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선무랑(宣務郞) 율봉도찰방(栗峯道察訪)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화헌(華軒) 장선생(張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명나라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 충성을 다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 사람에게 은총을 극진하게 베풀었으니 어찌 특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성은 장(張)이고 이름은 해빈(海濱)이고 화헌(華軒)은 그의 호이다. 대대로 절강(浙江)에 살았기에 이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한나라 유후(留侯, 張良)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맹경(孟慶)으로 명나라의 국자생(國子生)이었고 조부는 충원(忠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자사(刺史)를 지냈다. 부친은 응화(應華)로 태의감(太醫監)을 지냈다. 모친은 태위(太尉) 주의먕(朱義明)의 딸로 만력(萬曆) 을해년(1575)에 공을 낳았다. 자질이 남달랐고 장성하자 담력과 용기가 있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으며 육도삼략의 이치를 알았다.
정유년(1597)에 오유충(吳惟忠)공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왜란을 구하려 할 때 공을 불러 좌익장(左翼將)으로 삼으니 이때 나이가 23세였다. 충성스러움과 용기를 내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싸워 처음에 죽산(竹山)에서 승전하니 비석이 세워지고 그 공이 새겨졌다. 충원(忠原, 忠州)과 증성(甑城)에서의 승전도 모두 공의 힘이 많았다. 왕의 군대가 개선하는 날에 공은 홀로 남아서 돌아가지 않고 적라(赤羅, 군위)의 북산(北山)에 터를 정해 살았다. 비록 전쟁터에서 탄환에 맞은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것을 핑계됐으나 실은 이천피발(伊川被髮)
2의 근심을 드러낸 것이다. 남태수(南太守)가 이른바 “세상을 피하여 한번 들어오면 여러 장군들도 미칠 수 없는 곳이다.” 라 하였는데 이는 실제의 말이다.
조정에서 그 공훈을 생각하고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처음에 혜민서 참봉(惠民署叅奉)에 임명하고 다음에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에 임명했는데 한번 숙배(肅拜)하고 곧 물러나 거주지의 뒷산에 단을 세우고 대명단(大明壇)이라 이름하였다. 매년 세 황제의 기일에 서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또한 동굴 하나를 차지하고는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여기에 묻으라.” 하였다. 병석에 눕기 7일 전에 소고기와 술을 갖추어 가족과 이웃에게 먹이고는 말하기를, “나는 장차 죽게 될 것이니 그대들과 이별하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그 날에 이르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서쪽과 북쪽을 향하여 각각 네 번 절하고 자리를 바르게 하고 죽었다. 이 때가 숭정(崇禎) 정유년(1657) 11월 19일이었다. 북산(北山)의 남쪽 너머 을좌(乙坐)의 등성이에 안장하니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그 후 조정에서 그 마을을 중화촌(中華村)이라 이름하고 사림들이 사당을 세워 경화사(景華祠)라 하니 모두 그를 숭앙하기 위한 것이다. 고종 임진년(1892)에 후손 헌규(憲奎)가 태상시(太常寺)에 아뢰니 병조참판(兵曹叅判) 겸 훈련원사(訓鍊院事)에 추증되고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무덤은 묘역은 같고 봉분은 다르다. 5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로는 장남 통덕랑(通德郎) 덕례(德禮), 덕지(德智), 덕제(德悌), 덕신(德信), 통정대부(通政大夫) 덕안(德安)이 있고, 딸은 정계룡(鄭繼龍)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총명하고 훌륭한 모습으로 문무(文武)의 기량(器量)을 겸비하여 중화(中華, 중국)에서 태어나 묘년(妙年)에 발탁된 인재로 변방의 나라로 나와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공을 세웠으니 그 높은 공훈과 탁월한 식견을 구구절절 많이 칭찬한 것이 이미 여러 선배들의 글에 두루 나타나 있는데 지금 어찌 감히 반복할 필요가 있겠는가. 공의 세손(世孫) 갑무(甲武), 원환(元煥), 석순(錫淳)이 유적을 가지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행적이 이와 같습니다. 비록 여러 조정에서 기리는 명과 높은 관직을 받았으나 자손들이 미약하여 아직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훼철된 사당을 다시 세우고 크고 작은 묘도비(墓道碑)를 세웠습니다. 일이 끝났으니 원컨대 한 말씀으로 선양해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다만 나는 말학(末學)으로 이 책무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이에 사양했으나 부득이 하여 현인이 서술한 글을 모아 서문을 짓고 명(銘)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皇明爀閥 명나라의 빛나는 문벌로
海東茂績 우리나라에 무성한 공적 이루었고
運籌遺謨 궁리하여 계책을 남겼으며
出奇韜略 육도삼략에 매우 뛰어났네
旣文且武 문과 무를 아울러 갖추어
扶傾社稷 기울어가는 나라를 붙잡았으니
炳幾蹈海 밝기로는 거의 도해(蹈海)
3와 같고
築壇戀國 제단을 세워 고국을 그리워하였네
考槃赤羅 적라[군위]에서 유유자적하였는데
再仕一肅 두 번 임명에 한번 숙배하고 물러났네
天餉終老 천복 누려 고종명한 지
於焉歲百 어느덧 백년이 흘렀네
叫章上徹 호소하는 글이 임금에게 전해져
亞卿寵爵 참판 벼슬에 추증되었으니
榮動泉臺 영광은 저승에도 알려져
名傳竹帛 이름이 역사에 전해지리라
尙節溯韻 지조를 숭상하고 여운을 따라
後人之式 후인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鑱辭徵賢 글을 새겨 현명함 드러내어
昭示無極 무궁한 후대에 밝게 보여주리라
병인년(1926) 4월 일에
장사랑(將仕郞) 전(前) 혜릉참봉(惠陵叅奉) 진성(眞城) 이중철(李中轍) 삼가 지음.
지군(知郡) 경주(慶州) 최항묵(崔恒黙) 삼가 씀.
서기 1976년 병진년 4월 일에 고쳐 세움.
후손 응무(應武)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