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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협신도비(權悏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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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는 1673년에 건립된 권협신도비명(權悏神道碑)으로 조경(趙絅)이 비문을 지었으며, 조위명(趙威明)이 글씨를 썼다.권협의 본관 안동이고, 자는 여명(汝明), 호 초루(草樓)이며 서울 출생으로 관찰사 벽(擘)의 아들이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문명이 높았으며, 음보(蔭補)로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지냈다. 아우 필(鞸)이 당시의 집권당인 대북(大北) 일파의 음모로 유배되어 귀양 가던 도중에 죽자 벼슬에서 은퇴하였다.1618년(광해군 10) 대북 일당들이 강에서 주유(舟遊)함을 보고 뛰어들어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키고 정권을 농단하는 처사를 꾸짖어 화를 당할 뻔하였다. 문집에 《초루집(草樓集)》이 있다.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길창부원군(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吉昌府院君) 행유충장의선무공신 숭록대부 예조판서 겸오위도총부도총관 길창군(行幼忠仗議宣武功臣崇政大夫禮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吉昌君) 권공신도비명병서(權公神道碑銘竝序)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행판중추부사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行判中樞府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 조경(趙絅)이 글을 짓고,
중직대부(中直大夫) 행사헌부장령(行司憲府掌令) ▨▨▨이 전액(篆額)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간원정언(行司諫院正言)조위명(趙威明)이 글을 쓴다.
정미년 11월 영가(永嘉:안동의 옛이름) 권대부(權大夫)가 대사간으로 재직하다가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나의 집을 찾아왔다. 대부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 조부께서는 높은 공을 세워 공신에 책봉되었고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이제 묘소에 심은 나무가 굵어진 정도로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비석이 세워지지 않은 것은 사실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집사(執事:상대방의 경칭)께서 묘비문 짓기를 꺼리신다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불초한 우리들이 선조의 행적을 길이 전하는 데에는 집사(執事)가 아니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감히 가장(家狀) 한통을 올리어 집사께 누를 끼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며 “옛날에 촉지무(燭之武)가 말하기를, ‘젊은 날에도 남만 같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이제 늙었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상황은 비록 같지 않지만 이 말은 나의 처지에 알맞은 말이다. 더욱이 나는 여든 살이 넘어버려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며 오랫동안 붓을 놓아버렸으니 대군자의 훈덕과 대업을 나의 붓으로 그린다면 후에 대부가 후회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금년에 또 사람을 보내 대신 예물을 전하며 매우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대략 그 뜻은 내 나이로 보아 선조대왕께서 어진 정사를 펴시던 때에 내가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 틈에 끼어 당시의 훌륭한 공경(公卿)의 풍모를 조금이나마 가까이서 접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부공은 어떻게든 나의 제대로 되지 못한 글 한 줄을 얻으려 하였고, 나는 그가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이 뭇사람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에 감동하여 마침내 허락하고 가장(家狀)을 살펴보았다.
옛날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반란을 일으켜 배은망덕하게도 주인을 무는 개처럼 신라의 왕에게 독수(毒手)를 뻗었는데. 당시에 신라의 후예로서 길창군(吉昌郡)을 지키던 행(幸)은 고려 태조에게 군(郡)을 바치고 투항하여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으니 태조가 의롭게 여기어 권(權)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대개 그 뜻은 기미를 잘 알고 권도에 통달하다는 것이다. 그 후에 자손들이 매우 번창하였고 수백 년 동안 모두 충효로써 이름났으며 지금까지도 흥성하다. 보(溥)는 충효로써 역시 커다란 명성을 얻었으며 벼슬이 첨의(僉議)에 이르렀는데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간행을 건의하여 시행되자,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보(溥)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팔대를 내려와 상(常)에 이르러서는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동흥부원군에 봉해졌다. 천성이 성실하고 효성이 있어 천지를 감동시키는데 이르자 선조대왕께서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붉은 관복을 하사하여 통정대부에 올렸으며 후에 팔십세에 이르자 가선대부로 올렸으며 정려문을 하사하였으니 이 일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묘지문(墓誌文)에 자세히 실려있다. 부인은 안정나씨(安定羅氏)인데 고려 지후직경(祗侯直卿)의 후예인 어모장군 운걸(云傑)의 딸이다. 정경부인에 봉해졌으며 장부같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의정공(議政公)은 다섯째 아들로서 이름은 협(悏)이고 자는 사성(思省)이다. 천성이 영특하여 관례를 올린 나이에 문사에 뛰어났으며 24살에는 정시에서 장원하였다. 이듬해 알성시에서 4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과 춘추관을 거쳐 승정원에 들어가니 모두 천거를 받은 것이었다. 성균관의 전적을 비롯하여 직강과 사예를 거쳤고, 중앙의 주요부서인 호조, 예조, 병조, 형조의 원외랑으로부터 정랑에 이르렀다. 세자시강원의 사서와 문학 그리고 필선과 겸필선을 지냈고, 사간원의 정언과 헌납을 거쳤다. 사헌부에서는 지평, 장령, 집의를 지냈으며 홍문관의 수찬으로부터 교리와 응교에 이르렀는데 항상 지제교와 전랑(銓郞)을 겸임하였으며 여러 번 높게 승진하였다.
