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일사(甲子日史)

조선개인일기_갑자일사 1_본문01_미상_모덕사_2018_미술_제4유형.jpg

저자
최영조(崔永祚, 1833~1906)
작성연대 / 간행시기
1924~1926 / 20세기
수량(장수)
1
광곽(변란)
四周雙邊 半郭 17.8 x 12.0cm
계선
烏絲欄
행자수
10行 字數不定
주(註)
없음
어미
無魚尾
크기
22.6 x 14.9cm
지정종목
비지정 
소장처
모덕사
보고서(연도)
2018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갑자일사(甲子日史)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4유형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수 있습니다.

개요

운재 최영조(雲齋崔永祚)가 1924년(갑자) 1월 1일부터 1926년(병인) 7월 30일까지 2년 6개월 간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이다. 표제는 없고 권수(卷首)에 ‘갑자일사’(甲子日史)라 적혀있다. 책갈피 속에는 인물정보를 적은 명자(名刺)와 금전‧물자의 출납을 적은 쪽지가 끼워져 있다. 이 일기는 중요 항일 수구파 유림 인물이었던 최익현의 계승자 최영조가 별세를 앞둔 말년에 어떤 사회문화적 활동과 일상생활을 하였는가에 관한 구체적 실상을 보여

운재 최영조(雲齋崔永祚)가 1924년(갑자) 1월 1일부터 1926년(병인) 7월 30일까지 2년 6개월 간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이다. 표제는 없고 권수(卷首)에 ‘갑자일사’(甲子日史)라 적혀있다. 책갈피 속에는 인물정보를 적은 명자(名刺)와 금전‧물자의 출납을 적은 쪽지가 끼워져 있다. 이 일기는 중요 항일 수구파 유림 인물이었던 최익현의 계승자 최영조가 별세를 앞둔 말년에 어떤 사회문화적 활동과 일상생활을 하였는가에 관한 구체적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해제

표제 및 권수제 표제: 없음, 권수제: 甲子日史
저자 최영조(崔永祚, 1859~1927)
판종 필사본
작성연대/간행시기 1924년~1926년
형태사항 1책 / 가철 / 사주무변, 무계, 무어미 / 10행 자수부정 / 22.6 x 14.9cm
소장처 모덕사

개요

"이 일기는 운재 최영조(雲齋崔永祚)가 1924년(갑자, 한국6) 1월 1일부터 1926년(병인) 7월 30일까지 2년 6개월 간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이다. 표제는 없고 권수(卷首)에 ‘갑자일사’(甲子日史)라 적혀있다. 책 갈피 속에는 인물정보를 적은 명자(名刺)와 금전‧물자의 출납을 적은 쪽지가 끼워져 있다. 이 일기는 중요 항일 수구파 유림 인물이었던 최익현의 계승자 최영조가 별세를 앞둔 말년에 어떤 사회문화적 활동과 일상생활을 하였는가에 관한 구체적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
"최영조(崔永祚)는 본관은 경주, 자는 석윤(錫胤), 호는 운재(雲齋)이며,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 자 贊謙, 1833.12.5.~1906.11.17.)의 장남이다. 그의 조부는 최대(崔岱), 외조부는 한필유(韓必裕)이고, 부인은 거창신씨와 풍천임씨이다. 첫 부인 거창신씨(1857.5.19.~1894.1.16.)의 부친 신학인(愼鶴仁, 1831~?)은 자는 천보(天甫) ,호는 회은(晦隱)이고, 신영만(愼永萬)의 아들(생부는 愼永詳)이며, 화서 이항로(華西李恒老)의 문인이다. 둘째 부인 풍천임씨(1877.8.28.~1929.1.4.)의 부친은 임체상(任棣常)이다. 그는 장남으로서 아우 둘이 있었는데, 큰 아우 영학(永學)은 백부 승현(升鉉) 밑에 출계하였고, 둘째 아우 영복(永福, 1873~, 자 季膺)은 늘 가까이서 서로 의지하였다. 아들은 원식(元植, 1892~1961, 장인 金瓚圭)과 인식(仁植, 1913~1940, 장인 李廷求), 춘식(春植, 1911?