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무령왕릉(公州武寧王陵)
설명 사적.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 송산 사면에 위치한 백제 25대 무령왕 부부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1971년 7월 5일에 발견되었고 내부 발굴조사는 3일 뒤인 7월 8일에 이루어졌다. 무덤 입구의 폐쇄전을 제거하고 내부로 들어가던 중 연도에 놓인 지석(誌石)을 발견하였고 지석에 기록된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이란 명문에 의해 이 무덤이 무령왕릉임을 알게 되었다. 무령왕이 세상을 뜬 것은 523년 7월 7일이고 무덤에 매장된 것은 525년 8월 12일의 일이다. 이 기간을 빈(殯)이라 한다. 왕비는 526년에 눈을 감았고 이후 도성의 서쪽[酉地]에서 빈을 치른 다음 529년 2월 12일에 무덤에 합장되었다. 발굴결과 왕비의 매장 이후 무덤의 문이 열린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무령왕릉은 폐쇄 후 1,442년 3개월 여 만에 발굴된 것이다. 백제 25대 무령왕은 평소 사마(斯麻, 斯摩) 혹은 융(隆)으로 불렸고, 사후 무령(武寧)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501년 11월 선왕인 동성왕이 사냥터에서 백가(?加)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고 그 해 12월에 사망하게 되자 40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한다. 즉위 후 먼저 백가세력을 처단하여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민생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옛 땅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신라, 왜, 중국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특히 남조 양나라로부터는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나이 62세 되던 523년 사망하였고, 27개월 동안의 빈장을 거친 후 왕릉에 안장되었음이 지석(誌石)에 기록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왕릉은 경사진 산비탈을 파고 그 속에 벽돌을 쌓아 만들었음이 밝혀졌다. 봉분은 지름 20m 내외이며, 높이는 7.7m이다. 축조당시에도 그리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봉토는 무덤 주위의 풍화암반층을 편평하게 깎아낸 다음 석회를 섞은 흙으로 겹겹이 쌓아올려 만들었다. 봉토의 동남쪽에서는 봉토의 유실을 막기 위하여 잡석을 4~5단 쌓아 올린 호석이 드러났다. 매장주체 부는 장방형의 현실에 연도를 갖춘 전축묘이다. 현실은 남북 420㎝, 동서 272㎝, 높이 314㎝이다. 네 벽 가운데 남북벽은 비교적 반듯하게 쌓아 올렸고, 동·서벽은 차츰 안으로 기울여 쌓아 터널처럼 만들었다. 벽돌 표면에는 아름다운 연꽃과 인동초무늬를 올록볼록 장식하였다. 벽돌은 두 가지 방법으로 겹겹이 쌓았는데, 1줄은 세워서 쌓고 그 위의 다른 1줄은 벽돌 4장씩을 뉘어서 쌓음으로써 견고함을 더하였다. 현실의 세 벽에는 모두 5개의 감실이 마련되었다.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배치된 이 감실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 등잔이 하나씩 놓여 있었고, 타다 남은 심지가 발견되었다. 감실의 가장자리에는 붉은색 안료로 화염문을 선명하게 그렸다. 현실의 바닥과 관대는 벽돌을 2중으로 깔았다. 밖으로 드러나는 윗면의 벽돌은 삿자리모양으로 배열하였고, 아래 벽돌은 석회를 발라 암반에 고정시켰다. 관대가 시설된 곳은 다른 곳보다 지반 자체를 높게 남겨두고 그 위에 벽돌을 깔아 왕과 왕비의 합장관대로 만들었다. 연도는 현실의 남벽 중앙에 설치되었다. 규모는 길이 290㎝, 너비 104㎝, 높이 145㎝로 현실과 같은 터널형이며, 바닥 역시 삿자리모양으로 벽돌을 깔았다. 높이는 관대와 동일하다. 연도 입구의 좌우에는 높이 304㎝의 벽돌 벽을 수직으로 쌓았다. 연도의 남쪽에는 풍화암반층을 파내어 길이 930㎝의 묘도를 만들었다. 연도에서 347㎝ 지점까지는 바닥이 평탄하나 그 보다 남쪽은 약간 경사져 있다. 벽돌로 만든 배수구는 암거방식인데, 현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바닥 밑을 따라 진행하며 묘도를 지나 밖으로 이어진다. 전체 길이는 18.7m에 달한다. 연도 입구를 막고 있던 폐쇄전 가운데 ‘士壬辰年作’의 명문이 있는 벽돌편이 발견되었는데, 임진년이란 왕의 사망 11년 전인 512년에 해당한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무령왕 생전에 무덤을 미리 만들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이 같은 전축분은 원래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국내에서 는 평양 일대의 낙랑무덤에 유례가 있고, 백제의 경우 웅진도읍기에 중국 남조로부터 받아들였으나 크게 유행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그간 발굴조사된 웅진시기의 예로는 무령왕릉과 송산리6호분, 그리고 송산리에 인접한 교촌리2·3호분 등이 있다. 