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동화사적비(八公山桐華寺蹟碑)
조선불교(朝鮮佛敎) 선교양종(禪敎兩宗) 제일사찰(第一首刹) 대본산(大本山)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君) 공산면(公山面) 동화사적비명(桐華寺蹟碑銘) 병서(幷序)
부처의 가르침이 동쪽으로 전해지고부터 국가에서 신봉하여 사찰이 명승지에 별처럼 벌여 있고 종소리와 경쇠 소리가 들리게 되었으니, 동화사도 그 하나로서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수시로 흥망을 거듭하여 마치 봄 제비가 찾았다가 물러나는 것과 같았다. 살펴보건대 극달(極達) 존숙(尊宿)이 부악(父岳)의 남쪽 중턱에 창건하여 유가(瑜伽)라고 편액 하였으니, 이때는 신라 소지왕(炤智王) 15년 계유(癸酉, 493)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면 그 산을 부악(父岳)이라 일컫는데, 또한 국기(國畿)의 중앙에 가깝기 때문에 중악(中岳)이라고도 부른다. 나라에서 이곳에 제천단(祭天壇)을 설치하면서부터 나라의 중요한 산악이 되었기 때문에 공산(公山)으로 개칭(改稱)하였다.
《동사(東史)》에서 심지왕사(心地王師)의 행적을 살펴보면, 미륵보살이 속리산(俗離山) 영심법사(永深法師)에게 전래한 간자(簡子) 가운데 8번째와 9번째 2개를 얻어 이곳에다 보배롭게 여겨 간직해 두었는데, 고려 예종(睿宗)에 이르러 궐내로 가져다가 경배를 드리면서 9번째 한 간자를 잃어버렸다. 왕은 너무나 미안해하며 송나라에서 온 불아(佛牙)를 대신 보냈다. 본사에서는 미륵의 유훈(遺訓) 가운데 8번째 간자를 성불종자(成佛種子)로 새로 중히 여겨 공산에 다시 모셔 오고, 드물게 있는 상서로운 징조를 기념할 것을 생각하여 공산(公山)이라는 두 글자 위에 팔(八)자를 더하여 팔공산(八公山)이라 이름하였다. 처음 창건부터 340년이 지나 흥덕왕(興德王) 7년 임자(壬子, 832)에 심지왕사가 두 번째로 중창하였다. 《동사》에서 심지왕사(心地王師)의 행적을 살펴보면, 스님은 곧 헌덕왕(憲德王)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타고난 품성이 맑고 지혜로웠다. 열다섯 살에 머리를 깎고 스승을 따라 불도를 부지런히 닦으며 중악(中岳)에 머물렀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에 사방으로 노닐다가 가야산(伽耶山) 봉서사(鳳栖寺)에 이르러 희랑조사(希朗祖師)를 참배하였고, 속리산(俗離山)의 동쪽 관음사(觀音寺)에 나아가 영심법사(永深法師)를 참배하고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을 얻어 예불하고 참회하였다. 간자(簡子) 8번째와 9번째 2개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산악의 신이 두 선자(仙子)를 데리고 맞이하기에 산꼭대기 땅에 이르러 말하기를 “적당한 땅을 가려 부처님의 간자를 안치하려 하니, 청컨대 세 분께서 점쳐주십시오.”라고 하며 신들과 봉우리에 올라 던졌다. 간자가 바람에 날리면서 숲속의 샘으로 날아 내려왔기에 마침내 그 땅에 불당을 지어 모셨다. 지금 첨당(籤堂) 북쪽 작은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그때 하늘에서 비가 내려 오동나무 꽃과 기쁨을 함께 하였기 때문에 유가사를 고쳐 동화사(桐華寺)로 편액하였다. 102년이 지나 경순왕(敬順王) 7년 갑오(甲午, 933)에 영소선사(靈昭禪師)가 세 번째로 중창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려 태조가 견훤의 군대와 동수(桐藪) 아래에서 크게 싸웠는데, 사리탑에서 빛을 쏘는 것을 따라갔다가 선사를 만나 보고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감격하였기에 이때에 이르러 탑묘(塔廟)를 빈틈없이 수리하고 전우(殿宇)를 크게 하였으며 선사가 거처하는 방을 넓혔다. 일인석(一人石)은 암자에 소속되어 있는데, 뒤에 왕이 선사를 만난 장소로 한 사람은 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 옛 자취를 존경하고 사모하여 손으로 어루만지게끔 한다.
