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환두대도(環頭大刀)
설명 환두대도는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긴 칼로 고리칼이라고도 한다. 환두대도는 둥근 고리 부분(환두부(環頭部)), 손잡이 부분(파부(把部))으로 이루어진 칼자루(병부(柄部))·칼집(초부(?部))으로 구성되어 있다. 환두부의 외환外環과 환 내 장식(環內裝飾)은 환두대도의 명칭과 형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파부는 이를 감싸는 병판(柄板)과 환두부와 파부의 경계 지점의 금속 장식인 자루 뒤 장식(병두 금구(柄頭金具)), 파부와 도신 사이의 장식인 자루앞 장식(병연 금구(柄緣金具))로 이루어졌다. 병연 금구는 칼코등이(심(?))가 끼워진 경우도 있는데, 이는 병연 금구에 연결되거나 병연 금구를 대신하여 병판을 고정시키고 손잡이가 칼집 속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칼집은 칼날을 보호하기 위해 도신을 넣어두는 부분으로 도신이 삽입되는 칼집 앞쪽을 장식하는 칼집 입장식(초구 금구(?口金具))과 아래쪽 끝 부분 장식인 칼집끝장식(초미 금구(?尾金具)) 등으로 구성된다. 우리나라 환두대도는 병연 금구가 초구 금구 속으로 들어가는 끼움식(탄구식(呑口式))이다. 각 부분에 대한 용어는 조금씩 달리 사용되고 있다. 환두대도는 외환의 형태와 환 내 장식을 기준으로 소환(素環)·삼엽환(三葉環)·삼(루)환(三累環)·용봉환(龍鳳環)·귀환(鬼環)으로 분류하고 있다. 소환두대도는 환 내 장식이 없는 것으로 손잡이에 원형, 횡타원형, 오각형, 방형, 상원하방형(上圓下方形) 등의 고리가 달려 있다. 삼엽환두대도는 원형, 횡타원형, 상원하방형 등의 고리 안에 삼엽형의 장식이 들어 있는 칼을 말하며, 삼(루)환두대도는 외환의 형태가 ‘C’자형인 고리 세 개가 위쪽과 좌우에 붙어 삼각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용봉문환두대도는 고리에 용이나 봉황의 도상이 장식된 것을 말하는데, 단용·단봉·쌍용·쌍봉·용봉의 도상으로 나타난다. 환두부의 도상은 외환 자체의 형태에 의한 것과 외환에 표출된 것 그리고 환 내 장식에 의한 것 등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명칭을 결정하는 데 환 내 도상이 우선되고 환 내 도상이 없는 소환의 경우 외환의 형태나 표현된 문양을 기준으로 한다. 환두대도는 중국에서는 한 대(漢代)에 동검(銅劍)이 동도(銅刀)로 바뀌게 되고 이것이 다시 철도(鐵刀)로 변하게 되면서 나타난다. 한반도에서는 가평 달전리 2호묘, 창원 다호리 1호묘 등의 예로 알 수 있듯이 기원전 1세기 이전에 도자로 출현한다. 길이 60㎝ 이상의 환두대도는 2~3세기에 등장하여 3세기 후반 이후 중요한 전쟁 무기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5세기에 이르면서 실용적인 무기로서가 아니라 자루와 칼집 등을 화려하게 장식한 환두대도가 성행한다. 한반도 중서부 지방에서 환두대도는 3세기의 토광묘나 주구토광묘부터 나타난다. 이 시기의 환두대도는 모두 소문(素文)이다. 4세기 후반~5세기 중반에도 여전히 소문환두대도가 부장되지만 형태와 제작 기술에서의 변화가 보인다. 즉, 슴베 끝을 구부려 고리(外環)를 만들거나 고리에 슴베를 감아서 고정하던 방법에서 환두 슴베와 도신 슴베를 겹쳐 리벳으로 고정하는 방법으로 바뀌고, 슴베도 가늘어진다. 또한 도신과 슴베의 경계(關)는 인부 쪽에만 있던 것이 등 쪽에도 완만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고리도 평면 타원형이 많아진다. 물론 길이도 길어진다. 이러한 형태 및 제작 기술의 변화와 함께 장식의 변화가 보인다. 즉, 손잡이 양단에 철제의 병연·병두 금구, 칼집에 초구 금구가 적용되고 일부는 외환에 은상감 등 금은을 이용한 장식 대도가 출현한다. 또한 외환 안에 삼엽을 장식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도의 위세품으로서의 기능 강화에 따른 실용성의 저하를 보완해 주는 중요한 변화로 매우 실용적이고 실전적인 목병대도(木柄大刀)가 제작·보급된다. 장식 대도로서의 백제 환두대도로는 상감·은장(銀裝) 소환두대도, 용봉문환두대도, 삼엽환두대도가 있다. 상감대도(象嵌大刀)는 천안 용원리 5호 석곽·화성리 A-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화성리 A-1호분 출토 동진제(東晋製) 청자반구호(靑磁盤口壺) 등을 고려하면 4세기 후반~5세기 초에 출현하였을 것으로 추정 된다. 