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낙랑 고분 유물(樂浪古墳遺物)
설명 낙랑 고분으로는 목관묘와 목곽묘 그리고 전실묘가 가장 많이 조사되었는데, 부분적으로 옹관묘와 와관묘, 그리고 소형 전곽묘가 낙랑·대방군의 묘제로 채용된다. 목관묘(木棺墓)는 묘광(墓壙) 속에 판재(板材)를 조립하거나, 통나무를 분할하여 내부를 파낸 목관(木棺)을 안치하고 묘광과 목관 사이 혹은 목관의 머리맡과 발치에 부장품을 두는 형태이다. 낙랑과 관련된 묘제 중에서는 등장 시기가 가장 빠른 무덤 형식으로 이해되는데 세형동검류(細形銅劍類)의 토착 청동기를 부장하던 전 단계의 재지계(在地系) 토광묘와의 계승 관계가 인정된다. 목관묘는 목곽묘가 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하위 계층의 무덤으로 선호된다. 일반적으로 목관묘에서는 세형동검과 관련된 청동기류가 출토되는 경우가 많으며 토기로는 활석 혼입계(滑石混入系)의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와 소형의 타날문단경호(打捺文短頸壺)가 세트를 이루어 부장되는 사례도 있다. 목관묘보다 출현 시기가 늦은 목곽묘는 크게 단장 목곽묘(單葬木槨墓)와 합장 목곽묘(合葬木槨墓)로 구분되는데 후자는 다시 병혈 합장(竝穴合葬)과 동혈 합장(同穴合葬)으로 나뉜다. 단장 목곽묘는 판재식 목곽묘와 귀틀목곽묘가 있는데 전자는 묘광을 조성한 다음 판자를 여러 장 잇대어 목곽을 만든 것이고 후자는 각재를 이용하여 목곽을 조립하는 것이다. 판재를 잇기 위한 부재로 나무쐐기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낙랑군 주변에서 발견된 목곽묘에는 채용되지 않는다. 목관 두부 쪽의 바깥과 목곽 사이의 공간이 부장 칸으로 이용되었는데 목관의 측면도 부장 공간으로 활용된다. 단장 목곽묘는 목관묘와 마찬가지로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류와 화분형토기, 그리고 타날문단경호가 공반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 상한이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높다. 그 예로 세형동검이 공반된 상리(上里)나 동대원리(東大院里) 허산(許山)과 이현리(梨現里)에서 발견된 목곽묘를 들 수 있으며, 전국 시대(戰國時代) 후기나 진 대(秦代)에 유행한 동경(銅鏡)이 공반된 토성동 486호분도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높다. 즉 위만 조선과 관련된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병혈 합장묘(倂穴合葬墓)는 먼저 만들어진 묘광 옆에 또 하나의 묘광이 축조되는 것으로 선행 묘광의 일부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나란히 늘어서는 것이 많다. 먼저 만들어진 묘광의 바깥에 추가로 묘광이 만들어질 것을 대비해 색깔이 다른 흙으로 위치를 표시해 두는 사례도 확인된다. 병혈 합장묘는 대개 부부 합장묘(夫婦合葬墓)로 판단되는데 여성의 관 바닥이 남성의 관보다 낮게 설치되며, 여성이 남성의 왼쪽에 매장되는 원칙이 대부분충실하게 지켜진다. 합장 목곽묘의 등장은 친족 중심의 매장 습속이 부부, 즉 가족을 기본 단위로 하는 매장으로 바뀌었음을 암시한다. 대표적인 병혈 합장묘로는 정백동 37호분과 53호분을 들 과 있다. 여전히 세형동검과 화분형토기가 공반하고 이체자명대경(異體字銘帶鏡)의 부장이 많은 것을 참조하면 기원전 1세기 대가 중심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혈 합장묘(同穴合葬墓)는 방형 내지는 장방형으로 조성된 묘광에 비교적 규모가 큰 목곽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복수의 목관을 안치하는 구조인데 단장 목곽묘나 병혈합장 목곽묘에 비하여 묘광의 규모가 크고 모두 귀틀로 조립되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혈 합장묘는 병혈합장묘에 비해 등장 시기가 늦은 것으로 이해된다. 격벽으로 부장 공간을 따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지만 격벽 없이 목곽의 한쪽에 치우쳐 복수의 목관을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내부에 목관이 3기 이상 안치되는 경우에는 목곽의 내부 구조를 고치거나 목곽 외부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병혈 합장묘 단계에서는 보이지 않던 현상이다. 대표적인 동혈 합장묘는 정백동 2호분, 127호분, 석암리 205호분 등으로 출토된 칠기의 명문과 동경의 형식으로 보아 기원후 1세기에서 2세기 대를 중심 연대로 한다. 전실묘는 동혈 합장 목곽묘에 후행하는 묘제로서 단실묘와 이실묘, 그리고 측실이 달린 경우가 있는데 낙랑에서는 대개 궁륭상의 천장 형태가 일반적이다 . 전실묘는 묘광 바닥에 전돌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전돌로 네 벽을 쌓아 올리는데, 3횡 1수를 반복하여 축조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전실 벽면은 대개 바깥으로 호선을 그리는 배부름(胴張) 기법이 채용된 경우가 많지만 예외도 있다. 