임진년 섬나라의 왜적들이 탐욕스런 돼지와 교활한 뱀처럼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주상이 도성을 떠나려고 하였고 온 성중은 흉흉하였다. 공은 대사헌 김찬(金瓚)과 함께 대궐로 들어가 주상께 아뢰기를, “서울은 위로는 종묘와 사직이 있고 아래로는 백관과 만백성이 있는데 전하께서 이를 버리시고 장차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비록 다급한 형편이지만 성을 등지고 최후의 결전을 감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니 종묘사직을 죽음으로 지키어 이 땅을 버리지 말라는 것은 맹자의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조대왕께서 비록 그 말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내심 그 충정을 가상하게 여기어 패검을 하사하였다. 밤 이경에 주상은 숭례문을 나섰고 공은 주상의 말고삐를 부여잡고 수행하였다. 갑오년에 명나라 도독 이여송(李如松)이 삼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가 평양을 탈환하고 토굴속에 숨어있던 왜적을 불태워 죽였다. 공은 왕명에 따라 삼도(三道)를 독려하여 마초와 군량을 급히 수송하였으며, 그것으로 명나라 군사와 군마가 풍족하게 되니 모든 이가 훌륭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얼마 후 재상 정철(鄭澈)이 삼남도체찰사가 되자 공을 뽑아 종사관을 삼았다. 겉으로는 공의 능력을 산 것처럼 하였지만 실은 공을 죄로 얽어매고자 한 것이니 공이 기축년에 대간으로 근무할 때 지나친 형옥을 주관한 그를 공격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은 부임하여 오직 공무에만 힘을 쓰니, 그가 호시탐탐 엿보았지만 공을 어쩔 수는 없었다. 이윽고 체부 정철(鄭澈)은 스스로 강화에 머물면서 호남의 군무를 공에게 맡기어 내려가도록 하였다. 당시에 적이 서울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서울 이남은 위태 (·····마멸·····) 모두 공이 위험하다고 여기니 공은 “주상께서 욕을 당하고 계시니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다.”라 하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마멸·····)
정유년 행장(小西行長)과 청정(加藤淸正)은 다시금 호남을 도륙하였으며 예봉을 등에 업고 재침의 기회로 삼았다. 조정에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것보다 나은 계획이 없다고 여겼다. 선조께서는 찬찬히 여러 신하를 살펴본 후 그 일을 전적으로 맡길 사람은 권모(權某 : 권협을 가리킴)밖에 없다고 하여 공은 응교로서 당상관에 올라 급변을 고하러 가는 사신이 되었다. 왕명을 받은 공은 길을 재촉하여 겨우 한 달 만에 북경에 도착하여 자문을 올린 후 공은 병부(兵部)의 군문(軍門)에 서서 흉적이 쳐들러온 본국의 상황을 눈물로 호소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격앙되었다. 군문이 공에게 “너희 나라의 험준한 산천은 어느 곳이며 도로사정은 어떠한가? 지금 적의 수중에 떨어진 곳은 얼마나 되며 너희 나라가 방어하고 있는 곳은 얼마나 되는가? 비축된 군량미는 얼마나 되며 갑옷을 입은 병사는 얼마나 되는가? 상세히 지도를 그려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공은 평소부터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며, 뛰어난 언변으로 알아듣기 쉽도록 손짓을 해가며 화공에게 지도를 그리게 하여 바쳤다. 군문이 병조시랑(兵曹侍郞) 이정(李楨)과 함께 지도를 펴놓고 물어보니 공은 하나하나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공이 물러나자 시랑은 통역관인 표정구(表廷耉)를 불러서 공의 관직을 묻고는 “저런 인재를 온나라를 통털어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 즉시 천자에게 보고되었고 남북의 군함에 배속된 보졸과 산동(山東)의 군량미를 징발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공은 우러러 천자의 커다란 은혜에 사례한 후 머리를 조아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아가 “조그마한 우리나라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서 만백성은 울부짖고 있습니다. 