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순절도
해제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선조 25) 4월 13일부터 14일까지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를 묘사한 전쟁기록화이다. 이 그림의 제작배경과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산진 전투와 임진왜란 이후 순절자를 기리기 위하여 지속된 추모사업에 대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부산진 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발발한 첫 번째 전투이다. 전투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조선과 명나라 정벌을 계획했던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는 조선 정벌을 명령하자 4월 13일 왜군 병력 1만8천7백여 명이 병선 700척에 승선하고 진군하여, 이날 오후 늦게 부산 영도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가 이끄는 왜군은 4월 14일 새벽부터 부산진을 에워싸고 공격 준비를 하고 ‘길을 비켜달라’는 뜻의 ‘가도(假道)’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써서 부산진성 밖에 세웠다. 부산진을 방어하던 첨절제사 정발(鄭撥, 1553~1592)은 이를 묵살하고 군사 1,000여 명과 결사항전하였다. 왜군은 숫자도 많거니와, 큰 칼(太刀)과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발사하며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활을 쏘며 성을 지키고자 했지만, 군사의 수도 무기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왜군은 진성 후방의 방어가 허술한 사실을 알고 북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성안으로 난입했다. 정발은 항전하였으나 왜군의 조총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지휘관을 잃은 조선군의 사기도 급격히 떨어지면서 곧 함락되었다. 부산진의 군사들은 거의 전사했고, 정발의 첩 애향(愛香)은 자살하였다. 왜군은 부산진 전투 이후, 다음날 다대포진성, 동래성 등을 빠르게 함락하면서 북으로 진격하였다.
비극적인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에 국가와 관, 개인 차원에서 임진왜란 때 충절을 지킨 이들에 대한 추모사업이 시작되었다. 특히 17~18세기에 부임한 동래부사(東萊府使)들은 임진왜란 순절자 추모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605년부터 1607년까지 동래부사로 재임한 윤훤(尹暄, 1573~1627)은 동래부사로 순절한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을 기리는 송공사(宋公祠)를 세우고, 그에 앞서 부산진을 지키다 전사한 정발도 함께 배향하였다. 1624년에 송공사는 국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로부터 충렬사(忠烈祠)라는 편액을 받았다.
전란 발발 60여 년 뒤인 165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민정중(閔鼎重, 1628~1692)도 적극적으로 추모사업을 기획했다. 송상현과 정발, 이 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사와 열녀 등 동래부민을 선양하고 민중의 충절의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전투 당시의 상황을 채록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토대로 비석을 세우고자 하였다. 동래부에 이들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그림을 그려 봉안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고자 동래부성을 쌓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사직에서 교체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 부임한 이들이 민정중이 기획한 추모사업을 이어받았다. 1664년부터 1666년까지 동래부사로 재임한 안진(安縝, 1617~1685)은 민정중에게 동래부사 시절에 채록했던 내용을 요청했고, 이에 민정중은 1668년 「임진유문(壬辰遺聞)」을 완성하였다. 이 글을 바탕으로 1668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비문을 작성하였으며, 1670년 동래부사 정석(鄭晳, 1619~1677)이 충렬비를 세웠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부산진을 지키려했던 정발과 군사들의 이야기를 처음 그림으로 제작한 이는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다. 그는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를 함께 제작해서, 정석이 세운 충렬비를 보호하는 비각 안쪽 벽면에 걸어두었다. 이 그림이 낡고 해지자, 1760년 동래부사 홍명한(洪名漢, 1724~1774)이 동래부 출신의 군관 변박(卞撲)에게 다시 그리게 하였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는 이때 같이 세트로 제작된 것이다. 홍명한은 「본부순절도서(本府殉節圖序)」라는 글에서 순절도 2점이 오래되어 색이 변하고 해어져서, 내용을 분별하기 어려울까 염려되어 변박에게 그림을 다시 그리도록 했다고 썼다. 이때 제작된 그림은 동래 충렬사에 모셨다.
<부산진순절도>는 비단 세 폭을 이어 만든 화폭에 그려졌다. 전체 크기는 세로 145cm, 가로 96cm로 상당히 큰 편이다. 비단 세 폭을 이어붙인 방식과 화면 크기는 세트로 제작된 <동래부순절도>와 동일하다. 전체적으로 회화식 지도와 부감시를 이용하여, 부산진성 내외부와 주변 지형을 조망하고 전투를 들여다보는 듯한 구도로 그려졌다. 화면 우측에는 부산진성이 자리하며, 그 뒤로 단면이 잘린 듯한 모양의 산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증산(增山, 현 부산시 동구 좌천동)으로 실제 지형을 반영한 것이다. 부산진성의 대각선 방향은 앞바다인데, 왜군의 선박이 가득한 모습으로 그려져 대비를 이룬다.
엄청난 규모의 왜군은 배에 탄 모습과 육지에 상륙하는 모습, 성 앞에서 총과 칼을 들고 공격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조선군은 남문 성루에 있는 정발의 지휘를 받으며 왜군을 향해 화살을 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남문 앞에는 화살에 맞아 죽은 왜군의 시체가 쌓여 있는데, 이는 민정중의 「임진유문」에서 조선군의 화살을 맞은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세 곳이나 되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성안의 전각에는 칼을 든 여인이 있는데, 정발이 전사하자 자결했다는 첩 애향이다. 근경에 위치한 또 다른 성은 부산진 외성이다. 이 외성은 후에 왜군이 일본 성곽 양식으로 쌓아 자성대(子城臺) 왜성라고 불렀으며, 그림이 그려진 18세기에도 증축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조선 성곽 양식으로 그려져 있어서, 1592년 당시의 부산진 외성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그림은 평면적 성격이 강하고 인물묘사는 도식적이다. 건축물과 배, 인물 등은 가는 필선으로 그리고 깃발과 건물 등은 적색, 남색, 녹색 등 선명한 원색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반복적인 형태의 물결과 왜선, 왜선에 탄 왜군의 모습은 거의 동일하다. 활을 쏘는 조선군 병사들이나 성벽 아래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왜군들의 모습도 비슷하여 생동감이 떨어진다. 진성 뒤편의 산과 화면 곳곳에 배치된 수목은 윤곽선과 쌀알같은 미점(米點), 선염 등을 이용하여 표현하였는데 18세기 화단을 풍미한 진경산수화풍을 드러낸다.
이 그림은 전쟁기록화로서 시간차를 두고 벌어진 여러 전쟁 관련 일화를 하나의 화면 안에 효과적으로 재구성하여 묘사하였다. 또 회화식 지도와 부감시를 이용하여 사건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변박이 창안한 방식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순절도의 화면구성과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글: 윤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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