사례는 많지 않으나 전돌로 묘실을 만들고 지붕을 나무로 덮거나 목곽의 천장이나 벽에 부분적으로 전돌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북한 연구자들은 이것을 목곽묘에서 전실묘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판단한다. 이는 목곽묘에서 전실묘로의 변화가 외부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부적인 요인에 의한 발전이라는 기본 인식이 전제된 해석이다. 반면 일본학계에서는 중국에서 이미 묘형(墓形)으로 완성된 전실묘가 낙랑 지역으로 수입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요동 지역의 전실묘와 유사성이 높은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러한 낙랑 지역의 전실묘에 대해서는 기원후 2세기 말에 출현하여 3세기 대에 가장 유행한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최근에는 문양전이 함께 사용된 목곽묘의 시기가 기원후 1세기에 위치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전실묘의 상한 연대도 기원후 1세기대로 소급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실제 발굴 조사된 사례는 없다. 또 늦은 시기의 전실묘는 돌천장을 채용하거나 벽면의 일부를 할석(割石)으로 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북한학계에서는 이 역시도 낙랑 전실묘가 고구려의 특징적인 묘제인 석실분으로 변화해 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이미 낙랑 지역으로 수용된 고구려 석실의 영향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평양 역 구내 전실묘에서 출토된 기년명 벽돌(기원후 353년)을 참고하면 낙랑 지역의 전실묘는 낙랑·대방군이 멸망한 4세기 대에도 지속적으로 축조된 것이 분명하다.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장무이묘도 앞에서 언급하였듯 벽면에 석회를 바르거나 연도 좌우에 작은 이실(耳室)을 부설하는 등 고구려 고분의 영향이 농후하게 확인된다. 낙랑·대방 시기의 옹관묘는 대부 분이 합구식으로 화분형토기와 타날문단경호의 조합이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남경 옹관묘처럼 옹관묘만으로 구성된 분묘군이 있는가 하면 목곽묘나 전실묘에 배속된 유아의 묘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소수의 사례가 보고된 와관묘와 전곽묘도 대개 유아의 묘로 판단되는데, 만약 이것이 성인의 묘라 할지라도 부장 유물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하위 계층의 묘제로 볼 수 있다. 낙랑 고분의 철기는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서 철기문화가 수용되는 배경 및 연대와 관련하여 주목을 받고있다. 또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서 전하는 철을 매개로 한 원거리 교역의 중심으로서 낙랑의 역할이 중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낙랑 철기 그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철의 교역과 관련된 『삼국지』의 기사는 진·변한에서 생산된 철이 낙랑군에 공급되었다는 근거로 원용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낙랑 지역 출토 판상철부(板狀鐵斧)가 진·변한에서 공급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정백동 62호분 출토 단야구鍛冶具는 낙랑군의 철기 생산이단조품 중심이며 그 원료가 진·변한 지역에서 공급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확산시키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낙랑 고분에서 한식(漢式)과 다른 주조의 철제 솥과 차축두가 부장되는 점으로 보아 낙랑군에서도 주조철기(鑄造鐵器類)의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현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주조철부와 철촉류가 토성리(낙랑) 토성에서 출토되는 것을 참고하면 낙랑군 설치 이전의 철기는 전국식(戰國式)의 주조철기이고 낙랑군 설치 이후의 철기는 한식(漢式)의 단조철기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은 옳지 않다. 낙랑의 철기에는 극(戟), 모(?), 검(劍), 도(刀), 촉(鏃) 등의 무기류가 포함되며 도끼, 낫, ‘U’자형 삽날과 같은 농구류도 보고된 바 있다. 