이 은상감 환두대도부터 대도의 장식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백제 한성기 지방 거점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된다. 은장대도(銀裝大刀)는 백제 한성기 말에서 웅진기에 유행하였다. 공주 수촌리 1호 목곽묘, 논산 모촌리 93-5호분에서는 안쪽에서 타출하여 파상문을 나타낸 은판을 병두·병연 금구로 장식한 대도가 출토되었다. 수촌리 대도의 외환에는 쌍룡문이 상감되어 있다. 이외에 논산 표정리에서 발견·신고된 대도는 환두와 손잡이에 은판을 덧씌워 만든 것인데 환두의 형태가 5각형이다. 두 가지 형식 모두 가야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가야 장식 대도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외환에 용이나 봉황을 장식한 대도는 백제, 신라, 가야 및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환두대도이다. 환내 장식으로는 단용, 단봉, 용봉 등이 있는데, 봉황을 장식한 대도가 가장 많다. 백제에서는 천안 용원리 고분군(1·12호 석곽묘), 무령왕릉,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되었다. 현재까지 가장 이른 용봉문환두대도는 용원리 고분군 출토품으로 이 환두대도는 무령왕릉 환두대도와 계통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확실해져 용봉문환두대도는 백제에서 제작된 장식 대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용원리 및 무령왕릉 출토 환두대도는 환두부가 금동제로 외환과 환 내 장식을 일체로 만든 것이며 외환에는 주룡문(走龍文)이 시문되어 있다. 무령왕릉 환두대도는 백제 왕릉(급)에서 출토된 유일한 사례로 공반 유물로 부장의 절대 연대(525년)를 알 수 있어 이와 유사한 환두대도 연구의 기준이 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외환과 환 내장식이 따로 만들어진 용봉문환두대도와 삼엽환두대도가 나주 복암리 3호분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되어 중앙과는 대비되는 대신 가야와는 공통되는 요소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복암리 3호분에서는 삼환두 안에 귀면이 장식된 희귀한 사례도 출토되었다. 가야에서는 소환두대도, 삼엽환두대도, 용봉문환두대도가 만들어졌는데, 초기에는 백제의 영향을 받았지만 5세기 후반 이후에는 ‘ 가야계 환두대도’로 불릴 정도로 독특한 용봉문환두대도가 제작되어 유통되었다. 가야계 환두대도는 환 내 장식을 외환과 별도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외환은 철지 혹은 동지에 금판이나 금동 판, 은판을 씌운다. 외환에는 주룡문이 표현되어 있다. 환 내 장식은 퇴화된 봉황문이 대부분이고 용문은 매우 적다. 손잡이는 은선을 감은 것이 많으나 금속판을 입힌 것도 있다. 금속판을 씌운 경우는 어린문(魚鱗文)이 타출되며, 패리(佩裏) 중축선 상에 못을 박아 고정한다. 병두·초구 금구에는 2마리의 용이 서로 얽힌 쌍룡문을 타출한다. 용봉문환두대도 중에서 가장 수가 많은데, 일본 열도에서 출토된 자료와 출토지가 불분명한 자료까지 포함하면 40점이 넘는다. 신라의 환두대도로는 소환두대도, 삼엽환두대도, 삼환두대도, 용봉문환두대도가 있다. 삼엽환두대도와 삼환두대도가 신라 장식 대도 가운데 가장 많이 제작·배포되었다. 5세기 이후 상원하방(上圓下方)의 고리 안에 가운데 잎에 비해 좌우 잎이 긴 삼엽 장식을 갖춘 전형적인신라의 삼엽환두대도가 나타나 주류를 이룬다. 환두는 철제 고리에 금이나 은박을 입히는 방법과 청동으로 만든 후 금을 도금하는 두 가지가 있다. 황남대총 남·북분 등 경주의 적석목곽분 등 중앙과 지방의 중요 거점 지역에서 모두 출토된다. 삼환두대도는 외환을 ‘C’자형의 고리 세 개를 삼각형으로 연결하여 만든 장식 대도이다. 삼환두대도는 신라에서만 확인되는 특징적인 장식 대도로서 삼엽환두대도와 마찬가지로 황남대총 남·북분 등 중앙과 지방의 중요 거점 지역에서 확인된다. 대도의 제작은 철로 삼환을 만든 뒤 금박 또는 은박으로 감싸서 마무리하였다. 신라에서 용봉문환두대도는 경주 호우총·식리총·천마총과 창녕 교동 10호분에서 출토된 것이 전부이다. 신라에서는 용봉문환두대도를 장식 대도로서 일찍부터 제작하여 사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5세기 후반 백제 또는 가야의 용봉문환두대도가 전해지고, 이후 이를 모방하여 제작·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제작한 용봉문환두 대도는 천마총 출토품이 유일하다. 