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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익신도비(裵三益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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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는 조선 중기 문신인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배삼익(裵三益)의 사적(事蹟)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배삼익은 자가 여우(汝友)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31세의 나이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 호조 좌랑, 풍기 군수(豐基郡守), 양양 부사(襄陽府使), 사간원 정언(正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87년(선조 20)에 진사사(陳謝使)로 차임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가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다 병이 심해져 사직하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죽었다.
비석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며, 글자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비의 상단 네 면에는 관찰사 임연재 배 선생 신도비(觀察使臨淵齋裵先生神道碑)가 새겨 있다. 비문에는 흥해 배씨의 가계와 배삼익의 일생, 비문을 쓰게 된 경위, 명(銘)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이 비는 배삼익의 사적과 그의 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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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신진호
관찰사 임연재(臨淵齋) 배 선생(裵先生) 신도비(神道碑)
만력24년(1596, 선조 29) 3월 19일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사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일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事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一師)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은 지었다.
신도비명 병서(幷序)
고(故) 통정대부(通政大夫)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배여우(裵汝友)가 세상을 떠나고 7년 뒤, 그의 아들 세자 세마(世子洗馬)인 배용길(裵龍吉)이 공의 행장을 가지고 우리집에 찾아와 묘도명(墓道銘)을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그의 행장을 읽고 슬퍼하며 “여우는 나의 벗이다. 평소 교분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여우에 대해 다 알고 있으니 내가 여우의 묘도명을 쓰지 않고 누가 쓰겠는가. 다만 노쇠하고 병들어 종이와 붓을 겁내니 어찌하리오.”라고 하였다. 배용길이 울면서 더욱 간곡하게 부탁하기에 나는 더욱 슬픈 마음이 일어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침내 먼저 배공의 일생에 대해 서술하고 뒤에 행장을 근거하여 말하였으며, 이어서 명을 붙였다.
나는 나이 16세에 처음으로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였다. 그 해 가을 여우가 시골에서 올라와 우뚝하게 두각을 드러내어 이미 동료들에게 추중을 받았다. 고금의 일을 논할 때면 두루 꿰뚫었고 음성이 유창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나는 그를 좋아하고 사모하여 날마다 그의 거처에 가서 이야기를 들었다. 원(院)에 들어가기 전날 저녁에 나는 여우가 있는 곳에 가서 잠을 잤는데 도성 거리엔 인적이 없었고 달이 밝아 마치 대낮 같았으며, 종루(鐘漏) 소리가 밤새도록 귓가에 울렸다. 닭이 울자 여우가 발로 나를 재촉해 깨워 나란히 말을 타고 원에 나아갔다. 뜰 가운데에 있는 큰 회화나무 아래에 멈추어 서서 불빛 속의 푸른 잎을 우러러 보았는데 층층이 우거진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시제(詩題)가 나오자 여우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날이 저물기도 전에 두 편을 모두 완성하였는데 한창 여력이 있었다. 나는 시가 완성되었지만 베끼어 쓰지 못하였는데 여우가 나 대신 글을 써주었다. 급제자를 호명할 때 나는 다행히 호명되었으나 여우는 호명되지 않았다. 여우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나는 다시 술병을 갖고 와 그를 전송하면서 행(幸), 불행(不幸)에 대한 시를 지어 작별하였다. 이때부터 우정이 날로 친밀해져 만나지 않을 적에는 서로 그리워하고, 만나게 되면 둘 다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어 여러 날이 지나도록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여우는 죽고 나 또한 늙었으니, 이번 생에 어찌 다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슬프다.
행장을 살펴보니, 성은 배씨(裵氏)이고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고려 때 배경분(裵景分)이 검교장군(檢校將軍)이 되었고, 4대 뒤에 배영지(裵榮至)가 전리판서 평양 윤(典理判書平壤尹)이 되었다. 그 아들 배전(裵詮)은 충렬(忠烈)·충선(忠宣) 두 왕을 섬겨 성근 선력 익대 좌명 공신(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으니, 흥해 배씨가 이로부터 더욱 알려졌다. 그 아들 배상지(裵尙志)는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다. 높은 절개와 원대한 식견이 있었는데, 일 때문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당시 고려의 국운이 이미 다하였으므로 마침내 안동부 금계촌(金溪村)에 숨어살면서 집 이름을 백죽(柏竹)이라 지어 스스로 자기의 뜻을 드러내고 일생을 마쳤다. 백죽의 후손은 사헌부 지평 배권(裵權), 녹사(綠事) 배효장(裵孝長), 소위장군(昭威將軍) 배임(裵衽)인데, 배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성균 진사 배이순(裵以純)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성균관 생원 배헌(裵巚)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배천석(裵天錫)으로,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에 올랐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영일 정씨(迎日鄭氏)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3대 모두 공이 현달함에 따라 추증된 것이다.