철모는 자루 구멍 끝이 대체로 직선적이어서 연미형(燕尾形)이 주류를 이루는 고구려나 부여의 것과는 다르고 철촉은 삼릉촉(三稜鏃), 사릉촉(四稜鏃)이 많다. 경기도 화 성 기안리와 가평 대성리 유적에서 철기 생산을 증명하는 다양한 유물과 함께 다량의 낙랑 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 중부 지역의 철기제작이 낙랑·대방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이것이 지속적으로 발전되는 양상은 보이지 않아 4세기 후반 이후부터 조업이 시작되는 진천 석장리 제철유적까지는 비교적 긴 공백 기간이 있다. 낙랑 지역의 청동기로는 재지(在地)의 세형동검 문화(細形銅劍文化) 전통을 계승한 것과 중국 청동기 문화의 계통을 이은 것이 공존한다. 평양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거푸집과 낙랑 고분에서 다수 출토되는 세형동검의 부장 사례를 참고하면 평양 지역에서는 낙랑군 설치 이후에도중국식의 청동기뿐 아니라 재지계의 세형동검 등이 지속적으로 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낙랑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식의 청동기로는 노기(弩器)의 부속구와 과(戈), 모(矛), 검(劍), 촉(鏃) 등의 무기류, 복(?)이나 정(鼎)과 같은 용기류, 거울이나 동전 등이 있다. 낙랑지역에서 출토되는 이러한 다양한 청동기류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낙랑 현지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토성리 토성에서 청동기를 제작한 공방터가 확인되었으며, 출토된 청동기류의 납동위체 비율을 분석한 결과 이들 청동기는 현지에서 자체 조달했거나 중국에서 수입한 동(銅)을 이용하여 현지에서 만들었음이 밝혀졌다. 더불어 청동제 마구(馬具)나 수레 부속구(車輿具) 중 이른 시기의 것은 중국 한 대(漢代)의 그것과 형태가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위만 조선의 청동기라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삼한 지역에서도 비교적 많은 중국식 청동기가 출토된 바 있다. 청동 거울(靑銅鏡)과 동전(銅錢)이 가장 많이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청동제 삼릉촉(三稜鏃)의 보고 사례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고, 경북에서는 노기의 방아쇠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청동기들은 대개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에 낙랑군을 통하여 입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청동 촉 등은 형식과 공반 유물로 보아 낙랑군 설 치 이전으로 소급되는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낙랑군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그 제작에 이용된 점토의 성격을 기준으로 니질계, 활석 혼입계, 석영 혼입계의 3종류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니질계 토기에는 원통형, 고배형, 완(?)형, 분(盆)형, 시루형 토기와 같은 일상 용기가 많고 부뚜막형 토기, 이배(耳杯) 등 소수의 부장용 토기도 포함된다. 활석 혼입계에는 정(鼎)이나 화분형 등 취사용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는 내화성(耐火性)이 뛰어난 활석의 암석학적 특성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결과이다. 석영 혼입계는 석영을 혼입한 점토로 제작되어 흰색을 띠기 때문에 백색토기라고도 불리며, 소수의 일상 용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대형의 저장용 토기로 제작되었다. 즉 사용 목적에 따라 점토를 선별하여 토기를 제작하는 경향이 인정된다. 대방군 치소로 이해되는 황해도의 지탑리 토성 출토 토기와 동해안에 면한 소라리 토성과 그 주변에서 출토되는 토기도 낙랑군의 중심지역으로 이해되는 평양 지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재래의 무문토기류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이들 새로운 토기류 전반을 ‘낙랑 토기 양식(樂浪土器樣式)’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물론 낙랑 토기 양식에는 위만 조선의 토기류가 포함될 것이나 아직 양자를 분명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고고학적 지표는 분명하지 않다. 이렇듯 3종류로 나뉘는 낙랑 토기의 태토는 토기 제작 과정에 채용되는 성형 방법의 차이로까지 연결된다. 