~1945, 장인 閔泳晉)의 셋을 두었고, 딸도 셋을 두었는데 사위는 송각헌(宋珏憲) 오정균(吳貞均) 심진석(沈晉錫)이다. 그는 1859(기미, 철종10)년 9월 19일에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장리(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나, 1900년에 부모를 모시고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定山)으로 이주하였고, 1927(정묘, 한국9)년 8월 14일에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어려서 중암 김평묵(重菴金平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4세(1873년)에 계유상소로 의금부에 갇힌 아버지를 위해 옥 밖에서 통곡하였고, 17세에는 유배된 아버지를 뵈러 흑산도를 다녀왔다. 벼슬은 음사(蔭仕)에 의한 1905년의 효릉참봉(孝陵參奉)을 시작으로 돈녕사주사(敦寧司主事), 현릉참봉(顯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과 주전원전무과주사(主殿院電務課主事) 등의 직을 받았다. 1907~1908 년간에 부친과 모친 청주한씨의 장례를 치르면서 부친의 문집 󰡔면암집(勉菴集)󰡕을 간행하였고, 이후 모덕사(慕德祠)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는 등의 부친 선양사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문집은 『운재집(雲齋集)』 14권 7책(石版本)이 전하는데 최익현의 문인인 조동린(趙東麟)과 최영조의 장남인 최원식(崔元植)이 1956년에 발문을 썼다. 최영조의 아버지 최익현은 화서 이항로(華西李恒老, 1792~1868)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나 성리학(性理學)의 형이상학을 담론하기 보다는 역사적 현실에 기초한 구국애족의 사상을 실천하였다. 22세인 185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1873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를 비판하는 상소를 낸 후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876년에는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여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1895년에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당하자 항일과 척사를 주장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후에는 박제순(朴齊純) 등 매국오적의 처단과 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74세의 고령으로 호남에서 항일의병 운동을 일으켰으며, 끝내는 일본군에 의해 대마도에 압송되어 순국하였다. 그리고 그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그를 현창하는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고,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농암리의 모덕사(慕德祠)와 포천 해주 태인 고창 곡성 순화 무안 함평 광산 구례 등지에서 제향하고 있다."
"『갑자일사』는 필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심하게 흘려쓴 초서 자료이다. 책의 필자가 최영조이고 ‘갑자’년이 1924년임은 일기에 언급된 인물과 사건의 내용을 확인하면 알 수 있는데, 내용의 상세한 확인 없이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증거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월 2일 일기 내용에 봉현(鳳峴)에 사는 이윤구(李允九)의 부고를 받고 백지와 초 한 쌍을 부의하였음을 적고 있는데, 이는 최영조의 『신유동일사(辛酉冬日史)』에 첨부된 <갑자일용부(甲子日用簿>의 내용과 일치하며 일기장의 종이 형태도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갑자십이월용기(甲子十二月用記)>가 일기와는 다른 형태의 백지 한 장으로 갈피에 끼워져 있는데, 앞의 <갑자일용부>가 11월로 끝난 다음의 기록인 듯하다. "