대군을 발병하여 시각이 지체되면 혹 미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꼭 은혜를 내리고자 하신다면 본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영평(永平)의 군사와 군량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성명하신 천자께서는 온 세상을 사랑하시어 중국과 본국을 구별하지 아니하시니 대인께서는 천자의 뜻을 받드시어 급히 주선하시어 구원을 조금도 늦추지 마소서!”라고 아뢰었다. 군문은 공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자의 재가를 기다리지 않았다. 공은 또 활을 만드는데 필요한 근각(筋角)과 화약의 재료인 초황(硝黃)을 요청하여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 그를 본 뜻있는 사람들은 “그 양반의 기민함은 미칠 수 있겠지만 그 충성이야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갑진년 선무공신의 녹훈을 의논하자 선조대왕께서 공을 원종공신이 아닌 정식으로 공신에 올리도록 명하시었다. 이어 길창군에 봉하시고 교서를 내려 “자산(子産: 춘추시대 정나라의 공손교)이 뛰어난 언변과 간곡한 정성은 주위나라의 임금을 감동시키고 포서(包胥 : 전국시대 초나라의 신포서)의 통곡과 지성은 금석을 녹여 버렸다. 칠년간의 먹구름을 거두어 낸 것이 누구의 힘인가. 온 나라 편안케 하니 아아! 빛나도다. 뛰어난 외교적 재능은 더욱더 믿을 만하고 전쟁을 그치게 한 공훈 크기만 하네.”라고 하였다. 당시에 예조에서 일을 도모한 신하가 한 둘이 아니었지만 이처럼 커다란 칭송을 받은 신하가 몇이나 되겠는가! 명철한 임금이 신하를 알아본다고 한 말은 꼭 맞는 말이다.
무술년에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었으며 경자년에는 나주목사로 나갔었는데 모두 칭송이 자자하였다. 임인년에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로부터 우승지에 이르렀으며 여름에는 형조정랑에, 겨울에는 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갑진년 겨울 한성부우윤을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을사년에는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가을에 품계를 뛰어넘어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이 되었다. 당시에 명망이 있었던 어떤 사람이 관내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세력을 믿고 법을 농단하니 공은 용서없이 축출하였지만 그 사람이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고, 다시 기용되자 “청렴하고 근신하게 국법을 수행하기로는 권모(權某)만한 사람을 어찌 얻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공은 옛사람의 유풍을 지닌 바른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미년에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무신년에 선조대왕께서 여러 신하를 버리고 승하하시자 공은 예조의 판서로서 상례를 주관하였는데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공은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여 선왕이 정하신 의례에 조금도 벗어남이 없었으니 남의 허물 들춰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을 탄핵하였지만 공의 덕에 어찌 손상을 입히겠는가? 기유년에는 종묘의 수리를 감독한 공로로 정헌대부에 올랐으며 갑인년에는 공신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숭정대부에 올랐다. 병진년에 사은정사가 되어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공은 당시에 많은 나이에 기력이 쇠잔하였지만 일이 어렵다고 사양하지 않는 것이 공의 신조였다. 오천리길을 단숨에 달려가니 돌아와 왕에게 보고한 때는 엄동설한이었다. 쇠잔한 노인으로서 촉박한 일정에 어찌 병이 나지 않겠는가? 정사년에 병이 들어 무오년 정월 이십칠일 집에서 돌아가시니 그가 태어난 가정(嘉靖) 계축년으로부터 예순여섯 해가 된다. 부음이 전해지자 주상이 부의를 내렸으며 이조에서는 증직을 의논하여 의정부영의정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추증하니 임금도 깊은 애도를 표함이 지극하였다. 공이 돌아간 때에 마땅한 묘자리를 얻지 못하여 부평(富平)의 수탄리(水呑里)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이듬해 봄 그곳의 남쪽을 향한 자리에 안장하였다.