우선 니질계 토기는 대부분 노끈을 감은 봉상의 내박자와 타날구로 1차 성형하므로, 이 공정을 거친 토기의 내면에는 가로로 연속되는 노끈 압흔이 남는 것이 특징이다. 1차 성형에 이은 2차 성형 공정에서는 기종에 따라서 타날과 회전물손질이 선별적으로 채용된다. 토기의 1차 성형에서 노끈을 감은 내박자를 사용하는 사례는 지금까지의 자료로 보는 한, 한반도 서북 지역, 즉 낙랑군의 강역에서만 확인되는 중요한 기술 속성이다. 활석 혼입계 토기는 틀에 포를 씌운 다음 점토를 두르고 타날을 가하여 성 형하는 ‘형뜨기’ 기법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석영혼입계 토기는 니질계 토기들과는 달리 1차 성형 단계에서 곧바로 완성형의 모양을 구현해 낸다. 고분 부장용 토기로는 화분형토기와 니질계 단경호가가장 먼저 등장하며, 기원후 1세기가 되어서야 석영 혼입계의 저장옹과 호형토기 등이 추가된다. 화분형토기는 구순(口脣)에 각이 지고 평저인 것이 전형(典型)이고 고식(古式)인데, 이후 구순이 휘며 외반하고 저부에 굽이 달리는 것으로 변화한다. 기원후 2세기에는 부뚜막형토기를 비롯하여 각종 명기류(明器類)가 부장 토기로 추가되는데, 전반적으로 낙랑 고분에 부장되는 토기류는 그 수량이 많지 않다. 낙랑 토기는 때때로 한식 토기(漢式土器)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형태 및 제작 기법에서 중국 한 대의 토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기종이 많다. 활석 혼입계 토기와 니질계 토기는 전국 시대 연(燕)의 제도 기술과 관련이 높으며 석영 혼입계 토기는 기원후에 중국의 산둥 반도(山東半島)에서 생산되어 이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 토기는 위만 조선 대에 성립한 토기 양식을 대체로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여기에 한식 토기에서영향을 받은 토기가 추가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낙랑 고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칠기가 다량 출토된다. 당시 “군현 장관의 월급이 1,800~3,000전(錢) 정도인 것과 비교하여, 칠기 한 점의 가격이 1,200전이었다.”는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의 기록을 참고하면 낙랑 고분피장자의 막대한 재력을 이해할 수 있다. 낙랑 고분처럼 많은 양의 칠기를 부장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흔하지 않은 사례다. 칠기의 종류로는 이배(耳杯), 합(盒), 반(盤), 안(案), 명(皿), 염(?), 협(?), 편호(偏壺), 향로(香爐) 등이 확인되나, 정(鼎), 종(鍾)과 같이 청동 용기를 본뜬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칠기를 만드는 방법에는 목심에 칠을 바르는 목태(木胎), 천에 칠을 발라 여러 번 겹쳐서 굳히는 협저태(夾紵胎), 목심에 포를 여러 겹 덧씌 우면서 칠을 반복하는 목태협저(木胎夾紵) 등이 있다. 토기의 표면에 칠을 하는 경우도 확인되고, 흰색 화장토를 바른 다음 채색을 한 토기도 발견된다. 당시 낙랑 지역에서 유통된 고급 칠기는 그 명문으로 보아 지금의 중국 쓰촨(四川) 지역인 촉군(蜀郡), 광한군(廣漢郡)의 관영 공방에서 제작되어 수입된 것으로 볼 수있다. 한반도 남부의 진·변한 지역에서도 최근 칠목기(漆木器)의 출토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나 이들은 낙랑 지역에서 출토되는 칠기들과 그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진·변한의 칠기는 대개 가공된 목기에 칠을 하는 목태(木胎)임이 분명한데 이는 재지(在地)에서 낙랑군 설치이전에 개발되어 사용된 기술로 판단된다.(정인성)
참고문헌 樂浪 : 漢文化の殘像(駒井和愛, 中央公論社, 1972), 평양일대 벽돌무덤의 구조형식과 그 변천(한인덕, 조선고고연구 2, 사회과학출판사, 1983), 우리나라 서북지방의 나무곽무덤에 대한 연구(리순진, 고고민속론문집 8, 사회과학출판사, 1983), 낙랑고분문화 연구(高久建二, 낙랑고분문화 연구,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낙랑(국립중앙박물관, 2001), 대방태수 장무이묘의 재검토(정인성, 한국상고사학보 69, 한국상고사학회, 2010)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유물편)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낙랑 고분 유물(樂浪古墳遺物)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4유형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수 있습니다.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 담당부서 :
  • 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