"이 일기는 필자가 66~68세의 연로한 시기에 작성된 것인데, 이전 시기의 것에 비해 사회문화적 활동기록이 약간 줄어들고 혼인‧족보‧재산‧질병 등에 관한 기술이 많아진 것을 특징으로 들 수 있는데, 도조(賭租)의 수수, 산지 전답 수목 등 생활물자의 매매와 관리, 질병 치료를 위한 약침(藥鍼), 경조사의 부의, 혼인 납채 등의 예물, 그리고 신후문자 등을 써준 일 등을 적고 있다. 사회문화적 활동은 여전히 매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원근의 유림인물과 친척·사우(士友)들이 서신과 서책을 보내오고 찾아오며, 유림의 향사(享祀)에 참여하고, 족보와 문집의 간행에 관여하고, 비문‧행장 및 기문 등을 청탁에 응해 써주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최익현을 모신 사우‧영당에 제향하고 관리보수하는 일, 그리고 선조의 절사(節祀)를 모시는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일기의 내용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눈에 띄는 기사를 뽑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사회정치적 내용 항일 유림에 대한 일본 경찰 및 면서기의 감시와 간섭, 그리고 영친왕의 귀국과 순종황제 서거 및 일본의 지진 소식 등을 적고 있다. 1924년 갑자 1월 17일 눈 내리는 밤에 강순사가 왔다 감. 2월 29일 강 순사가 와서 통문의 일을 탐문하고 감. 3월 7일 이은설과 강 순사가 와서 청결조사를 하고 감. 19일 본면 주재소에서 이상철이 만동묘 산판을 반환한 일로 호출함. 원아(元兒: 장남 최원식)가 갔는데 시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경찰관을 못 보고 돌아옴. 5월 1일 왜의 왕자 결혼일이라고 사면이 내려 각처에서 경축했다 함. 24일 청양 경찰서에서 호출장이 왔는데, 이상철을 붙잡는 일 때문인데 27일 오전 9시에 왔다고 말함. 6월 15일 면 서기 조병일이 와서 농회비 25냥 8전을 받아감. 17일 청양 경찰서에서 호출장이 왔는데 21일에 와서 대기하라 함. 25일 본면 경찰 복기가 왔다 갔는데, 전일의 심문 일 때문임. 28일 원아가 청양경찰서에 갔는데 호출 기한을 넘긴 일 때문임. 7월 15일 면장 홍선표, 회계원 김가와 구장 이은설이 유성기를 가지고 다음달 농회에 오라고 연설하는데 떠드는 소리가 정말 해괴하였건만 온 동네 사람 중 듣고 반대하는 이가 하나도 없음. 12월 4일 본군 순사와 구장이 와서 탐문함. 성진 김구현에게 서신을 보낸지 여러 삭인데 아무런 회답이 없어 그 까닭을 알고 싶다고 김씨가 청양 경찰서에 전갈하였다 함. 김병훈이 자기 군 한별장의 비문 일로 한별장을 위해 앙갚음을 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을축 윤4월 5일 지난 달 28일에 동경에 진재(震災)가 있었다 함. 6월 9일 송자대전 판각허가가 나왔고, 총독이 청천에 내려와 우암 묘소에 절하고 돌아갔다 함. 8월 3일 두문 순사가 왔다 감. 7일 순사가 또 와서 송우회가 대전에 건원한다는 소문을 들었는가 묻기에 모른다 함. 14일 본면의 순사가 국세조사를 하러 왔다가 감. 1826년 병인 1월 21일 영친왕이 일전에 권속을 이끌고 귀국했다 함. 2월 17일 저녁에 순사가 잡기하는 사람 대이(碓伊)를 잡아감. 29일 창덕궁의 환후가 매우 위중하며, 중국에서 장작림이 난리를 일으켜 많은 청나라 사람들이 해외로 도피했다 함. 3월 14일 오전 6시에 창덕궁(순종황제)이 서거하였다고 공주에 광고가 게시되었다 함. 21일 국상을 행하여 성복한다고 매일신보가 두 번 알리고, 서울의 운선이 서신을 보내옴. 4월 3일 인산이 있었음.