천마총 출토품은 환 내에 봉황이 장식된 것으로 청동으로 외환과 환 내 장식을 일체형으로 만든 후 도금하여 장식하였다. 자료가 매우 부족한 고구려를 제외하고 백제, 가야 및 신라의 환두대도를 비교하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도 독자적인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백제와 가야에서는 오각형 환두, 파상문을 타출한 은제 병두·초구 금구, 상감기법, 용봉문환두대도, 이엽문환두대도 및 어린문과 원두정(圓頭釘)이 함께 나타난다. 이러한 공통 요소는 주로백제가 가야에 영향을 미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와 가야에서는 삼엽환두대도가 그리 활발하게 제작·사용되지 않은 점도 공통된다. 백제·가야와 신라의 환두대도 사이에는 제작 의장이나 기법에서 공통되는 특징을 찾기 어렵다. 백제·가야와 신라의 환두대도에서 차이는 손잡이 장식 판의 문양과 고정 방법에서 특징적으로 보인다. 백제·가야는 칼을 패용했을 때 안쪽(佩裏)에서 어린문을 시문한 병판(柄板)을 원두정으로 고정한 데 비해 신라의 환두대도는 ‘C’자형의 무늬가 상하로 서로 마주보며 엇갈리게 새겨져 있으며 손잡이 측면에서 ‘ㄷ’자형의 못으로 고정되었다. 칼집에 대도와 똑같은 새끼칼(子刀)를 만들어 붙이는 모자대도(母子大刀)도 신라에서만 확인되는 특징이다. 삼환두대도도 신라에서만 확인된다.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장식 대도인 환두대도는 관, 이식, 대금구, 금동신발 등 금은제 장신구류 등과 마찬가지로 삼국 시대 지배층의 전유물이었으며 그들의 사회적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제작되었다. 제작지는 특정 지역, 즉 정치적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환두대도가 시기에 따라 공간적으로 일정한 분포 양상을 보이는 것은 왕권에 의한 하사 또는 분여의 결과로 나타난 ‘정치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신라의 예로 보면 장식 대도는 단용(單龍) 또는 단봉(單鳳)>삼(루)환>삼엽(三葉)이라는 위계적 서열이 확인되어 종류별로 등급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실 혹은 지배층이 왕경의 귀족 세력, 거점적 지 방의 수장 세력을 통제하기 위하여 다양한 환두대도를 제작하여 등급에 맞게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환두대도는 소유자 간의 의제적(擬制的) 관계를 유지해 주는 매개물로 기능했을 것이다. 신라의 경우 6세기에 가까워지며 단위 지역 내에서 장식 대도의수급자 범위가 중형 묘역까지도 확대되는 것은 그만큼중앙 세력이 주도하는 체계가 구체화되고 영향력이 지역 사회의 중간층까지 미쳐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6세기 중엽 이후 중앙의 집권력이 강화되면서 대도를 비롯한 위세품은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며, 사비기 백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묘제나 부장품에 대한 규제도 상당히 이루어진다. 즉, 삼국 시대 각국에서 환두대도가 본격적으로 제작되는 시기는 5세기로 대개 6세기 전반경까지 이어지며, 제작 주체는 각국 왕실로 왕경의 공방에서 제작하여 영역 내 제(諸) 세력의 통제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김낙중)
참고문헌 삼국 시대 환두대도의 제작과 소유방식(이한상, 한국고대사연구 36, 한국고대사학회, 2004), 삼국 시대 환두대도 연구(구자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한국의 칼(국립대구박물관, 2007), 대가야의 성장과 용봉문대도문화(이한상, 신라사학보 18, 신라사학회, 2010), 합천 옥전35호분 용봉문대도의 금공기법과 문양(이한상, 고고학탐구 13, 고고학탐구회, 2013)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유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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