공은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뛰어나 나라의 큰 그릇으로 장성하였다. 약관의 나이가 되자 비범함이 드러났으며, 높은 스승인 순천도정(順天都正 : 李琯)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의 갈고 닦은 학문의 깊이는 다만 ‘박사(博士)의 가문이다.’라는 말로서는 부족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간 뒤로는 충효한 가문의 후손으로서 학문 또한 뛰어나니 선조대왕의 깊은 인정을 받았으며,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온힘을 다하니 이 나라가 망국의 지경에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에는 공의 힘이 많았으니. 주상이 교서에서 이른 말씀이 어찌 틀리겠는가? 아! 공은 사십여년간을 조정에 있으면서 거치지 않은 관직이 없었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공을 세운 것은 역사에 분명하여 모르는 이가 없으며 아녀자들까지도 거침없이 이야기할 정도이다. 형님인 지사공과 참판공은 모두 공과 한 동네에 살았는데 공은 두 분을 아버지처럼 공경하였다. 맛있는 음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반드시 나누었으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의복을 준비하여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사마온(司馬溫)공이 그의 형 백강(伯康)을 아버지처럼 모셨다지만 어찌 이보다 더하였겠는가? 과부가 된 누이와 그의 자식을 평생토록 집에 데리고 살면서 돌보았으며, 공의 도움으로 결혼할 수 있었던 가난한 조카와 손자도 또한 많았다. 녹봉이 문에 들어오면 여러 친척과 이웃에게 모조리 나눠주어 조금도 남겨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의 만년의 행실에는 더욱 뛰어난 바가 있었으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여 높은 관직을 지닌 사람과는 절대로 교제하지 않았으며, 혼인한 집안에 권세를 누리는 사람이 있으면 왕래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물으면 “이는 우리 동흥(東興)공의 유훈이다.”라곤 하였다. 자제들에게는 엄격하여 법도를 지켰으며 항상 가득 찬 물동이를 인 것처럼 조심하도록 가르치며 “내가 주역을 좋아하여 항상 읽었지만 그중 가장 의미있는 말이 있으니 ‘적선한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우리 집안이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하게 된 것이 어찌 모두 충효했던 조상들의 덕택이 아니겠느냐? 지키는 것은 얻는 것보다 어려우며 잘 지키는 방법은 검약 밖에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공은 판서의 지위에 올랐지만 조금도 사치하지 않아서 좋은 고기반찬도 없고 거처도 화려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말은 한 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또한 남을 비난하거나 헐뜯는 말도 하지 않았다. 평생을 하루처럼 조금도 변함없이 살아온 공은 진실하고 강직하며 높은 덕을 지닌 군자라고 할 수 있다. 공의 병이 심해졌을 때 폐모론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제들로 하여금 부축해 일으켜 앉히도록 하게하고는 크게 탄식하며 “인륜이 땅에 떨어졌으니 이제 우리는 오랑캐가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지사공에게 몇 마디 써주니 지사공이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은 것 또한 공의 도움이라고 할 것이다.