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무리에 핏덩이 같은 것이 보였다. 총독이 두려운 마음을 가졌고 서울 안이 흉흉했다. 6월 1일 순사가 와서 영석의 거취를 물음. 전에는 서울에서 일이 있었음. 7월 30일 연동의 서기 김영훈이 와서 수해구제금 4원과 호별 세금 25원 12전을 받아 감. 서기가 와서 청결 심사를 하고 감. (2) 유림의 교유 내용 각지 유림과 서신‧통문‧서책 등을 주고받은 일, 사우‧친지가 찾아온 일, 동학사 숙모전과 송자대전 간행소등에 관여한 일 등이 적혀 있다. 1924년 갑자 1월 9일 양평군 지제면의 천후근과 공성군 읍내리의 정봉태가 조장(弔狀)에 대한 답장을 보내옴. 15일 양주의 유진정 노인이 12일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3냥의 여비를 지급했음. 21일 광주 일곡의 노종룡이 선고(先考)의 유고를 보내옴. 3월 9일 이치춘이 성학십도 10폭 등을 보내옴. 13일 대흥의 박준과 조재명 김종응과 동학사의 15일 숙모전 제향을 위해 감. 4월 19일 이승영이 와서 우암서원의 기부금을 요청하기에 이후 힘 닿는대로 돕기로 함. 7월 18일 북청 최효순과 최주순이 문집 1질 18책을 가지고 대전에 감. 25일 정주의 백락운이 와서 15일을 묵으며 글을 읽고 떠나감. 함흥 종인 최관현이 계화도의 간재(艮齋) 대상(大祥)에 참석하고 옴. 1925년 을축 1월 18일 해주의 오찬근이 후조문집 5책을 부쳐옴. 능주 근석이 종이 3축을 부쳐옴. 2월 23일 충식과 송랑이 영동에 가면서 문집 1질 19책을 가지고 감. 4월 23일 영동의 송재성(宋在晟)이 오고, 망해에서 송중옥이 돌아옴. 5월 6일 경주 종인 최영소가 혼담과 여재당 기문의 일로 옴. 23일 임실의 김병주, 윤방섭이 옴. 7월 2일 송치술과 나주 유씨(고흥에서 송자대전 판각일에 힘을 보태려 온 사람)가 소제(蘇堤)로 가서 우암이 살던 집에 간소(刊所)를 설치하려 한다는 소식. 30일 송중옥과 최용식이 소제(蘇堤)의 유회에 가는 편에 송증헌(宋曾憲)에게 보내는 위장을 부침. 9월 23일 오늘이 양현각(兩賢閣) 제향날인데, 송주헌과 약속을 하였으나 못 가봄. 11월 5일 김대집이 와서 인근에 열녀 윤씨가 하종(下從: 남편을 따라 죽음)한 일을 말하며 감탄함. 12월 23일 유구의 한 선비가 남당집을 팔러 왔다 감. 가격은 20원에 고가(雇價) 5냥. 1926년 병인 1월 3일 삼현사 장의로 차정됨. 2월 12일 소제(蘇堤) 송자대전 간행소 충남도유사 명첩이 옴. 5월 8일 중옥이 내일의 소제 유회를 위해 간다 함. 15일 중옥이 소제에서 돌아오며 송증헌의 서신을 받아옴. (3) 선조 제향(祭享) 및 사우(祠宇) 관리 내용 각처에 있는 최익현의 사당‧영당에 제향하는 일과 철거‧압수된 영정(影幀)을 회수‧복구하는 일, 그리고 선조의 절사(節祀)를 모시는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1924년 갑자 2월 16 춘분에 시제를 모심. 23일 계응 원아 인식 오정균이 대흥에 가 절사를 모셨다. 4월 18일 영당의 기와 구멍을 막았는데, 송내에서 일꾼 두명을 뽑아옴. 19일 영당의 담장을 쌓았는데, 송내에서 두 사람이 와서 흙일을 도옴. 7월 15일 전서(專書) 를 보내 오준선에게 면암 만정 유허비 음기를 청함. 9월 8일 원아 신석 인식 계응 윤도 김규보 강덕초가 대흥에 갔다(9일 節祀를 위해). 1925년 을축 3월 11일 포천에서 편지가 왔는데 충식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태인의 류재일이 월초에 목수를 포천에 데려와 영당 중건 작업을 시작함을 전함. 4월 3일 포천의 편지와 류재일의 편지로 태인 태산사가 다음 달 28일에 봉안식을 한다 알려옴. 25일 태산사 봉안이 28일이라, 송우회, 이중녕, 희맹, 계응, 이영성이 태인을 향해 감. 류재일에게 봉안축문을 보냄. 윤4월 28일 태산사 봉안식이 있었음. 5월 1일 7명이 순조롭게 돌아옴. 23일 원아가 거창에서 영정을 모셔 돌아옴. 9월 9일 곡성 오강사 추향이 13일에 있어 강중달과 성준경이 떠나감. 