무령왕릉은 남조묘 등급 중 B형(혹은 2등급)에 속하는 대형분이며, 벽돌의 번조와 무덤의 축조에 중국 기술자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인접한 송산리6호분에서 ‘梁官瓦爲師矣’ 명 연화문전이 출토되어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즉, 이 명문 역시 판독 및 해석에 다소 논란이 있지만 중국 양나라 관영 공방의 기술자가 벽돌의 제작과 전축분의 축조에 관여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령왕릉은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에서 108종 2,906점 정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2000년대에 왕릉 부장품을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유물이 더 발견되었으므로 출토유물의 수량은 3,000점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연도의 입구에서는 제사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제 그릇과 수저,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가 출토되었고 연도 중앙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과 진묘수인 석수가 있었다. 연도의 바닥에서는 연도에 시설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문 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현실 내부에는 일본열도에서 원목을 들여와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왕과 왕비의 금송(金松)제 목관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왕과 왕비의 목관은 약간의 형태차가 있으며, 왕의 목관은 동쪽에, 왕비의 목관은 서쪽에 놓여 있었다. 목관재를 수습한 다음 내부를 노출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왕의 두침과 족좌, 장신구는 목관 내에, 금속용기와 중국도자기는 목관 밖에 부장된 것 같다. 왕의 유해부에서는 금제 관식·금제 뒤꽂이·금제 이식·금은제 대금구·금동제 식리가 출토되었고, 왕비의 유해부에서는 금제 관식·금제 이식·금제 와 은제 천·금동제 식리가 출토되었는데 이식과 팔찌의 경우 각기 4점씩 출토되었다. 왕릉 출토 지석(誌石)에는 무령왕이 523년에 사망하여 525년에 매장되었고 왕비는 526년에 사망하여 529년에 매장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유물의 제작시점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多利作’ 명문이 있는 은제 팔찌가 520년에 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520년대를 전후하여 제작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들은 대부분 왕과 왕비의 격에 맞게 최고급 도안과 기법이 구사되어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무령왕릉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석(誌石)이다. 지석이 출토되었기에 왕릉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지석은 가로 41.4㎝, 두께 5㎝의 돌판으로, 앞뒷면에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제1면에는 백제의 사마왕이 523년 5월에 사망하니 27개월 후 왕릉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2면에는 방위표가 새겨져 있다. 제3면에는 왕이 사망하자 지신들로부터 무덤터를 샀다는 내용이, 제4면에는 526년 12월 백제국 왕태비가 돌아가시니 역시 27개월 후인 529년 2월 왕릉으로 옮겨 장사지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무령왕릉은 지석(誌石)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공을 분명히 알 수 있는 특별한 예에 속한다. 내부에서 다수의 고급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유물의 제작 및 매납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으므로 5~6세기 동아시아 고고학 자료의 편년에 기준점이 되고 있다. 아울러 지석에는 무령왕의 출생, 백제왕의 계보, 빈장 등 기왕의 사서를 통한 연구에서 논란이 되거나 미지의 상태였던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으므로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사와 백제고고학 연구가 진일보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이한상)
참고문헌 무령왕릉 발굴조사보고서(문화재관리국, 1973), 백제무령왕릉(공주대학교박물관, 1991), 동아시아 문명교류사의 빛 무령왕릉(권오영, 돌베개, 2005), 百濟武寧王陵形制結構的考察(王志高, 동아고고논단 창간호, 충청문화재연구원, 2005)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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