공은 무오년(1558, 명종 1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갑자년(1564)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성균관 학유(學諭), 학록(學錄), 학정(學正), 박사(博士)를 차례대로 거쳐 호조좌랑으로 승진했다. 계유년(1573, 선조 6)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다. 을해년(1575)에 복제(服制)를 마치고 예조 좌랑·성균관 전적(典籍)·형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또 사간원 정언으로 교지를 내려 특별히 불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천전(遷轉)되어 부임하였고 임기를 다 채우고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승문원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나가지 않았다. 신사년(1581)에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에 소명(召命)을 받고 들어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고, 얼마 뒤 체직되어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 누차 직강(直講),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천전되고 다시 사예, 장령이 되었는데 성균관 사성(司成), 사간원 헌납 겸 춘추관기주관(司諫院獻納兼春秋館記注官)으로 옮겨갔다. 얼마 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知製敎兼經筵檢討官),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뽑혀 들어왔고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으며 재차 장령, 사간에 제수되었다. 을유년(1585) 겨울에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이 되었는데, 왕명의 출납을 진실 되게 하여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어 상호군(上護軍)이 되었고 장례원 판결사에 제수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겨졌다.
당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빙문(聘問)하러간 자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어서 어떤 이는 길에서 방물(方物)을 잃어버리고 어떤 이는 옥하관(玉河館)에 불을 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사신을 뽑아 사죄하려 하였고 공이 사신으로 선발되었다. 공이 떠나는 길에, 선비를 기르는 곳의 장관(長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고 하면서 대사성을 사직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서 떠났다. 돌아와 우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당시 황해도에 해마다 흉년이 이어지자 조정에서 구황(救荒)을 급선무로 할 것을 의논하면서 감사(監司)를 잘 선택해서 임명해야 구제할 수 있다고 여겨 마침내 공을 관찰사로 삼았다. 이 때 공은 병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 여러 고을을 순행하면서 고생을 꺼리지 않았다. 그러다 병이 마침내 더욱 심해져 거듭 사직을 청하여 체직되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5세였다.
부고가 들리자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 조문(弔問)하였고, 조정에서는 예법대로 부의(賻儀)를 내리고 제사지냈으며, 일로(一路)에서 배와 수레로 그 길을 호위하게 하였다. 그 해 10월 기사일(己巳日)에 안동부 북쪽 내성현(奈城縣) 호애산(虎崖山)의,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바라보는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곳은 바로 선친 참판공 묘소의 뒤이니, 공이 맑은 정신일 때 한 유언을 따라 묻은 것이다.
공은 어려서 대부인(大夫人)을 여의었고 집은 가난했으나 힘써 배우고 스스로 분발하여 장성하였다.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직무에 임하여 신중히 하고 부지런히 하여 일마다 모두 해내었다. 풍기 군수가 되어서는 아전들을 엄히 다스리고 몸가짐을 간소하게 하였으며 백성을 사랑으로 어루만지니, 처음에는 성격이 강경한 이들이 썩 기뻐하지 않았으나 몇 년이 지나자 고을에서 공의 치적을 칭송하였고, 공이 떠난 뒤에도 공이 남긴 은택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양양(襄陽)은 바닷가에 있는 고을로 토속이 순박하였다. 공이 이러한 풍속에 맞게 다스린 데다가 너그럽고 소탈하게 백성을 다루어 피폐하고 쇠잔해졌던 것들을 다시 일으키고 소생시키니, 선정(善政)의 명성이 더욱 자자하였다. 제사를 더욱 중시하여 문묘(文廟)의 석전제(釋奠祭), 사직(社稷) 및 성황(城隍)의 여제(厲祭)까지 모두 몸소 직접 하였다. 매년 동해신(東海神)에 제사지낼 때 축책(祝冊)이 경사에서 오면 공은 경건하고 엄숙하게 일을 받들었는데 더욱 엄격하고 신중하게 하였으니, 비가 오거나 볕이 쬐기를 기도할 때면 그 기도대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황사(城隍祠)에 들어갔을 때 마을의 무당이 지전(紙錢)으로 내부를 어지럽혀 놓았는데 공이 거두어 불태우라고 명하고서 땅을 쓸고 제사지냈다.