조영선 숙질의 조장과 조우식이 부탁한 묘표와 묘지 등 5건을 우편으로 보냄. (4) 신후문자와 소개 편지의 청탁 내용 최영조는 그가 지녔던 당시 유림 사회에서의 권위에 의해 별세 직전까지도 많은 비문‧행장과 기문 등의 문장을 부탁받고 써주었는데, 주로 호남 유림의 글 청탁이 많았던 것을 볼 수 있다. 1924년 갑자 2월 15일 무안의 두 노 선비와 여러 선비들이 옴. 18일 무안의 두 노 선비가 요청한 묘갈은 뒷 날을 기약하고 떠나 감. 3월 6일 문장선 선고의 묘갈, 신용성의 조장, 전긍재(戰兢齋)의 위장(慰狀), 종인 최기성의 낭은기(郞隱記)를 보냄. 14일 명천의 최익주가 상렬사 중건기의 일로 옴. 16일 산청 외고리 이교호에게 묘지문과 연동서당기을 보냄. 최익주가 중건기를 받아 감. 8월 18일 부여 권호준이 선고의 묘갈을 부탁하며 그 행장 초고를 놓고 감. 9월 13일 울진의 남대년(간재의 문인)과 최소년이 신도에서 간재 담제(禫祭)에 참석하고 옴. 그 백부 목영이 서신으로 보서(譜序)와 선인 문안의 묘표를 부탁함. 15일 남대년이 그 종조부 묘표를 부탁하고 감. 10월 9일 송탁이 고조부의 묘갈을 부탁하고 감. 16일 청양 운곡면의 김종응 김종헌 형제가 15일에 와서 선부인의 열행비문을 부탁하고 감. 27일 장흥 백홍선이 그 부친 형칠, 사종조 경실, 그리고 보성 내동 이남재의 서신을 지니고 옴. 29일 백홍선이 선대의 묘갈을 부탁하고 감. 1925년 을축 1월 25일 간청과 김소년이 옴. 27일 간청과 김소년이 신도비문을 가지고 감. 3월 8일 광윤도가 같은 군 금남면의 강래경 등 3인을 데려 왔는데, 선대의 문자를 부탁하고 감. 예물은 백복 1필, 백지 10묶음, 민어 1마리, 문어 2마리. 10일 남궁윤이 선고의 묘표를 받아 감. 곽윤도 편에 강씨의 갈문 둘과 표정기(表旌記)를 보냄. 24일 길주 김익성이 삼대 제단의 비문 대초(代草) 를 보내옴. 4월 11일 능주 문태식이 문제진, 박병주의 서신을 가져옴. 13일 문태식이 부탁한 묘표와 정기들을 가지고 떠나감. 윤4월 24일 지은과 최춘렬이 돌아감. 부탁한 유고서문, 행장, 재기(齋記) 등 5건의 글을 전주 최병심을 시켜 대신 쓰게 하기로 함. 5월 2일 김병주의 증조부 묘갈, 윤방섭의 조부 정려기(旌閭記)을 부탁받았는데 병이 좀 나으면 초를 잡아 보내겠다고 말했다. 25일 김병주가 증조부 묘갈, 윤방섭이 조부의 효자정려기를 받아 감. 8월 2일 전북 정읍 영원면의 김락승과 고부면의 이상일이 와서 증조부의 갈문과 조부의 행장 및 재기(齋記)를 청하며 20원을 주었음. 5일 청주의 문태식이 조부의 묘갈문과 박씨의 재기를 부탁하고 감. 1926년 병인 4월 11일 연기에서 정자원이 정기와 묘표를 받으러 옴. 15일에 돌아감. (5) 족보 혼인 재산 질병 등의 내용 필자가 고령의 노인이 된 이 시기 일기에서는 아들 최원식 등의 혼사, 경주에서의 족보 간행, 재산 관리의 문제, 질병 구축의 술법 등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1924년 갑자 2월 21일 대흥 산소의 나무들과 논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최영오가 농간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들음. 4월 22일 정 사과를 거창에 보내며 노자 십원을 주고 신석(辛錫: 최영조의 서자인 듯)의 사주와 납채서를 보냄. 거창군 웅양면 석정리의 이인영 딸이 17세라 함. 5월 4일 팔천이 백미 1말을 장리로 가져감. 거창 이인영에게 회답 혼서를 보냄. 7월 21일 한발이 너무 심하여, 콩이 말라가고 채소는 씨를 못 뿌렸고, 논에도 병충해가 많다. 8월 3일 함양의 정사과가 거창에서 왔는데, 이인영이 9월 27일로 택일기를 보내옴. 16일 원아가 혼수 마련하러 서울에 감. 29일 규헌이 대흥의 산직을 맡기를 청하며, 최영오가 근래에 또 산소 뒤의 표송(標松) 몇 그루를 베어 팔았다 전함. 9월 25일 신석, 희맹과 안부(雁夫) 세 사람이 거창으로 초행(醮行) 길을 떠나며, 노자 40원을 가져갔고, 사과 정재호에게 보내는 서간을 가져감. 10월 2일 안부(雁夫) 김성관이 거창에서 돌아왔고, 하인 봉이가 술과 음식을 가져옴. 21일 대구에서 족보 33책이 소포 우편으로 옴. 27일 자부가 대전에 근행 가는데 교자꾼 확이와 팔천 그리고 원아와 성준이 공주까지 데려감. 12월 1일 포천의 조(租) 70석의 값은 980냥인데, 그 중에서 백원(伯元)의 집 값과 농회비 등을 공제하고 받았음. 1925년 을축 1월 4일 원아와 병하가 거창에 가는데, 사돈 이인영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침. 2월 7일 제천 최영래가 임술년(1922) 4월에 나온 보소(譜所)의 통문과 간소(刊所)의 통문을 가져옴. 