256년이 지나 고려 명종(明宗) 20년 경술(庚戌, 1190)에 불일(佛日) 보조국사(普照國師)가 네 번째로 중창하였다. 7년이 지난 정사(丁巳)에 국사의 병발(甁鉢)을 지리산(智異山) 무주암(無住菴)으로 옮겼다가 3년이 지나 다시 송광사(松廣寺)로 옮겼다고 한다. 108년이 지나 충렬왕(忠烈王) 24년 무술(戊戌, 1298)에 홍진국사(弘眞國師)가 다섯 번째로 중창하였다. 308년이 지나 조선(朝鮮) 선조(宣祖) 39년 병오(丙午,1606)에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여섯 번째로 중창하였다. 이때에는 임진년 이후로 불우(佛宇)와 승료(僧寮)가 함께 소실되었는데, 대사가 해인사(海印寺)에 있으면서 도제(徒弟)인 학인(學仁)과 사승(寺僧)인 천령(天靈) · 해진(海眞) · 옥보(玉寶)를 보내 일을 끝내게 한 것이다. 70년이 지나 숙종(肅宗) 3년 정사(丁巳, 1677)에 상서대사(尙書大師)가 일곱 번째로 중창하였다. 55년이 지나 영종(英宗) 8년 임자(壬子, 1723)에 관허(冠虛) · 운암(雲巖) · 낙빈(洛濱) · 청월(晴月) 등의 스님이 마음을 합쳐 여덟 번째로 중창하였다. 이 또한 7년 전 을사(乙巳)로 거슬러 올라가면 온 절집이 화재
2를 당했는데, 4명의 대사가 수리 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석가모니 사리(舍利)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10년 을사(乙巳, 549)에 소양제(蕭梁帝)
3가 사신 심호(沈湖)를 파견하며 사리 한 상자를 보냈는데, 왕이 감격스럽고 경하하는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마침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법운(法雲)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진평왕은 법운의 손자로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임인(壬寅, 582)에 여러 사찰에 사리를 나누어 안치하였는데, 유독 이 절에만 1255과(顆)를 안치하였기에 나라를 복되게 하는 원당(願堂)
4이 되었다. 경문왕(景文王) 3년 계해(癸亥,863)에 조정으로부터 또 7립(粒)을 이곳에다 안치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성교(聖敎, 불교)에서 말한 이익이 많지만 업장(業障)을 남김없이 섬멸하고 이물(利物)을 넓히는 것은 탑을 세워 예배하고 참회하는 것을 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연대(蓮臺)
5의 업(業)을 높이고자 동수(桐藪)의 원당(願堂) 앞에 석탑을 창립하니 아이가 모래를 모으는
6뜻을 기대한 것이다.’고 되어있다. 헌강왕(憲康王) 원년 을미(乙未, 875)에 승려 삼강(三剛)이 금당에 탑을 옮겨 봉안하였다. 조선 중종(中宗) 38년 갑진(甲辰, 1544)
7에 종관(宗觀)
8 해달(解達)이 중수하고, 숙종(肅宗) 원년 을묘(乙卯, 1675)에 인화도수(印花道修)가 다시 수리하였다. 철종(哲宗) 4년 임자(壬子, 1853)
9에 포운(布雲)과 양운(兩運) 두 스님이 이어서 수리하였다. 근래 신축(辛丑, 1901)에 회응(晦應) 스님이 부서진 것을 바꾸고 이지러진 부분을 고쳤으며, 이어서 보응(普應) 스님은 금탑의 철 난간을 조성하였고, 설운(雪雲) 스님은 대웅전의 돌계단을 수리하여 이전보다 더욱더 빛났다. 영험한 자취를 지닌 귀중품으로는 불사리(佛舍利) · 불아(佛牙) · 금강저(金剛杵) · 패엽경(貝葉經) · 구룡대(九龍臺) · 오동향로(烏銅香爐) · 고동향로(古銅香爐) · 상형향로(象形香爐) · 부도비석(浮圖碑石)이 있다.
