 사당을 세우고, 권·장 두 분 태사를 함께 향사하여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은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지은 《삼공신묘증수기(三功臣廟增修記)》에 갖춰져 있다.”고 했다.
대개 공이 고창을 지킴에 신라의 국운이 이미 다하였는데, 역적 견훤이 신라의 임금을 해쳤으니 의리상 반드시 보복을 해야 했다. 돌아보건대 공이 외롭게 한 외로운 성으로써 흉적의 서슬에 맞서려 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고려에 붙어서 함께 원수의 적을 멸망시킬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그 의(義)를 폈으니 이는 거의 장사도(張司徒:장량(張良))가 한(漢)나라를 도와 진(秦)나라와 초나라를 멸망시켜 한나라의 원수를 갚은 것
5과 서로 같았고, 그 유풍(遺風)에 격발된 바는 백성들이 의(義)에 용감해졌음이 야별초(夜別抄)와 홍건적(紅巾賊)의 난리 때에 모두 죽을힘을 내어 임금님을 호위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풍속을 이룬 것과 같으니 이는 더욱 공이 한 지방에 덕이 되는 까닭이니, 백세토록 사당에서 제사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공의 무덤은 세월이 오래되어 그 묻힌 곳을 잃었는데, 『東國輿地勝覽』에 그 묘가 안동부 서쪽 고태장리(古台莊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증조부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부군(府君)께서 일찍이 여러 종인(宗人)을 데리고 두루 다니며 찾았고, 심지어 글을 지어 천등산(天燈山)에 빌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안동부 서쪽 10여 리에 봉우리가 있는데 태장봉(台莊峯)이니 바로 천등산의 왼쪽 기슭이고, 그 아래 지명이 당동(堂洞)인데, 마을 사람들과 나무꾼과 사냥꾼이 모두 태사묘동(太師墓洞)이라고 불렀다.
숭정 병인년(1686)에 종인(宗人) 김연(金(土+寅)) 등이 그 이름을 가지고 찾고자 하여 그곳에 갔더니, 신씨(申氏) 성을 가진 자가 그 가운데 여러 대를 매장했다고 하였다. 다만 한 묘(墓)의 뒤쪽 10여 걸음쯤에 옛 무덤 같으면서 평평한 곳이 있었고, 담장이 밖으로 빙 둘러 있어 땅의 윤곽을 분별할 만했는데. 대체로 커다란 무덤 같고, 그 형국(形局)과 앞을 바라보는 것이 또 옛 서적이나 마을 어른들의 기억과 흡사하여 십중팔구가 징험할 만하였다. 또 들으니 신씨들이 장사를 지냄에 실제로 두 기의 옛 무덤을 발굴해서 다른 곳에 묻었고, 담장 아래에서 또 묻힌 돌이 지석(誌石) 같은 것이 숨겨진 것을 얻어서 더욱 의심할 만했다. 이에 여러 종인이 그 일의 전말(顚末)을 갖추어 관청에 송사하였고, 관청에서 심문하여 과연 무덤을 발굴한 형상을 얻어서 곧 파 버렸으나 지석을 끝내 찾지 못하여 증험할 수 없었으며, 관청에서도 또한 그 일을 끝까지 밝히려고 하지 않아 이에 드디어 그만두게 되어 이미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곧 말하기를 “생각건대 우리 태사께서는 공(功)이 신라에서 고려로 바뀌는 즈음에 있어서 이름이 역사책에 드러나고 덕이 온 고을에 베풀어져 자손이 음덕을 받아 번성하지 않음이 없지만, 의관을 묻은 곳을 잃어 묻힌 곳을 알지 못한 것이 몇 백 년이 지나도록 벌초하고 제사 지냄이 미치지 못하였더니 이번에 다행히 거의 진짜 무덤을 찾을 뻔하였으나 돌아보건대 나쁜 사람들이 몰래 점령하여 무덤이 훼손되고 비석 판이 없어져 끝내 그 사실을 증험하여 무덤에 흙을 더 쌓아 올릴 수 없어서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니 그 