당시 북쪽에 경보가 있자 남방의 곡식을 운반하여 군량을 공급하게 되었다. 큰 배를 만들어 바다로 실어 나를 것을 건의한 자가 있었는데, 큰 배는 매서운 풍랑에 맞서지 못하여 번번이 물속에 가라앉아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공이 그러한 폐단을 알고 장령에 임명되어 조정에 돌아왔을 때 즉시 상께 아뢰어 이를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또 동성(同姓) 간의 혼인을 금할 것을 청한 일은, 이때 조정의 의론이 둘로 갈라지고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트집 잡아 공격하여 사류를 해치는 일이 많자 공이 이를 매우 근심하였다. 공이 조정에서 의견을 낼 때 과격하지도 않고 줏대 없이 남을 따르지도 않았으니 식견이 있는 자들은 공이 지조가 있음을 알았다. 대사헌에 함부로 오른 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감히 따지지 못하였다. 공이 사간원에 있으면서 홀로 “화와 복은 하늘에 달려있으니 응당 나의 직책을 다 할 뿐이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그를 논핵(論劾)하였다. 또 주인을 모함하여 거짓으로 공훈(功勳)을 얻은 자의 명적(名籍)을 삭제할 것을 아뢰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히 여겼다. 공이 경사(京師 명나라 수도)에 진사사(陳謝使)로 가서는 칭찬하고 장려하는 말이 담긴 황제의 칙서와 하사(下賜)받은 망룡의(蟒龍衣)를 가지고 돌아오자 상이 가상히 여겨 “전대(專對)의 충성이 아니면 어찌 이러한 것을 얻었겠는가.”라고 하시고 내구마(內廏馬)를 하사하셨다.
황해도에 있을 때는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는데 극진하게 계획하고 다스렸으니, 그에 힘입어 살아난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윽고 병으로 매우 쇠약해지자 그 아들 배용길이 쇠고기가 기운을 내게 해줄 수 있다고 하여 구해다 올렸는데, 공이 이를 물리치며 “내가 한 지방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나라에서 금한 고기를 먼저 먹어서야 되겠느냐! 너의 아비를 죄에 빠뜨리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아. 공은 먹고 마시는 자잘한 일에서까지 죽음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다른 것들도 알 만하다.
공은 집안에서 효성이 매우 독실하였다. 항상 녹봉으로 부모 생전에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서러운 일로 여겨, 말하다가 이에 대해 언급할 때면 번번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 때는 옷에서 띠를 풀지 않았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초상과 제사에 슬픔과 예를 다하였고, 아버지 묘 옆에 여막을 짓고서 삼년상 동안 집에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우들과도 우애가 있었으니, 이는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사업에 시행한 것은 근본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지 우연히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만년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도목촌(桃木村)의 언덕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서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산수(山水)’라 이름 지었으며 또 서재를 ‘임연(臨淵)’이라 짓고 이따금 벗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는데,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쉬면서 일생을 마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공은 휘가 삼익(三益)이고, 여우(汝友)는 그의 자이다. 공의 부인은 영남 남씨(英陽南氏)이니, 처사 남신신(南藎臣)의 딸이며 정부인에 봉해졌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배용길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천거되어 익위사에 제수되었다. 학문을 갖추었으니 장차 공의 가업을 이을 것이다. 막내 아들 배용필은 일찍 죽었다. 딸들은 아무개,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몇 명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得之天者非質耶 하늘로부터 얻은 것은 바탕이 아니겠는가
成之己者非學耶 자기에게서 이룬 것은 학문이 아니겠는가
發之名者非時耶 이름을 드러낸 것은 때가 아니겠는가
全之孔艱 이를 온전히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지라
若將有爲 마치 훌륭한 일을 할 듯 하였는데
胡寧止是 어찌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단 말인가
未究厥施 그 베풂은 아직 다하지 않아
尙有餘慶 여전히 남은 경사가 있으니
徵此銘詩 이 명시에서 징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