아, 이 사찰이 있은 지가 지금까지 1439년이 되었는데 더욱 창대해졌으니, 여래의 가르침이 시대와 세상에 널리 퍼지는 것은 승려와 백성이 어떻게 분주히 달려가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어느 날 현 주지인 황보응(黃普應)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당사(當寺)에는 옛날에 사적비가 있었는데,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큰바람에 묻히고 마모되어 다만 헤진 종이에 희미한 먹빛 마냥 또한 또렷하지 않습니다. 만약 차일피일 시간만 보낸다면 앞 사람의 위대한 자취가 세상에 전하지 않게 되어 뒷사람에게는 서계(書契) 정도가 됨을 면하지 못해 끝내 이전 세계의 탄식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것을 걱정하여 연내로 상고할 만한 역사 가운데 대략적인 것을 찾아 사람들에게 묻고 상의하여 돌에 새기려고 하니, 그대는 정신을 수고로이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나는 황군과는 일찍이 동창으로 어렵게 공부한
10 정의(情誼)가 있는 데다 또한 공문(空門)에 인연이 의리상 역사에 대한 안목이 없다고 사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와 같이 서술하있어 고 명을 지어 말한다.
석가모니 도를 깨쳐 삼계
11의 스승 되어
근기에 따라 설법함은 자비의 방편이라네
중생의 깊은 괴로움 구제함을 기약하여
빛이 대천세계 덮으니 누가 우러르지 않으랴
공악의 남쪽에 범궁을 열어두었는데
창수함에 석덕이 차례로 큰 공 세웠네
천지신령이 지킨 선종과 교종의 종통
법보와 사리 영원토록 세상을 복되게 하리
정성과 공로로 귀의해 남과 자기 이롭게 하고
옛날보다 배로 흥성하니 어찌 후인을 기다리지 않으랴
전날의 사적 지금 도모해 사라짐이 없게 하고
서술하고 돌에 새겨 그 아름다움 드러낸다네
불기 2958년(1931) 신미(辛未) 하한(下澣)에 우당거사(藕堂居士) 김정래(金鼎來)가 짓고, 긍석산인(肯石山人) 김진만(金鎭萬)이 쓰다.
강사(講師) 권한경(權漢鏡) 주지(住持) 황보응(黃普應) 법무(法務) 윤해붕(尹海鵬) 감무(監務) 최만곡(崔萬谷) 서기(書記) 이영허(李暎虛) 감무(監務) 김설운(金雪雲) 서기(書記) 김용봉(金龍峯)
영산전(靈山殿) 광무(光武) 임인(壬寅, 1902)에 물로 인한 피해를 입어 을사(乙巳, 1905)에 화주(化主) 월송(月松)과 성파(性坡), 활허(豁虛) 세 선사가 재건했다.
심검당(尋釰堂) 대정(大正) 계축(癸丑, 1913)에 주지(住持) 김남파(金南坡)와 화주(化主) 황보응(黃普應)이 중건했다.
금당(金堂) 헌종(憲宗) 무술(戊戌, 1838) 화주(化主) 퇴은 무익(退隱武益)이 재건했다.
내원암(內院菴) 인조(仁祖) 병인(丙寅, 1616)에 유찬(惟贊)이 창건했고, 순조(純祖) 정해(丁亥, 1827)에 제월(霽月)이 중건했다.
양진암(養眞菴) 영종(英宗) 계해(癸亥, 1743)에 무주 선사(無住禪師)가 창건했고, 광무(光武) 무술(戊戌, 1898)에 운파(雲坡)가 중수했다.
염불암(念佛菴) 신라 경순왕(敬順王) 무자(戊子, 928) 영조 선사(靈照禪師)가 창건했고, 뒤에 고려 태조가 증축했다. 광해(光海) 임자(壬子, 1612)에는 유찬(惟贊), 숙종(肅宗) 기묘(己卯, 1699)에는 승변(勝卞), 순조(純祖) 계해(癸亥, 1803)에는 의암(義庵)이 모두 중수했다.
포교당(布敎堂) 대정(大正) 신해(辛亥, 1911)에 창건했다. 대구부 아미산(峨嵋山)에 있다.
산중석덕(山中碩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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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토지 면적 261,665평 산림 면적 608정 7반 1무 2보 6합
소속 말사(所屬末寺) 8개 군 40사찰 본말사 토지 총면적 987,314평 3합 5균
본말사 산림 총면적 3217정 3반 7무 6합 7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