보소는 경북 경주의 서악서원이고, 간소는 경주 동면의 근산재이며, 저작자는 내동면 보문리 최영운임. 9일 김휘조가 왔다가면서 말하길, 공주군 서기 이용승의 딸과 혼담을 내는 것이 좋겠다 함. 4월 2일 종인 원규가 이달 안에 다시 와 족보 일을 의논하기로 하고 감. 6월 26일 최영래가 서울에서 와서 말하길, 포천과 도공동 그리고 각처의 화숙공파 종인들에게 족보편찬소에 수단을 보내라고 권하였다 함. 7월 30일 동일이 경주 보소(譜所)에 가는 편에 서신을 보내 최영소에게 족보의 위조와 착오를 잘 고칠 것을 말하고, 통문 분파기를 부침. 9월 12일 대흥 안운학의 어머니가 사랑채 구입 대금 15원을 가져옴. 수기를 만들어 줌. 10월 9일 충신의 도미(賭米) 56두 6승 5합 중 3두를 탕감함. 12월 6일 면식이 김희진과 혼사를 의논하러 소제에 갔다가 영동으로 갔다 함. 1926년 병인 7일 사돈 이인영이 옴. 어제 거창을 떠나 공주를 거쳐 인력거를 타고 옴. 2월 9일 박선로라는 이가 의술이 고명하여 반신불수를 고친 적이 있다함. 14일 광정 노파가 온양에서 와 선을 보고 매우 좋다고 말함. 20일 구화동 안의에서 서신이 와 최영오의 부랑행패를 말하는데 산직(山直)에 뜻을 둔 듯함. 4월 22일 혼사 일로 김휘조가 와서 보고 감. 5월 16 면식에게 서신으로 족보 분소를 각각 설치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함. 21일 운선과 계응이 무단히 술주정을 하며 밤까지 떠들었음. 6월 6일 학동들에게 오언 및 칠언의 절구 시험을 치게 함. 7월 20일 충신의 집에서 독경을 함. 22일 저녁에 황노파가 축사(逐邪) 독경을 함. 24일 약산의 임홍순이 월은동 산지의 송림을 구매하려 하며, 그 동네 사람이 척매(斥賣)하려 한다고 전편의 편지로 알려옴. 25일 황노파가 덕암 재봉 집의 초대로 왔다 감. 서천의 종인 영식이 족보의 일로 서신을 보내왔는데 병으로 혼침하여 인사불성이라 대답함. "
"『신유동일사』의 가치는 최영조가 항일 운동가이자 수구파 유림의 대표 인물이었던 최익현의 후계자로서 일제의 지배 아래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는지 일상의 구체적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그에 관해서는 별로 연구되지 않았는데, 그 역시 간재 전우(艮齋田愚), 송사 기우만(松沙奇宇萬), 애산 정재규(艾山鄭載圭) 등과 교유한 당대의 중요 유학자였다. 최영조의 일기 내용을 정리고찰하면 20세기 초 향촌의 지주이자 보수파 지식인이며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순국자의 후예가 어떤 모습으로 활동하며 살아갔는가의 현실적 생활상을 볼 수 있고, 그와 교유한 수 많은 사람들의 인물정보와 교유내용을 정리고찰하면 그들의 사회적‧문화적 관계망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대체로 농지의 도조(賭租)를 주된 경제적 기초로 삼고, 호남과 영남에 분포한 많은 유사들과 교유하면서 비문(碑文)과 기문(記文) 등의 문장을 작성해주고 그 답례 금품을 중요한 경제적 기초의 하나로 삼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
"최익현, 『(국역) 면암집』(한국고전번역원) 최영조, 『운재집』(고려대학교 소장) 김상기, 『호서유림의 사상과 민족운동』, 지식산업사, 2016. 김상기, 「崔益鉉의 定山 移住와 泰仁義兵」, 『충청문화연구』 7, 충청문화연구소, 2011. 『경주최씨대동보』(화숙공파)"

부가자료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문의 : 042-860-9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