어찌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달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옛날에 제사를 지내는 방법 중에는 진실로 무덤을 바라보고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었으니, 지금 그것을 본떠 제단을 만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선조의 시신과 혼령이 묻힌 곳처럼 느끼고, 밭 갈고 나무하고 풀 베는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예법에 혹은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모두가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모년(某年) 모월 모일로 날을 받아서 터를 닦아 태사묘동 안에 제단을 만들었다. 이윽고 완성되어 제사를 지냄에 종인이 모두 모였다. 이때부터 봄가을 향사를 한결 같이 윗 무덤의 거동과 같이하여 영구히 지켜 행하기를 기약하고 또 제단 옆에 비석을 세우고 이 사실을 새겨서 후손들에게 알리기를 꾀하였는데, 백부(김수증)께서 나에게 그 본말을 갖추어 적으라고 명하셨다
6.”고 기록하였는데, 자손에 관한 기록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태사 부군 아래로 혹은 몇 대가 없어졌다고 하고, 혹은 처음부터 없어지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의심되는 것을 의심되는 대로 전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다. 족보에 기록된 여러 파(派)가 저마다 그 파조(派祖)를 1세(世)로 삼아 전해서 지금에 이른 것은 혹은 30여 세(世), 혹은 20여 세(世)인데, 이름난 공경(公卿)과 큰 재상이 뛰어나게 서로 이어졌고 충성과 절의, 효성과 우애, 경술(經術)과 문장이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며, 후손들이 번성하여 자못 온 나라에 두루 퍼져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은 진실로 부군께서 몸소 힘써 후손들을 보살펴 길이 번창하게 하신 까닭이니 아아. 성대하도다! 명(銘)을 하여 말하기를
羅氏季葉 신라 말엽에
公守古昌 공께서 고창을 지키셨으나
邦命杌隉 나라의 운명이 이미 기울어
賊勢鴟張 적의 세력이 크게 뻗쳤네.
擧義佐麗 의롭게 일어나 고려를 도와
揚武桓桓 무용을 드날림이 굳세고 굳세었네.
瓶山一捷 병산에서 한 번 이김에
生靈奠安 백성들이 안정되었네.
紀功錫爵 공적을 기록하여 벼슬을 내리니
是報是酬 이에 보답하고 이에 응수(應酬)했네.
是尸是祝 여기에 시동(尸童)을 앉히고 여기에 축문을 읽으니
垂之千秋 천추(千秋)토록 드리워지리라.
天燈左麓 천등산 왼쪽 기슭은
衣履攸藏 옷과 신발을 묻은 곳일세.
奸盜占域 간악한 도적들이 지역을 차지해서
久失若堂 오래도록 무덤을 잃어버렸네.
春露秋霜 봄 이슬과 가을 서리에
灑掃靡及 벌초하고 제사지냄이 미치지 못하였네.
若苗若裔 우리 후손들이
痛恨涕泣 애통하고 한스러워 눈물을 흘렸네.
爰謀築墠 이에 제단을 쌓아서
歲薦蘋藻 해마다 제수를 바치기를 꾀했네.
允合人情 진실로 인정에 부합하여서
庶慰神道 거의 신도(神道)를 위로하였네.
迺礱穹石 이에 커다란 돌을 다듬어서
峙于崇岡 높은 언덕에 우뚝이 세웠네.
大書深鑱 큰 글씨를 깊이 새겨서
昭眎茫茫 밝게 나타냄이 아득하네.
임신년(1932) 겨울 10월 아무 날에 세우다.
후손 통정대부 비서원 승 영한(甯漢)이 삼가 짓고,
후손 가선대부 동지돈녕원사 용진(容鎭)
7이 삼가 쓰고,
후손 숭록대부 판돈녕원사원임 규장각 직제학 종한(宗漢)
8이 삼가 두전(頭篆)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