부인은 전주최씨(全州崔氏)로서 조부는 헌납을 지낸 극성(克誠)이며 부친은 정랑 말(沫)이다. 부인은 정숙하고 절조가 있어 군자의 배필이 되었으며 시부모에게 순종하여 부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도리에 맞도록 자녀를 교육하고 노비를 부리니 온 집안이 화목하였으며 큰 복을 받아 많은 아들을 두었다. 정경부인에 봉해졌으며 경신년 십일월 십구일에 돌아가시니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모두 7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신중(信中)은 을사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풍덕군수가 되었다. 다음은 필중(必中)으로 계축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다음은 경중(景中)으로 을사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연일현감이 되었다. 다음은 사헌부감찰인 정중(正中)이며, 다음근중(謹中)은 세자익위사 사어(司禦)이고, 다음은 심중(審中)으로 갑자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호조좌랑이 되었으며, 막내 위중(偉中)은 정사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장녀는 이조좌랑 유업(柳㒒)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형조참의 이시환(李時煥)에게 출가하였다. 군수인 신중(信中)은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인 대임(大任)은 옹주에게 장가를 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었다. 이남은 대명(大鳴)이고 삼남은 대식(大式)이다. 딸은 박상빈(朴尙彬)에게 시집갔다. 도사인 필중(必中)은 6남 5녀를 두었다. 아들로는 무과에 합격한 장남 대덕(大德)이 있고 다음은 대순(大淳), 대숙(大淑), 대주(大胃), 대화(大華), 대하(大夏)가 있으며 딸은 각각 최진(崔璡), 이경회(李慶會), 정랑 윤유근(尹惟謹::TEXT), 좌랑 이창현(李昌炫), 지여관(池汝寬)에게 출가하였다. 현감 경중(景中)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대복(大復)과 대장(大壯)이며, 딸은 경력 유중형(柳重炯)과 이덕승(李德升)에게 출가하였다. 감찰인 정중(正中)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여 사어(司禦)의 차남인 대윤(大胤)으로 자식을 삼았다. 사어(司禦)근중(謹中)은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대운(大運)으로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나에게 이 글을 부탁한 사람이다. 차남은 대윤(大胤)으로 감찰이며 대원(大遠)과 대술(大述)이 있다. 딸은 각각 사간 이후(李垕), 이시계(李時繼), 송변(宋㺹)에게 출가하였다.
좌랑 심중(審中)은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대민(大敏)과 대익(大益)이며 딸은 각각 송도응(宋道凝), 이▨(李▨), 진사 노사민(盧思敏)에게 출가하였다. 진사 위중(偉中)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대재(大載)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이 되었고 딸은 각각 생원 이담(李墰), 생원 최동로(崔東老), 생원 이명린(李命麟)에게 시집갔다.
유업(柳)은 봉사인 정기(廷琦)와 참봉인 정연(廷衍), 감찰인 정원(廷瑗)의 세 아들을 두었고, 이시환(李時煥)은 도사 안후창(安後昌), 진사 최세창(崔世昌), 박대규(朴大圭), 윤정면(尹廷冕)에게 출가한 네 딸을 두었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무려 이백여 명이 되니 아! 번성하도다. 하늘이 후덕한 공에게 보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땅을 바쳐 원수 갚길 바라니, 의로운 임금 크게 감동하여라.
이에 좋은 성씨(姓氏) 내려주었네.
그 후손 길이 이어져 선조의 덕 계승하니, 내려올수록 더욱 훌륭하여라.
그 중에 길창공은 선조대왕 섬기어, 조상의 업적 크게 넓혔네.
충효를 다하여, 나랏일로 동분서주 몸 바친 그 공로 높기도 하여라.
임금님 그 공로 알아보시고 공신의 칭호를 공에게 내리시니,
크고 빛나는 붉은 글씨 벼슬은 더 높아졌지만,
겸손하여 더욱 빛나니, 주역의 도 드러났네.
삼형제가 모두 늙도록 우애 깊으니, 세상에 짝이 없어라.
현부인 맞이하여 어진 아들 두었으니, 복과 녹을 다 누렸네.
우국충정은 죽어도 변치 않아, 쌍령(雙烈)의 벗이 되었네.
내 붓끝 무디지만, 명(銘) 짓는 법 따르니,
이곳을 지나는 이 반드시 예 다하리.
숭정(崇禎) 갑신후 29년 계축 정월 일에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